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줘
연하 | @yeon_ha_may_do
서풍이 몰고 온 건 다른 이들에게는 절망이었겠지만 그에게는 기쁨이었다.
분명 축복받아야 마땅할 결혼식임에도 장례를 닮은 행렬은 막내 왕자를 걱정한 이들의 슬픔과 그사이 기쁨이 공존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주인공은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이 조용히 한 곳만 응시했다. 백색의 면사포 아래 값비싼 보물들로 치장했지만, 어떠한 무게도,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무채색을 띤 채 허공을 바라보는 두 눈은 결혼을 가장한 장례를 도우러 온 이들이 그 자리를 떠난 뒤에도 여전했다. 그리고 우두커니 선 절벽 위에서 서늘한 서풍이 느껴지자 그제야 그의 양 뺨은 발갛게 달아올랐고 두 눈은 총기를 띄었다.
드디어 나를 찾아주었구나, 네가.
나를 찾아줘
아프로디테의 미움을 받은 왕자. 만백성이 추앙하고 사랑하는 막내 왕자가 신에게 미움을 받은 비운의 왕자로 추락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두의 사랑을 받는 왕자는 어쩌다 여신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일까. 이를 셈하려면 약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막내 왕자 이명헌이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아주 오래전이었지만 그의 외모가 빛을 발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사실 얼굴은 다른 형제들과 비슷한 궤도로 성장했으나 과묵함 속에 가끔 보이는 다정한 낯빛의 웃음은 그를 매력적으로 만들기 충분했다. 왕위 계승 순위에서는 날 적부터 밀려있지만, 백성들의 사랑을 받기에는 넘칠 정도로 능력을 보이는 왕자. 가끔 보이는 미소와 다정히 휘어지는 눈웃음에 정신을 못 차리는 이들은 성별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니 이 막내 왕자의 미소 한 번을 보겠다고 우후죽순으로 성문 앞에 모여든 건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여신의 미움을 사기에는 더없이 적절했다.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왕성 앞으로 모이느라 아프로디테 여신의 신전은 꽤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되었으니. 여신의 분노가 이명헌에게로 향할 것은 아마 왕자도 그의 부모도 모두 알 만한 것이었다. 그 때문일까, 그에게 내려진 가혹한 신탁의 내용 앞에서도 왕자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현실을 수긍했다. 그것이 신의 결정이라면 한낱 인간이 거역할 수 없으니 자신은 기꺼이 독사 같고 맹수 같은 괴물 신랑을 맞이하겠노라고. 울며 쓰러지는 어머니와 무력감에 왕좌만 움켜쥐는 아버지를 뒤로한 이명헌의 표정은 시종과 시녀들도 왕자의 표정을 가늠하지 못했다.
괴물 신랑과 혼인하게 된 이명헌은 절망하고 있는가?
이명헌이 13살 무렵, 그는 왕국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행사인 황소 떼의 행진에서 유모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사실 인파에 떠밀려 정신을 못 차리는 유모의 손을 그가 놓은 것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유모와 기타 수행인들을 뒤로하고 홀로 있을 수 있었다. 막내 왕자의 얼굴을 평민들이 알 리는 만무했고 그리 값비싸 보이지 않은 행색으로 일부러 나왔으니 왕궁 병사들이 그를 찾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터였다. 갑자기 혼자만의 시간이 생긴 명헌은 길목에서 무엇을 할지 계획하기보다는 인파가 없는 쪽에서 고민해보기로 결심했고 모퉁이를 도는 순간 저보다 한 뼘은 족히 작을 남자아이를 발견한다.
잠깐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기엔 명헌이 가는 곳마다 그 남자아이가 있었고 왕궁 내 사람이 아닌 길거리의 사람에게 말을 걸어본 적 없는 명헌은 그에게 쉬이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소년은
“내 이름은 신현철이야.”
그에게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알려주었다.
내 진명을 안 것은 네가 유일하다며 웃는 목소리는 낮으면서도 듣기 좋았다. 현철은 작은 감자처럼 생겨서는 단단한 눈빛을 가졌고 다정한 낯을 띄었지만 동시에 장난기로 포장한 말투의 알맹이는 낯설면서 동시에 익숙했다. 그래, 꼭 제 아버지처럼 단 한 순간도 누군가의 발밑에 있어 본 적 없는 이들만의 전유물. 그때부터 명헌은 신현철이라는 인물이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명헌이 왕궁 밖으로 자주 나가지 못하는 것치고는 둘은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은밀하게 들어오기 힘든 왕궁 뒤 산등성이나 왕궁 사람들이 승마하러 자주 나가는 들판, 언덕, 성벽에 조그맣게 나있는 개구멍 근처 등등. 현철과 명헌은 가리지 않고 만났고 꼭 약속을 하지 않더라도 명헌이 발길이 닿는 대로 그곳으로 가면 늘 현철이 있었다. 그리고 현철에 정신이 팔려 형님의 업무를 제대로 돕지 못했다는 이유로 왕궁 밖으로 나가지 못했던 그날, 명헌의 방으로 오르는 계단에 현철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이명헌은 그가 평범한 인간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러나 제 일상에서 금방이라도 사라질 수 있는 현철을 잃는 것과 같은 도박은 명헌의 선택지에 없었기에 명헌은 그에게 정체를 묻는 것보다는 마음속에 질문을 묻어두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누구도 상처 입지 않은 채 그를 온전하게 제 것으로 만들 방안을 몇 년에 걸쳐 계획했고 그를 데려온 서풍으로 그의 계획이 드디어 결실을 보았음을 알렸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그에게 절망이라니. 목표를 이룬 명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어린아이가 무언가를 갖겠다 한 다짐이 한 왕국을, 신전을, 그리고 신들을 움직일 줄 누가 알았으랴. 어린 이명헌은 왕자인 신분에 맞지 않게 물욕이 없었다. 다른 형제들은 생일 선물로 갖고 싶은 토지를, 보석을, 화려한 옷감을 탐냈지만, 명헌만큼은 바라는 게 없었다. 그저 딱 하나. 여러 학문들을 배워보고 싶다는 것. 이 과정에서 어릴 적부터 총명하던 막내아들이 혹여 제왕학에도 관심을 두어 제 형제의 자리를 탐하는 것일까 하던 왕과 왕비의 우려와는 다르게 명헌은 제왕학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지질학부터 천문학, 역사학 신학 등 명석한 명헌의 두뇌는 그가 생일마다 바라던 선생들의 지식을 솜처럼 흡수했고 그 지식은 왕국의 백성들이 풍요로움을 느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이명헌을 왕국 내에서 칭송하지 않는 이들이 없었고 이는 곧 누군가의 불안함과 위기감에 불씨를 지폈다.
그의 입지가 다져질수록 다음 왕위를 이을 첫째 왕자의 입지는 점차 줄어들었고 순탄하게 왕위를 이어받을 것만 바라보고 있던 장자에게는 만백성의 칭송을 듣는 막내의 행보가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가 왕위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사람 심보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가져보지 않았기에 관심이 없을 뿐이지 손에 쥐어진 뒤에는 놓기 싫은 그런 것. 아무리 이명헌이라도 권력의 달콤함은 쉬이 포기하기 힘들 것으로 판단했던 것인지 첫째 왕자는 나무뿌리처럼 단단히 자리 잡은 민심을 흔들기보다는 신전으로 눈을 돌렸다.
신탁! 그래, 신탁을 받게 하자!
신의 미움을 받는다면 아무리 막내라 할지라도 백성들도 부모님도 쉬이 도움을 줄 수 없는 것이며 살아있는 인간 재앙이 될 테니 누구도 그 아이의 손길을 받고 싶지 않아할 것이니 그의 입지를 되돌릴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날 새벽 저잣거리에는 왕실의 막내 이명헌의 아름다움과 총명함, 그의 외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내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찬양하는 글들이 그득하게 붙었고 이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애초에 왕국의 백성들은 이명헌이라면 그냥 물을 먹어도 성수라 할 정도로 신망이 깊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역사적으로 왕위를 이을 이도 아니고 왕위 계승권에서 형제 중 가장 밀려있는 이에게 관심이 쏟아진 적이 없었기에 더욱 이례적으로 돋보이게 되었다. 그 덕에 신전에 공양을 드리러 가던 사람들도 왕성에서 이명헌을 보기 위해 새벽부터 나와 왕성 문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허다했고 사람들에게 외면받은 신전의 주인인 여신이 분노하게 되면서... ...
다시 현재.
서풍이 그를 데려다준 성은 거대했고 반짝였으며 온갖 귀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명헌에게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신랑. 독사 같고 맹수 같은 그의 괴물 신랑이 먼저였으니. 그렇게 한나절이나 걸려서 성안을 뒤져봐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신랑에 실망하던 것도 잠시, 지리상 해가 가장 먼저 지는 곳에 위치한 탓에 벌써부터 노을이 내려앉아 샹들리에를 비추자 반짝이던 빛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불빛들이 순식간에 꺼지는 것을 목도했음에도 명헌은 어둠을 응시했고 그 속에서 제 사랑이 있음을 직감했다.
그의 신랑은 신탁으로 가진 제 신부가 자신을 괴물로 알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는 모양인지 그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하며 다정히 명헌의 얼굴을 쓰다듬었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육감적인 감촉에 타액을 꼴깍 삼키는 것으로 대신 대답했다. 그런 명헌이 겁에 질린 것처럼 느낀 것인지 낮게 웃는 목소리는 몇 년 전 만난 그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남자.
그 소년은 사랑으로 인해 남자가 되어있었다.
이명헌 때문에.
신현철이 이명헌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명헌이 신현철을 온전히 가졌다고 하기엔 그는 밤이 되기 전의 시간을 홀로 보내야만 했고 그것들은 꽤나 자주 이명헌의 심기를 건드렸다. 서로의 신랑과 신부가 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신현철을 눈동자에, 온 마음에 담은 순간부터 그를 향한 사랑에는 욕망만이 그득하게 들어찬 모양인지 이명헌은 신현철의 모든 것을 원했고 그것은 신현철의 낮도 포함이었다. 그렇게 이명헌은 그의 정체를 묻는 선택을 했을 때와 정반대의 선택을 하게 된다.
어김없이 어둠과 함께 찾아온 신랑과 사랑을 속삭이고 난 뒤. 등불로 제 곁에서 자는 신현철의 얼굴을 바라본 이명헌은 어릴 때의 모습에서 훨씬 성숙해진 현철의 모습에 답지 않은 당황을 했고 그 결과로 등불을 떨어트려 깨트리는 실수를 범했다. 이런 것까지는 계획에 없었는데. 창문 너머로 사라진 현철은 자신과의 약속을 명헌이 깼다는 것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기보다는 당혹스러웠을 명헌을 위해 자리를 비켜준 것에 가까웠으나 신의 그런 의도를 알 리 없는 명헌은 사라진 제 신랑을 찾으러 나섰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긴 했으나 모로 가도 신현철만 가지면 된다고. 오히려 이런 시련이 저희에게는 필요했다고 여긴 모양인지 명헌은 여신의 신전을 찾아 제 신랑을 상처 입힌 것에 대한 합당한 처벌을 요구했고 뻔뻔스럽게 찾아온 명헌에 기가 찬다는 듯이 웃던 여신은 그에게 인간이 해내기 힘든 일들을 내렸다. 그렇게 명헌은 그 모든 일들을 놀랍게도 다 해냈고 마지막으로 죽음의 세계로 가서 여왕의 선물을 가져오는 일만이 남았다.
“너는 절대로 네가 갖고 오는 상자를 열지도 말고, 무엇이 담겨 있는지 알려고도 하지 마라. 신들의 아름다움이 담긴 신비한 상자의 비밀은 네가 알려고 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신들의 아름다움이 담긴 비밀의 상자. 명계의 여왕에게서 받아온 상자가 명헌의 손에 쥐어지고 성공적인 임무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저를 찾지 않는 현철에 괘씸함을 느꼈던 명헌은 마지막으로 현철과 제 목숨을 두고 도박을 선택한다. 사실 아프로디테의 신전으로 가 용서를 구했을 때부터 늘상 제 곁에 현철의 전령이 함께한다는 것을 명헌은 벌써 알고 있었다. 인간이라면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낼 수 있게 한 것도 현철의 도움이었고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승으로 가는 선택을 무식하게 탑에서 뛰어내리는 것으로 대신할 뻔했으니. 그 과정에서 현철이 얼마나 식겁했는지는 그만이 알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했음에도 자신을 찾지 않는 현철에 점점 두려움을 느꼈던 명헌이었기에 마지막으로 제 목숨으로 도박을 감행하는 것이었다.
신들의 아름다움. 인간이 감히 탐해서는 안 될 그것.
명헌은 신들의 아름다움이 담긴 명약이든 뭐든 관심이 없었다. 그저 신현철. 그만 제 곁에 있다면 자신은 저승강 까짓 거 두세 번도 건널 수 있었고 그것은 정말 빈말이 아니었다. 상자 안에 있는 것은 인간이 손대서는 안 될 것인 만큼 열었을 때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나올 것이 불 보듯 뻔했으나 이명헌은 다시 한번 그에게 사랑을 걸어보기로 한다. 딸깍.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생에 미련이라도 남은 모양인지 명헌이 큰 결심을 하고 열었으나 아무것도 없는 상자 안은 텅 비어있었다. 그에 의아함을 느낄 새도 없이 다시금 고개를 든 명헌의 눈앞에는 현철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고 그 모습이 허상이든 아니든 환하게 웃는 명헌은 흐릿한 그의 잔상과 함께
암전.
명헌이 눈을 뜬 것은 얼마나 오랜 기간이 지났는지 알기 힘들었지만 오랜만에 본 신랑의 낯빛이 초췌한 것을 보아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래 잠들어 있다면 목소리가 갈라질 법도 했는데 제대로 나오는 것을 보아 이 역시도 신의 능력인 것인지. 가만히 제 곁에서 손만 꼭 잡은 채 잠들어있는 현철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자 명화같이 그의 속눈썹이 들렸고 그의 눈동자에 드디어 오롯이 명헌만이 가득찼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은 기쁨이 가득찼고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현철을 끌어안는 것으로 이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리고 현철과 명헌이 처음 만난 그 골목에서부터 현철의 눈에는 명헌만이 있었다는 것은 누군가가 모를 또 하나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