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
뇌물수수 | @kickback_love
신현철은, 색으로 표현하자면, 희었다. 희다고 해서 모두 순수하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흰 것에 검은 것을 얹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가장 간단하고도 어리석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건조한 시선을 늘어뜨렸다.
"문학소년, 뿅."
"어, 책 좀 읽어보려고."
"뭐보는데 뿅"
"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신화."
명헌은 자연스럽게 현철의 어깨에 턱을 괴었다. 어릴땐 이렇게 하면 딱 맞았는데, 점점 키가 크더니 턱을 들어야 겨우 괼 수 있게 되었다. 명헌은 그것이 불만이었으나, 굳이 소리 내어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런 말소리 따위로 깨어질 수 있는 평화가 아니었다.
"무거워."
"하나도 안무겁다 뿅."
"내가 무겁다니까 그러네."
책을 읽던 현철은 무겁다 무겁다 투덜거리면서도 명헌을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적당한 묵직함이 기꺼웠다. 그야, 그게 익숙하니까.
"뿅."
손을 들어 반대편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굵직한 뼈대하며 단단한 몸이 흠칫 떨렸다. 키득. 웃는 소리가 들린다. 현철은 그 소리가 듣기 좋아 제지하지 않는다.
"야, 이명헌."
"삐뇽."
그런 반응을 보고 있자니 재미가 들렸는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생각을 들킬 리 없는 무표정한 겉거죽을 쓰고서 인내심 있게 손을 놀렸다. 굵고 짧은 목덜미를 지나 핏줄을 따라 올라가면 말랑한 귓볼이. 그리고 더 위로 올라가면 귓바퀴와 관자놀이가. 바리깡으로 짧게 깎아버린 머리칼이. 좀 더 옆으로 옮겨가면 두꺼운 눈썹이 있겠지. 하지만 명헌의 손은 거기까지 침범하지 않고 얌전히 귓가를 맴돈다.
"됐다. 알아서 해라."
간지러움에 흠칫 몸을 떨던 현철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책에 집중한다. 아름다운 프시케가 세상에서 가장 추한 것과 사랑에 빠지게 하라는 명령이 내려지는 시점이었다. 책 내용을 흘긋 보던 이명헌은 다시 신현철의 귀를 괴롭히는데 집중한다. 한번 호기심을 보인 대상에게는 어떤 짓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잘 아는 현철은 느닷없이 자신의 귀에 집착하는 이명헌이 의아하면서도 낯설지 않았다.
명헌은 문득 흐르던 빛깔이 스러지기 전에 손을 거두었다. 집중하는 현철은 언제나 보기 좋았다. 안경을 씌워볼까, 뿅.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던 명헌은 문득 자신이 우스웠다. 친구한테 뭐하는 짓인지. 점점이 내려앉을 관계의 얼룩이 보였으나 여린 손끝으로 문질러 금세 지워낼 터였다. 저와 타인을 연결하는 끈은 어딘가 한박자씩 엇나가 선연히 바랜 색이었다.
명헌은 스스로를 찔러버린 에로스의 마음을 안다. 에로스는 바다 저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노을의 색이 다양함을 알았다. 늦은 오후에 바스라지는 햇살의 온도가 여러가지라는 것을 알았다. 인간의 심성이라는 것이 열 네가지 하고도 또 두어가지를 더 가진 빛깔이라는 것을 알았다.
"현철."
"엉?"
"여기서 더 크면 안된다 뿅."
"하! 뭔 뚱딴지 같은 소리야."
"진심이다, 뿅."
딱 이대로. 지금 이 위치가 좋았다. 네가 고개를 숙이지 않고, 내가 뒤꿈치를 들지 않아도 되는 이 위치가. 에로스는 한번도 어린 아이였던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은 알아보지 못한 프시케의 탓이었다. 그러니 너는 영영 모르는 채로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