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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비효과

 | @ppyong_eee

*

  우리들의 마지막 인터하이는 어이없게도 일찍 끝나버렸다. 

 

  남은 경기는 내내 관전이었다. 뒤숭숭한 마음에 다들 타 학교 경기에 집중하지 못했고, 심지어 감독과 코치진도 마찬가지였지만, 오직 명헌만은 아직 자신의 인터하이를 끝내지 않은 것처럼 남은 모든 경기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간간이 매니저나 부주장 성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흔들림 없는 표정의 명헌은 내내 코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명헌의 뒤통수를 내내 쳐다봐도 눈이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명헌은 산왕과 이미 몇 번 겨뤄본 강팀들의 경기는 물론이고, 인터하이에 몇 번 올라온 적 없거나 처음인 팀의 경기까지 죄다 챙겨보았다. 주장으로서의 책임감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패배를 딛고 일어서는 명헌만의 방식이었다. 명헌을 가장 오랫동안 지켜본 현철의 해석이었다.

 

  명헌은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간간이 좋은 플레이였다 또는 이 부분은 아쉽다 하며 혼잣말처럼 코멘트를 붙였다. 그렇다고 내내 딱딱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레프리 타임인데도 명헌이 노트에 뭔가를 집중해서 적는 것 같아 현철의 시선이 노트로 향했다. 힐끗 본 노트 귀퉁이에는 웬 물고기들을 줄줄이 그려놨었다. 하. 현철이 어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젓자 명헌은 뭐가 문제나는 듯 뿅, 했다. 질책인가. 하여튼 한 글자로도 많은 걸 표현하는 녀석이었다. 중간중간 잔소리도 했다. 대체로는 우성에게 향하는 말이었다.

 

  "윈터컵이 됐든, 다음 인터하이가 됐든, 언젠가 만나게 될 팀들이다. 딴짓들 하지 말고 잘 봐두도록 해. 비디오보다 현장에서 직접 보고 느끼는 게 더 크니까 뿅."

 

  사실 우성뿐만 아니라 현철도, 다른 주전과 벤치 멤버 모두가 입 밖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같은 생각이었다. 더 뛰고 싶다, 내가, 우리가, 산왕이 저 자리에 있었더라면... 관중석의 시야는 낯설었고 녹색 페인트가 칠해진 바닥에는 여전히 은근한 분노가 일렁였다. 근처를 지나가는 이들은 모두 산왕공고를 힐끗거렸다. 왕좌에서 끌어내려진 왕자는 아무래도 이목을 끌기 마련이었다. 오직 명헌만이 고요했다. 말 그대로 깊은 물처럼 혹은 그 자리에 굳어버린 것처럼. 명헌은 코트가 전부 똑바로 내려다보이는 자리를 항상 지켰다. 그게 주장의 자리라는 것일까. 명헌은 북산의 다음 경기를 바라보던 냉정한 눈으로 다음 경기도, 그 다음 경기도, 결승까지도 모두 지켜보았다. 애초에 산왕공고의 버스는 결승 경기가 있는 날에 오기로 되어 있었다.

 

  현철은 언젠가 명헌에게 네가 모든 것을 책임질 필요는 없다는 말을 넌지시 한 적도 있었다. 어쩌다 감독의 신임을 얻어 주장이 됐다는 이유로 산왕 농구부의 행보 하나하나에 책임을 지려 하는 것은 다소 과하다고 생각했다. 주장이라고 해봐야 자신과 같은 고등학생, 그때만 해도 2학년이었으니 더더욱. 그래도 명헌은 처음 주장을 맡은 날부터 지금까지 자기 방식을 고수해왔다. 현철은 더 이상 명헌의 방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하거나 의문을 품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애초에 자신은 감독이 제안하고 명헌이 부탁해온 부주장 자리조차 거절했던 사람이고, 이명헌은 인터하이 개막일에 선수 일동을 대표해 선서까지 해내는 인간이기에. 그러니 이명헌을 완벽하게 이해하기란 평생 불가능하다... 그런 결론에 다다르고 나서야 오히려 명헌에 대해 좀 더 깊게 알게 된 것 같았다.

 

  현철이 멍하게 명헌에 대한 상념에 잠겨있는 동안, 산왕과 한 번 붙어본 적도, 심지어는 들어본 적조차도 없는 학교가 올해 인터하이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학교로 돌아왔을 때는 아직 한여름이었지만 곧장 윈터컵 준비로 바빴다. 명헌의 시간, 산왕의 시간이 이제서야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방학을 맞아 다들 집으로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농구부원들은 매일 학교에서 연습과 훈련을 반복했다. 학교에 있는 대형 선풍기를 전부 가져와 틀어도 체육관을 가득 채운 젊은 학생들의 숨과 땀방울을 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장마와 무더위가 번갈아 오고, 선수뿐만 아니라 코치들의 몸까지도 눅눅해져가던 쯤이었다.

 

  산왕공고 농구부 

  여름 합숙훈련 공지

 

  매니저 둘이서 커다란 전지를 들고와 게시판에 붙였다. 신입 매니저가 또박또박한 필체로 채워놓은 안내문에는 합숙훈련 일정과 장소, 준비물, 수칙 등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전지에서는 눅눅하고 비린 매직 냄새가 아직도 배어있었다. 

 

  합숙훈련. 현철은 작년의 하계 합숙훈련을 떠올렸다. 산왕의 합숙훈련은 동계 하계 가릴 것 없이 언제나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산골짜기의 합숙소였다. 작년 인터하이에서는, 초반에는 교체 멤버들을 적절히 투입할 수 있었다. 다만 제법 강호인 팀들을 연달아 만난 덕에 주전들이 거의 그대로 뛰었고, 쉴 수 있는 경기가 없었다. 이어진 하계 합숙훈련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훈련 강도도 평소보다 훨씬 강했을 뿐더러 좀처럼 돌아오지 않은 체력이 받쳐주지 않아, 낙수를 제외한 모든 주전 멤버가 도망쳤었다. 근처 호수에서 수영도 하고 구멍가게에서 아이스크림도 사먹으며 내내 쉬었지만 산골짜기 동네라 결국 해가 지기 전 합숙소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그래도 이번은 왠지 설레는 합숙이었다. 방학에도 매일 체력단련과 연습이 있어 합숙이 설레는 것은 아니었지만, 뷔페식 식사를 제공한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단순히 학교를 떠난다는 것 자체도. 이번에는 지옥 같은 스케줄도 없었다. 군데군데 휴식 시간이 들어있는 것은 감독의 배려였다. 

 

  매니저들이 전지 한 장을 더 가져와 옆에 붙였다. 명헌을 제외한 모두가 2인 1실로 일주일 동안 방을 함께 쓸 짝이 지어져있었다. 학교 기숙사는 최근에 신축하여 4인 1실까지 있었지만 그마저도 일부 3학년만 사용하는 방이었고, 보통은 6인 1실, 심하면 8인 1실이나 10인 1실까지도 사용하는 좁아터진 방이었다. 농구부원들이 자석 앞 철가루처럼 게시판 앞으로 모여들었다.

 

  "좋겠다 이명헌."

  "낙수야, 같은 방이네. 잘 부탁한다."

  "주장은 독실이구나."

  "독방은 형벌이기도 한데 뿅."

  "그럼 나랑 바꿔."

  "싫어 뿅!"

 

  우성은 버스에서부터 형들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엄청나게 칭얼거렸지만, 현철이 단호하게 등을 떠밀었다. 형들이랑 좀 떨어져 있어야 친구들이랑 친해질 기회가 생기지.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가는 것은 꽤나 고역이었다. 아직 제대로 닦이지 않은 길인데다가, 며칠 전까지 이어지던 장마로 나뭇가지나 돌멩이들이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계속 덜컹대는 버스 안에서 명헌은 제대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어느새 안색이 파리해진 명헌은 스르륵 몸을 틀어 창가에 이마를 기댔다. 식은땀이 더 차게 식었다. 이렇게 멀미가 심하게 올라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명헌은 차가 흔들릴 때마다 치밀어오르는 욕지기를 겨우 삼켜내고 있었다. 복도 건너편 자리에 앉은 낙수가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물병을 내밀었지만 물 냄새에 오히려 더 토기가 강해지는 것 같아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저었다. 멀미가 심한가봐, 낙수가 다른 애들한테도 얘기를 전한 모양이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더 이상 억누르기 어려워졌을 때쯤 버스가 멈춰섰다. 후텁지근한 여름의 산이 나무 냄새와 습기를 위협적으로 뿜어대고 있었다.

 

 

*

  합숙훈련이라는 이름 아래, 최초로 사실상 휴양이나 다름 없는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사실 우승 후의 포상으로 준비했던 합숙훈련이지만, 이번은 처음 패배를 경험한 아이들을 위한 위로의 의미가 되었다. 작년 하계 훈련에서 도망쳤던 주전들은 너희 덕분이라며 농구부원들의 감사인사도 받았다. 그렇다고 느슨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연습이나 훈련 강도도 평소와 비슷한 수준으로 이어졌다. 학교보다 좀 더 쾌적한 환경 속에서, 각자 들뜬 마음으로 밧슈 끈을 고쳐맸다. 기초체력훈련, 농구 기본기, 패스와 슈팅 연습, 더 좋은 팀이 되기 위한 일련의 과정,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휴식.

 

  "형들!" 

 

  체육관 곳곳에 놓인 의자 몇 개를 끌어다 앉은 3학년들에게 우성이 반갑게 달려왔다. 쟤는 친구들이랑 어울리라니까 왜. 성구가 안타까워하기에 동오가 팔꿈치를 툭 쳤다. 음? 성구가 다시 고개를 들자 우성 뒤로 몇 명이 함께 다가오는 게 보였다. 우성과 달리 다소 쭈뼛거리는 모양새가 아무래도 선배들이라고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우성은 어디서 공을 주워와서는, 아마도 이제야 조금 친해졌을 친구들과 벌써 팀을 꾸린 것 같았다.

 

  "저희랑 족구 한 판, 어? 명헌이 형은요?" 

 

  우성은 현철에게 물었지만 현철뿐만 아니라 다들 모른다는 얼굴로 서로만 쳐다봤다. 명헌에 대해 입을 연 것은 이번에도 낙수였다.

 

  "방에서 쉰대."

 

  아쉬워하는 얼굴이 몇몇 있었지만 명헌이 빠진 덕분에 2학년들과 머릿수도 맞고 실력도 비등비등했다. 여태 쉬는 시간마다 족구만 했던 형들이 많이 봐준 덕분이기도 했다. 우성은 좋은 농구선수였으나 좋은 족구선수는 못 됐다. 기껏 힘들게 동급생들과 친해졌는데 족구를 계기로 더 멀어질 것 같다는 게 동오의 평가였다. 우성의 개발질에 열받는 사람 목록에서는 유일한 3학년으로 현철이 끼어있었다. 오른쪽 바깥을 맡은 현철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우성의 공을 몇 번이고 주워오느라 슬슬 열이 받았다. 현철은 체육관 벽을 맞고 한참 멀리 굴러간 공을 향해 슬렁슬렁 뛰어갔다. 현철의 체스트 패스는, 농구공은 아니었지만 정확하고 빠르게 낙수의 손에  꽂혔다. 현철은 그렇게 공부터 먼저 보내놓고 숨을 고르며 천천히 걸었다.

 

  멀미가 심한가봐. 방에서 쉰대. 모두 낙수에게만 전달 받은 사항이었다. 그러고보니 오늘 이명헌 목소리를 거의 못 들었네.

 

   주장은 팀의 눈이기도 했으나 귀이자 입이었다. 감독의 지시를 전달하는 것도, 코트에서 선수들을 컨트롤하는 것도, 애들을 모으거나 정렬시키는 것도 모두 주장의 입이 하는 일이었다. 명헌의 입은 그 외에도 많은 일을 했었다. 버스에서도 조잘조잘 떠들고 가끔 희한한 말로 모두를 웃게 했을 명헌의 입인데 오늘은 내내 굳게 다물려 있었던가. 원래 그렇게 멀미가 심했나, 아닌데. 석식도 깨작거렸지. 거기까지 떠올랐을 쯤 현철은 걸음을 돌렸다.

 

  "형, 어디 가요! 이제 막 감 잡아가고 있는데!"

  "너 임마. 네가 4번 타자야? 내가 네 볼보이냐?"

 

  현철은 자신을 붙잡으러 나온 우성에게 헤드락을 한 번 걸어주고 체육관을 빠져나왔다. 현철의 팔에 탭을 치며 악, 아악! 소리 질러대던 우성은 제 무리로 돌아가 구해주지도 않냐며 투정을 부렸다. 작은 소란 끝에 재개된 족구 게임을 뒤로하고 코너를 돌면 자판기가 미미한 기계음을 내며 서있었다. 주머니에 동전 하나가 있었는데. 마침 사이다 한 캔 값이 딱 맞아서 하나를 뽑았다. 텅,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캔이 떨어졌다. 잘그락거리는 거스름돈 없이 깔끔했다. 현철은 곧장 캔을 까려다 주머니에 넣고는 걸음을 옮겼다.

 

  현철이 선 곳은 명헌의 방 앞이었다. 아마도 잠겨있을 것이다. 그래서 문이 덜컥이는 소리에 이명헌이 깬다면, 방 호수를 착각했다고 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문 손잡이는 부드럽게 돌아갔다. 명헌의 방 안은 다른 방보다 조금 좁았고, 어두컴컴했고, 잠든 사람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신발을 보면 명헌은 분명 방에 있는데 인기척이 없었다.

 

  요즘 몸이 안 좋은가... 그런 거 치곤 잘 자네. 

 

  명헌은 언제나 지금처럼 단단해보였다. 어쩌면 조금 지친 것일지도. 그러게 혼자 모든 책임을 다 지려 하지 말라고도 했었는데. 현철은 좀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잠시 명헌을 내려다보았다. 남들은 모르는 현철의 오랜 습관이었다.

 

  단지 신기해서 그랬다. 잠들기 전까지는 작은 불빛 하나에도 힘들어 하다가, 한번 잠들고 나면 미동도 없이 자는 명헌이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잠든 명헌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일은 없었다. 모두가 잠든 밤, 먼발치에서 힐끗 보고 누울 뿐. 하지만 현철의 걸음은 매일 밤 조금씩 더 가까워졌다. 잠든 명헌은 금방이라도 눈을 떠 '뿅' 하며 장난을 칠 것 같았지만 여태까지 단 한 번도 그러는 일이 없었다.

 

  현철은 주머니 안에서 허벅지에 부딪히던 캔을 협탁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방금 자판기에서 뽑은 캔인데도 그새 조금 미지근해졌다. 

 

  아직 야심한 시각은 아니지만 굳이 주변을 둘러볼 필요는 없었다. 

 

  주장은 독실이니까.

 

  현철은 허리를 숙여 명헌의 이마에 살짝 입맞췄다. 처음이었고, 어쩌면 마지막일까. 오늘은 명헌이 잠에서 깨어 뺨을 갈긴대도 받아줄 각오가 되었다. 명헌은 평소처럼 잠잠했지만 현철은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왔다. 입술을 벅벅 문질러도 방금 스친 살결의 감각이 코끝에 닿던 명헌의 비누 냄새와 함께 자꾸만 살아났다. 우성이 연속 다섯 번 째로 홈런을 찰 때보다 심장이 더 쿵쾅거렸다.

 

 

*

  보지 말 걸. 눈 계속 감고 있을 걸. 명헌은 눈을 감았지만 잔상은 선명해졌다. 오늘따라 달이 밝은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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