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영혼
따개 | @ddagae22872
후여!
나의 등불이여!
부디 앞장서시오,
나는 칼이 되어 당신을 뒤따르리니!
-아키타 연호 10년, 아키타의 간이 출정하며 지에게 불러주었다던 연시.-
명헌이 서국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말을 배우는 것이었다.
서국(西國)을 아키타라고 부르는 것이 시작이었다. 명헌은 그 제대로된 발음과 어감을 이 땅에 와서야 배웠다. 명헌의 고국에서는 이 땅에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기에.
고국은 깨끗하지 않은 것들을 혐오했다. 고아하고 순결한 것들을 숭상했다. 때문에 명헌의 고국은 잘 닦여진 돌바닥도, 향나무로 창틀을 짜 넣은 궁궐도 없는 이 야만에 땅에 이름을 붙여주지 않으셨다. 그러니 그들의 활시위가 감히 저들을 향했을 때 얼마나 경악스러워했던지.
명헌은 저를 향해 신탁이 내려졌을 때 제 운명에 잠시 고통스러워했지만 아주 예상치 못했던 일은 아니라 이내 담담해졌다. 명헌이 신력이 있어 신탁을 미리 알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신성이 고갈된지 오래된 그들의 신전이 신의 말씀을 전했을 리가 없다는 걸, 명헌은 오래 전부터 알았다. 명헌의 가문은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헌은 예상할 수 있었다.
존재 없는 신에게 밉보인 가문에서, 명헌은 적절한 핏줄로 선택된 것뿐이었다.
그래서 명헌은 서쪽으로 7일을 갔다.
국혼도 뭣도 아니었으니 술이 달린 무거운 가마는 국경까지만 명헌을 실어 날랐다. 이후로는 덧창이 없는 가벼운 가마로 갈아타고 사흘을 더 갔다. 엄밀히 말하면 중간중간 제 발로 걷기도 하고, 직접 말을 타고 강을 건너기도 했다. 혼례길이 아니라 순례길에 더 가까운 여정이었지만 명헌은 제 처지가 그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다지 괴롭지 않았다.
“앞으로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그들은 예법도 품위도 없어서 혼인할 때 소와 양을 잡은 피를 대문 밖에 흩뿌리고, 손님들이 마구 뜯어먹을 수 있게 피가 흐르는 고깃덩이를 장대에 걸어 놓는다는 이야기를 고국의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전설처럼 듣고 자랐다. 명헌은 새삼 저의 가문에 신탁을 내린 사제에게 묻고 싶었다. 야만의 짝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 말고, 나라의 액운을 짊어지고 서쪽으로 가야 한다 따위의 추상적인 신탁은 집어치우고 좀 더 현실적인 것을 가르쳐줄 마음은 없었는지. 명헌은 가족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야만의 땅에서는, 타국에서 온 새신부가 가마에서 내리면 꽃을 수놓은 가죽신을 첫 선물로 준다고. 그 신을 신고 새 풀이 돋아난 땅을 밟는 기분이 썩 괜찮다는 것을.
약식은 예상외로 가벼운 분위기였다. 간소한 예복을 입고 식을 올린 다음 타고 온 가마와 수하들을 돌려보내자 이제 완전히 혼자라는 실감이 닥쳐 막막했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명헌을 환대했고 살뜰하게 챙겼다. 아마도 타국에서 홀로 온 신부를 배려한 것이었으리라. 그들이 음료며 간식을 자꾸만 권하는 행동도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했다. 명헌은 사람들과 다과상에 둘러앉으며 새삼 어릴 적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피가 흐르는 살점 대신, 명헌이 서국에서 처음 먹은 것은 끓인 우유로 만든 차와 말린 과일이었다.
아키타의 중앙으로 가서 카의 승낙 아래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기 전까지는 명헌은 약혼자의 신분으로 이곳에 머무르기로 되어 있었다. 명색이 우두머리의 결혼이니 당연했다. 문제는 언제 중앙으로 갈 수 있는지 확실치 않다는 것이었다. 명헌의 상대는 정벌을 위해 무리를 이끌고 떠나 있는 상태였다. 아이만 생산할 수 있는 몸이라면 사내든 여인이든 외관은 중요치 않다는 것이 그들의 조건이었다. 그래서 명헌이 선택된 것이다. 초원의 천막에서 홀로 기약없이 신랑을 기다리는 것. 이런 굴욕적인 처우를 수락할만한 명문가 자제따위 본국에 있을리가 없었다. 명헌은 홀로 약식을 치렀다.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천막을 걷고 나가보니 횃불을 여기저기 피워놓고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상을 차려놓고 명헌을 기다리고 있었다. 금실로 수를 놓은 두꺼운 융단 위에 흰 천을 넓게 펼쳐 온갖 음식과 술이 올라앉아 있는 풍경이 장관이었다. 명헌을 위해 비워진 자리는 가장 끝 상석이었다. 옆자리가 비어있는 모습이 어딘지 허전하게 느껴질 법도 했지만 워낙 사람이 많아 그런대로 괜찮았다.
“감사합니다.”
나이든 여성이 일어나 명헌을 향해 술을 건넸다. 잔을 든 채로 가만히 있자 옆 사람들이 마시는 시늉을 하며 명헌을 재촉했다. 한번에 쭉 들이키니 살짝 텁텁하면서도 들큰한 맛이 입안을 채웠다. 명헌이 저도 모르게 입맛을 살짝 다시자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원래는 부부가 같은 잔을 들고 술을 나눠 마시는데 혼자 식을 치른 명헌이 술을 한번에 전부 마셔버려 웃은 거였다고 한다.
명헌은 굳이 제 신랑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재수가 없다면 정벌지에서 죽어버릴 수도 있는 운명, 얼굴도 모르는 신랑의 일신을 굳이 신경쓰고 싶지 않아 반쯤 오기를 부리고 있다고 해도 좋았다. 이 부족이 명헌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있는 이유에 그 탓도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새신랑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약혼해 시체가 되어 돌아온 남편을 마주할 수도 있는 처지의 이방인. 그게 지금의 명헌의 입장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가. 명헌은 동이 터 오는 새벽 내내 골몰했다. 이제는 동국(東國)이 되어버린 고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한다. 비열한 음모임에 틀림없지만 어쨌든 나라의 신탁을 받고 온 몸. 돌아가면 제 가족은 어떻게 되는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다. 얼굴도 모르는 남편의 시체를 몇 달 뒤 마주하게 되더라도.
명헌은 찬 새벽 바람을 맞으며 오래 오래 생각했다.
“천막, 횃불, 울타리.”
명헌은 자연스럽게 부족 사람들과 어울렸다. 천막에 천을 덮는 것을 돕거나 가축 모는 것을 따라가면서 사람들에게 말을 배웠다. 절반쯤은 이방인인 처지라 어색한 티는 아직 숨길 수 없었으나 이만하면 기대 이상이었다.
“지펴선을, 지평선을 따라가다. 앞으로. 맞습니까?”
“예에, 맞습니다!”
아키타는 여러 부족의 협약으로 이뤄진 연합 국가였기 때문에 딱히 정해진 국경이랄 게 없었다. 이 부족들은 말과 양을 이끌고 평원을 달렸다. 초원이 그들의 국토였고 집이었다. 명헌은 방금까지 제게 짧은 문장을 가르쳐주던 십 대 중반쯤의 남자아이가 몇 마리의 개를 이끌고 말을 타고 달려가는 모습을 차마 감탄하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아이는 마치 말과 한 몸인 것처럼 달렸다. 초원을 달리는 기십마리의 말들의 갈기가 바람을 타고 거칠게 휘날렸다. 그 어떤 종보다 강한 혈통의 짐승이었다. 아마 고국의 명마조차도 저들과는 견줄 수 없으리라. 명헌은 지천을 울리는 이 발굽 소리가 고귀한 조국을 얼마나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을지 짐작하며 쓰게 웃었다. 이들의 말에는 편자가 없었다. 부드러운 흙을 박차는, 이 야만적인 소리는 위협적이면서도 부드러웠다.
“간에게서 서신이 왔습니다!”
서신을 가져온 이가 다른 사람들과 몇 마디를 나누더니 곧장 명헌에게 향했다. 명헌은 제 남편이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보내온 것은 편지 뿐만이 아니었다. 명헌은 늑대 가죽을 받아들고 몸을 뻣뻣히 굳혔다. 비린내가 나는 묵직한 털가죽이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았다.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은 새카만 털을 쓰다듬으며 감탄 섞인 환호성을 질렀지만, 이내 명헌의 표정을 보곤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선물이에요. 간께서, 선물.”
한 남자가 명헌의 마음을 풀어주려는 듯 말했다. 남편이 아내에게 주는 선물이니 놀라지 말라는 듯.
간은 명헌의 남편을 칭하는 말이었다. 이 부족 무리의 우두머리를 그렇게 불렀다.
[지에게 주는 약혼 선물이오. 돌아갈 때까지 건강히 지내시기를.]
지. 지는 간의 반려자를 부르는 말이다. 명헌은 편지에서 언뜻 발견한 그 단어를 보고 문득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명헌은 털가죽을 다른 이들에게 넘기고 천막으로 돌아와 편지를 읽었다. 아키타의 문자는 명헌의 고국과 통하는 곳이 있어 해석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어려움을 겪을 만큼 길지도 않은 편지였다. 약식을 혼자 치르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에 몇 마디 말을 덧붙인 것 뿐, 그러나 명헌은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늑대는 추벽산을 넘을 때 잡은 것이라고 했다. 추벽산은 고국의 국경에서 머지 않은 곳이었다.
다음날이 되자 천막 옆 밧줄에는 늑대 가죽이 팽팽하게 당겨진 채 널려 있었다. 밤새 기름을 먹이고 무두질을 한 건지 털에는 윤기가 흘렀다. 왠지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옷을 만들어 드릴까요?”
“예?”
“가죽이 워낙 커서 깔개도 괜찮고요.”
가죽을 살펴보러 나온 여자가 상기된 말투로 물어왔다. 제게 온 선물이니 뜻대로 말만 하라는 의미였다. 장정의 겉옷 한벌쯤 거뜬히 만들 수 있는 크기였으므로 용도에 제한은 없었다. 명헌은 조금만 생각해보겠다고 전했다. 여자가 자리를 뜨고 나자 명헌은 늑대 가죽에 다가가 결을 쓸었다. 기름과 짐승 비린내가 섞여 조금 불쾌한 냄새가 났다. 궁금해하지 않겠다 다짐했지만 문득 호기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만한 늑대를 직접 잡았다고 했다.
아키타는 연합 국가인 만큼 다양한 부족들이 섞여 살았고, 그 피가 오랜 세월 각양각색으로 섞인 탓에 이제는 부족민들사이의 특징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무서운 생명력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적어도 명헌이 보기엔 그랬다. 분명 그 편자 없는 말을 타고 나갔을 테지. 개중에서도 가장 크고 빠른 말을 탔을지도 모른다. 제 약혼자는 이 부족의 간이다. 그에 걸맞는 외관을 지녔으리라. 키는? 얼굴은? 정벌을 하며 초원을 떠도는 부족의 우두머리인 그의 몸에 상처 하나 없을까?
명헌은 그 전설을 떠올렸다. 상상 속의 사내는 육중한 팔로 늑대의 머리에 도끼를 휘두르고, 맨손으로 가죽을 벗긴다. 피 흐르는 손을 핥고는 다시 전쟁터로…..그런 상상에 이르자 명헌은 시답잖아 웃었다.
“맛있어요?”
“예, 맛있어요.”
명헌이 머무르는 천막에 식사가 차려졌다. 명헌은 살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모여 밥을 먹고, 생활해본 적이 없었다. 항상 명헌의 부모님과 하나 있는 누님뿐, 그보다 애초에 고국에서는 이렇게 융단 위에 앉아 식사를 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명헌은 그런대로 적응해갔다.
“손이 참 희다, 그치?”
명헌은 말을 놀라울 만큼 빨리 배웠다. 타고나길 머리가 좋았다는 문제보단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딱히 할 일도 없어서 하루종일 아이들을 봐주며 그 애들에게 말을 배웠다. 간의 약혼자에게 막노동을 시킬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보모 노릇이 제격이기는 했다. 명헌도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면 마음이 편해져서 좋았다. 아이들은 호기심 많고 참을성 좋은 훌륭한 스승이 되어주었다.
“맞아요. 그쪽 사람들은 원래 그렇게 하얀가?”
“저희는 돌아다니지 않으니까…정착해서 건물 안에 살아요.”
“지, 간이 돌아오기 전에 말 타는 것을 배워요. 같이 양도 몰고, 그래야 지금처럼 간이 출정할 때 같이 따라 나가지요.”
더듬더듬 알아들은 내용으로 명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끌려오다시피 한 신부에게 말 타는 법을 가르쳐서 어쩌려는 것일지. 확신이 있어 이런 말을 하는 것이리라. 초원 위의 제일가는 준마를 탄다 한들 명헌은 도망칠 수 없었다. 이들은 다리에 힘이 생기는 순간부터 망아지와 송아지를 타고 노는 종족이다. 제아무리 빨리 달린다 해도 강을 건너기도 전에 목이 잡혀 도로 끌려갈 것이다. 도망친다 한들 온 나라와 함께 불타 죽겠지. 명헌은 자신의 피해의식이 걷잡을 수 없이 뻗치기 전에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부족의 사람들도 자신이 억지로 혼인에 동의한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 사실은 도착한 첫날부터 알 수 있었다. 묘하게 자신의 심기를 의식하며 조금이라도 안색이 어두워질까 신경쓰는 모습에서 이들이 저를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우습게도, 명헌은 그 사실에 약간의 위안을 얻었다. 색실로 수놓아진 가죽신을 신는 순간부터 명헌은 위안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은 때때로 명헌을 괴롭게 했다.
“말 탈 줄은 알아요.”
“그래요?”
“여러분처럼 달릴 수는 없어요.”
옆에 앉은 이가 탄식하듯 웃었다. 호방하게 잔을 내려놓은 여자는 내일 당장이라도 말을 고르러 가자고 명헌을 설득했다. 명헌은 할 수 없이 그러마 대답하곤 마저 식사에 집중했다. 천막 안은 음식과 사람들의 열기 때문에 따뜻했다.
명헌은 한동안 허벅지와 엉덩이가 아파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걸었다. 애써 괜찮은 척 했지만 골반이 뻐근해서 걸음을 조금만 크게 하면 허리부터 엉덩이까지 저려 왔다. 어찌됐든 다 큰 사내의 몸이니 큰 말을 타고 연습해야 한다는 주장에 의해서였다. 말을 몰러 갈 때 함께하던 소년마저 명헌에게 큰 말을 권해서, 혹시나 자신을 괴롭히는 것인가 싶었지만 소년의 말이 명헌의 말보다 더 크고 거칠었기 때문에 아무 항의도 할 수 없었다. 말은 평범한 갈색 수컷이었고 꽤 온순했지만, 고국에서 타던 말과 비교할 순 없었다.
“괜찮아요?”
머리를 땋아 올린 소녀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승마를 가르쳐준 사내의 딸인 그녀는 벌써 결혼을 한 몸이었다. 소녀는 허리께를 툭툭 치며 꺄르르 웃었다.
“엉덩이가 아프죠?”
“조금.”
“어쩌나! 간이 돌아오시면 더할 텐데! 어서 적응하셔야지요-”
소녀는 또 꺄르르 웃었다. 자신보다 어린 소녀의 입에서 묘한 말이 튀어나오자 명헌은 제가 이해한 것이 맞나, 싶어 눈을 크게 떴다.
“간께선 덩치가 황소만하세요. 이러시다 지는 혼인하면 쓰러지시겠네!”
명헌은 생각지도 못한 음담패설을 듣고 당황해 멀뚱히 서 있었다. 곧이어 나타난 남자가 소녀를 나무라며 꾸짖자 명헌은 됐다며 손짓을 했다. 이곳에 와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많았다. 예를 들면 아키타는 성적으로 꽤나 방종했다. 거처를 옮길 때는 모두가 이동해야 하니 정착해 있을 때 혼인과 출산 등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부족의 특성이었다. 그래서인지 결혼이 이른 편이었고, 상대방이 죽어도 어렵지 않게 재가를 했다. 젊은 피를 굳이 썩히지 않으려는 것이겠지. 명헌은 열 예닐곱 쯤 되는 아이들이 풀숲에서 살을 맞대는 걸 목격한 이후로는 성적 문화의 차이점 따위는 그러려니 납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면에선 명헌은 늦은 편이었다.
생식기관이 발달하는 시기가 남들보다 훨씬 느려서, 명헌에게는 혼담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어딘가 흠이 있는게 아니냐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아이를 밸 수 있는 몸인지 아닌지 결정되지 않은 채로 십 대를 흘려 보냈고, 스무 살 초반에 끔찍한 고통을 겪은 이후에야 수태할 수 있는 몸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는 이리로 오게 된 것이다.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저 애가 버릇이 없어서….죄송합니다.”
남자는 무릎을 굽혀 사과를 했다. 감히 간의 약혼자에게 함부로 농담을 했다는 의미의 사과였지 아마도 그 말의 내용에 대해서 사과하는 건 아닐 거였다. 이곳에서 부부는 함께 말을 타고 초원으로 나갔고, 소녀들은 스스럼없이 소년에게 다가갔다. 이쯤은 별 것 아닌 일이었다.
“간께선 키가 큰 편입니까?”
“예? 네. 이 정도만합니다. 나가 있는 동안 더 컸으면 이쯤 될까요.”
남자는 제 머리 위쪽을 가늠해 손짓했다. 대략잡아도 명헌보다 한뼘은 큰 높이었다. 황소만하다- 라던 소녀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어쩌면 맨손으로 늑대 가죽을 벗기는 일이 우스운 상상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궁금해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헛말이 된지 오래였다. 명헌은 갈수록 신랑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잦아졌다. 부상자들이 먼저 귀환한 이후부터였다. 정벌이 거의 막바지라 곧 돌아온다는 소식과 함께. 그들은 치료를 끝내고 곧바로 명헌을 찾아왔다. 동쪽에서 온 이방인 지에게 인사를 올린 그들은 간은 무사하며, 지를 혼자 있게 둬서 많이 미안해 한다는 말을 전했다. 명헌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언제 돌아옵니까?”
“아마 한 달 쯤 걸릴 겁니다.”
한 달. 명헌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화라기보다 실망이나 원망 같은 게 더 컸다. 이곳에 온지 반 년이 다 되어가는데 한 달을 더 기다려야 한다니. 명헌의 표정이 말라가자 병사들은 눈치를 봤다.
“간께선 척하(河) 상류까지 갔다가 내려오실 겁니다. 그곳의 마을들이 쉽게 길을 열어 줘서, 다행히 빠르게….”
“척하?”
척하는 고국으로도 줄기가 뻗은 큰 강이었다. 그 강의 상류로 가면 나라의 외곽 지대와도 거의 맞붙어 있는 지대가 나온다. 애써 무시해온 생각이 다시 가지를 뻗쳤다.
아키타의 부족들은 순서를 바꿔가며 마치 간을 보듯 강을 넘어 왔다. 초원과 동국 사이에는 강이 두 개 있었다. 그중 하나가 척하의 하류로 가는 강이었다. 초원에 맞붙은 첫번째 강에 비하면 작았기 때문에 고국은 언제나 그곳을 경계했다. 그런데 몇 년 전 척하 주변의 부락 하나가 불타 사라졌다. 보잘것없이 작은 부락이었지만 고국에 충격을 주기는 충분했다. 개미새끼 하나 안 남기고 불탄 흔적을 보고 위협을 느낀 궁은 부랴부랴 인근에 성벽을 높이 세웠고 군대 몇 기를 데려다 놓았다. 하지만 그걸로는 안심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던 야만족에게 중앙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고국은 대단한 자존심을 한 풀 꺾을 수밖에 없었다. 편지와 함께 성대한 선물이 두 개의 강을 건넜고 대지를 가로질러 야만의 패왕에게 다달았다. 돌아온 것은 편지 한 통과 질 좋은 양털, 가죽을 가득 실은 수레였다. 편지의 내용은 간결했다.
[왕이여!
척하와 거륜이 두 땅을 갈라놓고 있거늘
떨어진 땅을 인간이 어찌 잇겠소?
내 짧은 지혜로는 화친을 도모할 길이 없어 한탄했건만
친히 편지를 보내 오시니 기쁘기 마지않은 일이오!
나또한 이 제안이 보화보다 값진 것을 모르지 않고
그러니 보답하는 것이 도리일 터.]
편지의 마지막은 아키타 가장 외곽에 있는 간의 장자와 혼인을 시키자는 제안으로 끝났다. 축복 가득한 번드르르한 말이었다만 카의 적장자도 아니고 외곽 부족과의 결혼이라니. 궁에서 공주를 내놓을 리는 없었고 세력가문의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명헌의 아비는 중앙에서 밉보인지 오래였다. 명헌의 어머니는 이럴 수는 없다며 가슴을 쳤다. 이미 시집간 누님도 친정 문을 부술듯이 열고 달려와 울었다. 껍데기만 남은 귀족가의 핏줄이 그때만큼 저주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명헌에겐 양친이 인질이었고 시집간 누님이 인질이었다. 명헌도 마찬가지. 엉켜버린 그물을 끊어내듯 가족들은 그렇게 도려내졌다.
명헌은 꾸러미를 펼쳐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먼젓번 손질을 끝낸 늑대 가죽과 먼저 귀환한 이들이 가져온 공물 중 명헌의 몫으로 떨어진 것들을 바닥에 몽땅 늘어놓고 보니 그 모습이 꽤나 호화찬란했다. 그러나 명헌의 표정엔 기쁜 기색이라곤 없었다. 간은 척하 상류에서 내려오고 있다고 했다. 그곳까지 가려면 산줄기를 넘고 작은 마을들을 몇 개나 거쳐야 한다. 척박한 땅이라 그곳 사람들을 죽이든 말든, 그 사실이 고국에게 위협이 될지 의문이었으나 상류로 넘어간다면 문제가 된다. 물줄기가 좁은 곳이다. 아키타의 말을 타며 명헌은 때때로 공포스런 생각에 휩싸였다. 마음만 먹으면, 그래 어쩌면 마음만 먹는다면 척하를 넘는 것은 이들에겐 그저 수고스러운 일 따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북풍을 견디며 살아온 이들에게 추벽산이 무서울까? 이 말들은 깊지도 않은 물줄기 따위…..
생각이 뿌리처럼 뇌리를 파고든다. 명헌은 애써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그저 얼굴 모를 아키타의 카에게도, 마찬가지로 얼굴 모르는 자신의 신랑에게도, 이 결혼이 뜻있는 것이기를 빌었다.
신랑이 저를 진정으로 아끼는 것인지, 아니면 그도 이 결혼의 의미를 알아서 그랬는진 모르겠지만 명헌은 받은 선물을 뜻있게 쓰리라 마음먹었다. 늑대 가죽은 겨울을 나기 위해 겉옷을 만들기로 했다. 초원의 겨울을 버티기엔 지금 있는 옷들로는 턱도 없다는 이유였다. 나머지 선물들은 모두 꾸려져 수레에 실렸다. 누이를 위한 것이었다. 제 편이 없기는 혈육도 마찬가지일 터, 오히려 고국에서 끈떨어진 연 신세일 게 분명한 누이는 저보다 더한 외로움을 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누님에게 헛것이나마 뒷배가 있다는 모양을 만들어주고 싶은 욕심이었다. 최고로 친다는 산양모는 있는대로 모아 실었다. 주변에서는 아까워 말렸으나 명헌은 못 들은 체했다.
하늘은 끝도 모르고 높아졌다. 푸르기만 했던 대지는 한바탕 비가 지나가고 난 뒤 물기를 푸르른 하늘에 모두 빼앗긴 듯 말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기는 여전했다. 바람에 습기가 없어지자 사람들은 힘없는 양을 골라 살을 발랐다. 중앙과 가까운 곡창지대에서 갓 수확한 곡식과 양식이 매일매일 실어져왔다. 어느덧 말이 꽤 능숙해진 명헌도 나가 일을 거들었다. 신랑이 돌아오기 보름쯤 남은 나날이었다.
“지, 기대되나요? 간께서 곧 오시잖아요.”
양털 고르는 것을 거들던 아이가 들떠서 물었다. 명헌은 울컥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아냈다. 날이 가까워질수록 불안은 커져만 갔다.
“응.”
“간께서 어서 돌아오시면 좋겠다. 중앙에서 엄청나게 큰 결혼식을 하고, 또 여기서도 결혼식을 하구요.”
속모르고 떠드는 아이는 천진했다.
명헌은 며칠 전 빈 수레와 함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누님에게서 온 편지였다. 생각보다 빨리 온 편지가 달가웠던 것도 잠시 봉투를 뜯고는 발밑이 꺼지는 느낌에 간신히 처소로 돌아와 비틀거렸다. 누님의 필체가 아니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 순간 손이 떨렸다.
선물을 언급하는 형식적인 감사 인사도 없는 거의 텅 빈 종이나 매한가지였다. 너를 혼자 만리타향에 보낼 수밖에 없어 죄스럽고 미안하다는 말에, 이젠 아키타가 너의 집이자 고향이니 이곳은 잊고 살라 따위의 말이 명헌을 찢어발겼다. 사방 칼날로 둘러싸인 구덩이에 떨어진 것 같았다. 뒷장에는 일이 잘 끝나면 네 신랑이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리라는 문장이 휘갈겨져 있었다. 명헌은 한참을 멍청하니 있다가, 종이를 구겨들고 천막을 젖혔다.
병신같이 아무말 없이 숨죽이고만 있었던 날들이 스쳐지나갔다. 믿음이라는 명목으로 몇 달을 허비했나, 의심이 머릿속을 자글자글 태우는 것 같았다. 목 끝까지 올라온 분노에 숨이 막혔다. 미친듯이 달려 어느 처소 문을 젖혔다. 간과 함께 출정했던 병사들 중 그의 최측근, 동오를 붙잡고 명헌이 소리쳤다.
“날 죽이려는 작정이면 한치 거짓없이 다 고하고 나서 하시오!”
동오는 옷매무새를 정돈할 틈새도 없이 명헌에게 무릎을 굽혔다. 다짜고짜 들이닥친 명헌을 보고서도 동오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명헌은 제 눈길을 피하는 동오의 표정을 보고 맥이 탁 풀리며 앞에 주저앉았다. 공포스러운 예감이 창끝으로 저를 꿰어 죽이는 듯했다.
“척하 상류에는 왜 간 겁니까,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 놓고…..화친할 목적이라고! 혼인한다는 작정으로 날 몇 달이나 내버려놓고, 다 참았건만, 일부러 모르는 척 시체처럼 굴어줬는데 이제와 나를 능멸해!”
“지! 간께선 지와 혼인하실 겁니다. 지의 부친께서 당신을 지키려고 이리로 보냈어요!”
“뭐라고?”
와락, 명헌의 가슴속에 불벼락이 쳤다. 머리에 가득 찼던 혼돈이 불길에 휩싸여 잿더미로 변했다. 들끓던 무언가가 차갑게 식어 나동그라졌다. 차분해진 틈새를 놓치지 않고 동오는 명헌을 자리에 앉혀놓고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이마를 쓸었다.
“지, 아니 명헌. 당신을 이리로 보내고자 손을 쓴 건 부친이십니다.”
주절주절 이어지는 말들 중 반쯤은 알아먹고 반쯤은 흘러내려갔다. 아비가, 신전에, 아키타가 어쩌고 하는 말들. 궁이 어쩌고 저쩌고, 알수 없는 말들, 말들, 음모들, 수작질들. 명헌이 모르는 새 오고갔던 말들이 두 세번씩 쉬운 말로 걸러져 쑤셔박혔다.
명헌이 몰랐으면 하는 바램들. 아키타와 몰래 교류하던 것의 발각. 남자는 똑똑한 자였으나 잃을 것이 많았다. 하필이면 딸이 시집간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았던 때. 하나 있는 아들은 덜 자란 몸이었으며 남자 자신도 끈 떨어진 연 신세였다. 바람만 불어도 무너질 누각 같은 판국임을 똑똑한 남자는 모르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부패한 신전에서 남자에게 제안을 한 것이다. 그 하나 남아있는 아들을 달라고. 세간에는 덜 자란 몸이라고 알려놨지만 의원이 매수당해 아들이 수태할 몸으로 변하리라는 사실은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부친께서 당신께 비밀에 부친 것 뿐, 동하(東河)는 애초에 당신을 첩자로 보냈습니다. 중간에 간과 부친께서 은폐한 겁니다.”
덧붙인다.
“동하, 당신의 나라는 애초부터…..우리와 전쟁할 작정이었습니다. 그걸 카에게 알린 것이 부친이십니다.”
명헌은 외국어를 알아들으려고 애를 쓴다. 머리를 흔들다가 정신을 차리려 별안간 일어나 미친 사람처럼 서성거렸다. 실낱같은 이성이 돌아온건 찰나였다.
“내게 신탁이 떨어진 건 1년 전이오. 카의 서신이 도착한게 그보다 이른 여름이었고 내 몸이 변한 게 그쯤이지.”
눈에 이채가 번득인다. 총명한 본성이 흩어지는 정신을 간신히 수습한 모양새다. 가만히 두면 휘청일 것 같이 애처로운 꼴이었지만 끝끝내 두 발로 버티고 꼿꼿히 심지를 세웠다. 감탄스러웠다.
“내 아버지가 작정하고 아키타와 내통했다는 말이오?”
밀정! 첩자짓을 시킬 계획으로? 애초에 조작된 신탁인줄은 알았지만 그 배후가 제 아비와 아키타였으리라곤 생각치 못했다. 내통이라고 말은 했으나, 전쟁은 힘없는 개인이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고 하나 남은 아들이나마 도피시키려는 최후의 수단이었을 것이다. 허나 꺼림칙한 것이 하나 있다.
“그렇다면 최소 2, 3년 전부터 말이 오갔다는 것인데. 그땐 돌아가신 선대 간께서 족장이었을 때가 아닌가? 내 남편 될 자가 간에 오른 것은 작년 아닙니까? 그자가 뭘 믿고 나와 결혼하겠다고 했지? 왜 아버지를 도왔지? 얻을 것이 하나 없는데!”
명헌은 거의 악을 쓰고 있었다. 제 분에 못 이겨 거의 모국어로 말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총명한 본성이 정신은 수습해줬을지 몰라도 바닥난 인내심까지 채워 주진 못했다.
“저는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다만 간께선 반드시 명헌과 혼인하실 겁니다. 분명히 그리하실 겁니다.”
“어차피 마지막 허락은 카가 내리는 게 아니오?”
자포자기한 듯한 음성이다. 원망할 상대를 찾아 미미하게 메아리치는 음성은 동오의 말에 맥이 뚝 끊겼다.
“카 앞에서 맹세한 일입니다. 선대 간과 카 앞에서 당신과 혼인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동오의 마지막 말이 오래도록 맴돌았다.
‘그러니 마지막 결정은 당신의 몫입니다.’
동오와 나눈 대화들은 뱅글뱅글 돌다가 가라앉기도 했지만 북편에서 바람이 불 때는 다시금 떠올랐다. 지평선 너머에서 말을 탄 사내가 나타나는 환영이 저를 덮치기도 했다. 묻고 싶은 말이 거품처럼 솟아오르다가도 툭, 툭 터져 사라졌다.
“경우야. 너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손빠르게 털을 골라내던 아이는 천진하게 웃으며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다 대답했다. 일곱 살 남짓한 경우의 웃음소리는 군데군데 빠진 치아 사이로 새서 실없는 소리를 냈다. 또래 아이들 중 어느 소녀의 이름을 댔다. 노래를 잘 하는 아이였다. 송아지를 타거나 실을 짤 때 항상 그 아이가 선창을 했고 다른 사람들이 뒤를 따랐다. 목청 좋고 아이답지 않게 시원스런 면이 있어 눈에 띄던 소녀. 명헌이 알기로 그 애를 마음에 둔 소년들이 몇명 더 있었다. 소녀가 망아지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찬찬히 걸어가면 아이들이 그 뒤를 따라가며 후창을 했다. 사랑스러운 광경이었다.
“그 애와 결혼하고 싶어?”
“나중에 크면 이우한테 청혼할 거에요. 금색 산양털을 구해가지고 꼭 청혼할 거에요!”
동하에서도 그랬듯 이곳 아이들에게도 나름의 전설이 있었다. 북쪽 산맥에 산다는 절벽위의 황금색 털을 가진 산양이 그것이다. 구름을 먹고 사는 그 산양의 털은 불을 붙여도 타지 않는다고 했다. 그네들이 질리도록 들어왔을 이야기에 집중하는 이방인이 반가웠던지 아이들은 신나서 명헌을 붙잡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이방인의 눈에는 망아지를 탄 소녀가 초원의 여신이었으며 그를 따르는 아이들이 전설 속의 정령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만약에…..만약에 이우가 싫다고 하면?”
흥얼흥얼 콧노래가 끊겼다. 그 사이에 집 짓고 살림까지 차렸던 것인지 단꿈이 무너진 표정으로 울상이 된다. 턱밑이 주름지더니 눈물이 그렁그렁한다.
“몰라요……”
어린것의 짧은 식견에선 황금 산양털과 견줄 다른 귀한 것은 없었다. 황금 산양털이 싫다 하면 이것을 갖다 주지요, 할 만큼 황금과 겨룰만한 재보가 아직 그의 작은 머리통에는 없었던 것이다. 혹은 단지, 일곱 살 난 사내아이에겐 일곱 살 난 여자아이의 마음이 전설과 맞바꿀 만큼 진귀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 단순한 진리였을지도 모른다. 풀숲에서 살을 맞대던 환희에 가득찬 어린 육체들처럼.
늑대 가죽도 그러했을까? 문득 명헌은 신랑이 제게 보내온 털가죽의 무게가 떠올랐다. 황금 산양털 대신 늑대 가죽을 보냈을까, 그도 이 혼인을 심각하게 생각할까, 내가 떠나지 않았으면, 거절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 귀한 검은 늑대를 잡을 생각을 했을까. 가죽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어디 하나 상해서 떨어진 곳도 없었다. 화살 하나로 숨통을 끊은 것이다. 그 잔혹함은 나를 위한 것이었을까. 명헌은 경우의 울먹이는 소리에 장난이었노라 어르며 작은 등을 도닥였다.
신기하게도 자신의 무력한 처지에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힘을 잃었어도 쇠심줄같은 이성은 여전히 명헌을 붙들고 있던 덕이었다. 다행인 일이었다.
슬며시 불어오는 찬 바람에 아이를 일으켜 하던 일을 정리하고 처소로 돌아갔다. 모든 걸 잊고자 하는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닥쳐올 진실을 외면하고자, 그러나 하루빨리 진실로 가슴이 헤집어지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달은 무섭게 기울었다. 고국의 달보다 차고 기우는 기세가 무섭다는 착각마저 일었다. 왜 나하고 혼인하겠다 했는지. 며칠간 부글부글 넘쳐흐르던 생각의 거품이 걷히고 나자 남은 것은 저 한 문장 뿐. 모든 의문이 저것으로 귀결되었다. 누님의 행방이며 혹은 생사여부, 아울러 부모의 안전과 전쟁보다도 앞선 물음이었다. 다른 모든 것보다 얼굴 모르는 신랑의 맹세의 이유가 가장 의문이었기 때문에. 그렇기에 명헌은 초탈해진 마음으로 보름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대답은 생각치 못하게 다가왔다.
“간! 간께서 돌아오셨다! 돌아오셨다아-”
한밤중이었다. 깡-깡- 하고 철쇠 두드리는 소리가 모두를 깨웠다. 명헌은 꿈을 헤메는 심정으로 처소를 뛰쳐나와 도착한 무리와 마주했다. 땀에 흠뻑 젖은 말들이 위협적으로 콧김을 뿜었다. 멈추기가 무섭게 장정들이 뛰어내려 부상자들을 들쳐업고 천막으로 내달렸다. 그틈에 어느 여자 하나가 끼어 있는 것은 우연히 명헌의 눈에 들어왔다. 장정 덩치의 반밖에 안 되는 가냘픈 몸체가 어느 사내의 어깨에 들쳐져 사람들의 손에 내려졌던 것이다. 포로가 아님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깻죽지가 온통 피로 젖은 그녀를 들쳐맨 남자의 등허리께로 축 떨어진 손이 창백했다.
“누구에요?”
흥분한 말들을 달래던 누군가 그것을 보고 흘린 말이었다. 명헌은 자연스레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그 창백한 손을 보았다. 축 늘어져 힘없이 흔들리는 고개를 사내가 단단히 받치고 안아들었다. 소란 속에서 비명이 찢어졌다.
“누님!”
머리가 인식하기도 전에 튀어나간 말이었다. 창백한 손이 불길하게 눈길을 끌었을 때부터,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은 신랑이 아니라 저 창백한 손을 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명헌은 자리에 눕혀진 여자의 머리카락을 걷어 얼굴을 확인하고 목구멍이 막혀 끅, 끅 숨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헐떡이는 명헌을 잡아챈 사람은 동오였다.
“진정하세요! 살아있습니다, 누님께선 살아있습니다!”
명헌을 진정시킨것은-진정이라기보단 절망에서 막 빠져나온 안도의 헐떡임 같았지만, 동오의 외침보다 여인의 눈꺼풀이 파르르 경련하는 것을 본 까닭이었다. 명헌은 누나의 가슴팍에 귀를 대고 온 신경을 쏟았다. 사방 소란 속에서 미약하게나마 맥 뛰는 진동이 들렸다. 명헌이 실낱같이 숨을 몰아쉬었다. 약재며 붕대를 한가득 안고 달려온 사람들이 부상자들의 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명헌도 천막 밖으로 쫒겨났다. 손에 피가 조금 번져 있었다. 저도 모르게 옷을 부여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따라 나온 동오가 명헌의 안색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의 생각으론 명헌이 당장이라도 난리통 속 어딘가 있을 간을 찾아 칼이라도 휘두르지 않을까 싶어 내심 속내를 살피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동하에 있어야 할 혈육이 피칠갑이 된 채 업혀와 숨을 꼴깍이고 있는 연유를 묻지 않는 명헌은 동오로서는 더 혼란이었다. 방금까지 놀란 숨을 헐떡이던 명헌은 어느새 차분하게 허공을 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지가 총명하고 속내를 알 수 없을 만큼 차분하다고 평했다. 타지에 홀로 떨어진 처지로 지금껏 누구에게 불안을 내비친 적도 없다고. 침묵을 참지 못하고 동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간에게 모셔다드릴까요?”
지펴놓은 횃불이 밤바람에 일렁거렸다. 붉은 빛이 명헌의 한쪽 얼굴을 비췄다.
“누님을 업어온 남자에게 데려다주십시오.”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지만 동오는 대꾸없이 명헌을 안내하였다.
성구는 출정한 자들 중에 가장 키가 컸다. 월등한 장신이 눈에 띄어서 그가 간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었던 명헌은 저를 향해 무릎을 꿇는 성구를 보고 약간의 허탈함을 느꼈다. 이자는 아니구나. 그렇다면 누구지? 캄캄한 밤이었고 같은 무장을 한 장정들은 하나같이 덩치가 컸기 때문에 그 많은 자들 중에 간이 누구인지 짧은 새 알아보기란 힘들었다.
“설명하시오.”
고압적인 태도였다. 지금껏 명헌이 다소 지나치게 낮은 자세를 취했다는 건 모두 인정하는 바였다. 초보적인 회화를 따라하면서도 경어체를 붙여 썼다. 그 태도에 감동하는 이도 있었고 의아해하는 이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간 명헌이 취해온 태도가 집단에 융화되는데 적지 않은 공을 세운 것은 맞았다. 성구는 명헌에게 자리를 권했다. 구체적인 질문이 아니었음에도 의아한 기색 없이 순순히 말문을 트는 것을 보고 명헌은 모든 것의 해답은 결국 약혼자만이 줄 수 있으리라, 그런 확신이 들었다.
“지의 부친께서…”
명헌이 말을 가로막는다.
“내 아버지가 아키타의 카, 그리고 전대 간과 지금의 내 약혼자. 이 셋과 이전에 내통했다는 건 알고 있소. 간이 카 앞에서 나와의 혼인을 맹세했다는 것도 알고 있소. 이 모든 게 나의 신변을 위해서 오래전부터 계획되었다는 것도 들었고.”
“그렇다면 일의 내막을 설명해야겠군요.”
명헌은 가늘게 숨을 들이켰다.
“동하는 애초에 우리와 전쟁을 할 계획이었습니다. 지의 부친께선 예전부터 아키타와 비밀리에 교류를 하고 있었지요. 주로 저희 부족과 교류를 많이 하셨습니다. 우리는 태호산 아랫쪽 부락민들로 위장해 동하의 동향을 전해 들었으며 부친의 밀수를 도왔습니다. 우리 모두 전쟁만은 막고자 하는 공통의 목표가 있었으니까요.”
“밀수?”
“주로 양가죽과 산양모 같은 것들…..부친께선 궁의 눈을 피하셔야 했기 때문에 최소한의 이윤만 남기고 다른 국가로의 무역로를 찾아 주셨습니다. 그러던 와중 밀수가 발각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의 부친께선 전쟁만은 막으려고 하셨기에 그동안의….”
“밀수꾼 딱지를 뒤집어쓰고 밀정짓은 비밀에 부쳤다. 그건가?”
제 아버지가 청렴한 귀족이니, 그래서 중앙세력의 눈 밖에 났다느니 그런 말들은 애초에 믿은 적이 없었다. 명헌의 집안은 딸린 식솔들이 적기도 했지만 위신이 떨어진, 껍데기만 남은 귀족가문 치고는 이상하게 풍족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이윤이라고는 했으나 아키타 북부에서 나는 산양모의 무역로를 독점하다시피 했다면 가족 네 식구와 하인 몇 명, 작은 저택을 건사하기엔 분에 넘치는 금액이었을 것이다. 누님이 시집가는데 큰 무리가 없었던 것도 이해가 갔다. 생활수준에 있어서는 선대가 남겨놓은 땅의 소작료나 세금이라는 말로 납득했으나 누님의 혼인지참금은 그 땅마저 팔아야 했을 규모였기 때문이다. 그 때 처음으로 아버지의 부정을 확신했었다. 그러나 명헌은 땅을 다소 팔았노라, 하는 부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명헌이 그 부정을 외면하고자 한 건 아니었다. 그저 명헌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동하에서 청렴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신의 이름조차 허울뿐인 그의 나라에서 티끌 하나 없는 고결함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
“아마도 동하에선 부친께 밀수꾼 행세를 계속하면서 아키타의 정보를 빼오라 시켰겠지요. 본의 아니게 이중 첩자가 되어버린 셈입니다. 그때 부친께서 선대 간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저희 부족은 거륜강과 가까워 전쟁이 나면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분도 전쟁만은 막고 싶으셨겠지요. 그렇게 그동안의 정보를 모아 우리의 카에게 전달하셨습니다. 하지만 카께서는 아키타 열일곱 부족의 제왕이십니다. 그분이 전쟁을 두려워하실리 없지요. 동하를 치려는 찰나…..지금의 간. 당신의 약혼자가 나서서 당신과 혼인하겠다고 제안하셨습니다.”
띄엄띄엄, 그러나 감당 못할 망상이자 추측이라고 불문에 부쳤던 예측들. 명헌의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파도를 치며 신경을 갉아먹던 상상들이 하나하나 짝을 맞춰 떨어지고 있었다.
“궁의 공주도 아니고 세력가의 자식도 아닌 나와 결혼해서 전쟁이 막아지리란 보장이 없지 않소.”
“당신은 아키타를 모르는군요. 그렇기에 카께서 먼저 서신을 보낸 것입니다. 초원의 패왕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분과의 약속을 어긴다는 것은 척하를 넘어선 모든 땅을 불모로 만들겠다는 또다른 약속입니다.”
명헌은 한참을 말없이 앉아 그동안의 일을 되뇌었다. 멍청하기 그지없다. 아둔하고 또 아둔하고, 눈 귀 멀고 팔다리 잘린 병신 모양을 하고 있었구나. 의심하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구나. 명헌은 피투성이가 된 채 업혀온 누님을 생각했다. 아마도 모든 일이 발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둔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동하. 고결한 고국도 초원의 힘을 몰랐다. 고결한 그들은 야만을 몰랐다. 명헌은 자신의 고국이 일을 그르친 것을 직감했다. 내버려두면 동하가 먼저 군사를 일으킬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떠나온 순간부터 일은 잘못되었고, 내 아버지는 누님이라도 대피시키려 했겠군요. 당신들은 누님을 빼오려고 척하 상류까지 돌아서 국경으로 간 것이고.”
“예.”
“누님에게 먼저 가보겠습니다.”
“아, 아직….”
“누님께서도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실 터. 내 누님은 그 상황에 당신들의 발목을 잡을 바에야 차라리 자결하셨을 분입니다. 내게 할 말이 있어 그 몸으로 여기까지 오셨겠지요. 지금쯤 깨어나셨을 겁니다.”
말대로 명헌의 누나, 명효는 깨어나 있었다.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파리한 안색이었으나 눈만은 번득였다.
“명헌아,“
명효는 남은 힘으로 애써 눈짓을 했다. 성구가 꾸러미를 건넸다. 명헌은 그것을 받아들고 한 팔로는 급히 명효를 부축했다. 쉭 쉭 쉰소리를 내는 작은 몸이 가냘팠지만 무서운 힘으로 명헌의 팔을 붙잡은 명효는 뚜렷한 음성으로 명헌에게 속삭였고, 다시 의식을 잃었다.
”……..누님은 괜찮으실 겁니다. 늘 그래왔던 분이십니다.“
예복을 입고 당당히 혼례 가마에 오르던 명효의 눈빛을 본 명헌은 생각했었다. 금실 예복 따위 없었어도 그러했을 거라고.
땅을 팔아 마련했다는 분에 넘치는 혼수따위 없었어도 명효는 언제나 도도하고 오만했던 사람이었다. 명헌은 그녀의 무서운 생명력을 믿어 왔다. 명헌은 꾸러미를 풀어 안을 확인하고 자신이 직감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이제 내 약혼자를 만나러 가야겠습니다.”
마침내.
그 얼굴 모르는 신랑. 약혼자가 이 안에 있다. 명헌은 천막 주변의 횃불에 흙을 부어 차례차례 꺼트렸다. 원을 그리며 한 발자국씩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문 앞에 섰다. 그믐에 가까워진 달은 미욱한 빛을 냈다. 천막을 젖히자 암흑이었다.
“뒤돌아 있으세요.”
어둠 속에서 거대한 체구의 누군가가 움직이려다 명헌의 말에 몸을 굳혔다. 침대 한쪽에 주저앉았는지 검은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조각조각 상상해온 그가 바로 네 발자국 너머에 있다. 자신의 운명을 틀어쥔 사내, 오늘 이후의 삶을 결정할 인물, 그러나 명헌은 동오의 말이 줄곧 걸려왔던 것이다. 마지막 결정은 당신의 몫. 이 상황에서 주도권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었지만 명헌은 제게 쥐어진 몫을 믿어 보기로 했다. 명헌은 사내의 반대편에 등을 마주보고 걸터앉았다.
“모든 내막을 알았으나 그래도 이해가지 않는 것이 딱 하나 남았습니다. 왜 나와 혼인하겠다고 했는지.”
그림자는 대답 없이 듣고만 있다.
“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말을 고르는 것이리라.
어느덧 새벽이 다가와 어둠이 검푸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사람의 형태를 갖췄을 것이다. 언뜻 봤었음에도 거구의 장정이다. 명헌은 그를 등지고 앉은 채 충동에 날뛰기 시작하는 스스로를 억눌렀다. 그림자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몇 년 전 내 아버지를 따라 멀리 길을 떠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이 아버지가 말로만 전해주던 동하라는 건 도착해서야 알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어떤 어른을 만났는데,”
명헌의 머릿속에 어떤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그 분 곁에 당신이 계셨지요.”
소스라치게 놀란 명헌이 뒤를 돌아본다. 검푸름 속에 남자의 육중한 등이 웅크려 있다. 그 위로 어떤 사내아이의 깡마른 몸집이 어른어른 비친다. 억세고 말랐던 몸, 말 못하는 시종으로 데려왔던 힘이 센 사내아이, 명헌이 놀란 것은 변해버린 그의 몸집 뿐만 아니다. 그 목소리, 벙어리라 손짓 발짓하여 의사소통을 했던 사내아이의 목소리 때문이다.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으나 명헌은 목소리로 그를 알아보았다.
“최대한 모두를 속일 필요가 있었으니 아버지께서도 나를 벙어리 시종이라 하셨고 나또한…..동하 말을 모르니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손짓 발짓을 해가며 다니는데 당신이 내게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너 글은 아느냐, 하고….”
“…..기억이,”
“나는 동하 말을 몰랐으니 당황했지요. 이것도 나중 아버지께 물어 알았습니다. 허둥거리는데 당신은 내가 귀가 먼 줄 알고 글을 써서 건넸습니다. 아키타와 동하 문자가 겹치는 곳이 많다는걸 그때 처음 알았는데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다행히 하인이 글눈 어두운 건 당신도 의심하지 않더군요.”
그때 남자가 손가락 둘을 펴든다. 까딱까딱 손짓하더니 주먹을 쥐어 어깨죽지를 툭툭 쳤다. 수화를 하는 모양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명헌은 아득한 기억 속에서 제 목소리를 듣는다.
‘나. 너, 가다, 돌아가다…전장에서 쓰는 신호라 나도 아는 것이 별로 없어 아쉽네. 이런걸 가르치면 쓸모있을 텐데…..하지만 네 주인어른도 너를 거두신 걸 보니 좋으신 분이다. 여기선 불구자를 내쫓기 바쁘니.’
기억 속의 소년은 저를 쳐다보는 것도 같다. 희뿌연 몸체가 저를 따라하는 것도 같다. 주먹으로 어깨를 툭툭 치면서, 종이에 글씨를 따라 덧그리며,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행동을 따라하고 입술을 따라하고 손짓을 따라했다.
‘나는 말 배우는게 좋다. 아버지 서재에 책이 많아서 다행이지. 너 같은 이들이 할 수 있는 말도 있었으면 좋겠다. 참, 이것도 배운 거야. 어느 나라 말인지는 모르겠다만. 나. 땅, 하늘, 너, 강, 우리.’
“당신이 그때 아키타 말을 했을 땐 정말로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동오가 당신이 아키타 말을 유창하게 한다 전했을땐 그다지 놀라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허리를 편다. 굽어져 있던 등이 바로서자 방 안이 가득 차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왜 혼인하겠다고 했는지 물었지요. 나는 당신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에게서 모든 사정을 들었습니다. 당신과 혼인하겠다 맹세한 이유는,”
마지막 결정권은 명헌에게 있었으나 그 옥새가 든 상자를 열 열쇠는 사내에게 있다. 동오의 말 이후로 기다려온 순간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명헌의 손끝이 싸늘하게 식어왔다. 고개를 돌렸던 것도 잠시, 명헌은 사내의 등을 바라보고 기다리고 있다. 사내가 열쇠를 명헌에게 쥐어주기를.
“첫째는 우리 부족을 지켜야 할 의무가 내게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고.”
요란한 침묵이 흘렀다. 고국의 언어였다. 얼마간 명헌의 속에서 잊혀졌던 언어가 귓가를 세차게 파고들었다. 두 사람의 심장이 세차게 뛴다.
“둘째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장정의 입에서 가녀린 한숨 비슷한 것이 새어져 나왔다. 너무나 연약한 숨이 그가 괴물도, 한 손에 늑대를 찢어죽이는 괴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줬다. 남자가 명헌에게 준 것은 보잘것없이 단순한 대답이다. 사실 여태껏 명헌이 그의 대답을 아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디선가 그가 나를 봤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의 편지에서, 늑대 가죽에서, 그리고 훨씬 이전에 내밀어진 꽃신, 곡차, 저를 위해 만들어진 자리와 그들이 선뜻 고삐를 쥐어줬던 숫말까지 모든 것들이. 어쩌면 이것이 사랑이 아닐까, 하고 때때로 허물어지는 명헌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왔던 우스운 생각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확언하고 있다. 사랑이라고.
또한 아비의 부정을 생각한다. 누님의 상처와 몇날을 달려 가져온 꾸러미 속 등불과 피 묻은 칼도 생각한다. 명헌은 이제야 확신을 얻었다. 모든 것이 사랑이었노라고.
“미안했습니다. 의심을 풀어주고자 노력했는데, 당신 곁에 있어줄 수가 없어서….사람들에게 당신을 잘 부탁한다 당부한 게 최선이었습니다.”
“누님을 살려왔으니 그걸로 되었어요.”
“……예.”
“이곳에서는 혼인이 당사자 마음이더군요. 난 그래서 오랫동안 와닿지 않았습니다. 이곳의 사랑이라는 말이….이렇게 명료할 수 있는지를…. 눈으로 보면서도 믿지 못했어요. 이젠 알았으니, 마지막 결정은 내가 하겠습니다.”
명헌은 인장이 새겨진 칼을 남자의 옆으로 툭 던졌다. 남자는 칼을 받아들고 괴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 아마 남자도 예상했을 것이다.
“내 부모는 누님을 대피시키고 자결했습니다. 그 증거를 누님이 가져왔어요.”
명헌은 등불에 불을 켠다. 사내의 등과 뒷목, 짧게 깎은 머리칼이 환하게 드러났다.
“나는 내 부모를 죽게 만든 그들에게 복수하고, 시신을 모셔오고 싶습니다. 나의 부탁을 들어준다면 당신의 얼굴을 보고 맹세하도록 해 주세요. 나는 영혼을 다 바쳐 당신의 아내가 되겠습니다, 또한 동하의 신전 지하의 모든 보화와 재보를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보화는 필요없습니다.”
“거절하겠다면, 그 칼로 내 눈을 뽑아주세요. 모든 것을 불언에 부치겠습니다.”
“나는 보화도, 재보도, 당신의 영혼도 원치 않습니다.”
“무엇을 원합니까.”
“의심도 고통도 없는….당신의 마음을 원합니다.”
명헌은 등불을 들고 남자에게 향한다. 삐쭉 치켜올라간 눈매는 그대로일까, 투박한 광대뼈와 웃을 때 시원스레 벌어지던 입은. 아키타 말을 듣고 놀라 올라가던 눈썹은 그대로일까. 놀란 사내의 얼굴이 불빛에 드리워졌다. 야만의 얼굴이 드러난다. 기억 속 그대로였으나 뼈대가 자란 탓에 골격이 두꺼워졌다. 그러나 놀란 얼굴의 표정은 여지없이 똑같았다. 명헌은 등불을 든 채 남자 앞에 무릎꿇는다.
“현철, 당신은 이미 내 의심과 고통을 거둬 갔어요.”
명헌은 결정을 내렸다. 이미 결정은 내려진 것이었을까? 아니다. 꽃신이, 곡차가, 황금 산양과 어린 것의 사랑이, 늑대 가죽이, 갈색 숫말이 내려준 결정이다. 열쇠는 그들이 가지고 있었으며 그저 쥐어준 것이 이 사내, 오래전 말 못하던 작은 소년이었다.
“내, 이름을….”
“나와 혼인해 주겠나요, 현철?”
야만이 마음을 찾아 그 앞에 무릎꿇었을 때, 그 자리엔 그저 초원만이 있었다.
고요하고 물이 흐르는 초원이.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