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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후회

왹져 | @BByongjeossi

신현철이 이명헌의 사정을 모조리 알고 있었다면.

에로스가 인간 프쉬케의 두려움, 고독을 외면한 채 자신만을 사랑해 달라 했던 오만함을 생각하고 글을 써보았습니다.

"그래서, 무슨 생각 중인 건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현철은 책상 위의 정갈한 남색 공책을 뒤적였다. 꼭 인쇄소에서 짜 맞춘 듯 명헌의 책상에는 같은 공책들이 즐비했다. 이런 걸 어떻게 구분도 안 하고 알아보는 건지.

 

 

4월 16일

 

또 말이 턱턱 막힌다. 입이 그날처럼 닫힐까 봐 무섭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려워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피곤해.

언제쯤 그냥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이제 베시는 수명을 다한 듯하다. 이제 뭐로 바꿔야 하나...뿅? 용?

전부 바보 같다. 그렇지만 이거라도 붙여야 겨우 입이 닫히지 않는다.

바보 같은 말투를 쓰면 그래도 사람들이 덜 무서워한다. 말도 먼저 걸어주고. 

 

나도 언젠간 먼저 말을 걸어야 할 텐데.

 

 

'무슨 말이지? 그거 장난으로 붙이던 거 아니었나?' 

 

 현철은 일기를 툭 덮고선 한쪽 눈썹을 삐죽 올렸다. 1학년 때부터 농구부에 들어와 같은 방을 쓰게 된 지금까지 1년. 그 1년 동안 저 녀석은 그저 농구를 미친 듯이 잘하고 그것 외에는 관심이 없어 보이는 녀석이었다. 가끔가다 이상한 어투를 쓰는 걸 제외하면. 

신현철은 궁금해졌다. 늘 제 주위에는 파리와도 같이 사람이 꼬였다. 집에서 운영하는 커다란 과수원에서 나무 밑에 썩어 떨어진 과일 주위로 모이는 파리처럼 언제나 말이다. 쾌활한 성격과 시원스러운 웃음. 종종 사람의 상태를 기민하게 알아차리는 섬세함은 각박하고 고된 삶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꿀과도 같이 달아서 어지간한 사람들은 그의 주위를 맴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명헌은 그 늘상에서 벗어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저 녀석의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말투와 무표정 속의 진심은 뭘까.

 

적어도 내가 보이긴 하는 건가?

 

꽤 오만한 생각이었다. 자신의 인맥 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은 없었는데, 쉬이 품어지지 않는 그에 대한 호승심, 그것에서 비롯된 호기심은 결국 그릇된 관심으로 그를 이끌었다.

 

 

 

 명헌의 책상 밑에는 늘 베이지색 종이로 된 상자가 하나 놓여있었다. 뭘 넣어 놨길래 박스 안에 넣어놨나 싶어 안을 열어보니 위에 올려둔 공책과 같은 종류, 같은 색상의 것이 몇십 권은 들어있었다. 앞에는 년도, 어떤 것은 같은년도에 월별로 몇 권이 나열된 노트도 있었다.

 

"이게.... 이게 그러니까 다 일기라는 거지."

 

하...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 골 안에 꼭꼭 숨겨놓은 생각을 종이에 줄줄이, 그것도 제 눈앞에 적어놨다는 것이. 이것으로 그의 생각을 간단히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 참.... 허탈했다. 

 

"그러면 어디 숨겨놓기라도 하란말이야. 허술하게 책상 밑에 갖다놓지말고..."

 

 현철은 가장 오래된 일기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일기를 들여다보며 드는 생각은.... 얘는 무슨 이런 걸 굳이 적어놓지? 였다. 밥이 맛이 없다느니, 수업이 재미없다느니. 선생님 머리에 파리가 앉았다가 떨어졌다느니. 거의 실시간으로 생각을 적어놓은 듯한 내용들이 빽빽이 공책을 채우고 있었다. 개중에는 자신이 읽으면 안 되는 내용도 들어있긴 했었으나, 그건 이미 일기를 연 순간에 후회하기엔 이미 늦은 일이었다. 

 

 

꽤 오래전의 일기다. 연도로 봐선 초등학생 때인가.

 

1월 3일

집에서도 말하기가 싫어진다. 입이 닫히는 건 내 잘못이 아닌데. 누구도 나를 탓하진

않았지만 다 내 잘못인 것만 같다. 더 이상 부모님이 나를 볼 때마다 짓는 표정을 보고 싶지 않다.

선택적 함...뭐였지, 어렵다. 아. 함묵증.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도 갑갑하다.

입이 그만 다물어졌으면 좋겠다. 나도 어제 본 만화의 히어로 얘기를 하고 싶다.

물론 걔는 말투가 조금 이상했지만. 뿅이 뭐야, 뿅이. 

 

 

...남은 일기들을 그냥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훑었다. 마침 이명헌은 집에 내려간다고 자리를 비웠으니 누가 들어올 걱정은 할 필요 없었다. 이런 집념이면 얼마 전 회로 실습에서 조금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친해져야겠다고 생각한 친구에게 오히려 반감을 살만한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잠시 마음이 찔렸지만, 그렇다고 지금 읽고 있는 것을 덮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까, 이명헌은.... 한동안 사람들 앞에서 말을 못 하는 학창 시절을 보냈다. 지금의 과묵하고 조용하고, 농구밖에 모르는 무서운 이미지는 그때의 오해들이 따라와 생긴 것 같았다. 다가가고 싶으나 명헌은 그럴 수 없었고, 또래도 다가오지 않으니 그는 당연히 실력으로라도 이해받을 수 있는 농구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겠지. 

명헌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일반 학생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조금 더 위축되고 조금 더 위태로워 보이는 정도. 하고 싶은 말도 짧은 몇 단어 사이에서 전달하느라 표현하지 못한 감정들이 뭉치고 뭉쳐진 상태인 것 같았다. 

 

그저 뿅과 농구 뒤에 가려진 제 또래일 뿐이었다. 

"야 현철아."

"응?"

"이명헌 오늘 안보이던데, 너 같은 방 쓰지 않아?"

"흠..."

 

 그러고보니 오늘 명헌의 몸이 전체적으로 굼떴다. 깨우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던 놈이 몇 번 흔들어야 일어나고, 구보도 구령은 제대로 뱉었으나 몇 번 발을 헛디디는 것 같던데. 어디 아픈가? 분명 같이 교실에 들어온 것까진 기억이 났었는데 말이다. 키가 커 늘 뒷좌석, 햇볕 드는 창가 자리에 앉아있는 놈의 책상이 비었다. 흰 커튼만 바람에 나부껴 그 위를 간질이고 있었다.

 

 

"잠시만."

"야 어디가 곧 수업 시작인데...!"

 

 친구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뒤로하고선 신현철은 자리를 비운 명헌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체육관에는 당연히 없었다. 체육 창고도 들여다봤는데 먼지 냄새만 매캐하게 풍길 뿐 아무도 없었다. 괜히 굴러다니던 농구공이나 몇 번 튀겨보고 다른 곳으로 걸었다. 수업 중에 학교에 학생이 갈 만한 곳은 딱히 없었다. 옥상에도, 혹시나 해 찾아간 보건실에도 명헌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생각났다. 일기장. 며칠 전에 몸 으슬거린다는 내용을 썼던 걸 봤던 것 같은데. 그게 아니더라도 일기장에는 땡땡이치는 곳이라도 적어놨겠지 싶어 기숙사로 달려가 방문을 열자 침대에 이불을 머리가 보일락말락 하게 덮은 채 웅크리고 있는 명헌이 보였다.

 

 

"이명헌…? 야, 명헌아. 수업 안 가고 여기서 뭐 해."

 

꼭 훔쳐보러 온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놀라 부른 그 이름 뒤에 부러 침착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쥐어흔들었다. 손바닥에 닿는 어깨가 불덩이 같았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뜨거울 수가 있을까. 

 

"야, 얀마. 너 괜찮...냐? 너 열이.... 세상에."

 

 이 미련한 놈은 입을 닫은 채 저 아프다는 얘기도 안 했다. 아침에 깨울 때도, 구보 때도, 심지어 같은 반 교실로 들어가는 와중에도 말이다. 골 속에 그리 생각을 담아두면 좋은 걸까. 좋아서 담아두는 것이 아닐 텐데, 현철은 제게 말해주지 않는, 답답하게 끙끙 앓으며 제 물음에 대답도 못 하는 저 치에게 서운함이 섞인 화가 났다.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되나. 

 

 이제는 정신을 차리라며 명헌의 몸을 흔들어보는 손길이 더 너무할 지경이었다. 그저 눈을 감은 채 열에 꼴딱꼴딱 넘어가려는 숨을 쉬는 명헌을 얼른 끌어안아다 보건실을 향해 달렸다. 백팔십의 남정네를 드는 것은, 아무리 제 힘이 따라준다고 하더라도 조금은 버거운 일이었다. 급한 상황에서나 나올 수 있었던 힘이었으리라 생각한다.

 

 

 

 

흰색 길쭉한 합판이 짜 맞춰진 천장을 바라보며 이명헌은 눈을 떴다. 분명 제 위에 다른 침대가 보여야 할 텐데, 이상하다. 땀으로 흠뻑 젖은 침대가 아닌 서늘하고 조금은 딱딱한 침대에 얇은 이불도 이상했다. 코끝을 스치는 소독약 냄새를 맡고 나서야 이곳이 보건실임을, 멍한 머리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온 기억이 없는데.'

 

시선을 이곳저곳 두다 보니 수업 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얼마나 잔 거지. 그리 궁금하지는 않았으나 집중할 것이 없어 그저 물끄러미 틱틱거리며 시계를 돌고 있는 바늘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드르륵.

"어, 깼냐." 

'신현철...? 보건선생님이 아니고 왜 네가.'

 

 어느덧 시간은 점심시간을 지나 있었기에, 아침은 고사하고 점심도 못 먹은 채 잠들어 있는 명헌이 걱정되어 매점에 가서 빵이며 뭐며 바리바리 싸 들고 보건실로 들어왔다. 마침 보건 선생님이 점심 드시러 자리를 비우신 게 다행이었지. 현철은 사 온 것을 그의 품에 안겨주고서 간이 의자를 하나 끌어와 침대 옆에 앉았다. 아픈 것을 들어다 보건실에 갖다 놨다고 입이 터져서 제게 조잘조잘 말을 쏟아내는 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그저 봉투를 끌어안고 고마워. 한마디만 짧게 털어놓는 모습에 아까의 서운함이 다시 치미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신현철은 아픈 놈한테 어째라 저째라 제 감정을 밀어붙일 만큼 쪼잔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시원스럽고 뒤끝 없는 성격에 사람들이 달라붙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미련한 놈에게만큼은, 왜 이런 감정이 드는지. 생각을 갈무리하기 전에 말부터 튀어 나갔다.

 

"넌, 그렇게 혼자인 게 좋냐."

"...?"

 

또 대꾸도 않고 멀건 얼굴로 눈썹만 삐죽 올린 채 바라본다. 그러나 지금 머릿속에는 끓어 넘칠 듯 생각이 가득하다는 걸 이제는 안다. 결국 현철은 삼키려던 말을 한숨과 함께 늘어놓았다.

 

"아니, 우리. 말이다. ...너 나랑 1학년 때부터 농구부인 건 알지. 그리고 지금은 같은 반에 방도 같이 쓰고 있고. ... ...하, 있잖냐 명헌아. 있잖아." 

 

현철은 몸을 침대 쪽으로 더 기울여 그의 둥그런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서 생각이라도 읽을 것처럼.

 

"우리 그렇게 먼 사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이런 거까지 숨길 정도로 내가 불편하냐?"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렇게 한 문장이 툭 튀어나왔다.

 

"...적어도 나한테만큼은 말해줄 수 있잖아."

 

 그렇게 말하며 어느새 손가락 끝이 하얘질 만큼 꽉 붙들고 있던 침대 시트 끝자락을 발견하고 헛기침을 하며 손의 힘을 풀어내 그것을 놓았다. 친구라는 말을 덧붙여 정의하기엔, 제게 벽을 치고 있는 명헌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서운함이라는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만한 사이여야 이런 감정도 갖는 거지 싶어 그저 쓸어버렸다. 

쓸어 '버린' 줄 알았는데, 말이다. 

감정은 먼지와도 같아서 한쪽에 쓸어둔다고 어디론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잊어버린 채 쓸어버린 감정들은 그저 쌓이고 쌓여 어디로 쏟아버리지 않는다면 자기도 모르게 재채기하듯 튀어나오고 만다. 

 

 현철이 그에게 '나한테만큼은'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명헌의 일기를 보고 혼자 멋대로 키워버린 감정이었다. 나만은 너를 알고 있으니 나에게는 말할 수 있지 않으냐는, 그런 오만한 생각이었다. 

그 점을 명헌은 몰랐다. 그저, 어쩔 수 없이 세워진 벽을 뚫고서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인 이는, 그가 처음이었다. 

'혼자 있고 싶지 않아.' 실은 명헌의 생각의 요는 그것이었다. 

 

이번엔 명헌이 덮고 있던 이불을 양 주먹으로 꽉 쥐었다.

 

"... ...현철아."

 

 명헌이 현철의 이름을 그리 친근히 부른 적이 있을까. 명헌은 마음속에서 몇 번이고 그렇게 부르는 것을 상상했지만 상상하던 것을 내뱉어놓으니 어색해서 시선이 더 아래로 떨어졌다. 멀찍이 떨어진 것만 같던 그가 이름을 부르니 제 곁에 있는 것이 실감이 났다. 하얀 시트 자락을 바라보며 그는 몇 마디를 어렵사리 꺼내 놓았다.

 

"...나, ...나, 너한테는 말을...해도 되는 거야? 뿅?"

 

 어미를 떼고도 이름이 나오다니. 신기했다. 아직 문장을 말할 때는 붙었지만, 언제부터 제 마음속에 그가 이리 편하게 느껴졌는지. 명헌도 명헌 나름대로 현철에게는 공유하지 않고 멋대로 키워버린 감정으로 그에게 말을 거는 것에 부채감이 일었다. 이런 감정을 너는 모르겠지. 열로 말라 버석한 입술을 꾹 짓씹었다. 

 

"...그래."

 

마침내, 그가 제게 말을 걸어온다. 그의 시선이 이쪽을 바라본다. 위태로운 몸짓으로 제 쪽에 명헌이 머리를 기대왔다. 

 

네가 이제야 나를 보는구나. 

 

 명헌은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간 이해받지 못해 서러웠던 외로움 중 하나가 풀리자 마음이 와르르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명헌은 그런 조여지지 않은 감정에 덜컥 겁도 났지만, 그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기에 그저 마냥 좋았다. 열로 달뜬 얼굴에 굳은 표정의 가면이 파스스 흩어진다. 배시시 웃는 얼굴이 드러난다. 

어미가 빠진 말이 입 밖으로 걸어나갔다. 

 

"...고마워." 

 

 

 

 이명헌은 점점 현철에게 마음을 열어갔다. 자의로 세우지 않은 벽 안의 세상 속에 머물 적이 언제인지도 모를 정도로 빠르게 말이다. 두려워했던 것들과는 다르게 그와는 신기할 정도로 말이 잘 통했다. 죄 자기 더러 무슨 생각을 하는 줄 모르겠다고 말했는데. 꼭 짜 맞춘 것처럼 좋아하는 것도 비슷했고, 식성도 비슷했다. 

현철과 같이 다니며 느낀 것은, 그는 늘 주위에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다. 주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것은 자신이었지만, 농구부 내의 돈독하고 파이팅 넘치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것은 현철이었다. 그 때문에 그의 곁에서 걸을 때면 저를 볼 때마다 긴장하던 부원들의 낯이 누그러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을 볼 때와는 다른 낯들. 새로웠다. 현철과 있으면 늘 새로운 경험이 다가왔다. 명헌의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새롭게 자리 잡은 감정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날마다 2층 침대에 서로 다른 천장을 바라본 채로 두런두런 머릿속에 그득했던 생각들을 조금씩 공유하면 감정이 자라느라 마음속이 간지러웠다. 그러다 가끔 말 끝에 어미가 붙어 나오지 않을 때는 놀랐고, 그럴 때마다 침대 프레임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그때의 미소를 입에 단 채 현철을 바라보면 그는 마주 웃어주었다.

 

 

현철은, 명헌의 시답지 않은 생각들을 듣는 것이 좋았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일기를 볼 적만 해도 남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므로 일단 품 안에 들이면 금방 질리리라 생각했던 것들이 자꾸 귀를 끌어당길 줄은 몰랐다. 그래, 저 웃음. 저 웃음 때문이리라. 

길가의 새 꽃을 발견한 아이마냥 어미 하나 붙어 나오지 않았다고 그리 해맑게 웃는 고등학생이 어딨나, 싶었다. 

그래 그 미소 탓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기숙사 바닥에 앉아 잠이 오지 않을 때처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 말할 적마다 조금씩 움직이는 그 옆얼굴에 홀린 듯 입을 맞추고 좋아한다는 말이 흐른 것도, 그냥 다 이명헌의 미소 탓이었다. 

 

 

2학년의 중반, 점점 현철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 명헌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늘 꾸준히 노력하고 연습 말미에도 몇 번이나 더 연습하는 성실한 동오, 엄청난 인내심을 지녔지만, 표현할 때는 할 줄 아는 낙수, 유머러스하고 부드러운 성정을 지닌 부주장 성구. 아직 그들에게는 어미 떼고는 말이 안 나와서 이상한 말을 붙이며 말을 건네지만, 그래도 그걸 이상하게 보진 않았고 주장만의 개성이라 생각하는 좋은 친구들이었다.

명헌은 더 이상 이따금 느껴지던 소외감이 어느 순간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현철 덕분이었다. 제 벽을 두드려 깨주던 그 덕분이었다. 그래서 다시금 다짐했다, 이 마음을 언젠가는 먼저 표현하리라.

 

그러나, 현철에게는 이 변화가 못마땅했다. 내가 두드리고 부숴 열어놓은 벽의 구멍은, 다른 부원들도 드나들라고 만들어놓은 것은 아닌데. 명헌은 이제 자신에게만 생각을 공유하지 않았다. 어미를 떼고 말할 수 있는 상대는 여전히 자신뿐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남들과 비슷한 위치로 전락하는 미래는 상상하지 않았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때는...나도 고작 좋은 친구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처음 느꼈던 애정은 어느새 마음을 달구다 못해 화상을 입혔고, 그 자국엔 질투만이 남게 했다. 질투는 곧 현철의 성격에 맞지 않는 조바심과 불안을 일게 만들었고, 졸 지에는 그로서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고독을 불러일으켰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겠어.'

 

현철은 그때처럼 명헌과 자신의 방으로 뛰어갔다. 그는 이미 명헌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지만, 더 깊게 이해하고 싶었다. 남들보다 더 깊게. 그가 자신에게 말을 튼 이후부터의 일기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일구기 시작한 사랑의 땅에 너는 아직 씨를 뿌리지 않았으니, 이 사랑은 불균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미 마음속이 추수할 적인데, 너는 줄 마음도 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이 풋내나는 위태로움을 견딜 수 없었던 현철은 그렇게 다시금 실수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명헌은 점심시간에 보이지 않는 현철이 걱정되었다. 교실, 체육관, 혹시나 들른 보건실.... 어디를 가도 보이지 않는 현철이 이상했다. 혹시 그날의 자신처럼 어디 아파서 방에 있으려나 싶어 방으로 돌아갔다. 

 

"현철아, 어디 아ㅍ..." 

 

열려있는 문틈으로 보이는 현철은 눈에 익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자신의 남색 공책을 들고 안의 내용을 빠르게 훑고 있었다. 오히려 충격은 명헌의 입을 다물게 하지 못했다. 몸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성큼성큼 그의 어깨를 한 번도 쥐어본 적 없는 힘으로 쥐어 당기며 한 번도 내뱉어 본 적 없는 날 선소리로 그를 대했다.

 

"... 너, 왜 내 일기를 들고 있어?"

 

현철은 말이 없었다. 그저 노트를 쥔 손을 느릿하게 내리고선 마찬가지로 놀라 휘둥그레 떴던 눈을 끔뻑여 갈무리하더니 바닥으로 내렸다. 

 

"왜 내 일기를 들고 있냐고, 신현철. 그거 내 일기잖아. 내 일기는 아무도...아무도 보면 안 되는...건데. ... ...뿅."

 

말미에 다시 어미가 붙었다. 턱이 점점 움직이기 힘들어졌다. 아아. 이제는 명헌의 눈이 크게 뜨이기 시작한다. 머리부터 몸이 차갑게 굳어가는 느낌이 오랜만에 그를 덮친다. 

 

바보 같게도, 현철은 자신의 잘못보다는 질투에 눈이 멀었다. 마음을 데어 버린 사람은 이미 질투에 눈이 멀어 제대로 연인을 마주할 수 없었다. 제 연인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어미 붙였네. 나한텐 안 그랬잖아." 

"지금 그게 중요해 뿅? 너 지금 내 일기를 멋대로 본 게 잘못..."

"니가...!"

 

현철은 들고 있던 일기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일어섰다. 제게는 말하지 않았던 명헌의 시간들이 바닥에 떨어진다. 성큼성큼, 두어 발짝 그대로 명헌에게 다가가 굳어버린 그의 어깨를 양손으로 그러쥐었다. 위협적인 몸짓과는 다르게 목소리는 꼭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니가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하고 자꾸...미련하게 구니까...볼 수밖에 없었던 거야. 명헌아.

...그때 내가 어떻게 너 아픈 거 알았게. 니가 룸메인 나한테조차 얘기 안 하고 끙끙 앓던 거, 며칠 전부터 몸 으슬거린다는, 일기장에만 쓴 그 내용 봤던 게 기억나서 방으로 온 거야."

 

"언제부터...대체...뿅..."

 

 현철은 민 지 얼마 되지 않은 까슬한 제 머리를 투박한 손으로 문질렀다. 갑갑한 마음이 그래도 가시질 않았다. 명헌에게 화만 바짝바짝 오르는 제 상황이 이해되질 않았다. 오히려 질타를 순순히 받아야 하는 것은 제 쪽일 텐데. 어째서 나는 화를 내고 있는가. 하지만, 이미 터져버린 울분은 그조차도 쉽사리 막을 수 없었다. 

 

"...1년 전. 1년 전부터야. 알겠어? 우리 사귀기 전부터. ...근데, 넌 그때랑 바뀐 게 없네. 나한테 말하지 못할 말들, 남한테 털어놓듯 여기에 적어놓는 걸 보면...나한테는 얘기할 생각이 없는 거잖아. ...나도 답답해. 나라고, 나라고 감정이 없는 줄 알아?"

"... ...신현철. 뿅."

그를 부르는 명헌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마치, 코트 위에서 작전을 지시할 때만큼 아무런 감정이 없는 그 목소리는 되려 현철을 자극했다.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 끓어오르는 마음에 차가운 물을 뿌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미안하다. 억지로 기대게 만들어서. ...혼자 살아갈 수 있는데 억지로 입 열게 만들어서. ...넌, 내가 그저 버팀목으로밖에 보이지 않겠지, ...너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여태껏 몰랐잖아."

현철은 그렇게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난 네가 유일했는데."

그가 없는 빈자리에서 그렇게 어미도 매달지 않은 말이 절박한 걸음으로 걸어나왔다.

 

 

 

이 어린 사랑이 끝난 것은 서로 말로써 정의하지 않아도 마음속으로 이미 정해버린 일이었다. 2학년의 말미에 벌어진 끈적한 타르 같은 감정싸움은 서로의 마음을 검게 얼룩지게 했다.

이명헌은 사람을 겉으로만 대하는 것에는 이미 아플 만큼 능통한 사람이었고, 그것은 현철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보다도 친하고 마음이 통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둘의 사이는 마치 속이 빈 대나무와도 같았다. 겉으로만 단단히 이어진, 같이 보낸 시간으로만 연결된 사이. 그 때문에 서로에게는 몰라도 다른 부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 

3학년의 중반, 누구 하나 말할 것 없이 입시를 핑계 삼아 농구에서 손을 뗐다. 자연스레 기숙사에서도 마주치지 않았고, 다른 수업 과정을 택했던 두 사람의 수업이 겹치는 일도 없었다. 

 

 

 현철의 마음속 화상의 자국은 이명헌만큼 큰 흉으로 남았다. 신현철은 여전히 제 주위에 붐비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나름의 삶을 이어갔다. 하지만 늘 나오던 적당한 반응과 여유로움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보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향한 그들의 진심과, 그들의 웃음과 애정이. 그간 시시한 것이라 치부했던, 파리떼라 치부했던 것들의 무게가.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마음 한구석이 아파질 적마다 깨닫게 되었다.

 

 이명헌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는 어미를 기워 붙이며 남은 학창 시절을 보내고 새로이 대학 생활을 맞이했다. 그는 좁은 인맥에서 헤엄치고 싶지 않았다. 몇 다리 건너면 현철의 이야기가 들려왔기에 사람을 어떻게든 더 만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 처절한 몸짓은 누군가를 더 떠올리게만 했다. 어떤 사람의 부족한 이해심을 느낄 때면 오래간 동떨어졌던 제 마음을 어루만지듯 바라보던 현철의 깊고 조용한 시선이 떠올랐고, 또 다른 사람의 튀어 나갈 듯 밝은 에너지를 느껴 버거울 적에는 진중하고 차분하며, 묵묵히 제 뒤를 받쳐주었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결국엔, 아무도 신현철만큼 자신을 깊게 바라봐주지 않았다. 집념이든 집착이든 뭐든 (설령 그것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없었더라면 자신이 이렇게까지 열릴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잊고 싶었다. 다시금 혼자가 되었다는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어, 명헌아! 여기, 여기!"

북적이는 고깃집의 좌식 테이블, 낙수는 손을 들어 추위에 코끝이 빨개진 채로 두리번거리는 명헌을 자리로 불렀다. 

제XX회 산왕공고 농구부 동창회

그렇게 적어 메일로 회신을 돌렸지만, 가게에서 마주한 얼굴들은 자주 보던 그 얼굴들이었다. 다들 공고 출신답게 뿔뿔이 각지면 다행이고, 각국으로 흩어져 모이고 싶어도 모일 수 없었다.

더벅하게 자란 머리 위의 눈을 탈탈 털어내고선 자리에 훌쩍이며 멋쩍게 앉았다. 

 

"오랜만이다 명헌아, 회사는 잘 다니고?"

"뭐...그냥 사는 게 그렇지. 얼마 전에 거래 하나 엎어져서 엄청 깨졌어."

"천하의 이명헌 주장이 거래 엎고 윗사람한테 깨지는 꼴도 듣네!"

"참나...시끄러워."

 

느지막이 자리를 비집고 앉으면 주위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컵에 맥주를 그득히 담아 건넸다. 하지만 이명헌의 시선은 익숙한 그 얼굴 중에 그리웠던 얼굴을 찾기 바빴다. 내주는 술을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 열기를 띠기 시작한 시선은 그와 반대로 사그라드는 기대에 아래로만 떨어지고 있었다.

 

"뭐야, 한 대 피우고 왔더니. 다 부어라 마셔라냐. 섭섭하게 같이 좀 마시지."

 

익숙한 목소리에 둥그런 눈으로 급히 뒤돌아 올려다본 곳에는 그때와 같은 현철이 머물고 있었다. 크게 변하지 않은 스타일과 말투에 꼭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것만 같은 착각마저 일었다. 그 때문에 어색한 말투에 다시 그때와 같은 어미가 딸려 나왔다.

 

"혀, 현철...삐뇽."

"어~? 으하학. 이명헌 또 이런다~"

 

이미 거나하게 취한 친구들은 둘 사이의 어색함을 감지하지 못한 채 그리운 말투를 쓰는 그의 어깨를 잡으며 웃어대기 바빴다.

 

"...오랜만이네, 그거."

 

현철도 조금 전과는 달리 짐짓 말을 멈췄다 뱉으며 남들은 느끼지 못하는 어색한 기류에 휩쓸렸다. 현철은 이미 술기운에 조금 달뜬 뺨을 한 명헌의 옆자리를, 제 자리는 이미 남이 차지하고 있다는 핑계를 대며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거, 큼...잘 지냈냐?"

"그냥...삐뇽."

 

분명 고쳤을 터인데 그의 앞에서는 여전히 마음과 다르게 그 말투를 쓰게 되었다.

 

 

 

어색한 기류에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옆 친구들은 그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부어라 마셔라 술을 따라 주었다. 서로 말을 엮을 거리가 더 없었기에 둘은 그저 주는 대로 받아마시며 그렇게 뇌를 흐물흐물하게 녹여갔다. 

그러다 이명헌이 말했다.

 

"너, 나 열났을 때 손 주물러줬던 거 기억나?"

 

노곤하게 취해서 긴장이 풀렸던 탓일까, 그때처럼 어미가 붙어 나오지 않은...달큰한 말투로 열이 오른 뺨을 제 어깨에 기대며 그는 그렇게 접어둔 추억을 꺼내어 말했다. 

 

"...넌 열 많은 편이잖아. 근데 주물러줄 때는...신기하게 시원했었어. ... ...있지, 나 다른 사람들 손 많이 잡아봤는데...그런 적 없었거든. ...그래서 아직도 신기해." 

 

명헌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초점이 맞지 않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손을 뻗어 걱정스러운 몸짓으로 제 손을 얼러주었던 그날처럼, 현철의 손을 가만히 쥐고선 느릿하게 주물럭거렸다.

술이 아닌, 다른 이유로 벌겋게 변해가는 현철은 그가 기대온 무게에 다른 사람이 다가올 적처럼 마음이 따끔거리지 않았다. 그제야 느꼈다. 이 마음의 흉은, 너를 만나서야만 낫는 것이라는 것을. 그간의 고통은 그리움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현철은 보건실의 그날처럼 명헌의 멍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생각을 읽고 싶다는 마음은 없었다. 그저 열기만을 나누고 싶었다. 

그제야 서로의 마음은 비슷하게 일구어졌다. 그간의 서러움은 곡식이 여물기 위한 풍파였던 것처럼. 

 

타닥, 마주하던 시선에선 불꽃이 일었으나 현철은 그것을 애써 무시했다. 이 한순간의 불로 망치지 않고 아껴온 밭을 다시금 태워버리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손을 주물러오던 손길은 밀어냈으면서도 조금 더 편히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내주었다.

 

"...명헌아. 데려다줄게, 가자."

"... ..."

 

이명헌은 말이 없었다. 밀어내는 손길에선 그때만큼 다정함이 느껴졌기에,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지금은 기다려야 할 때라는 것을 은연중에 자신도 느꼈다. 

 

"야, 잘 마시고들 가라. 정산해서 보내고. 얘 너무 취해서 난 얘 데리고 집 갈게."

"아 뭐야, 승진했다고 빼는 거 봐라. 말술 신현철 다 뒤졌네."

 

아쉬움으로 아우성치는 친구들을 뒤로한 채 흐느적거리는 명헌을 이끌어 제 어깨에 이듯 부축했다. 묵직한 이 무게가 꼭 그를 안고 복도를 내달리던 그날을 떠올리게 해, 저도 모르는 웃음이 비싯비싯 샜다. 집으로 가는 길의 걸음이 두 명 분이 아닌 한 명 분인 것 마냥 가벼웠다.

 

침대에 푹 고꾸라져 자는 그 모습에서는 열에 달떠 정신이 없을 때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술기운으로 뜨뜻해진 그의 손을 가만가만 주물러주었다. 

치사하게도, 현철은 들릴까 말까 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한마디를 내어놓았다.

 

"...미안해. 명헌아. ...바보같이, ...바보같이 한참을 돌아서 오게 만들고 말이야."

 

치사하게도, 명헌은 그때도 지금도 깨어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제 손을 주물러주는 손길이 졸음에 의해 멎을 때까지 고른 숨만 내뱉고 있었다. 

 

 

 

 

커튼을 쳐두지 않아 햇살이 들이치는 창문 탓에 명헌은 눈을 찌푸린 채 굳은 몸을 일으켰다. 소파에 가서 자지, 바보같이. 여전히 침대 쪽으로 끌어다 놓은 의자에서 현철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여전히 제 손등을 덮은 그의 손에서 슬며시 제 손을 빼냈다. 

집중할 것이 없어 이번엔 현철의 손에 잠시 시선을 내렸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제 외투 주머니를 뒤적여 지갑을 꺼냈다. 

 

"분명...여기 있을 텐데."

 

언제였을까, 겨우 손이나 잡고 바깥을 걸을 시절에 싸구려 반지를 주고받았던 기억이 왜 지금 떠오를까. 명헌은 제 지갑을 뒤적였다, 분명 동전을 넣는 칸이었지만 탈탈 털어보면 예상과는 다르게 툭,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금색 반지가 하나 손바닥에 굴러떨어졌다. 

 

"... ...바보같이. ...우리는 왜 그렇게 방황해야만 했던 걸까."

 

손바닥에 올려놓은 반지를 조금 굴리고 있었을 즈음에 어느새 깨어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현철은 그의 혼잣말에 대답을 흘렸다. 

 

"...필요했으니까."

"...악!"

 

놀라서 뒤로 휙 던지는 반지를 현철은 탁 잡아채고선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노, 놀랐잖아, 그...깼으면 말이나 하지..."

"...아직 갖고 있었네."

 

언제 떠왔는지 미지근한 물 한 잔을 명헌에게 건네고선 현철은 자연스럽게 침대 옆 협탁의 서랍을 열었다. 늘 하는 몸짓인 것처럼 벨벳으로 감싸진 작은 상자를 소중히 꺼내고선 그 안을 열어 보고 가만 웃더니 그것을 명헌에게 보여주었다.  

 

"...안 버렸네. 너도." 

 

그렇게 말하는 명헌의 목소리가 조금 일렁였다.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떠다 준 물을 급히 마시며 시선을 돌리려던 찰나, 현철은 명헌의 왼손을 잡았다. 

정확히는 약지를. 

명헌이 놀라 던졌던 반지를 현철은 마치 명헌의 손이 유리로 조각된 것처럼 조심스레 쥔 채로 끼워넣기 시작했다. 한 번도 떨리리라 상상해본 적 없는 그의 손이 지금은 그 긴장이 느껴질 정도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현, 철아."

"...다시 시작해보자. 명헌아."

 

두툼한 입술이 입 안으로 말려들어 가더니 잇새에 몇 번이고 씹혔다. 긴장으로 한껏 굳어진 그의 어깨에 명헌이 다른 손을 올렸다. 그때는 늘 자신이 기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러나 서툰 감정으로 인해 이제야 다시 만질 수 있는 그 너른 어깨를 가만히 쓸어주며 아직 다 나오지 않은 그의 말을 기다렸다. 

현철은 이제야 솔직히 말할 수 있었다. 바보 같은 감정으로 점철되어 상대를 볼 수 없던, 그 시절과는 달랐기에. 그렇기에 이제야 입 속에 되뇌던 그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나 네가 그리웠어. 정말, ...그때는 미안했다. 명헌아. ...너랑 다시 시작해보고 싶어."

떨어지지 않는, 굳어가는 입으로 겨우 몇 마디를 뱉더니 현철은 명헌에게 벨벳 상자를 쥐여주었다.

 

"...끼워줄래? 네가, 나랑 같은 마음이라면."

 

여전히 버리지 않은 낡은 싸구려 반지를, 현철은 그간 소중히도 보관했는지 칠이 벗겨지지 않은 채였다. 반지를 꺼내는 명헌의 손이 조금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단단히 잡아주던 그 손을 가볍게 어루만지고선 변하지 않을 사랑의 고리를 손가락에 끼워넣었다. 

 

"...마음(psyche)을...간직해줘서 고마워. 현철아."

"...영원히 사랑(Eros)을 줘. 명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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