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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철과 명헌

333 | @san33_333

 자신의 금 화살에 손을 찔리고 말았다. 에로스는 프시케에게 사랑을 느끼자, 몸이 갑자기 자랐다.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널리 퍼진 그리스 로마 신화에 의하면 에로스는 사랑을 느끼자 성장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철이 갑자기 쑥 큰 것도 사랑에 빠졌기 때문일까. 제가 떠올린 가정이지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명헌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뜬금없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로 입부했을 땐 평범한 신장이었던 현철이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커버린 것, 둘째로는 며칠 전 우연히 읽었던 그리스 로마 신화의 문장이 기억에 남아있던 것.

 갑자기 커 버린 신장 탓인지 요새 현철의 실수가 잦다. 그 탓에 연습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농구부의 연습은 언제나와 같았다. 헤매고 있는 건 현철이었다.

 아직 자기 키에 적응도 제대로 못 했을텐데, 적응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농구를 하니 도저히 잘 풀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현철에게선 우울하거나 실망하는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괜찮아뿅?”

 “안 괜찮을 거 있냐.”

 “아직 힘들지?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거다뿅.”

 “명헌아 그래도 난 좋다. 작은 것보단 확실히 큰 게 더 도움되잖냐.”

 그러면서 현철은 웃었다. 갑자기 큰 탓에 성장통이 어마어마할텐데도 그는 아프다는 티는 전혀 내질 않는다. 분명 힘들텐데, 무리하고 있는 것일텐데도 현철은 웃고 있었다. 그래서 명헌은 어쩐지 현철에게서 신경을 끌 수가 없었다.

 

 “난 먼저 들어간다.”

 “왠일이야? 현철아 어디 아파?”

 “그건 아니고. 너무 무리하는 것도 안 좋은거 같아서.”

 그리고서 현철 혼자만 방으로 돌아갔다. 취짐 전까지 이제 자유시간인만큼 다른 애들은 들떠있다. 마침 내일이 주말이니 다들 어디 갈지 옹기종기 모여서 회의하는데 명헌은 영 집중이 되지 않는다.

 “나도 들어가서 쉰다뿅.”

 “너는 왜?”

 “피곤해뿅. 나가서 사고치지 말고 통금 어기지마라뿅.”

 이미 나가려고 작정한 이들이 자신을 쳐다보는게 느껴지지만 명헌은 무시하며 방으로 갔다. 자신의 방이 아니라 현철의 방에.

 똑똑.

 “나 들어간다뿅.”

 방 주인의 허락은 듣지도 않은 채 명헌은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바닥에 앉아있던 현철이 고개를 든다. 손에는 얼음팩을 들고 있었다.

 “왠일이냐 명헌아. 외출 안 갔어?”

 “응. 너 이러고 있을 거 같아서뿅.”

 아니나다를까, 현철의 무릎이 발갛다. 필시 열이 몰린 탓이다. 약간 부은 것 같기도 했다.

 명헌은 현철의 곁에 앉아서 그의 손에 들린 얼음팩을 건네받았다. 현철의 입장에서는 뺏겼다고 생각할테지만.

 현철의 다리를 쭉 뻗을 수 있게 자리를 옮긴 명헌이 그의 무릎 위에 얼음팩을 올렸다. 뜨끈뜨끈한 무릎 위에 팩이 닿자 시원하다. 통증이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잠시 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어떤 말부터 꺼내야할지 몰라서였다. 궁금한건 많았고, 말을 고르고 고른다고 고민중이었는데, 제 무의식에서 떠돌던 문장이 순식간에 튀어나왔다. 의식하기도 전에.

 “좋아하는 사람 있어뿅?”

 “뭐?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는데.”

 당황한 표정의 현철이 말한다. 질문은 아니다. 명헌에게 묻는 것보다는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본인이 먼저 질문했으면서도 역시나 당황한 명헌이 아무렇지도 않은척하며 말을 이어나간다.

 “갑자기 키가 컸길래뿅.”

 “키가 큰거랑 좋아하는거랑 뭔 상관이냐? 이명헌 오늘 이상하다.”

 뜬금없는 소리인데도 현철은 무시하지 않는다. 그냥 진지하게 대답하며 명헌의 안색을 살폈다. 얘가 뭘 잘못 먹었나. 아니 이명헌 이상한게 하루 이틀은 아닌데. 손을 들어 명헌의 이마를 짚어보며 열이 나는지 체크한 그는 별 다른 이상이 없자 웃었다.

 “열은 없네.”

 평소에 키에 비해서 크다고 생각한 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손이 커보이지 않았다. 이제야 현철이 제 키를 찾아간 것 같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현철을 내려다봤는데, 이제는 현철을 올려다봐야 한다. 그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아직까지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책에서 에로스와 프쉬케 신화를 봐서뿅.”

 “명헌아 그런것도 보냐. 의외네.”

 “뭐가? 책을 읽는거뿅?”

 “아니, 내용이. 왠지 너는 스포츠 관련 서적 아니면 안 볼 것 같았거든.”

 “그건 너도 마찬가지뿅.”

 하하하. 정답이네.

 라며 현철은 웃었다. 명헌은 그를 보던 눈길을 거두고 시선을 약간 아래로 내렸다. 현철과 마주할 땐 늘 그런 자세였으니. 그러나 이제 그 시야엔 현철의 얼굴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자꾸만 버릇처럼 아래를 보는 것이다. 현철은 그런 명헌의 옆구리를 가볍게 툭 때렸다. 그러나 명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책에서 봤는데, 사랑의 신 에로스는 프쉬케랑 사랑에 빠지고 나서 어른이 되었다드라.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어른으로뿅. 갑자기 키가 큰걸 보니 그런 생각이 났어뿅.”

 “그래서 나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흘려들어뿅. 말도 안 되는거 아니까뿅.”

 그래. 그냥 해본 말이다. 자신도 알고 현철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쩐지 명헌은 현철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자신이 평소에 기행을 일삼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런 주제는 함부로 꺼내선 안 되는 민감한 부분인데.

 명헌은 손으로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때렸다. 사실 때렸다기 보다는 터치했다는 쪽이 맞을 것이다. 실수. 조심해야지뿅. 그렇게 생각하며 톡톡 입을 세번쯤 두드렸을 때, 현철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처럼 아래가 아닌 위에서.

 “명헌아.”

 “응?”

 명헌이 위를 쳐다보자 진지한 얼굴의 현철이 눈에 들어온다. 어쩐지 자신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귀가 새빨갛다. 여름이니 추워서 그런건 절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어쩐지 얼굴이 빨개지고 시선을 못 맞추는게 꼭, 꼭.

 “맞는 거 같다. 네 말.”

 “뭐가?”

 “좋아하는 사람 있는 것 같다. 아니 있어.”

 처음이다. 쑥스러워하는 얼굴. 사람의 얼굴이 저렇게 빨개질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이 떠오를 때 명헌은 자신의 얼굴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아마 자신도 현철과 그리 다르지 않을 거라는 확신히 들면서 그는 현철과 시선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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