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and Doubt
양양 | @rmfjgrp94
"아.... 윽,....으..."
호된 성장통이었다.
165cm의 평균보다도 작은 키로 산왕공업고등학교에 입학했던 현철은 여름방학의 끝자락에 10cm가 넘게 컸다. 개학 후 현철을 본 모두가 놀라움을 표하며 등을 두드려줬지만 현철의 성장판은 거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현철이 밤잠을 이루지 못한지도 벌써 5일째였다. 허벅지부터 무릎관절, 종아리가 전부 저리고 욱신거려 잠에 들 수가 없었다. 잇새로 신음이라도 새어나갈까 현철은 꽉 다문 턱으로 끙끙댔다.
"현철아."
동그란 머리통이 삐죽 솟았다. 현철의 윗 침대에 자리한 명헌이었다.
"많이 아파? 베시."
한밤중의 어둠이 명헌의 얼굴을 가렸기에 현철에게 감각되는 것은 나직한 목소리 뿐이었다.
"어... 좀 아프네, 큼."
가만히 현철을 바라보던 명헌은 이내 부스럭거리며 내려왔다.
"야, 됐어. 올라가."
"베시."
명헌이 현철의 얇은 이불을 들춰 종아리를 손에 쥐었다.
"야, 무슨..."
"마사지 하면 괜찮아, 베시. 나도 중학교 때 할머니가 해줬다 베시."
"..그러냐."
"응, 베시. 어차피 잠도 안 오고. 베시."
마주한 명헌의 눈이 말끄럼한게 마치 송아지 눈 같아서 현철은 더이상 저항하지 않고 명헌의 손에 자신의 오금을 맡겼다. 주물주물, 농구선수답게 굳은살이 배긴 거칠고 큼직한 손이 36.5의 온기를 현철의 다리에 부지런히 전달했다.
가까이서 본 명헌의 얼굴은 입을 꾹 다문 채로 제법 진중했다. 현철은 명헌의 눈가가 거뭇한 것을 알아차렸다. 잠을 못 잔 탓이다. 현철이 밤잠 못 이룬 5일간 명헌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현철 나름대로는 불면을 속이려 애썼지만 기민한 성질을 타고나는 운동선수에게 통할 리 없었다. 그것이 현철은 안쓰러웠다. 내일도 타교와의 연습경기에 주전으로서의 출전이 예정되어 있는 명헌의 컨디션을 망치는 것은 아닌가 미안했다.
그런 현철의 마음과 달리 고개는 푹푹 꺾였다. 겨우 완화되는 통증과 더불어 퍼지는 온기에 못 잔 잠이 밀려오는 것이다. 가물대는 의식 사이로 현철은 웅얼댔다.
"고마워."
"..."
명헌이 '베시'라고 했던가 '응'이라고 했던가 그도 아니면 '현철아'라고 했던가. 현철은 듣지 못한 말에 "으응.." 대꾸하며 수마 속으로 빠져들었다.
욕심이 많은 성장판 덕에 무서운 기세로 자라나던 현철의 키는 그가 190cm가 되고서야 멈췄다. 쑤시는 통증에 못 이겨 수업과 연습을 결석하고 방에서 앓는 사이, 계절은 선선한 바람이 불던 가을로부터 제법 차가운 바람이 부는 초겨울로 바뀌어 있었다. 그간 현철의 하나뿐인 룸메이트인 명헌은 일주일에 최소 세 번은 침대를 내려와 현철의 다리를 주물러줬고 그보다 훨씬 빈번하게 찜질팩을 데워다 줬다. 현철이 머쓱하고 민망해 손사레를 치고 짐짓 괜찮다며 화라도 낼라 치면 명헌은 현철의 무릎을 한 번, 현철의 눈을 한 번 봤다. 그러고는 "이렇게 해야 안 아픈데. 베시." 중얼대는 것이었다. 현철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말끄럼한 눈동자를 마주할 때면 온 몸에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번번히 자신의 다리를 내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현철은 명헌에게 물렀다. 꼬박 1년이 다 되어가는 짝사랑이니 당연했다.
처음에는 저와 같은 포지션에 주전으로 뛰는 1학년이라길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을 뿐이다. 코트 위에서의 흐름을 읽어내는 명헌의 능력은 가히 천부적이었고 변칙적인 패스들은 절묘했다. 기초체력훈련과 개인연습까지 하루도 빼먹지 않는 명헌은 성실했다. 재능과 노력이 더해지면 꽃을 피우기 마련이다. 명헌은 그런 선수였다. 현철은 며칠 만에 명헌이 좋은 녀석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현철 또한 체육관을 쉽사리 떠나지 않는 성실한 선수였기에 둘은 금세 말을 트게 되었다.
그렇게 농구부 밖에서 알게 된 명헌은 뭐랄까...,
'베시'라는 근원 모를 어미를 내뱉는 것이 특이했다.
햇살이 좋을 때는 광합성을 해야 한다며 몇십 분이고 벤치에 앉아 있다가 벌겋게 익은 얼굴로 나타나는 것이 영 허술해서 웃음이 나왔다.
같은 방을 쓰게 되었을 때 자기가 키우는 애들이라며 조그마한 다육이 화분을 서너 개 들고 왔을 때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얘는 베시' '얘는 시베'.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에 현철이 얼떨떨해하자 웃음이 터지는 얼굴은 사랑스러웠다. '현철 순진하네. 베시.' 휘어지는 눈이 예뻤다.
현철은 그렇게 사랑을 자각했다.
190cm로 마침내 키가 멎은 날, 현철은 명헌에게 마음을 고백했다. 명헌은 현철의 고백을 듣고 고개를 약간 숙였는데 명헌보다 10cm가 넘게 큰 현철의 눈에는 수그러진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명헌의 목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선명한 색깔을 보며 현철은 생각했다. 이것 때문이었다고. 내가 그렇게 미친 듯이 쑥쑥 자라났던 이유는 솜털이 솟은 채 발갛게 물든 너의 목덜미를 보기 위해서라고. 너를 더 잘 보기 위해서. 너를 더 마음껏 사랑하기 위해서. 이명헌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컸던 거라고, 현철은 생각했다.
고개를 든 명헌은 "응, 좋아."라고 답했고 이미 답을 알고 있던 현철은 씨익 웃었다.
연애는 너무 달아서 혀가 아릴 지경이었다.
현철은 가끔 제 애인이 너무 귀여워서 심장이 시큰했다. 일상에서 곧잘 허술해지던 명헌은 현철의 너른 품 안에서는 더 쉽게 축축 늘어졌다. "현철." 부르며 벌려오는걸 안아주면 이내 목에 둘러오는 팔이 애틋했고 쭈욱 내밀어오는 입술은 귀여웠다. 쪽쪽 가볍게 입 맞추다가 먼저 아랫입술을 물고 도톰한 혀로 핥아댈 야했다. 현철은 종종 명헌의 자연스러운 몸짓에서 누군가의 그림자를 발견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명헌이 지금 제 옆에 있기에 기꺼웠다.
그러나 한 가지 걸리는 것은 있었다.
핏.
핸드폰 불빛이 켜졌다. 명헌이 놀라 숨을 흡 들이쉬며 현철을 돌아봤다. 움직임이 없었다. 명헌은 안심하며 푹신한 수면양말을 신은 발로 바닥을 가볍게 밟았다. 사뿐사뿐. 숨죽이며 걸어가 책상에 놓인 현철의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불빛을 최소밝기로 줄인 명헌은 전화기록과 문자기록, 갤러리를 차례대로 훑었다. 성구에게서 온 전화가 한 통 (2분 17초), 현필에게서 온 문자가 두 통이었다 ('형' '엄마가 보낸 택배 왔어'). 갤러리에 새로 채워진 사진이 없음까지 확인한 명헌은 현철의 핸드폰을 제자리에 두고 다시 흐릿한 제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조용히 자신의 침대로 올라간 명헌은 반듯이 누워 잠에 빠져 들었다.
명헌의 숨소리가 깊어진 그 때, 현철이 눈을 떴다.
현철은 가만히 누워 눈을 깜빡였다. 명헌의 새벽녘 버릇을 알게된 것은 한 달 전이었다. 처음 침대를 빠져 나가는 명헌을 보고 "명헌아" 부르려 했던 현철은 그가 자신의 핸드폰을 집어드는 것을 보고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명헌은 현철의 핸드폰을 몇 번 만지작대다가 내려놓고 침대로 돌아갔다. 현철이 다음날 핸드폰을 확인했을 때 특별하게 달라진 점은 없었으나 명헌이 핸드폰을 조작한 흔적은 사라진 채였다.
현철은 명헌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핸드폰 역시 잠금장치를 걸어두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명헌이 자신의 핸드폰에서 무엇을 찾는지 몰라도, 현철은 명헌에게 숨길 것이 없었다. 숨길 필요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다만 일주일에 세네번 가량 발생하는 명헌의 뜻 모를 행동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현철이 알게된 것이 한 달여일 뿐, 얼마나 오래 지속된 습관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두 사람이 교제를 시작한 때가 처음이었을 거라고 짐작할 따름이었다.
현철의 추측은 정확했다. 명헌은 현철과의 연애를 시작한 뒤로 현철의 핸드폰을 훔쳐봤다. 고된 훈련에 현철이 곯아떨어지는 밤이면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핸드폰 불빛을 촛불 삼아 그의 사랑의 이면을 확인하고자 했다. 현철의 비밀을 찾고자 했다. 비밀이 들통나는 날, 현철의 핸드폰은 날카로운 단검이 되어 그를 찌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명헌은 현철의 날개를 찢을 생각이다. 겹겹이 쌓인 현철의 커다란 날개를 위에서부터 가로질러 북북 찢어버릴 것이다. 엉망으로 흩어진 깃털들을 헤집어 그의 날개죽지를 꺾어버릴 것이다. 현철이 자신에게서 달아날 수 없도록. 날아가지 못하도록.
명헌은 밤마다 현철의 괴물 같은 모습을 찾아 헤맸다.
아직 괴물의 형상을 한 현철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음 날이 되면 아무 것도 알 리 없는 현철은 명헌을 안아줬다. 현철의 품은 크고 아늑하고, 놀라울 정도로 따뜻했다.
"명헌아. 내 꿈에 너 나왔다."
약간의 틈도 없게 꽉 안아 오는 현철은 명헌의 정수리에 머리를 가볍게 얹고 간밤의 사랑을 속삭였다. 그러면 명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현철의 쇄골 께에 입맞췄다.
"잘 잤어?"
"뿅"
"응, 그래. 다행이다."
2학년이 되어 바뀐 명헌의 어미에서 용케도 긍정의 의미를 읽어낸 현철은 안심이 되는 목소리로 속삭이며 명헌의 눈두덩이에 입술을 내렸다.
아랫배가 간지럽도록 달큰하고 온전한 현철의 애정을 느끼며 명헌은 물었다.
현철아. 너는 언제 괴물로 변할 거야? 너도 시간이 지나면 그 커다란 손에 숨기고 있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나를 할퀼거야? 내 심장을 쥐고 터뜨려 버릴 거야? 아직은 보이지 않는 커다랗고 검은 날개를 펼치고 나에게서 도망칠 거야? 그런 날이 오면 나에게 말해줘. 내가 너의 날개를 미리 꺾어버릴 수 있게.
발화되지 못한 말은 다시 명헌의 안으로 삼켜졌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현철은 제 품에 안긴 연인의 꽉 다물린 입을 바라봤다.
거짓말쟁이.
명헌아. 사랑과 의심은 함께 할 수 없어. 그렇지 않니?
명헌이 소중한 것을 다루는 방식은 지극히 불안정하고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명헌의 내면에는 뾰족하고 뒤틀린 것이 숨겨져 있었다. 아무리 말끔하고 담담한 얼굴로 숨기려 노력해도 그것은 나쁜 힘이 있어 똑같이 뾰족하고 뒤틀린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명헌과 달리 그들은 그것을 날카롭게 벼려 타인에게의 폭력성으로 표출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명헌을 함부로 대했다. 명헌에게도 그들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에게 다가오게 두었고, 엉망이 된 자신을 두고 떠날 때에는 가지 말라고 붙잡았다. 비슷한 뒤틀림을 갖고 있는 이에게 이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현철은 달랐다. 현철은 내면에 뾰족하고 뒤틀린 것을 숨기고 있지 않았다. 현철은 커다랗고 잔잔했다. 그는 고정되어 있는 듯 늘 유유히 흐르고 있는 사람이었다. 명헌은 현철을 볼 때면 큰 강을 떠올렸다. 어떤 것이든 품어주는, 수심을 모르겠는 큰 강.
명헌은 현철을 의심했다. 현철의 애정을 의심했다. 현철의 말과 행동이 의심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핸드폰에 남겨진 기록 따위, 주인이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안다. 그러나 명헌의 집요하고 얄팍한 의심은 거둬질 줄을 몰랐다. 사랑이 괴물로 돌변하는 순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고, 그것이 지독히도 두려웠기 때문이다.
새까만 밤, 명헌은 현철의 깊어진 숨소리를 확인하고 침대를 내려왔다. 어슴푸레한 불빛에 의지해 조용히 걸어가 침대 옆 협탁에 놓인 현철의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전화와 문자에 별다른 점은 없었으나 갤러리는 새로운 영상들로 채워져 있었다. 요 며칠 열심히인 신입생들의 슛 연습 영상이다. 매니저가 기록하고 있음에도 다른 각도에서의 자세를 함께 봐야 한다는 현철의 세심한 다정 덕택이다. 명헌은 스크롤을 몇 번 내리다가 다시 협탁에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탁.
동시에 현철이 명헌의 손목을 잡았다.
"명헌아."
움찔 놀란 명헌이 몸을 무르려는데 현철의 단단한 손이 그것을 막았다.
"자기야."
한밤의 어둠에 명헌은 현철의 표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다만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와 손목을 잡은 억센 힘이 느껴질 뿐이었다.
"알고 있었어?"
명헌이 물었다.
"숨길 생각도 없었잖아."
현철이 답했다. 명헌은 목이 꽉 메여 말이 나가지 않았다. 나름대로 기척을 숨기려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단 둘이 쓰는 방에서 밤마다 부스럭 소리가 나면 현철이 깰 것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요 며칠 수면부족으로 부르터 있던 현철의 입가가 생각난 명헌은 그에게 손을 뻗었다. 입가를 더듬어오는 손에 현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떨리던 명헌의 손이 멎었다. 현철은 그 손을 잡아 끌어 명헌을 자신의 옆에 앉혔다. 매트리스가 출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명헌아. 내가 의심스러웠어?"
명헌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뿅."
"그러면. 부족해?"
명헌이 보다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넘쳐."
현철이 명헌을 바라봤다. 명헌 또한 현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송아지의 눈을 연상시키는 새까맣고 반질한 눈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게 말끄럼한 눈동자를 마주하자 현철은 어김없이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자신을 의심한 연인에게 몇 번이고 심장을 내어주고 싶어졌다.
"그래, 다행이네. 오늘은 같이 자자."
현철이 명헌을 제 침대에 뉘였다. 깨지는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명헌의 몸이 반듯이 놓인 것을 확인한 현철이 협탁으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꺼냈다.
"이거 하고 자자, 자기야. 잠 설치지 말고."
현철이 내민 것은 온열 수면안대였다. 명헌이 좋아하는 캐릭터가 그려진.
명헌이 안대를 받아들고 말이 없자 현철이 명헌의 머리를 살짝 들어올려 안대를 씌워 줬다. 그리고는 옆으로 누워 명헌의 배를 살살 다독였다.
"배가 따뜻해야 잠이 잘 온대."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새벽녘의 푸르스름한 여명이 둘의 방을 가득 채웠다. 명헌은 팔을 들어올려 수면 안대를 벗었다. 빛에 적응하느라 눈을 깜빡이고 있자 현철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몇 시간째 명헌을 바라보고 있는 곧은 시선과.
"현철아. 이제 날 떠날거야?"
명헌이 속삭였다.
"왜 그렇게 생각해?"
현철이 메인 목소리로 물었다.
명헌은 답을 내놓기 위해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답했다.
"모두 그랬으니까. 사랑과 의심은 함께할 수 없대. 뿅."
명헌의 답변에 현철은 손 끝이 저릿했다. 어떻게 하면 너를 믿게 할 수 있을까. 밤마다 괴물의 흔적을 찾아 헤매던 너를. 몇 시간 째 숨이 넘어갈 듯 울면서도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은 너를. 푹 젖은 얼굴을 하고 나를 떠날 것이냐 담담한 목소리로 묻는 너를.
"명헌아. 내 키가 갑자기 왜 컸는지 아냐."
생뚱맞은 질문에 명헌의 눈동자가 이러저리 굴렀다.
"몰라. 뿅."
"이명헌 더 잘 사랑하려고."
명헌이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방금 들어온 말이 소화가 안되는 듯한 모양새에 현철은 웃음이 터졌다. 명헌의 눈이 커졌다. 그것이 또 사랑스러워 명헌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현철, 미쳤다. 뿅."
"명헌아. 여기서 보면 네 이마가 아주 잘 보여. 너가 미간을 찡그릴 때 어떻게 주름이 지는지 보여. 그럴 때면 내가 펴줄 수 있어. 눈동자는 더 잘 보이지. 너가 날 볼 때면 새까맣기만 하던 것에 햇빛이 들어서서 테두리가 갈색으로 물들거든. 그게 아주 예뻐. 다른 놈들은 못 보게 하고 싶을 정도로."
"현철아."
"귓바퀴. 너 부끄럽거나 창피할 때 귓바퀴만 빨개져 있으면 너무 귀여워. 거짓말 할 때면 창백해지는 뒷목도. 1학년 때는 몰랐는데 이제는 네 목덜미 오른쪽에 작은 점이 있다는 것도 알아. 눈 감고도 찍을 수 있어."
현철이 손을 명헌의 뒤로 뻗어 목 어딘가를 콕 짚었다.
"이러려고 내가 급하게 컸어, 명헌아. 너를 더 잘 눈에 담으려고. 너를 더 잘 사랑하려고. 널 사랑해서 내가 그렇게 미친 듯이 컸던 거야."
명헌이 현철을 바라봤다. 어디선가 달큰한 목련향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향이 지나치게 어찔하고 아득하여 명헌은 콧 속이 간지러웠다. 재채기가 나올 것 같았다. 온 몸이 간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현철아. 너 나한테 화내야 해."
"알아."
"근데?"
"근데 화가 안 나는걸 어쩌냐, 명헌아. 밤마다 고양이처럼 몰래 나와서 내 핸드폰 훔쳐본 것 보다, 고깟거 한다고 퀭해져서 까매진 니 눈두덩이에 더 마음이 동하는 걸 어떡해."
"현철 진짜 미쳤다..."
"뿅 까먹었다, 자기야."
현철이 명헌의 콧잔등에 입술을 내렸다. 그 말랑하고 간지러운 느낌에 명헌이 살짝 몸을 떨었다.
"날 의심해도 돼. 내 애정을 매일 매순간 확인해도 돼. 매번 대답해줄게. 사랑한다고. 나에겐 과분할 만큼 사랑하고 있다고. 내가 평생 받아왔던 사랑을 주려고 널 만난 건 아닐까 가끔 생각한다고. 너의 그 작고 귀여운 의심의 불씨조차 전부 사랑해. 사랑해, 이명헌."
현철이 조금의 틈도 느껴지지 않도록 명헌을 안았다. 품에 가뒀다. 명헌은 현철의 품 안에서 길고 긴 울음을 토해냈다.
한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사랑의 신이 지극히 사랑하여 사랑으로 빚으며 아껴줬다. 하여 아이는 '사랑'이라 불렸다.
또 다른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 또한 사랑의 신이 빚었다. 그러나 사랑의 신이 아이를 덜 사랑했던 탓인지, 부주의했던 탓인지. 예전부터 사랑의 신의 아이들을 질투하던 다른 신이 아이에게 '의심'이라는 작은 불씨를 심었다. 불씨는 아이가 자라나며 함께 커졌다. 작았던 불씨는 삽시간에 커다란 불이 되어 아이를 집어 삼켰다.
사랑의 신이 이를 가엾게 여겨 그가 특별히 사랑했던 아이 '사랑'을 '의심'과 만나게 했다.
아이들은 서로를 아꼈다. '사랑'은 '의심'을 사랑했다. '의심' 또한 사랑을 사랑했지만, 동시에 의심했다. 그 때마다 '사랑'은 자신이 가장 잘 하는 것을 '의심'에게 주었다. 온 마음을 다하여 상대를 사랑하는 것. 사랑의 신이 사랑으로 빚은 사랑의 아이가 가장 잘 하는 것은 단연 사랑이었다.
'의심'을 뒤덮었던 큰 불은 '사랑'의 품 안에서 점차 사그러들었다.
'사랑'과 '의심'이 처음 만났던 곳을 떠나던 날, '의심'은 '사랑'에게 말했다.
"현철아. 사랑해."
명헌이 처음 말해보는 것이었다. 현철은 환하게 웃었다. 온전하게 눈부신 웃음이었다. 명헌은 그 웃음에 안겼다. 그 모습이 마치 꽃으로 날아드는 나비의 날갯짓과 같았다. 하여 신들은 그를 '나비'라 명명하였다.
두 아이가 있었다.
한 아이는 의심을 말했고, 한 아이는 사랑을 말했다.
둘은 겹쳐져 확신이 되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