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법 재료는 용기 한 스푼!
기연 | @7iyeon0613
내딛는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안내서를 보며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그려본 길이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명헌은 어깨에 멘 가방을 고쳐 쥐며 두리번거림 하나 없이 교문을 통과했다. 벌써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즐거움에 내지르는 함성, 무대를 마저 세우는 사람들의 고함, 서로 경쟁하듯 자기네 부스에 들러 게임도 하고 경품도 받아 가라는 목소리. 그러나 명헌은 그 어디에도 신경을 두지 않고 붐비는 사람들을 피해 걸었다. 이대로 쭉 걷다가 학생회관이 보이면 좌측으로 꺾는다. 그쪽에는 도서관과 자연과학부 건물이 있고, 그 사이에 있는 오르막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다 보면 우측에 인문학부 건물이 보인다. 그리고 그 뒤쪽,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든 작은 길이 있는데, 그곳으로 내려가다 보면 현철과 만나기로 한 장소가 있다.
그 앞에 서서 명헌은 숨을 한 번 골랐다.
현철과 명헌은 각기 다른 대학으로 진학했다. 그러나 농구를 계속하는 것은 변함이 없어서, 대학 리그에서 상대 팀으로 만났다. 게다가 두 사람의 학교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어 종종 연습 시합도 갖곤 했다. 그때마다 현철은 명헌의 다음 주 일정을 물었고, 비는 시간을 맞춰 만날 약속을 잡곤 했었다. 신입생이던 두 사람은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던 탓이었다. 그러한 일상은 작년 봄부터 자취를 시작한 명헌이 집 전화번호를 현철에게 알려주면서 조금 바뀌게 되었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던 지난주 금요일, 현철이 명헌에게 자기 학교로 놀러 오지 않겠냐고 물었다. 축제 기간이라고 했다. 명헌은 달력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명헌이 다니는 대학의 개교기념일이 축제 기간에 껴 있었다. 그 이야기를 하자 현철이 구체적인 약속 장소를 말해 주었다.
‘십 분 정도 늦을 수도 있어.’
십 분이 아니라 한 시간이라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명헌은 벌써 미안함에 물드는 목소리에 상대가 보지도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괜찮다는 대답을 조금 늦게 했다. 너 또 고개부터 저었지? 몇 초 정도 늦은 대답이었음에도 현철은 명헌이 어떻게 했는지를 안다는 듯 말했다. 절로 웃음이 샜다. 오랫동안 합을 맞춰온 사이란 그런 것이다.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그랬기에 명헌은 평소와는 달리 ‘약속 장소’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덧붙이는 현철의 말을 한 번도 끊지 않고 들어주었다.
도착해보니 알 것 같았다. 현철이 좋아할 만한 장소다. 명헌은 축제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식물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후끈한 공기에 물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소매를 걷어 올리며 명헌은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네 시 사십오분. 약속 시간은 십오분 후인 다섯 시다. 그렇다면 식물원 구경이라도 좀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명헌은 천천히 안을 둘러보았다.
식물원 내부에는 곳곳에 앉아서 식물들을 감상할 수 있는 벤치가 만들어져 있었고, 작은 연못을 만들어둔 곳도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열대 식물들이 많이 보였다. 학교 근처 주민들에게도 개방되는 공간이다 보니 학교에서 신경 쓰는 곳 중 하나라고 하던 현철의 설명이 생각났다. 하지만 오늘은 축제가 한창인 바깥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서인지 식물원 내부는 조용했다. 관람하는 사람도 명헌 자신뿐인 느낌이었다.
그랬기에 명헌은 가까이서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분명 무언가 우르르 쏟아지는 소리였다. 그 사이로 난처해하는, 여성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섞였다. 도움이 필요한 일일까. 혹시 누가 다치기라도 한 게 아닐까. 그러나 명헌의 몸은 이미 소리가 난 쪽을 향해 뛰고 있었다.
조그맣게 만들어진 연못을 빙 돌아 뒤쪽으로 간 명헌은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 당황한 여자를 향해 괜찮냐고 말을 걸면서 바닥을 나뒹구는 병을 하나둘 주워서 바구니에 담았다. 여기저기로 굴러가는 병을 따라 허둥거리던 여자는 울상으로 고맙다고 인사했다.
“이게… 책상다리가 갑자기 꺾여버려서요.”
바구니 안에 아무렇게나 던져 넣었던 병을 차곡차곡 정리한 명헌이 시선을 들어 여자 쪽을 보았다. 정확히는, 그녀가 어정쩡하게 잡고 있는 책상을 바라보았다. 들고 온 바구니를 책상 근처에 내려놓고 여자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책상을 살펴보았다. 행사장에서 흔히 사용하는 직사각형의 접이식 책상이었다. 책상의 균형이 무너졌다는 것을 보니 철제 다리가 헐거워진 것 같았다. 명헌은 여자에게 책상을 잘 잡고 있으라고 말한 뒤 몸을 낮추고 밑으로 들어갔다. 그의 생각대로였다. 다 풀려버리다시피 한 나사를 꽉 조인 뒤 책상 아래를 빠져나왔다. 여자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명헌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러더니 몸을 뒤로 휙 돌려 바구니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도와주신 답례에요.”
아, 이상한 건 아니에요! 우리 회사 신제품이에요! 사이비 종교도 아니고요! 그런 일이 왕왕 있었다는 듯 여자는 다급하게 설명했다. 애초에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던 명헌은 네에, 대답하면서 여자가 내민 것을 받았다.
“요구르트?”
“네! 혹시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비법 재료는 당신의 용기 한 스푼!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여자가 묘한 자세를 취하며 발랄하게 외쳤다. 당황스러움 속에서 명헌은 흐릿하게나마 어떤 광고를 떠올릴 수 있었다. 여자가 외친 말은 몇 년 전, 반짝인기를 끌었던 음료 제품의 광고문구였다. 당시 유명한 연예인을 섭외해 만든 그 광고는 발렌타인 데이를 겨냥해서 나온 것으로, 당신의 용기를 마지막으로 넣어 완성한 음료를 통해 사랑을 쟁취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 이게 그 회사의 것인가. 그러나 제 손에 쥐어진 것은 시중에서 판매되는 흔한 요구르트로, 뭔가 특별해 보이는 디자인도 아니었다. 제품명도 특기할만한 것이 없었다. 요구르트의 이름 끝에 나비가 그려져 있는 것이 아주 잠깐 시선을 끌었지만, 그마저도 강렬한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제조업체의 이름만큼은 눈에 띄었다. 주식회사 큐피드…? 음료 제조 업체 이름으로 어울릴만한 이름은 아니었다. 회사가 큐피드면, 저 사람은 프시케인가. 명헌의 시선이 여자가 달고 있는 명찰로 향했다. 인턴이라는 글자 아래에 이니셜 P가 단정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건 상관이 없는데 왜 요구르트인 거지? 당시에 인기를 끌었던 제품도 요구르트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얼굴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왜 요구르트냐고 생각하는 거죠? 여자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머쓱해진 명헌은 뒷머리를 한 번 긁적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왜 요구르트냐고 개발팀에 물어본 적 있는데, 글쎄 이게 회장님 지시라는 거예요. 뭐라더라… 여러 번 나눠 먹지 말고 한 번에 꿀꺽 삼킬 수 있는 크기의 제품이면 좋겠는데 그게 딱 요구르트병 크기였다는 거죠.”
“아… 네, 그렇네요.”
“그러다 보니 또 궁금해지는 거예요. 왜 한 번에 꿀꺽 삼켜야 하지? 여러 번 나눠 먹으면 안 되나 싶어서 그렇게 말했더니 뭐라고 한 줄 알아요?”
“어, 글쎄요.”
“우리 비법 재료가 뭐였는지 기억하시죠?”
명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용기라고 하셨죠. 여자는 활짝 웃으며 손뼉을 짝 쳤다.
“그래요, 바로 그거 때문이래요. 용기를 가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용기가 생기면 그 뒤는 일사천리라고요. 그러니 마지막 비법 재료로 완성한 제품은 한 번에 꿀꺽 삼켜야 하는 거라고요.”
좀 억지이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듣다 보니 영 엉뚱한 말도 아닌 것 같았다. 용기를 가지기 전까지 걸리는 시간. 그것을 사랑과 결부시켜 이야기를 해보자면, 고백하기까지 마음을 먹는 시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고백을 실행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어쩌면, 찰나에 가까운 순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용기를 가진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우리 회사의 모든 제품은 절절한 마음을 가진 구매자들이 가까스로 끌어모은 용기로 완성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제품으로 인해 구매자가 용기를 가질 수도 있으니까요.”
“용기를 가질 수 있다고요?”
“네.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정말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럴 때는 탓할 것이 필요하잖아요. 뭐야, 역시 이건 광고일 뿐이었잖아. 하고 잠시나마 툴툴거리며 아픔을 털어낼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그 사람이 용기를 냈다는 것은 변함이 없어요.”
요구르트 같은 건 계기일 뿐이죠. 여자는 바구니 쪽으로 몸을 돌려 안을 한 번 더 뒤적였다. 그러더니 명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에게 주었던 것과 똑같은 요구르트가 그녀의 손에 있었다.
“용기를 가지고 실행했다는 사실만큼은 남아요. 그 경험이 내일의 나에게 새로운 용기를 줄 수 있어요.”
계기라는 것은 그런 거죠. 여자는 빙긋 웃으며 손을 조금 더 내밀었다. 명헌은 물끄러미 그 손을 바라보다가 고맙다고 인사하며 요구르트를 건네받았다.
“좋아하는 분과 함께 드세요. 그리고 잊지 마세요.”
완성을 위한 마지막 재료는 당신의 용기에요. 봄바람처럼 살랑이는 목소리로 알쏭달쏭한 말을 한 여자는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명헌 역시 그녀를 따라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짚어 걸어갔다.
곧 다섯 시였다.
∴
질문을 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처음 만난 상대에게 모든 것을 다 알려줄 이유 역시 없었기 때문에 이명헌이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신현철을 만난 이후로 이명헌은 단 하루도, 용기를 내지 않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 애의 앞에 서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 애의 동작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고 반응하지 않기 위해서는 용기가 아닌 무엇이라도 필요했다. 친구 혹은 동료이기에 받을 수 있는 장난 어린 애정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보면 지금이 고등학교 시절보다 조금 더 편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때는 같은 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좋든 싫든 항상 그 애를 봐야 했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용기가 필요한 날들이었다. 훈련도 고되었지만, 용기를 끌어모으는 것은 더욱 힘들었기에 명헌은 기숙사 방에 돌아갈 때가 되면 녹초가 되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마음만큼은 확실히 편했다. 매일 긴장의 연속으로 지내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마음은 괜찮았다. 마음이 편해지니 몸도 괜찮았다. 이렇게 가끔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짝사랑이지 않은가. 대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의 이명헌은 그렇게 생각했다.
인정한다. 그때의 자신은 안일했다.
자주 보지 않아도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있다. 학교는 달라졌지만, 신현철과 이명헌은 아직도 농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시절처럼 녹초가 되는 날들은 아니었으나 제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신현철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또 다른 곤욕이었다. 차라리 그 애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 수 있다면, 모든 시간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예전처럼 내가 직접 알 수 있다면, 너와 함께할 수 있다면. 마음이 부서져 내리더라도 차라리 그게 나았다. 누구에게 그 애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랬기에 2학년 때 기숙사를 나와 혼자 살게 되었다고 이야기했을 때, 현철이 전화기도 설치하냐고 물어봐 준 것에 심장이 콩닥거렸다. 간만에 이루어진 학교 간의 연습 경기가 있던 날이었다. 그럼 나중에 번호 알려줘. 뿅. 명헌은 심장 소리가 들릴까 싶어 이제는 쓰지 않는 말버릇으로 대답했다. 현철은 쾌활하게 웃었다.
몇 주가 흘러 명헌은 전화기를 설치했다며 전화번호를 현철에게 알려주었고, 그날 밤에 바로 그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통화하는 시간이 되었다. 이명헌이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 된 것도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탓에 명헌은 현철의 말을 놓쳤다. 툭, 팔뚝을 건드리는 감각에 퍼뜩 정신을 차린 명헌이 옆을 돌아보았다. 가늠하듯 가늘어진 눈을 감았다 뜨는 현철의 입에서 한숨이 흘렀다. 무어라 대꾸하려다 명헌은 그저 머리만 긁적일 뿐이었다.
“쉬어야 하는데 내가 괜히 불러낸 거 아니야?”
“아니… 뿅.”
“그게 아니면,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평소와 다름없는 눈빛에 걱정이 스쳤다. 명헌은 그 얼굴에 숨어 있는 다정함을 안다. 보기와는 달리 예민하고 세심한 성정은 산왕공고 농구부원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것이었다. 명헌은 그 다정함을 좋아하는 동시에 싫어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돌아가는 다정함은 무관심보다도 훨씬 뼈아팠다. 그런데도 이명헌은 신현철의 주는 다정함을 놓칠 수가 없었다. 놓치기 싫었다.
너의 관심을 온전하게 차지할 수 있다면.
현철의 질문에 무어라 대답을 해줘야 할 텐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대답하는 대신 온통 분홍빛으로 물든 세상을 바라보았다.
식물원의 입구에서 만난 현철은 함께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며 명헌을 이끌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이 벚꽃 동산이다. 식물원과 함께 학교의 명소로 손꼽힌다고 했다. 원래라면 여기도 사람이 많을 텐데 축제 기간에는 좀 한산하더라고. 우리 농구만 하느라 벚꽃놀이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잖아. 그렇게 말하며 손목을 붙잡는 손길에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른다. 언제 또 있을지 모를 꿈만 같은 시간에 집중해야 하건만, 명헌의 속은 어지럽기만 했다.
그런 명헌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벚꽃잎이다. 불어오는 바람이 벚나무를 스칠 때마다 벚꽃잎들이 하늘하늘 춤을 췄다. 위로 치솟았다가 다시 아래로 팔랑팔랑 떨어지는 꽃잎들은 독특한 선을 그리며 날았다. 그렇네. 한 가지 바람은 이루어졌구나. 아름답게 핀 벚꽃을 너와 단둘이 보고 있으니까.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명헌의 손에 절로 힘이 꾹 들어갔다. 그래서 그는 아까 전, 식물원에서 만난 여자가 건네준 요구르트를 그대로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도 모르게 엄지로 문지르고 있던 요구르트병을 쳐다보았다. 그때 상표의 끝에 새겨진 나비가 반짝거린 듯했다. 명헌의 눈이 조금 커졌다. 잘못 보았나? 나비가 반짝인 것 같았는데. 고개를 갸웃하며 요구르트병에 인쇄된 글씨를 자세히 보려고 손을 움직였다. 그 사이로 꽃잎 하나가 스르륵 날아들었다. 자연스럽게 명헌의 눈이 감겼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다. 눈꺼풀 안쪽, 꽃잎이 남긴 잔상 속에 현철이 있었다. 오랫동안 사랑한 사람.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사람. 그와 함께 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던 일 중 하나가 지금 막 이루어졌다. 눈을 뜨기 전, 명헌은 생각했다. 이것은 유일이 될까, 아니면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첫 번째가 될까.
잊지 마세요. 완성을 위한 마지막 재료는 당신의 용기에요.
나비의 날갯짓처럼 보드라운 목소리가 다시금 생각났다. 감겼던 눈이 스르륵 떠졌다. 그래, 밑져야 본전이다. 완성을 위한 마지막 재료는 나의 용기.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명헌은 쥐고 있던 요구르트 하나를 현철에게 내밀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현철의 시선이 위아래로 바쁘게 움직였다. 명헌은 어서 받으라는 듯 손을 한 번 더 내밀었다. 하, 하고 짧게 웃은 현철은 그것을 건네받았다.
“웬 요구르트야?”
“아까 식물원을 구경할 때 받았다뿅.”
“식물원?”
고개를 모로 기울인 현철이 몇분 전의 명헌이 그러했던 것처럼 요구르트병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의 손은 너무 컸고 요구르트병은 너무 작았다. 멀리서 보면 손바닥을 확인하는 것처럼 보이겠다고 생각하며 명헌은 요구르트병의 입구를 뜯었다. 그리고 단숨에 그것을 마셨다. 달고 새콤한 맛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잠깐, 이명헌! 모르는 사람이 준 걸 먹으면….”
“신현철.”
현철이 무어라 더 말하려고 입을 반쯤 열었다가 꾹 다물었다. 명헌은 사랑하는 사람의 눈동자를 정직하게 바라보았다. 거절당하면 어떠한가. 이러나저러나 아픈 것은 매한가지다. 그렇다면 고백이라도 해보는 거지. 명헌은 한 손을 뻗어 현철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현철의 시선이 손목을 향했다가 다시 앞을 향했을 때, 명헌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좋아해. 신현철, 너를 좋아하고 있어. 처음 만났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러니까, 친구 이상으로.”
현철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얼굴 위로 떠오른 감정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명헌은 짐작되지 않았다. 사실 예상되었으나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현철의 눈만을 오롯하게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대답은 하지 않아도 돼. 그냥 내가… 이기적으로 굴고 싶었어.”
키가 급격하게 크는 바람에 현철이 성장통을 앓았던 것처럼, 막을 수 없이 자라버리는 마음 때문에 명헌에게도 역시 성장통이 있었다. 현철을 마주 보고 있는 지금 역시도 성장통은 진행 중이다. 햇수로 육 년이면 오래 앓았다. 현철의 성장통은 진작에 끝났다. 그러니 명헌 또한 성장통에서 벗어나야 했다. 오늘이 지나면 두 사람의 관계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그와 함께 일상이 되어버린 전화 통화는 이제는 어렵겠지. 그건 좀 아쉽네. 하지만 경기가 있으면 잠깐이나마 얼굴을 볼 수 있으니 괜찮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사실은 괜찮지 않더라도 괜찮아야 하는 것이었지만, 어쨌든 명헌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할 말을 찾는 중인지 현철이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 명헌은 자연스러워 보이기를 바라며 잡았던 현철의 손목을 놓아주고는 시선을 천천히 돌렸다. 어차피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벌인 고백이었기에 그보다 더한 일도 저질러버릴 것 같아서였다. 명헌아. 약간의 시간을 두고 들려온 현철의 부름에 명헌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응, 하고 대답했다. 뒤이어 톡, 요구르트병의 실링이 뜯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백을 통해 덜어낸 만큼 마음이 편해진 명헌이 짧게 웃었다. 그리고 현철 쪽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모르는 사람이 준 건 함부로 먹으면 안 된다고 한 사람이 누구…. 끝맺지 못한 말꼬리가 늘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보는 친구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조금… 다르게 해봐도 좋을 것 같아.”
그런 명헌의 마음을 알 리 없는 현철이 나직이 말했다. 뜻 모를 말에 명헌이 고개를 갸웃했다. 현철은 설명 대신 요구르트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목울대가 한 번 크게 움직이는 것에 시선을 사로잡혔다. 그 때문에 커다란 손이 자신의 목덜미를 감싸 쥐고 당기는 것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은 맞닿은 입술에서 느껴지는 떨림 때문이었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절로 눈이 커졌다. 이윽고 현철의 얼굴이 천천히 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명헌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명헌아. 이름을 부르는 현철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으나 듣는 명헌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달아도 너무 달았다. 요구르트 탓인가? 그래서 달게 들리나? 바보 같다고 생각 하며 명헌은 손을 들어 입술을 만져보았다. 타인의 입술이 닿았던 감촉이 맴돌았다. 현철이 작게 웃었다. 그러더니 입술을 매만지는 명헌의 손가락 위에 한 번 더 입을 맞추었다. 몸이 절로 움찔댔다.
“왜, 안 믿어져?”
명헌은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현철은 헛기침하면서 몸을 가까이 붙여왔다. 대답이 필요 없다고 했기 때문에 그 대신 입을 맞춰놓고서는 이제 와 쑥스러워하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그래도 믿어줘. 너 지금 내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모르지.”
“응, 몰라.”
“잘못하면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아.”
현철이 명헌의 손을 잡아 올렸다. 당기는 대로 움직여보니 현철의 왼쪽 가슴에 손바닥이 닿았다. 퉁, 퉁, 퉁. 빠르게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그 진동에 제 심장 역시 자극받은 듯 빠르게 뛰었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는데… 뿅. 응, 나 지금 풀코트를 뛰고 나온 것 같아. 농담인 것을 뻔히 알 수 있는 말을 진지한 얼굴로 하고 있어서 명헌은 겨우 웃었다. 현철은 한숨 같은 웃음을 내뱉었다.
“내 친구 이명헌은 잘 알겠던데, 내가 좋아하는 이명헌은 잘 모르겠더라. 패스해주는 것 같긴 한데 확신이 들지 않았어.”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린 명헌은 현철의 품에 스르륵 몸을 기대었다. 긴장이 풀리자 힘이 쭉 빠져나간 탓이다. 잠시 멈칫했던 현철은 곧 두 팔을 뻗어 명헌을 감싸 안았다. 머리꼭지 위로 따뜻한 뺨이 닿는다. 명헌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감정에 입술을 꼭 깨물었다. 현철의 말에 담긴 진심을 안다. 자신도 그러했으니까. 친구 신현철이라도 붙들고 있어야 했던 지난 날이었다. 겁쟁이처럼 기다리기만 해서 미안해. 그랬기에 명헌은 그의 품에 안겨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팔을 뻗어 현철의 몸을 마주 안았다.
“걱정된다뿅.”
“뭐가?”
“눈을 감았다 뜨면 이 모든 일이 내가 꾼 꿈일까 봐뿅. 그러면… 어떡하지? 안 되는데… 뿅.”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에 명헌은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까만 눈동자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래서 명헌은 깨달을 수 있었다. 저를 바라보던 현철의 눈 속에 항상 담겨 있었던 애정을. 그것을 몰랐던 것은 이명헌, 자신뿐이었다.
“그러면 내가 먼저 고백할 수 있겠다.”
맑은 웃음을 터뜨린 명헌이 턱을 든 채로 눈을 감았다. 당연하다는 듯 현철의 입술이 닿았다.
바람의 방향이 바뀜에 따라 벚꽃잎들이 아래에서 위로 떠올랐다. 이제 막 탄생한 연인을 축복해주듯 꽃잎들이 춤을 췄다. 어디선가 날아온 나비 한 쌍이 그사이에 섞여 들었다. 흩날리는 꽃잎들 사이를 날던 나비들은 방향을 바꿔 벤치에 앉은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세상 가장 행복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는 연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던 나비들은 다시 꽃잎들 속으로 날아갔다. 나비들을 따라가듯 바람을 타고 상승하는 꽃잎들의 모습은 마치 거꾸로 된 세상에 내리는 눈처럼 보였다. 명헌과 현철은 서로에게 기댄 채 벚꽃잎들의 군무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만을 위한 봄의 향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