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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이름

자판기 | @jadongpanmaegi

기기묘묘한 현상도 일상이 되면 평범해지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 한가운데에 더 기이한 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현철. 어서 와 베시.”
“어어. 나왔다.”

문가 벽에 기대어 앉아 숙제 중이었던 명헌은 대단히 불편해서 절뚝거리는 듯 느껴지기까지 하는 발소리를 듣자마자 팔을 뻗어 문손잡이를 돌렸다.

역시나, 피로한 낯의 제 룸메이트- 신현철이 열린 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자리를 털며 얼른 일어난 명헌이 비틀거리는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아파 보여. 베시.”
“그렇지 뭐.”

한숨을 섞어 허탈하게 답한 신현철이 반팔티를 올려 벗다가 으윽, 앓는 소리를 냈다.

…그렇다. 신현철은 벌써 열흘 내내 심한 근육통을 앓고 있었다.

처음에야 훈련을 심하게 했나, 연습경기 몸싸움이 과했나. 잠을 잘못 잤나. 선에서 이해했지만 그런 하루가 이틀이, 나흘, 닷새가 되어도 변하는 게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마침 일 학년을 ‘솎아내기’ 하는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생지옥같았던 시기는 지나갔고 이제는 고된 훈련을 마치면 모두 세상 모른 채 곯아떨어지기 바쁜 때였다. 그런 훈련이 하필 신현철만 잠 못 이루게 만들었을 리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실제로 이어지고 있었다. 콕 집어 신현철만 앓는 날이.

노트와 연필을 정리하곤 멀거니 룸메이트를 바라보던 명헌이 물었다. 

“…안 컸어?”
“보면 알지 않겠냐.”

이미 가지런하게 깔린 제 몫의 이부자리에 주저앉으면서도 이를 악물어야 했던 신현철이 양손바닥으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닷새 전을 회상했다.

농구부 훈련 시간을 빼면서까지 병원에 가 그가 느끼는 고통의 정도와 부위를 전해들은 의사의 진단은….


‘성장통입니다.’
‘예?’
‘뼈가 급격히 크느라 비명을 지르는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근육이 함께 자극을 받으니 근육통도 있겠고, 새벽 사이에 세포의 생장이 활발하니 그때 유독 통증이 심한 거지요.’

‘그러면….’
‘진통제를 처방해 드릴테니 뜨거운 찜질과 마사지를 병행하며 풀어주세요.’


예상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야 신씨 집안은 대대로 키가 큰 강골이었고 이번 대에는 안 그래도 길쭉한 아버지에 배구 국가대표인 어머니의 결합으로 태어난 2세 형제에 대한 기대감이 엄청난 상태였으니까.

동생인 현필이가 이미 한참 전에 앓았던 성장통을 가까이서 지켜봤던 신현철 역시 제게 찾아온 이 낯선 고통이 성장통임을 완전히 이해했다.

기쁘지 않다고도 할 수 없었다.

뒤늦게도 도래한 이 다디단 고통이 제가 뛸 수 있는 점프를 높여 줄 것이고 기술의 파괴력을 더해 줄 테니. 기왕 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가. 림이 가까워지면, 물리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늘어난다면, 농구가 또 얼마나 재미있을지.

병원에 가기 전에 들렀던 양호실에서도 성장통이 오는 것 같다며 축하했기에 신현철은 기꺼이 이 고통을 감내하려 했다.

…도를 넘어설 정도로 고통스러운 성장통이라는 인고의 시간을 일주일 넘게 보냈는데도 전혀 자라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렇다.
그는 단 1cm. 아니, 0.1cm조차 자라지 않았다.

가히 발목과 무릎을, 척추와 손가락 마디까지 뭉툭한 칼날로 찢고 짓이기는 듯한 고통 속에서 그 어떤 결실도 나타나지 않았다.

미치고 팔짝 뛰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하…….”
“…….”

긴 한숨을 내쉰 신현철이 마른세수를 하곤 팔을 툭 떨어트렸다.

슬금슬금 다가와 나란히 앉은 명헌이 힘없이 늘어진 신현철의 커다란 손을 내려다보았다. 

불쑥 그 손을 쥔 것은 충동이기도 했다. 명헌은 잠시 생각하고서야 그럴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손도 아파?”
“그렇지. 뭐.”

대화 사이에 우렁찬 목소리가 단단히 닫힌 문을 뚫고 들어왔다.

“-자! 소등이다! 불끄고 자도록. 너희! 방으로 들어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명헌은 불을 끄고 신현철 곁으로 돌아왔다. 내년부터는 침대로 바꾼다는 말이 있었지만 뜬소문일 뿐이라 아직 기숙사 방은 요를 깔고 나란히 눕는 구조였다.

입학 초에는 나름의 사이를 두고 있던 이부자리가 공유하는 일이 많아지고 심적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이제는 완전히 맞붙어 있었다.

미리 누워있던 현철을 눈으로 쫓으며 명헌이 제 몫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눈을 꾹 감았다 뜨면 어둠도 들여다볼 만했다. 눈을 깜빡이며 천장 무늬를 세아리다 눈동자를 굴리자 두 쌍의 까만 반짝임이 곧장 마주쳤다.

“…….”
“…….”

시선을 얽고 있기를 삼 초.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자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눈을 감았다. 곧 방문이 열리며 복도에서 들어온 빛이 방안에 세모꼴 그림자를 남겼다가 사라졌다.

뚜벅뚜벅 끼익, 탁. 반복되는 발걸음 소리와 문 여닫는 확인 소리가 완전히 멀어지자 명현이 상체를 벌떡 일으켜 앉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현철은 베개 속을 더듬어 작은 손전등을 꺼내더니 이불 속에 넣고 버튼을 눌렀다.

천에서 아슴아슴 투과되어 나오는 빛이 만들어내는 오묘한 분위기가 작은 기숙사 방을 어딘지 동떨어진 공간처럼 만들었다.

한없이 광활하면서도 빠듯하게 좁다란 곳으로.

그 사이 명헌은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책상 아래에 숨겨두었던 제법 큰 철제 주전자를 꺼냈다.

손바닥으로 매만지자 주전자 속의 끓는 물은 이때 알맞게 뜨거웠고 주전자에 둘둘 둘러두었던 찜질팩도 자연스레 데워져 있었다.

만족스럽게 고개 든 명헌이 이미 의자를 빼 앉은 현철과 눈을 마주쳤다.

“…고맙다. 오늘도.”
“많이 커서 얼른 주전 해. 베시.”
“하. 그래야지.”

성장하지 않는 성장통이 엿새째 되던 날, 어둠 속에서 혼자 찜질팩으로 어설피 제 무릎과 발을 주무르던 신현철을 잠에서 깬 이명헌이 발견했을 때부터 명헌은 기꺼이 그 일을 자처했다.

네가 잘 자야 나도 잘 수 있다는 이야기가 뒤따랐고 실제로 맞는 말이기도 했다. 앓는 소리를 다 참을 수 없어 명헌을 가끔 깨웠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을 담아 그의 뒷정리 청소 당번을 도와주기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꼼꼼히 자신을 주무르고 매만지는 손길에 대한 부채감을 덜어내기는 어려웠다.

“하…….”

그러나 이런 부채감도 무릎에 따끈한 찜질팩이 얹어지고 훈기 머금은 수건이 발등을 덮어오면 잠시나마 녹아 사라지는 것이라, 야물은 손끝이 발가락과 발목을 꾹꾹 눌러오자 그는 주먹을 허벅지 위로 공손히 올려놓은 채 턱만 빠듯하게 치들었다.

“…….”

앓는 소리 들린다 베시. 시선을 슬그머니 올리면 눈을 감은 채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부르르 떠는 신현철이 보였다. 명헌은 잠시동안 그의 얼굴을 조용히 감상했다.

늘상 단단하고 호쾌하게 웃는, 행동도 성격도 옹골진 돌멩이 같은 신현철의 이런 무른 부분은 오직 이 새벽, 좁고 어두운 방 안의 자신만 보는 것일테니까.

비밀스러운 충족감이 있었지만 이유를 몰랐다.

그러나 당장 이유를 찾을 필요는 없었기에 다시 시선을 내린 명헌의 손길이 발등과 두꺼운 발목을 지나 정강이뼈를 따라 올라갔다.

…이제 그렇게 아프다는 무릎.

명헌이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만지는 곳도 무릎과 오금이었기에 올려두었던 찜질팩을 치운 뒤 새로 교체한 스팀타올로 무릎을 덮으려던 때였다.

“……?”

반쯤 덮었던 스팀타올을 손끝으로 들춘 명헌의 고개가 옆으로 갸웃 기울었다.

그대로 눈을 두 번이나 깜빡여도 시야 속 ‘흉터’가 여전히 보였다.

흉터? 아니. 이건 튼살 베시?

어제까진 없었는데. 게다가 자라지 않았다고 했는데? 의아해진 명헌이 엄지손가락 끄트머리로 한 줄의 튼살을 매만졌을 때였다.

“…!”

손끝이 불에 데는 듯 뜨거워진다 싶더니 마치 손끝에 마법 잉크가 발려져 있던 것처럼 엄지손가락이 지난 자리에 ‘이명헌’ 이름 세글자가 새겨졌다.

그 글자를 바라보는 순간 명헌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름? 이거, 그거 아니야? ‘운명의….’

그러나 이 이상의 감상을 전개할 틈은 없었다.

“명헌아. 왜 그러는, 헉…!”
“…아!”

정수리로 앓는 소리가 툭 추락해 떨어지더니 어깨에 있던 신현철의 커다란 손아귀에 힘이 콱 들어갔다.

배려라곤 하나도 없이 뼈를 으스러트릴 정도로 쥐다 못해 미끄러져 등을 끌어안으며 한껏 웅크린 신현철이 명헌을 몸 안에 가둔 채 신음했다.

“잠, 현철. 아프, 아.”
“으, 악…!”

반사적으로 몸을 뒤틀어본들 무소용해서, 명헌은 자신을 우그러트릴 듯 감싸온 몸에 가득 끌어안겼다.

 

그래서, 느껴졌다.
신현철이 자라고 있음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말이다.

그의 몸을 억지로 옭아매고 압박해 있던 밧줄이 터져 끊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지금까지 살가죽 아래에서 울럭이며 요동치던 것들이 기지개 켜며 일제히 태어나고 있었다.

말도 안 되게 벅차면서도 공포스러운 순간이었다.

고어 영화에나 삽입되었을 법한 소리가 들려왔던 탓이다. 우득, 와지직, 살갗과 뼈가 잡아늘려져 강제로 변하는 선연하고도 소름끼치는 소리. 이와 함께 자신을 껴안은 몸의 온도와 힘이 폭력적으로 거세졌다.

현철이 숨을 내뱉는 찰나에 명헌의 그의 등허리를 끌어안고 손끝에 바짝 힘을 줘 매달렸다.

“괜찮, 여기.”
“으윽-”

몸이 틈 없이 맞물리자 현철 역시 명헌을 한결 편하게, 또 완전히 끌어안은 채 근육과 뼈를 부수고 재조립하는 고통을 인내했다.

성난 해일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그의 무릎에 이마를 댄 명헌의 시야에 여전한 제 이름 세글자만이 경이로울 정도로 거대하고 선명했다.

숨 막혀 혼미한 가운데 명헌은 교과서에서 본 연리지를 떠올렸다.

…어쩌면 이대로 얽혀 하나로 합쳐져 버릴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나 생각을 마친 순간 명헌의 등을 감싸고 있던 팔이 툭 떨어져 나갔다. 뜨거웠던 체온과 압력이 사라진 자리가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식었다.

“명헌, -아. 미친.”
“…….”

밭은 숨과 함께 기침을 콜록인 현철이 몸을 덜덜 떨면서도 애써애써 힘을 풀고 있었다.

“미안. 하, 대체 뭐였지….”
“…….”
“너 괜찮아?”

그가 마지막으로 숨을 흡 마시더니 무너져있던 상체를 세우곤 명헌의 안색을 살폈다.

생리적인 눈물로 눈동자가 번들거리면서도 걱정이 가득한 표정. 멍하니 그 얼굴을 들여다보던 명헌이 다시 시선을 내려 현철의 무릎 옆면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진실로 갈기갈기 찢어져 튼살이 된 자리. 살갗을 뒤집어가며 기어이 움터 탄생한 ‘운명의 이름’이 여전했다.

“너 왜 대답을 않-”
“현철아. 베시.”
“어어.”

그래. 두 사람은 기묘한 세상 한가운데였다.

운명의 짝이 문신처럼 살갗에 떠오르는 세상이 어떻게 기묘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귓등으로나 흘러가 먼 나라의 일처럼 막연한 이야기였는데.

“내 이름. 베시.”
“…이름? 갑자기 왜?”
“…….”
“음. …이명헌.”

하지만 운명 될 이름과 함께 자라난 소년은 얼마나 더 기묘한가.

이름이 움튼 순간 반대로 자신의 땅속에 콱 심겨 들썩이기 시작한 이 미약한 박동은 뭐란 말인가.


***


둘은 기어이 소년의 껍질을 벗는다.
비과학적인 현상이 일상으로 자리 잡은 세계,
그럼에도 가장 불가사의한 것이 과연 사랑인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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