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날렵하게 빠진 구두가 대리석으로 칠해진 복도 위를 거침없이 누빈다. 모난 데 없는 걸음걸이가 내는 정박의 구둣발 소리. 명헌은 복도 끝에 놓인 문에 카드키를 댄다. 소음 하나 없이 고요하게 열린 문은 그대로 명헌을 집어 삼킨다. 텅 빈 복도에 클래식한 총성이 울린다. 연주는 비로소 절정이다.
“죽어 있었던 거 아냐? 뿅.”
“살아 있었어.”
“눈 돌아갔던데. 막, 이렇게.”
죽을 만큼 좋았나보지. 테이블 위를 정리하던 현철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명헌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어 시원스레 웃었다. 그리고 뜨거운 열기가 남은 총구를 현철의 등허리에 갖다 댔다. 셔츠 한 장을 사이에 두고 현철은 그것을 분명히 느꼈다. 그러나 명헌을 저지하지 않고 가방이나 열어 약을 챙겨 넣었다. 뭐야, 재미없어. 금세 심드렁해진 명헌이 코트 아래로 총을 감추고 자신의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핏방울이 점점이 튀었다. 카펫 바닥에 구두코를 문질러 닦았다.
“그 약이야?”
“어. 보름 뒤에 인천 통해서 들어올 거다.”
“오늘 뒤진 놈들만 불쌍하게 됐네. 뿅.”
“아다 떼는 건데, 어쩔 수 없잖아.”
현철이 이 밑바닥 인생들을 데리고 천국을 보여주겠다 호언장담을 한 것은, 명헌에 의해 간단히 증명됐다. 마약 때문인지, 머리통에 구멍씩이나 뚫려놓고 입에 거품들을 물고 있다. 현철이 묻고 싶은 건 딱 하나였다. 천국은 어떻게 생겼어?
명헌은 장갑 낀 손을 현철의 앞으로 뻗었다. 다부진 턱을 감싸 쥐고 저를 보게 만드니, 눈동자가 순종적으로 저를 향했다. 구두 안으로 발가락이 움찔 떨렸다.
“너도 했어? 약.”
“조금.”
“그럼 지금 기분 좋겠네.”
하자. 나 섰어. 코트도 벗지 않고 바지 버클부터 풀어 내리는 손길에 현철이 하, 비웃음 같은 한숨을 흘렸다. 가방 지퍼를 잠그고 꼿꼿이 서서 허리에 손을 짚으면 먼저 무릎을 꿇은 명헌이 현철의 앞섶에 뺨을 비볐다. 사람 죽여 놓고 그게 서냐. 현철은 타박하는 말투와 다르게 퍽 다정한 손길로 명헌의 작은 머리통을 쓸어주었다.
잘만 서는데. 죽여주게 좋으니까. 다음엔 자기가 쏴 볼래?
도톰한 입술을 살갗에 대고 문지르며, 명헌이 속삭였다. 그 소리가 꼭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느껴졌다. 현철은 그 감각을 아주 잘 안다. 죽여주게 좋다는 거.
고개를 젖힌 현철이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막 연주를 끝낸 총처럼. 명헌은 허리를 떨었다. 그처럼 자신을 흥분케 하는 것도 없다. 두 사람의 시야 끝에 머리가 터진 시체가 여러 구 걸린다. 훌륭한 연출이다. 명헌의 손길이 더욱 급해졌다. 자기야, 빨리…. 보채는 목소리가 또 한 번의 총성처럼 터져 나왔다. 현철은 기꺼이 그들의 무대를 침대 위로 옮겼다.
명헌은 깜빡깜빡 점멸하는 머리로 저가 지나온 대리석 바닥을 떠올렸다. 미감이 좋은 호텔은 천장마저 아름다웠다. 명헌은 이런 걸 좋아했다. 누군가 몹시 신경 쓴 흔적 같은 것. 섬세한 손끝이 현철의 너른 등을 끌어안았다. 가령, 이런 것. 잘 짜인 근육이라든가. 이내 명헌의 시야가 현철의 어깨로 전부 가려졌다. 아아. 아름다움이라는 건 얼마나 무용한가. 사랑하는 몸짓에 이리도 쉽게 가려지는 것을. 현철은 훌륭한 음악가가 되어 명헌의 몸 여기저기에 입술을 눌렀다. 명헌이 고개를 젖히고 신음했다. 현철이 그 잘 뻗은 목덜미를 핥았다.
“중요한 건이야…. 알지?”
“너나, 읏, 실수하지 마─”
기분 나쁜 찌라시가 돌았다.
신현철이 쁘락치라고.
명헌은 긴 다리를 꼬며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장갑 낀 손이 잘 빠진 은색 지포 라이터를 딸깍였다. 규칙적인 소음 끝에 명헌이 손짓했다. 깡통 오라 그래. 뿅. 문 앞을 지키고 선 남자가 목청 좋게 대답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그 찌라시는 누가 물어 온 거야?”
명헌이 묻자 그의 사냥개가 대답했다. 알아보겠습니다. 명헌은 내일 이 시간까지 제 앞에 무릎 꿇려 놓으라 당부했다. 사냥개는 제 주인의 기분을 기민하게 살필 줄 알았다. 실수했다간 내가 뒤지겠구나. 손톱을 다 씹어놔서 엉망이 된 손끝으로 턱을 긁적이니 명헌이 작게 웃었다. 너 그 버릇 언제 고칠래. 그 목소리가 퍽 다정해서 사냥개는 조금 전의 살기 어린 목소리가 착각이었나 했다. 시정하겠습니다. 명헌은 더 대꾸 않고 눈썹께를 문질렀다.
신현철이….
소파 정면에 걸린 수묵화를 올려다보았다. 새까만 폭포를 응시하던 명헌은 눈을 감고 고개를 젖혔다. 오직 명헌만이 안다. 제 심장이 무섭게 뛰고 있음을.
“보스 귀에도 들어갔을까?”
들어가게 하지 말라는 명령이다. 사냥개는 대답했다. 아직 모르실 겁니다. 이런 소문엔 관심 안 두시니까요. 명헌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모르게 처리해야만 한다.
명헌은 겁이 없는 현철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천성이 그랬다. 자신을 찍어 누르는 놈이 있으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매달려 진창으로 끌어내리는 놈이다. 약이라곤 손도 대본 적 없다더니 처음 엑스터시를 목 뒤로 넘긴 날,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타깃을 정확하게 찾아내 생포했다. 물론 봉고차가 떠난 자리에서 그대로 고꾸라졌지만. 그 앞에 무릎을 굽혀 앉은 명헌이 손가락 두 개를 펼쳐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명헌아. 이명헌.’
‘이게 몇 개인지 알아보겠어?’
‘너 지금 내 앞에서 꽃 흔들고 있지…. 프러포즈야? 결혼은 이르지 않냐.’
구정물에 처박힌 백구십이 넘는 거구를 앞에 두고 명헌은 크게 소리 내 웃었다. 손가락이야, 병신아. 진짜 웃겨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그럼 현철도 실실 웃었다.
‘너 웃는 건 보여. 잘 보여.’
코피가 엉망으로 번진 얼굴을 하고도 명헌을 똑바로 쳐다봤지. 거짓말 같은 걸 할 수 있는 놈이 아니다. 그렇게 믿었다. 명헌은 사람을 볼 줄 안다. 이제껏 제 육감 하나만 믿고 가지치기하듯 잘라온 목숨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리고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명헌은 한쪽 장갑을 벗고 재킷 안주머니에 든 핸드폰을 꺼냈다. 현철. 두 글자로 저장된 이름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길게 가지 않고 현철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 어, 왜.
“나 슬슬 퇴근할까 해서. 뿅.”
- 사무실로 모시러 가?
“하하. 그럴래?”
- 그래. 여기도 정리 다 된 참이었어.
“얼른 와. 보고 싶다.”
- 뿅도 안 붙이고 뭐냐, 이명헌. 오빠 차에 시동 걸었다.
기분 좋은 목소리였다. 현철의 웃음소리 뒤로 차에 시동이 걸리는 소음이 들렸다.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게, 꼭 살아 있는 것 같다고 좋아하던 신현철. 봐. 거짓말 같은 거 할 줄 모르잖아. 명헌은 꼬고 있던 다리를 풀어 테이블 위로 길게 뻗으며 대답했다. 나 지금 섰는데, 이거 죽기 전까지 와야 될 걸. 뿅.
- 네 개새끼랑 떡 치고 있다 걸리면 그 새끼 죽어, 명헌아.
“응. 방금 그거 들렸나 봐. 옆에서 벌벌 떨고 있네…, 귀엽게.”
끊는다. 뿅. 수화기에 대고 짧은 입맞춤을 남긴 명헌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타이밍 좋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고 깡통이 머리를 내밀었다.
“부르셨다고요.”
“신 이사가 쁘락치라는데.”
뒤 좀 캐 봐. 말을 마친 명헌이 손짓하자 뒤에 서 있던 그의 충견이 긴 담뱃대를 내밀었다. 도톰한 입술이 그 끝을 물었다. 줄곧 손안에서 굴리던 지포 라이터를 켜자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쓰읍. 담배를 빨며 깡통에게 나가봐도 좋다는 듯이 손을 저어 보였다. 허리를 깊게 숙인 녀석이 그대로 사무실을 나갔다. 명헌의 얼굴은 차가운 밀랍처럼 굳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