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은 특권이고 계급이다. 익인 학교의 모두가 그 사실을 알았다. 비행 거리나 속력은 타고난 핏줄에 따라 달랐지만, 날개 달린 것들은 하나같이 시치미 떼는 일을 잘했다. 명헌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제 등에 달린 홑겹의 한 쌍은 성장을 멈추고 나서도 볼품없이 흐느적거리고, 제 몸을 겨우 50cm 남짓이나 띄울 수 있을 뿐이지만. 어쨌든 저 역시 익인이었다. 곤충의 날개는 한없이 비루하다. 그러나 자존심이나 긍지, 수치심과 같이 추접한 것들을 덮어 감추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입학 직후 교과서를 받는 일보다 먼저 접수한 버디 신청이 방금 막 통과되었다. 단짝, 친구. 허울 좋은 뜻과 달리 미처 덜 자랐지만, 아마도 장차 유망할 상류층 익인들의 뒷바라지를 도맡는 자리였다. 비참한 알맹이에도 상류층 인맥을 빌어먹거나 재학 중 성적표에 꽤 짭짤하게 보탤 수 있는 가산점 덕분에 명헌처럼 힘없는 익인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경쟁이 치열한 만큼 신청할 수 있는 조건 역시 까다로웠다. 버디가 되기 위해 명헌은 지난 1년간 비행을 제한 모든 과목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이 세계는 특히 곤충 날개를 단 족속들에게 차갑고, 그중에서도 나비 날개를 단 후카츠들에 대한 처우는 최악이다. 상류층이 먹고 싸는 열매의 수분이나 담당하다 다 저문 꽃잎 속에 묻히면 그만일 한미한 계급. 애초에 익인 사회의 축소판인 학교 안에서 이렇게 오래 살아남은 후카츠는 명헌이 유일했다. 그러니 성적대로라면 입학식 대표 선서와 함께 달았을 버디 배지가 지금에서야 가슴에 자리한 것도 새삼 놀라거나 억울할 일이 아니었다. 슬렁슬렁 점심을 먹으며 배지와 함께 받은 봉투를 느즈막이 뜯었다. 받자마자 부리나케 교복을 뚫게 한 배지와 달리 담당할 익인에 대한 그 어떤 기대도 없는 무심한 손짓이었다. 필요한 건 드디어 가슴 위에 빛나는 둥글고 차가운 굴욕의 상징이지 번듯한 출신을 가지고도 제 앞가림 하나 못하는 온실 속 화초가 아니었다. 대강 훑어본 서류 속의 소년은 저와 1년을 함께할 화초는 갓 입학한 카와타로, 반은 7반. 이름은 신현철이었다.
“...카와타,뿅.”
이건 꽤 흥미롭긴 했다. 승인을 해줄 듯, 아닐 듯 그렇게 애를 태우더니 웬일로 학년 수석 금칠을 한 번 해주고 넘어갈 모양이었다. 덕분에 서류를 끝까지 읽을 힘이 생겼다. 꼭 나이를 지켜 입학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카와타들은 좀처럼 저들이 정해둔 정규 코스를 벗어나는 일이 없는데 서류의 소년은 저와 동갑이었다. 1년이나 늦은 입학의 이유가 궁금했는데 바로 다음 줄에서 납득했다. 165cm. 금칠은 개뿔. 아무리 피땀을 흘려봐야 먹고 남은 것이나 주워 먹는 도둑고양이 취급이다. 저 멀찍이 구름 옆에 떠 있어도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날개를 가진 카와타들은 그 커다란 깃에 맞춰 장신에 거구가 대부분이었다. 사실 대부분이라기보다, 그러지 않으면 카와타가 아니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명헌이 담당하게 된 화초는 ...
“내가 옮길 수도 있겠다, 뿅.”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날개에 아로새겨진 본능이 이토록 무섭다. 옮기고 퍼뜨리는 일에 속절없이 즐거워하고 만다. 간만에 등 속에 잠들어 있는 홑겹에 힘을 줘 계단을 대여섯 개씩 뛰어내리면 서류 위 카와타의 교실까지 금방이었다. 도착한 문 너머로 왁자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시치미를 떼는 것만큼 무게 잡는 일을 좋아하는 상류층 익인들을 모아놓은 학급이다. 평소라면 사소한 날갯짓도 소음으로 들릴 만큼 엄숙할 텐데. 그 가운데 불쑥 불거져 나오는, 방금 읽다 온 서류 속의 이름은 더욱 낯설게 들린다. 괜스레 침을 넘기고 문을 열자, 그 안에는.
맹세컨대 지금까지 본 어떤 한 쌍보다 크고 아름다운 날개였다. 문소리에 금방 접혀 그 모양을 숨기긴 했지만, 똑똑히 보았다. 드물게 당황해 차마 발을 들이지 못하고 멀뚱히 서 있자 금방 걸상 위의 비행복을 주워 입은 날개의 주인이 명헌 쪽을 돌아보았다가 인상을 비스듬히 구기며 다가왔다.
“이명헌이지?”
쉽게 펼쳐 내민 손바닥이 날개만큼 널찍했다. 한참 그 위의 손금을 세다 정신을 차리고 겨우 맞잡았다. 금칠이, 맞네. ...뿅. 뱉은 본인 외에 누구도 의미를 모를 말에도 호쾌하게 입꼬리를 올린 현철이 잡은 손을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었다. 잘 부탁한다.
신현철은 꽤 괜찮은 화초였다. ... 정정하겠다. 상당히 괜찮았다. 카와타에서 나올 수 없는 신장 덕분에 기형으로 의심받아 연구소에 감금되다시피 있느라 입학이 늦었다는 나름 어두운 사연이 있는데도 별 구김 없이 호방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유구하게 작았던 탓에 상류 익인 사회에도 제대로 섞이지 못한 것인지, 제 학우들은 보모나 다름없이 취급하는 버디를 태연히 친구로 대했다. 명헌은 금방 현철이 내미는 귀한 간식들에 익숙해졌다. 현철의 커다란 기숙사 개인실 서재에 전세를 내는 날이 차츰 늘어났다. 그러나 무엇보다 달콤한 것은, 언제든 원하기만 하면 현철의 등에 달린 그 웅장한 날개를 두 눈에 담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그 위에 누울 수도 있었다. 희고 풍성한 깃털에 파묻혀 가만히 책장을 넘기다 문득 팔을 뻗어 어깨깃을 더듬어도 현철은 놀라지 않았다. 그저 엎드린 채 명헌이 뽑아 온 책을 뒤적이다가 저도 똑같이 팔을 뻗어 명헌의 머리통을 몇 번 쓰다듬을 뿐이었다. 간혹 무리한 요구를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 요구를 무리하다고 표현하기엔 명헌은 이미 현철의 깃털을 제멋대로 주무르는 것으로 모자라 몇 가닥 뽑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에 비해 현철의 부탁은 단출했다.
“네 것도 궁금한데.”
“싫다, 뿅.”
“지는 내 거 베개로 쓰면서.”
“내 건 베개로 쓸 수 없으니까 그러지, 뿅.”
“야박하긴.”
그러면서도 명헌을 밀어내거나, 날개를 접어 넣지 않는 현철을 빤히 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묘했다. 그래도 티 내지 않고 이번에는 꽤 깊숙이 손을 파묻어 단단한 뼈대를 더듬는다. 강도에 비해 가벼운 뼈는 속이 비어있다고 들었다. 피를 타고 계승되는 거대한 몸뚱이를 말 그대로 깃털처럼 가볍게 견인하기 위함이다. 그 질서정연한 빗살을 더듬다 보면 자연스레 상념에 잠겼다. 이 뼈를 흉내라도 낼 수 있을 만한 금속은 뭘까. 어떤 엔진을 달아야 이 위에 붙은 풍성한 깃털들보다 강한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헌아.”
“...”
“명헌아!”
명헌은 한번 무언가에 골몰하면 통 주변을 신경 쓰지 못했다. 그래서 부르는 소리도, 다급히 손목을 붙드는 힘도 한 박자 느리게 전해졌다. 눈을 끔벅이자, 붉어진 낯의 현철이 침대에 붙였던 몸을 일으키고 색색 밭은 숨을 뱉고 있었다. 예민한 부분을 건드렸구나. 제 홑겹에도 유독 그런 부위가 있었다. 얌전히 손을 거두고 날개 위에서 미끄러지듯 몸을 떼어 내자 후, 한숨을 내쉰 현철이 다시 엎드리며 날개를 온전히 폈다.
“미안, 뿅.”
“됐어. 그냥 놀란 거야. ...안 눕냐?”
다시 부드러워진 목소리에 여전히 허리를 세우고 있던 명헌이 문득 이마를 긁적인다. 뒤늦게 양심의 가책이 찾아든 탓이다. 날개를 숨긴 건 그저 제 자격지심 때문이다. 그러나 제 아집을 계속 고수하기엔 현철에게 받은 것이 많았다. 대뜸 상의를 끌어 올리자 기함한 현철이 벌떡 일어나 다시 손을 잡았다.
“뭐하냐, 너!”
“뭐하긴, 딱 한 번만 보여줄 거다. 날개, 뿅.”
“아니, 그렇다고 이렇게 갑자기...”
“보고 싶어, 아니야.”
“...음.”
“...”
“... 보고 싶긴 해.”
“그럼 됐네, 뿅.”
상의를 탈피하듯 벗어 침대 한쪽에 대충 던져두고 얼른 뒤를 돈다. 혼자 있을 땐 펴 놓은 게 훨씬 편하니 드문 일도 아닌데 괜히 안면이 홧홧해 낯을 마주하기 힘들었다. 견갑골에 힘을 주자 익숙한 감각이 살을 가르고 피부를 간질였다. 현철의 것에 비하기도 민망할 만큼 볼품없고 가벼운 날개는 완전히 펼치는 데도 고작 현철의 반절도 못 되는 시간만을 썼다. 그 여백을 채우고자 괜히 깃을 펄럭여 보이는 움직임이 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퍽 안쓰러웠다. 그래서 펼 때만큼 빠르게 집어넣으려는데, 꾹 누르는 힘이 어깨깃에 닿았다.
“아.”
“미안, 넌 ...여기가 좀 예민한가?”
“... 그건 아니고 놀라서. 뿅.”
“응, 그럼 다행이고... 명헌아.”
“왜.”
“... 예쁘다.”
꼭 밤하늘 같아. 별 많을 때. 현철이 좋은 사람인 이유야말로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하지만, 그중 명헌이 가장 좋아하는 건 단연 낭만적인 언어였다. 카와타들은 대개 덩치가 크고 험상궂게 생겨서 행동까지 덩달아 투박한 경우가 많았다. 현철은 그 법칙에서도 예외였다. 이 역시 건조한 깃털로 지은 차가운 둥지와 오래 유리되어있었던 덕분일까, 아니면 그저 천성이 그런 것일까. 명헌은 전자가 좋았다. 그러지 않으면 홀로 버티며 묵묵히 쌓아온 담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굳이 초라한 날개를 펴서라도 하늘에 닿고 싶을 것 같았다. 멈춰야 한다. 시치미를 떼고 느릿하게 웃으며 다시 옷을 걸쳤다. 글쎄.
“예쁜 건 네 날개가 훨씬 그렇지, 뿅.”
“그런가, 별로. 무늬도 없고.”
“날 수 있잖아.”
“난 아직 못 나는데.”
유일하고 가장 치명적인 약점도 덤덤히 시인할 수 있는 건 그저 약속받은 유전이 든든하기 때문일까. 명헌의 몸이 제게 달린 날개에 비해 한없이 무거운 것과 정반대로, 덜 자란 현철의 몸은 웬만한 카와타들의 것을 훨씬 웃도는 제 날개를 여태 혼자 건사하지 못했다. 비행이 아니라 스스로 털을 고르는 일도 쉽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철의 불행과 결함이 명헌을 충족시켰다. 여전히 펼쳐진 채 늘어진 현철의 깃털을 골라 뽑아내며 조용히 속삭인다. 금방이야, 뿅. 독 섞인 꿀 역시 의심 없이 받아마신 현철이 입에 고인 말을 삼키며 가만히 웃는다. 그래, 고마워.
그 후로 둘은 불쑥불쑥 질문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넌 달리 원하는 게 없네. 버디를 유지하려면 그 전보다 뛰어난 성적을 얻는 게 유리했다. 그래서 명헌은 대부분 도서관에 있었고 어느 날부터는 현철도 자연스럽게 함께 했다. 획이 또렷하고 반듯한 필체를 한참 내려보다가 한 줄을 더했다. 뛰어난 성적에 비해 명헌의 글씨는 귀엽고 조금 형편없다. 신기하게도 현철은 금방 그 지렁이 기어가는 문장을 알아보았다. 처음부터 그랬다. 알아볼 사람이 하나 늘어난 덕분에 이전보다 더 흐트러지고 있는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현철의 질문이 먼저 엉망이었으니까. 앞뒤를 다 잘라먹으면 토론 수업에서 좋은 점수를 낼 수 없어용. 역시 단번에 알아본 현철이 코로 조용히 웃으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나가서 좀 쉬자, 벌써 3시간째야. 대부분 사려 깊은 현철이지만, 이럴 때는 영락없이 카와타였다. 대답은 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일어나는 등을 빤히 보던 명헌이 이내 가벼운 한숨과 함께 뒤를 따랐다.
“내 이종사촌은 자기 버디랑 결혼했어.”
“호오.”
“반응이 미지근하네. 다들 놀라던데.”
“누군지 알 것 같아서, 뿅. 비둘기들은 야망이 크지.”
“나비는 그런 야망 없고?”
“... 곤충은 현실적이고 효율적이거든, 뿅.”
토론 수업 운운하긴 했지만, 굳이 따지자면 현철은 말을 꽤 잘하는 편이다. 투박한 생김에 어울리지 않는 세 치 혀가 명헌의 신경 줄을 긁었다. 익인 사회는 소문에도 날개가 달려있어 저 정도 세기의 결혼 소식이라면 애들 모인 학교를 완전히 장악하기까지 채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물론 결별 소식도 마찬가지였다. 한 계절이 지나기 전에 현철의 이종사촌과 이혼한 그 비둘기는 제법 대단한 위자료를 받았다고 들었다. 당연히 참여하고 있던 카와타의 사업에 완전히 손을 뗀다는 조건이 달려있었다. 그래 봐야 계층 간의 교류 사업에 얼굴마담이나 시킨 걸로 알고 있는데 그마저 뿌리를 뽑아 버리다니, 아무튼 있는 놈들이 더 했다. 그나마도 같은 깃털 달린 족속들끼리의 이야기지, 고작 50cm나 뜰까 말까 한 날개로 날 수 있다고 덤벼들었다간 제일 먼저 부리에 찍혀 나가는 사냥감이 될 것이다. 그런 건 사양이었다.
그래서 더 의문스러웠다. 동족들 사이에서 아쉬운 결함품 취급받는 현철은 자연히 그런 문제와도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원래 그런 일에 관심이 없는지 명헌과 제법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도 비슷한 뉘앙스의, 그러니까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특별한 호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명헌 역시 그런 부분은 백지나 다름없었기에 현철과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니 이 시점에 굳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직전보다 가라앉은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던 현철이 목소리를 내기 전까지 영 혼란스러웠다. 역시 말의 앞뒤를 잘라먹고 대뜸 본론부터 꺼내 드는 버릇은 제 버디의 단점이다.
“입학하자마자 버디 신청했다고 들었는데. 그거 유지하려고 지금 공부도 이렇게 죽기 살기로 하는 거고.”
“그렇게 죽을 것 같진 않은데, 뿅.”
“뭐, 그게 중요하진 않잖아. 똑똑한 놈이 꼭 이럴 때 모른 척을 하더라.”
“음.”
“원하는 게 뭐야, 명헌아.”
의자에서 일어난 현철이 명헌의 앞에 바짝 다가서며 숨통을 조였다. 명헌이 아직 앉아있어 드물게 현철이 명헌을 내려다보는 그림이 되었다. 키가 덜 자랐을 뿐, 골격은 훌륭한 카와타의 것인 몸이 시야를 가리자 금방 두터운 그늘이 졌다. 어쨌든 카와타가 맞긴 하다니까용, 재수 없게. 그런 생각을 하며 부러 시선을 피한 명헌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 버디가 선량한 탓에 저도 모르게 긴장을 풀었던 모양이다. 평소라면 이런 위기 상황에 댈 변명 몇 가지쯤 늘 머릿속에 넣고 다녔을 텐데 이상하게 눈앞이 새하얗게 바랬다. 사실 별것도 아닌데 어째서인지 발가벗겨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대답 없는 명헌의 앞에 민망하지도 않은지, 한참 가만히 있던 현철이 결국 먼저 손을 뻗었다. 처음에는 까슬한 머리통, 곧이어는 귀. 마지막으로 뜨거운 손바닥이 볼에 닿았다. 도서관 내부의 공기처럼 고요한 목소리였지만, 코를 맞댄 거리에서는 들리지 않는다고 변명할 수도 없었다. 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차라리 밀어내주라.”
“안,”
“...”
“안 그러고 싶으면 어떡하지, 뿅.”
어쩌면 그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말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현철의 물음에 대한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언어가 궁색한 것은 결국 제 앞의 소년에게 안일한 거짓을 전하고 싶지 않다는 욕망에서 온 반동이라. 복잡하게 꼬인 마음 한가운데서 명헌은 처음으로 자신만을 생각했다. 현철은 명헌을 친구로 대해주었다. 이 넓은 창공에 지금껏 단 한 명, 명헌을 사람으로 여겼다. 마음에 품지 않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웠다. 맞댄 입술은 누가 더 서툴다 할 것 없이 버벅거렸지만 편안했다.
다행히 명헌은 이미 축복받을 수 없는 사랑에 면역이 있었다. 눈앞의 커다란 제트엔진은 카와타 일렉트릭에서 기증한 것이다. 흉흉한 껍데기 안에 부드러운 혓바닥처럼 자리한 프로펠러도, 팬도 아닌 것은 적어도 명헌의 눈에는 현철의 날개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구형 모델이라 전면 프로펠러가 신형처럼 많은 추력을 내지는 못한다고 들었지만 이조차도 버디가 아니었다면 영영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익인 학교의 기계 공학 관련 수업은 사실 상류층의 전유물이다. 특히 후카츠들처럼 1차 산업에 종사하는 것이 대부분인 계층은 수강 신청을 하는 것만으로도 괜한 이목을 끌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현철의 보조를 자처하면 쓸데없는 관심을 끌지 않고 실습장에 입장할 수 있었다. 물론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귀찮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이명헌, 그러다 큰일 나.”
“... 뿅.”
“닿기만 해도 네 날개는 찢어질걸.”
이 안에서 학년이나 덩치는 큰 힘이 없다. 참매들은 대개 몸집이 작고 가벼워 비행이 빨랐지만, 누구든 명헌보다 한참 눈높이가 낮았다. 그래서인지 하잘것없는 시비를 거는 경우가 많았다. 아니면 그저 포식자와 피식자의 유전자가 서로 반응한 것일 수도 있고. 어쨌든 명헌은 그런 참매들을 볼 적마다 작달 만 한 몸뚱이들을 거꾸로 들고 바닥에 내리꽂는 퍽 유쾌한 상상을 하곤 했다. 상상이라도 하지 않으면 실제로 저지를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는 새 내리는 적막은 효과가 좋았다. 힘을 가진 이들은 침묵을 쉽게 굴종과 혼동했다. 저들이 그런 식으로 굽히는 탓이다.
“야, 이명헌 괴롭히지 마.”
“... 뭘 괴롭혀.”
“저리 가, 저리 가서 너희들끼리 놀아.”
지금 현철을 대하는 태도처럼 말이다. 몇 번 입술을 비쭉이던 무리의 대장이 물러나자 곧 사위가 잠잠해졌다. 바짝 옆에 다가선 현철이 몰래 손가락을 엮으며 묻는다. 이게 마음에 드냐? 힘을 주는 마디가 이전보다 단단했다. 시선을 주자 부쩍 머리꼭지가 가까워져 있었다.
“현철. 키가 큰 것 같아, 뿅.”
“뭐... 안 크면 이상하지. 진짜 이상할 때지. 안 그래도 재봤는데 좀 컸더라.”
“무릎도 아프다고 했잖아.”
“어, 밤에 잠이 안 와 그거 때문에. 죽을 맛이다, 아주. 이상하게 날개도 쑤셔.”
“... 거기서 더 크려나 봐.”
“아마.”
“주물러주면 통증이 좀 덜하대용.”
“응?”
마사지, 같은 거. 잡은 손가락을 문지르자, 금방 현철의 귓불이 붉게 달아올랐다. 천연덕스러운 명헌의 얼굴을 돌아보는 뺨도 함께 물들어있었다. 그러면서도 잡은 손은 놓지 않아 명헌의 뱃속까지 덩달아 뜨끈해졌다. 그런 거 할 줄 알아? 물어보는 목소리가 한층 낮았다.
“뭐, 나도 안 어울리게 웃자라서 말이지. 뿅.”
“야, 뭐가 안 어울리냐... 말을 또 그렇게 해.”
“내가 후카츠 중에 제일 클 걸.”
“그런 걸로 치면 나는 카와타 중에 제일 작아. 확실히.”
“... 응, 그러네.”
덤덤하게 시선을 맞추고 눈을 깜박이자 머뭇거리던 것도 잠시, 현철이 명헌의 귓가에 손을 갖다 댄다. 이전에는 발돋움이 필요했는데 어느덧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정말이지 무섭게 크는구나. 짧은 감상은 속삭이는 밀어에 쉽게 밀려났다. 이제 주말인데, 우리 집에 와서 해줄래? 의외의 초대에 놀라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드물게 초조한 빛을 띤 현철의 얼굴이 다시 다가왔다. 이거 말고 신형 엔진도 있어. 구경시켜 줄게. 사랑에 빠진 소년다운 유치한 음성이었다. 날개를 할 수 있는 한 잔뜩 부풀리고 전하는 구애에 무의식적으로 제 입술을 더듬은 명헌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현철이 웃었다.
“이제 네 손이 더 따뜻한 것 같은데.”
“그만큼 오래 했으니까. 현철이 안 놔줬잖아, 뿅.”
“손이 가서 알아서 붙는 걸 어떡하냐. 조금만 더.”
능청스러운 농과 함께 커다랗고 뜨거운 손이 귀밑 턱을 문지르듯 감쌌다. 축축한 물수건을 든 손에 힘을 주면, 그보다 더 눅눅한 온도가 입안을 점령했다. 점막을 희롱하는 혀는 손보다 훨씬 뜨겁게 끓고 있었다. 들큰한 신음이 벌어진 틈을 타고 노래처럼 흘렀다. 치열을 모조리 훑어야 성이 풀릴 것처럼 신중하고 꼼꼼하게 구는 움직임에 절로 발가락이 움츠러들었다. 꼭 아슬할 때가 되어서야 아쉽게 붙인 살을 떼어 내는 것은 이제 둘 사이의 불문율이 되었다. 끈적하게 젖은 두 입술 사이로 기다란 은사가 늘어졌다.
“현철 입술 부었다 뿅.”
“너도.”
“이러다 깨물까 봐 무서워.”
“안 그래.”
수건과 대야를 들고 일어나자 따라 일어난 현철이 둘둘 걷어 올린 바지를 내리고 든 것을 빼앗아 든다. 구경하고 있어, 금방 갔다 올 테니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멀어지는 등을 보다 드디어 끝없이 높은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현철의 부모는 일이 바빠 집을 비운 지 며칠 되었다고 했다. 드나드는 것은 현철과 사용인뿐인데 의외로 상주하는 인원도 몇 없었다. 그들을 모두 물리니 커다란 내부 가득 외로움이 차올랐다. 밑바닥에 깔린 고독의 농도가 가장 짙었다. 거기 잠식되는 일이 없도록 현철이 하루빨리 자라 서재의 천장을 뚫고 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