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성인식
백오 | @105_night
노래하소서, 사랑과 아름다움이시여. 당신의 아름다움은 영원하며 그 은혜 역시 찬란할 것이니.
운명의 흐름에 넥타르를 붓는 분이시여, 노래하소서.
인간의 머리란 아둔하기 짝이 없었다. 범인(凡人)이라면 신과 만나는 기적 따위는 바랄 수 없었고, 신전의 사제들이 아니라면 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어려웠으니. 그들이 눈 앞의 같은 인간을 사랑하고 숭배하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였다.
흔한 일이였다. 인간의 눈은 옹이구멍보다 조금 나은 정도인데다가. 아프로디테는 아레스와 뒹구느라 바쁘니 인간들의 칭송이 좀 덜한것도 사실이니까…
요구는 간단하다. 인간들이 아름답다고 칭송해 아프로디테의 심기를 거스른 이에게, 최악의 상대와 사랑에 빠지게되는 화살을 찌르고. 최악의 상대에게 비정한 납화살을 찌르면 되는, 간단한 일.
이 일을 맡은 것은 늘 그렇듯… 작고 다부진 몸의 에로스, 신현철이였다.
'인간들은 뭐 집을 이리 복잡하게 짓는거야… 입술이 통통하고, 얼굴이 허연 인간이랬는데…'
프시케. 프시케라는 이를 찾아야한다. 작은 방들의 창문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전해들은 얼굴을 찾아다녔다. 입술이 통통하고, 얼굴이 허옇고, 새카만 머리카락의…
첫번째 방에 들어갔다. 훤칠하고 머리칼이 새카만 사내가 있었으나, 동침하는 이가 있었다.
두번째 방에 들어갔다. 그 방은 텅 비어있었으며, 침상에는 사람의 온기가 비치지 않았다.
세번째 방에 들어갔다. 깨끗하게 정돈된 방에는 이불을 꽁꽁 두르고 자는 이가 있었다. 옅은 숨이 새는 입술이 통통했고, 얼굴을 말끔하니 피부가 허옇고, 머리칼은… 뭘로 박박 밀었는지 짧았으나 분명 검은색이였다. 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사내가 그 프시케다. 이런 얼굴을 인간들이 아프로디테에 비한 것인가? 분명 얼굴이 갸름하고 몸이 두꺼운게 아름답기는 하다만…
‘뭐, 별 수 있나. 까라면 까야지…’
표적이 멀리 있는것도 아니니 딱히 활로 쏠 이유가 없어 준비된 금화살을 뽑아 쥐었다. 투박한 손에 쥐어진 섬세한 사랑이란 늘 간질간질하니 쏘는 자신 조차도 마음 한구석이 제법 싱숭생숭하단 말이지. 그나저나… 이불을 꽁꽁 두른 탓에 가슴팍에 찌르기가 어려웠다. 얼굴에 찌르자니 조금 죄책감이 느껴진달까. 다치지 않는대도 좀 그렇지 않은가. 화살은 일단 무기의 형상이니.
고민 끝에 결국 이불 사이로 빼꼼 나온 손가락을 골랐다. 신의 모습은 인간이 보려고 노력해봐야 보이지 않을 것이고… 자기 손보다 얇은 손에 살짝 스치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
깜빡.
그 순간 눈이 트였다.
그 찰나에 머리를 가득 메웠던 생각들-눈 앞에 누워 방금까지 자던 이에 대한-이 한순간에 깨진 도자기에서 물이 흘러내려 사라지듯이 비워졌다. 새카만 눈동자는 꼭 에레보스의 깊은 어둠을 닮아 에로스를 응시하였고. 도톰한 입술은 벌어져 작게 하품하니 눈꼬리에 말간 눈물 한방울 서린다.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분명 인간의 눈에 신이 보일리가 없었으나, 그만큼 에로스는 많이 동요했다는 것이다. 동요는 결국, 자신이 들고있던 화살에 자신이 찔리는 것을 초래했으며.
에로스는 결국 최악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사랑. 사랑이 뭐라고. 화살에 스치고 그 기운이 심장에 스미고 나면 몸이 제 멋대로 자라 천장과 가까워진다. 원래도 근육질이였던 몸은 키까지 커지니 거구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인데다가, 날개까지 몸과 함께 커 그 얼룩무늬 아롱진 깃이 제법 억세다.
최악이다. 최악이 아닐 이유가 있는가? 프시케는 원래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개뼉다구같은 놈과 사랑에 빠지고 그에게 거부당해 마음이 찢어지는 벌을 받아야 맞았다. 맞는지는 몰라도 아프로디테는 그러기를 바랬다. 지금 운명이라는 직물에 누가 넥타르라도 쏟았는가? 사고. 그래, 사고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몸이 저절로 움직여 창문 바깥에 숨은 에로스는 고민했다.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으며, 이상하게 커진 몸 때문에 거리감이 이상했다. 이러고 돌아가면 의심을 사지 않을까? 연기와는 도무지 맞지 않았던 탓에 쓸만한 변명을 찾기도 참 힘들다.
‘아이씨… 저걸 그냥 두면 아프로디테가 난리를 피울테고, 내 실수까지 알려질텐데… 어디다가 숨기는 방법은 없나. 이왕이면 조용하고 남들 안보는 곳에…’
그때, 제법 뾰족한 수가 머리를 스친다. 보통 신들-보통 제우스였다-이 주로 쓰는 방법이고, 인간이라면 대부분 들어먹을 수를.
프시케.
일어나시오, 프시케. 가련한 이여.
깊은 밤에 잠이 깬 참이였다. 분명 낮에 성인식 예복을 맞춘다 어쩐다 하며 치수를 재고 원단을 고른 탓에 피곤했을텐데. 어렴풋한 달빛이 눈꺼풀 너머에서 일렁였기 때문인가.
밤이면 날씨가 꽤 쌀쌀했던 탓에 꽁꽁 싸맨 이불을 조금 젖혔다.
“누구신데 남의 이름을 막 부르나요 뿅.”
프시케. 박복한 이여.
당신은 인간과 살 운명이 아니오.
“혼사 얘기라면 아직은 관심이 없어요 뿅”
… 그렇군.
아무튼… 그대의 운명이 손짓하니 그 기구한 길을 편하게 갈 방도를 알려주려 하오.
내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아무도 모르게 길을 떠나시오.
뒷산에 보면 계단이 있을 것이니.
300개를 올라가고 나면 허름한 신전이 나오는데, 그 입구에 멈춰서서 눈을 감고 기다리시오.
심호흡을 세번. 딱 세번만 하면 되오.
… 내일도 쌀쌀할테니 옷은 두툼하게 입으시오.
“한번 해볼게요 뿅.”
기구한 운명이라. 자신은 분명 형제들처럼 살지 못할 것 같다는 기분이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다른 폴리스의 이와 결혼하기를 거부했고. 값진 자주빛 원단이며 보석들을 지참금으로 들고오는 타국의 부호도 거부했다. 인간은 아둔하고 따분해요 뿅. 늘상 이런식이니 성인식이 한달쯤 남았는데도 혼처가 없어 부모님만 돌아버렸지…
무슨 일이 있든, 모이라이가 내 운명을 짜놨다면 나는 피하지 않겠어요 뿅.
잠이 올리가 없지. 인간이란 어쩔 수 없이 신의 계시와 같은 것을 들어버리면 평소와 같은 모습을 유지하기 힘들기 마련이다. 새벽빛이 하늘을 희게 물들이기 시작하면 잠 청하기를 포기하고서는 어디에 갈지를 모르니, 필요한게 있을까 싶어 선물로 받은 원단 죽 찢어와 짐을 챙겼다. 예쁜 색의 조약돌, 아폴론 신전에 갔을 적에 주운 꽃 한송이, 얇은 단도 하나, 어릴적 선물받았던 브로치… 별것도 없는 짐이였지만 아끼는 것들로만 꽉꽉 채운 보따리를 들고, 이명헌은 그렇게 사라졌다.
이백구십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른다.’
이백구십칠.
‘신의 계시가 아니라 괴물의 속삭임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백구십구.
‘하지만 아둔한 인간 무리에서 멀어질 수 있다면.’
삼백.
‘이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지.’
길게 숨을 들이쉬면, 바람이 불어와 제법 쌀쌀했다. 목소리의 말대로, 뭘 하나 걸치고 나와서 다행인걸까. 후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일단 한번. 다시, 숨을 들이키고. 300개를 올라온 것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지만 호흡을 정비하기에는 제격이였다. 또 길게 내쉬고. 마지막으로 길게 숨을 들이키면… 또 감은 눈꺼풀 위에서 빛이 어른거렸다. 마지막이니까, 특별히 조금 더 길게, 후우…
눈을 뜨면 자신이 지내던 저택보다도 호화로운 곳이였다. 분명 눈 앞은 허름한 신전이였을텐데. 조용하고, 깨끗했으며, 대리석 바닥에는 붉은색 꽃잎들이 흩뿌려져있었다.
프시케.
"이게 내 운명이였나요 뿅."
미안하오.
앞으로는 여기에서 지내게 될 것이오. 보이지 않는 시종들이 당신을 돌봐줄 것이고.
나는 밤마다 오겠소. 적응 할 시간이 필요할테니.
"... 여기 따뜻한 물은 나오나요 뿅."
… 잘 나올거요.
적응할 시간이라. 그런건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뭐, 인간에게 적응을 하느니 이런 영문도 모르겠는 장소가 프시케에게는 조금 더 편했다. 남을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은 곳이.
더이상 말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면 가볍게 운동도 할 겸… 이곳저곳 구석구석 들어가보고, 여기에는 뭐가 있구나, 이쪽이 침실이구나. 눈에 익혀두기로 했다. 가져왔던 짐들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들이 잘 정리해 침실 옆방에 차곡차곡 두었다. 그 모습이 제법 신기해 바라보기는 했지만… 말 없이 일만 하는 존재들인 것 같아 더이상 신경쓰지는 않았다.
자신을 부른 이는 누구일지. 그런 것은 조금 밀어두었다. 일단 이런 일은 인간이 하지 못한다. 그 사실 하나로 프시케는아무것도 상관이 없어졌다. 피톤의 벌어진 입 안으로 들어간 꼴이라도,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이 죽음이여도 상관 없다.
남들의 시선과 자신이 서있는 곳에 억지로 끼워들어갈 필요는 없다. 모양이 다른 열쇠처럼 살지 않아도 된다는 뜻 아닌가. 괜히 헛웃음이 트였다. 모이라이가 만들어둔 운명의 직물이 이런 모양이였구나. 지금까지 잘못된 날실처럼 살아왔던게 아주 헛 일은 아니였군요 뿅.
뭐, 지금 당장은 피톤이 입을 다물 일이 없는 것 같았다. 목욕탕에 가면 물은 알맞게 뜨끈했고. 식사는 대부분 입에 맞았다. 한나절정도 돌아다니면 제법 많은 방들이 호화롭게 꾸며져있어서, 반짝반짝한 것에 질릴 정도였으니.
점심이 지나고, 저녁이 지나서. 헬리오스가 자신의 궁전으로 돌아가 세상에 짙은 밤이 내리앉으면 궁전의 불이 모두 꺼졌다. 침대로 오라는건가요 뿅. 호화로운 침실에만 작은 불이 켜져있으니 침실 벽에 난 작은 창가에 가만히 기대어 바깥을 바라보고 있자면 손 하나 불쑥 시야를 막고선 다른 손이 팔뚝을 쓸어내어 손을 부드러이 쥐었다.
"낮 동안 적적하지는 않았소?"
"나쁘지 않았어요 뿅. 당신이 누구일지 잠깐씩 생각하기도 했는데, 인간이 궁금해 하면 안될 것 같았어요 뿅."
호기심이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이상한 욕구 아니던가. 보통 신의 노여움을 산 이들은 호기심이 화근이기도 했었으니.
"눈은 왜 가리나요,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신랑이라니 좀 웃겨요 뿅."
"나는 그대가… 이왕이면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라오. 내 겉모습이 아니라."
"사랑인가요, 뿅."
가만히 등을 기대면, 느껴지는 것은 단단한 육체였다. 그러고보면 제 눈을 한 손으로 가릴 정도니 그 손이 제법 크고 투박한 것도 같았다. … 눈을 감아 자신을 암흑 속에 내던지고 나면 방의 불이 모두 꺼지고, 투박한 손이 자신의 몸을 번쩍 들어 이불 위에 놓여지고 나서야 살금 실눈을 뜬다.
눈을 떠도 전부 암흑이였으나, 손이 닿는 곳에는 전부 그가 있었다. 이불이 제법 푹신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날씨가 아직도 제법 쌀쌀해 새벽에는 추워서 깨기일쑤였으니.
"밤에 추워할 것 같아서. … 이걸로는 부족한가?"
"부족해요 뿅."
천천히 손을 더듬어 이름 모를 신랑의 손을 더듬어 올라가, 팔뚝을 잡아 끌면 의중을 알아챘는지 부드럽게 끌어안아 함께 누웠다. 이불도 빼먹지 않고 꼭꼭 덮는 것이 제법 야무지다.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뿅."
"그거는 좀 고민을 해봐야 하지 않겠소?"
"당신, 남편, 여보 중에 골라보세요 뿅."
"... … 당신. 당신이 괜찮은 것 같소."
"좋아한다고 여기까지 부른 사람 치고는 소극적이에요 뿅."
한참 말이 없었다. 정곡을 찔린걸까? 더듬더듬 팔뚝이며 어깨를 쓸어주며, 단단하고 근육의 윤곽이 도드라지는 몸이 조금 마음에 들었다. 키는 나보다 한뼘쯤 큰가? 확실히 거구라는 인상이였다. 천천히 등허리를 문질러주는 손은 괜히 불리해지니 나를 재우려 하는건가, 짐작이 아마 맞을 것도 같았다. 실제로 졸리기도 했으니…
"소극적이라 미안하오. 부끄럼을 많이 타서 말이지."
"그 점이 제법 귀엽군요 뿅."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요 뿅. 너무 많이 놀리면 도망갈까봐 무서워요 뿅."
"... 그러면 오늘은 이만 주무시오. 피곤했을텐데…"
"응, 잘자요 뿅."
문제가 생겼다.
정말 아주 큰 문제다.
에로스가 사랑에 빠져 프시케를 저택에 들여서 밤마다 얼굴도 안보고 끌어안고 잠만자는-물론 신은 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기 때문에 그냥 밤 내내 사랑하는 이를 안고있을 뿐이다.- 운명에도 없던 생쇼를 하던게 벌써 스무밤이다.
남의 사랑에 관여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지. 화살이 손을 떠나고 나면 행복 혹은 행운을 빌어줄 뿐이였다. 키가 큰 덕에 활을 한두번 교체하기도 했지만 업무에 지장은 없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하루에도 몇번이나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간을 헤아리는 것만 빼면. 프시케를 만나기 전과 같은 상태였으나, 남들이 보기엔 정신이 빠졌나 싶은 것이다.
"그정도면 멀쩡한 편 아니에요? 제우스님은 사후처리도 안하잖아요."
"정우성 요즘에 안맞았지?"
"뭐 틀린 말 했나… 그 사람도 거기 저택에서 행복하게 잘 살면 상관 없지 않아요? 인간들 보다는 님프들이랑 노는게 재밌고…"
"님프는 없는데?"
"네?"
"형 진짜 미쳤어요?? 아니 인간을 아무도 없는 저택에 그냥 가뒀어요? 얘기하거나 같이 놀 사람도 없이? 밤에 가서 안아주기만 하고? 진짜 짐승이다… 왜 아주 발목도 부러트리지 그러셨어요 침대에서 못나가게… 나였으면 벌써 혀 깨물었다…"
5분쯤 지나고, 올림포스에는 아폴론이 까불다가 에로스에게 암바 걸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무튼, 훌쩍훌쩍 울고있는 정우성은 내버려두고 잠시 생각했다. 말 수가 적은 인간이기는 했지만, 그냥 혼자 있는 것과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있는 것은 아무래도 다르겠지. 본의 아니게… 사랑하는 이를 외롭게 두었다는 생각이 들면 가슴 한켠이 시큰하니 죄책감만 가득이라… 내가 천하의 개새끼마냥 굴고있지 않나.
우는 놈 달랠 생각은 없었으니 그대로 두고, 남을 일들을 처리하다 보면 평소보다 늦은 시간이라 급하게 저택으로 돌아갔다. 최악이구만, 심지어 신부는 제가 괴물인 줄만 알고있겠지. 인간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었을텐데도, 제 욕심에 이끌려 외롭게 지내주고 있는게 고마울 따름이다.
피곤했는지 방 안은 이미 어두워, 누워있는 이의 윤곽만 어렴풋이 보일 뿐이였다. 침상에 잠깐 걸터앉아서, 사과하고 돌려보낼지 사과하고 다시 끼고 살지 고민하다보면 절로 한숨이 길게 새나왔고.
고민에 빠져 사랑스러운 신부 일어나는 것도 몰랐으니. 뒤에서 끌어안으면 제법 놀라 머리 속이 새하얘졌다. 슬금슬금 제 손 보다 부드러운 손길이 억센 날개 돋아난 등판을 살살 쓸어내며 뼈와 날개의 형태를 따라간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당신은 제 품에 다 못 안길 정도로 커요 뿅."
"목소리도 다정하니 좋고요 뿅."
천천히, 광배서부터 위로 슬슬 손끝으로 훑어 목덜미까지 올라오면, 등판에 가만히 얼굴이 기대온다. 심장소리를 들키진 않았을까? 체온이 너무 올라가진 않았나?
"손이 나보다 큰 사람은 오랜만이에요 뿅. 마디가 굵어서 좋아요 뿅."
"등에는 날개가 억세고 커요, 잘때 불편할 법도 한데 뿅."
굳은살 박힌 손바닥에 손이 느릿하게 겹쳐지면 쥘 생각도 못하고 긴장만 할 뿐이였다. 귓가에 들리는 것은 전부, 사랑스러운 속삭임 뿐이라…
"오늘은 왜 안아주지 않나요 뿅?"
"당신 심장 박동이 쿵, 쿵, 쿵 하고. 빠르게 뛰어주지 않으면 이제 잠이 안와요 뿅"
그 손은 기어이 얼굴까지 올라와 천천히 두툼한 입술이며, 도드라진 광대뼈, 쌍꺼풀 진 눈두덩이, 까슬하게 밀어버린 둥근 두상… 하나하나 기억하듯이 어루만지면 불을 켠 것도 아닌데 손끝으로 자신의 얼굴을 들켜서. 품에 다 안지도 못하면서 제 날개까지도 제 품에 담겠다는 양 힘껏 안아옴에 망설임은 사라졌다.
"프시케, 요즘 외롭지는 않소?"
"밤이 오기만을 기다려요 뿅. 낮에는 기다리는 것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네요 뿅."
"난 괜찮으니까 당신 편한대로 해요 뿅."
몸을 돌려 함께 누우면, 신부의 품은 꼭 바다와 같았다. 눈을 감으면 두근거리는 심장박동 소리가 들려오고. 이불에 살이 스치는 소리가 바스락대면 해변가 모래를 밟는 소리라. 품 가득 차게 자신을 끌어안아 토닥이는 손길에 잠을, -분명 신이라면 필요하지 않을-휴식을… 그것은 아마 잠든 것은 아닐 것이다. 보통의 신들은 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으니. 그러나 에로스는, 사랑하는 신부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새근새근 인간의 얇은 숨이 파도소리처럼 들려와서, 내 신부의 품에는 바다가 있었구나. 바다를 품었으니 날 이 한 품에 다 담고 싶어하는 거겠지…
에오스의 손가락이 밤의 장막을 걷어내면 하늘은 희뿌옇고, 동트기 전 오묘한 색이 감돌아 평소보다 밝은 새벽이였다. 이쯤에는 나가 올림포스에 돌아가야 했으니, 그 바다같은 품에서 일어나면. 프시케는 자신의 눈을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여보.”
“호칭이 바뀌었구려, 프시케.”
“당신도 바꿔주는건 어떨까요 뿅. 그 이름 말고 다른걸로 부른다던가 뿅.”
“두번째 이름이 있소?”
“이명헌.”
“명헌.”
“나는 여보, 당신은 명헌. 이렇게 부르기로 할까요 뿅.”
“그렇게 합시다. 결혼이 아직인데 이래도 되나 싶지만.”
“안했나요 뿅?”
말문이 턱 막혔다. 아, 참… 눈을 가리고 있어서 다행이였다. 지금 제 얼굴은 벌겋게 물들어 사과가 비웃을 정도였으니. 어린애마냥 서툴게 허둥거리는 것은 얼마 안되는 시간 안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 탓으로 돌렸다.
“아무튼… 다녀오겠소. 명헌, 오늘은 조금 일찍 올테니 걱정 마시오.”
“잘 다녀와요, 여보 뿅. 올때에 내 눈 가릴 검은 천 한자락 가져와 주시면 고맙겠어요 뿅.”
허연 피부에 검은 천이라니. 자극적이지 않은가! 일단 알았다고 머리 한번 쓸어주고서는 일어나 창 밖으로 나갔다. 뭐 이래 사랑스러운 이가 다 있는가. 언제 아프로디테의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르는 최악과도 같은 사랑이였으나 신부의 품에는 바다가 있었으며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자신을 보듬어주는 손길이 있었다. 결혼식이라도 해서 관계를, 확정짓는건 어떤가. 생각이야 있었으나 계획을 앞당겨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프로디테는 아름답도 드라마틱한 사랑이야기라면 감동해 마음이 약해지곤 하니까…
또 한참, 시간이 흘렀다. 연인이라기에도, 반려라기에도 애매한 관계의 두사람이 끌어안고 쉼이 필요하지 않던 이가 잠 아닌 잠, 그저 휴식을, 위안을, 안정을 얻은지가 또 일주일을 훌쩍 넘겼다. 그간 예식에 대해서 생각했다. 옷이야 뭐, 보이지 않는 시종들이 사이즈를 대강 알고있었다. 꽃이라면 대부분 좋아하는지 저택 정원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낸다. 마땅히 말할 이가 없었으나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하거나…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을 한다는 보고에 에로스는 강아지나 고양이라도 한마리 얻어올까 물어보았으나 프시케는 정원이 망가질거라며 말렸다.
저택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지 벌써 한달이 되었다. 늦은 밤, 평소보다 늦은 시간이였다. 에로스는 늦은 탓에 급하게 창문을 넘어 들어왔고. 먼저 자고있는 프시케의 이마를 사알 문질러주고 나서 곁에 누웠다. 어제와 다를바 없는 밤이다. 셀레네가 친 밤의 장막이 짙어지면 불 꺼진 방에는 빛 한점 들지 않았다.
그래야 했다.
감은 눈꺼풀 너머에서 빛이 휙 지나감을 깨달아 눈을 번쩍 떴다. 작은 등불에서는 얇은 실연기 한자락 피어오르고, 화살과 실수가 점지해준 최악의 신부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깊은 그림자 드리운 그 얼굴은 처음 봤을때와 다를바 없어, 깊은 눈 가득 자신의 남편이 어찌 생겨먹었는지 바라보고 있었으니. 확 몰려오는 것은 부끄러움과 당혹스러움 비슷한 것이 뒤엉킨 감정이였다.
"여보, 그거 아시나요 뿅."
"당신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다른 인간과 얼굴도 모르고 결혼을 했겠죠 뿅."
"그건 참 마음에 들지 않아요 뿅."
"얼굴도 모르는 이와 어찌 사랑을 하겠냐고, 생각했어요 뿅."
"당신은 알겠죠? 인간의 머리가 얼마나 아둔한지요 뿅."
"그치만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은 것은 너무해요 뿅."
나긋하게 내려앉는 목소리. 등불은 침대 옆 협탁에 내려두고서는 에로스의 단단한 몸 위로 올라타 허리를 숙인다.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아나요 뿅?"
"… 오늘이 꼭 한달 되는 날 아니오?"
"내일은 원래 내 성인식 날이였어요 뿅."
"내 생일이라는 뜻이죠 뿅."
귓가에 천천히 속삭임에 에로스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생일이 지나면, 프시케는 완전한 성인이 된다. 원래라면 성인식 후에 정해진 사람과 결혼하고, 결혼식에서 얼굴을 처음 본 이와 한평생 살 운명이였겠지. 보통의 인간이라면, 그렇게 사는게 표준이였다.
"생일선물로 당신 이름만 좀 알려주지 않겠어요?"
"이름만. 내일부터는 다시 평소처럼 같이 있어요. 오늘까지는 성인이 아니니 더 조르지 않을게요."
노골적이지 않은, 은근한 속삭임이였다. 아니, 조르지 않겠다고 말했으나 그 말을 기점으로 신현철은 제 몸 위에 올라탄 이의 허벅지며, 몸의 단단함과 부드러움을 필요 이상으로 의식하여 투박한 손이 떨려올 정도라. 진정은 커녕 떨리는 손으로 텁 이명헌의 허리를 잡았다. 손바닥으로 전해오는 체온과 두께. 엄한 생각을 하지 않는게 더 어려울 정도라 머리가 빙글 돌아버리는 것만 같아져 눈을 꾹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고.
“참, 내가 좀 무심했구려…”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뿅. 이름은 알려줄건가요 뿅?”
“신현철. 지금까지 그랬던대로 편하게 불러주시오.”
“현철 여보.”
“하나만, 하나만 해주시오…”
신현철은 웃었다. 심장이 폭주하는 것 처럼 뛰어서가 아니라, 제 위에 올라탄 이가, 지금까지 본적도 없는 아름다운 미소로 자신을 내려다 보았기에.
"당신이 누구인지는 중요해요 뿅. 겉모습이 아니라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좋아하게 되니까요."
"과일의 색을 좋아하더라도 결국 입에 담는 것은 그 안의 알맹이이듯이."
"나는 아주 오래도록, 이곳에 있을 작정이에요."
"신의 분노를 사더라도, 여기 있겠다고 맹세하죠 뿅."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로디테는 이 상황을 알고있었다. 당연한 일 아닌가? 어린애만하던 에로스는 갑자기 거구의 성인이 되었지, 프시케는 증발했지, 매일 밤마다 에로스는 슬그머니 사라져 아침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으니까. 누구든 지레짐작 하는 것이다. 둘이 정분이라도 났나… 별 상관 없는 일이다. 아프로디테는 이미 프시케 일에 대해서 까먹었다. 때마침 아레스와 드라이브 하러 나가기로 해서, 오래전에 까먹은 것이다.
"그 말, 책임질 수 있소?"
"내 말을 뭘로 들었나요 뿅."
통통한 입술을 조금 비죽이다가 등불을 끈 이명헌은 평소와 다를바 없이 신랑을 안고 누웠다. 이정도면 마음이 전해지지 않았을까, 두근거리며 귓가에 울리는 2인분의 심장박동이 사랑스러웠다.
빈틈없이 꽉 끌어안은 채로, 느린 숨을 뱉어내면 내일도 오늘과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눈을 감고 나서야 자정이 지나지 않았나, 이제 성인이구나 뿅.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 … 생일 축하하오."
이명헌은 소리죽여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