夢中相尋
몽중상심
오랭지 | @Monsterlasagna7
너는 태어나자마자 입양되었다고 했지. 길러주진 않았어도 낳아준 것에 대해 감사한다고.
지금은 그것이 살해 당한 양친에 대해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의임을 안다.
그 모든 일을 겪은 너는 내가 그저 나의 소소한 불행과 알량한 오만함을 감추는데 급급했던 어린 시절 나의 무엇에 끌린 것일까? 그럼에도 너의 시선을 잡아챌 수 있었던 나의 운과 불운을 저울질해 본다. 아마 너의 몫의 운은 나와는 꼭 반대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건 나의 상상이다. 이런 즐거움은 허락해주길.
너를 처음 만났을 때를 상상해본다. 아마 입학식 때 같은 옷을 입고 지루한 연설도 함께 들었겠지. 식이 끝나고 우리는 줄지어 각자 반으로 갈라지면서 소매 정도는 스쳤을지도 모른다. 너는 우리가 센티넬 적성자들을 위한 오후반 교실에서 만났다고 했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내가 너를 처음 보았을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겠지. 그래서 나는 우리가 운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만남도 나의 실수도 지금의 고통도 결말을 향하도록 정해진 의례가 아니라 그저 나의 선택이고 대가 없는 참회와 공양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나도 너의 이름을 알게 된 날은 기억한다. 어느 선배가 동기들을 앞세워두고 본보기로 날 벌하던 평범한 날이었지. 그는 강화계 각성을 끝낸 자였고 사용 흔적이 잘 남지 않고 보여주기 좋은 그의 능력은 어른들의 눈을 피해 선배 노릇을 하기 적합했다. 하지만 이미 높은 등급으로 각성을 마친 나에게 그의 위협은 특별히 공포스럽거나 고통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단체 생활에 얼마나 잘 적응하는지에 대한 평가가 앞으로의 생활등급 심사에 중요 참고자료가 된다기에, 눈감고 내일 쓸 어미나 궁리하며 흘려보내는 시간이었지. 그걸 알기 때문에 선배들도 그렇게 시간을 보냈으며 그 선배들도 그러했고 그 위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단단하지만 고작 내 어깨 정도에 오던 남자는 내 옆으로 나와 나를 두둔하다 뼈가 부러졌다. 비각성 상태의 사실상 일반인이었던 너의 부상은 그 덤덤한 태도에 비하면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 그날 비로소 나는 너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현철아, 어쩌면 너와 나의 관계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달라진 것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언제나 교만하고 안일하고, 너는 별 가치 없는 일에 연민을 느껴 널 내어주지.
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의 이직을 이유로 떠났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잊지 않고 가끔 떠올렸다. 결국 센티넬로 각성하지 못했다면 다시 만날 일이 없을 텐데, 뭐하며 살까 상상하며. 특별히 만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미 오래전부터 부모에게도 보호의 대상이 아니었던 나에게, 이름도 모르는 애가 나를 대신해 다치는 그 순간의 기억은 약간 씁쓸한 단맛이 있었지. 그때에도 너는 나의 결핍을 일깨우는 4월의 라일락, 봄비였다. 그러나 어릴 땐 그저, 가끔 되새기면 무언가 감흥을 주던 기억에 네가 있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너를 종종 생각하며 보낸 시간들이 무색하게, 특수군 위탁생 장학과정이 있는 우리들의 대학 캠퍼스에서 널 다시 만났을 때, 네가 날 감쌌던 신현철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데 시간이 걸렸던 것을 기억한다. 너는 몰랐겠지만 네 큰 키와 두꺼운 팔뚝에 시선을 빼앗긴 것이 널 알아보는 것보다 먼저였지. 고작 5년 만에 전혀 다른 남자가 되어버린 너를 어떻게 바로 알아봤겠니? 너를 언제나 권태로운 듯 섹시하게 만드는 높은 눈썹산과, 날카로운 눈매와, 변하지 않은 까까머리가 아니었다면 나는 네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번호를 물어봤을지도 몰라. 어쨌든 늦지 않게 나는 널 알아보았고, 옛 기억이 떠올라 네게 말 걸 좋은 구실이 생겨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성인이 되어 정규복무를 시작한 이후로는 완전히 잊고 있었던 어미까지 붙여가며 네게 친한 척을 하고 내숭을 떨었던 것을,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럽지만. 그때는 좀 정신이 나가 있었어.
그렇게 너와 만나 함께 보냈던 그 1년이 내 삶을 비추는 유일한 햇살이지. 공대 쪽 뒷문 근처에 자주 가던 카페를 기억하니? 키가 큰 너에게 맞는 좌석이 있어 주말에도 종종 거기서 함께 시간을 보냈었지. 어느 날인가, 내가 임무를 끝내고 지친 상태로 늘어져, 그 카페 창가의 체리나무 탁자 앞에 앉아 과제를 하는 너를 보며 알 수 없는 감동에 괜히 목울대가 뜨거워진 적도 있다. 행복하다는 말을 어렴풋이 알겠다는 생각을 했었지. 이 순간의 기분을 어딘가에 기록하거나 저장하여 다시 꺼내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때는 분명 그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랬는데, 왜 나는 스스로 그 일상을 뒤흔든 결정을 했던 걸까?
네가 변명을 들어준다면, 나는 경험해본 적 없는 행복이 무서웠던 것 같다. 이제껏 가장 행복하다고, 이 이상 행복할 수는 없다고 생각할 때마다 추락을 걱정했다. 마치 어린 시절 탔던 롤러코스터의 최초의 등반과 같은 기분이지. 고점을 찍는 순간 남은 것은 하강이라는 직감. 추락에 대한 불안. 아니, 이건 정말 변명이다. 나는 사실 더 욕심을 부렸던 것이지. 완벽한 순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보다 더 완벽해질 수 있다고. 그렇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온전히 나를 위한 완성을 구상하면서 너의 말은 듣지 않았지. 나의 오만은 어느 정도 선천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너는 무슨 표정을 할까? 옛날이라면 시원한 입매로 웃어주고 내가 좋아하는 말씨로 귀여워 해주었을 텐데. 지금은 모르겠어.
최초의 의심은 센터 가이드의 말 한마디로 시작했다. ‘요새 명헌씨 안정화가 잘 되어있네요, 잘 맞는 사설 센터라도 다니시나요?’ 군인이 사설 센터에서 가이딩을 받아도 되는지 모르고 있었던 나는 같은 부대 동료들에게 이 내용을 공유했지. 너와 나의 사이를 대충 알고 있던 그들은 최근 만나는 그 사람이 가이드 적성자가 아니냐며 쉽게 추측했다. 그 인간 만나고 나서부터 네가 이상한 짓 덜해. 형제나 다름없는 성구가 확인해주었고, 등급 외 가이드라도 같이 적합검사 받고 페어로 등록해서 붙잡으라고 진지하게 권유한 것은 동오였다. 그러고 보니 일부 가이드 적성은 정신계 센티넬의 ESP로 혼동되기도 한다지. 어린 시절 센티넬 적성자로 분류되었던 너를 떠올리며 나는 꿈에 부풀었다. 평생 페어 등록은 생각도 상상도 해본 적 없으면서, 너와 이 말랑말랑한 감정으로 함께 손잡고 살면 귀찮은 의무 복무도 버틸 만한 것이 되고, 이후의 삶도 기대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틀 동안 온갖 상상을 다 하다 드디어 너를 만나 이 가능성의 미래에 대해서 털어놓았을 때, 네 태도는 전례 없이 단호했다. 자신 덕에 내가 안정되었다면 기쁘지만, 전의 검사에서도 가이드가 아니었고, 다시 검사받아 가이드로서 확인받을 생각은 없다, 고. 가이드 등록이 부담스러우면 개인적으로 아는 곳에서 나와 적합 검사만 받아보자는 부탁도 거절했다.
너는 대체로 나의 무리한 요구에 허용적이었고, 어떤 욕망에도 호응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당황했고, 네 결정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너를 설득하고 회유하고, 울며 떼쓰고, 화냈지만, 넌 그저 평소처럼 곤란한 듯이 웃었고, 그러나 끝내 나를 따라주던 평소와 달리 마지막까지 결정을 바꾸지 않았지.
"넌 내가 다른 가이드랑 배 맞추고 네게 돌아와도 아무 생각 안 들어? 그러지 않을 수 있는데도?"
결국 내가 나의 불안과 죄책감을 너에게 전가할 뿐인 그 말을 했을 때 비로소, 너는 내게 보여준 적 없는 표정을 했다.
"그게 널 살리는 일인데, 내가 거기에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데."
네가 어떤 마음으로 그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 내가 조금이라도 알 눈치가 있었다면. 그냥 그 말에 네게 무너질 수 있었을 텐데. 화가 난 나는 그저 널 이기기 위해 네 마음을 무심함으로 매도했다.
그 대화가 있었던 날은 따뜻한 말도, 굿바이 키스도 없는 채로 헤어졌다.
그 다음의 일을 알 수 있었다면 널 그렇게 보내지 않았을 텐데.
홧김에, 라는 것 역시 변명이다. 내가 원하면 나는 그렇게 하고 말았을 테니까. 다음날 나는 센티넬-가이드 센터와 군에 내가 접촉한 민간인 미등록 가이드로 네 정보를 등록하고 결과를 기다렸다.
그러나 며칠 후 내가 받은 것은 너와의 동반 출석 요구서가 아니라, 네가 사라졌다는 사실과 네가 몇 건의 테러와 센티넬, 가이드 납치 및 그루밍 사건에 연루되어있는 범죄 조직의 일원이며 너 스스로도 20년 전에 있었던 사건의 피해자이니 수사에 협조해 달라는 군경찰의 방문이었다.
군의 파일철에 기록된 너는 내가 모르는 사람이었다. 6촌 이내 친족 가운데 다수의 센티넬과 가이드가 있어 날 때부터 예비 적성자로 등록되어있던 너는, 영아 시절에 의뭉스러운 과정을 거쳐 양친을 잃고 변변치 않은 인간들에게 입양되었다. 양부모는 대단한 사연은 없는 빚을 지고 있었는데, 채무변제를 대가로 죄 없는 어린애를 알지도 못하는 곳에 넘기는데 협조한 적지 않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렇게 국제적인 범죄카르텔의 센티넬-가이드 팜에서 자라게 된 너는 조직의 씨고르기 과정에서 살아남은 것이라고 했다. 그를 위해 조직에 협력하는 센티넬들을 가이딩하면서, 유소년 센티넬 포섭과 납치 사건에도 관여했다. 포섭 및 납치와 관련한 혐의들은 다 나와 만난 고등학교 1학년 이전의 기록이었다. 아마 급격하게 자란 신장 때문에 위장 활동이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고서는 추정하고 있었다. 이후에는 재각성이라 불릴 정도로 이례적인 가이딩 등급 격상을 겪으며 직접적인 범죄사건에 관여되지 않아, 너는 내부 첩보를 통해서만 확인되던 인물이었다.
빈 행적, 다른 이름과 바뀐 인상착의로 태연하게 군 협력 대학 캠퍼스를 거닐던 너의 기록을 갱신하도록 만든 것은 나였다. 보고서 마지막 장에 첨부된 나의 미등록 가이드 접촉 신고서 복사본. 너의 현재 법적 신분이 아니라 네가 마지막으로 확인된 고등학교 시절의 이름이 적혀있는 문서. 왜 너는 나에게 너를 노출했지. 그냥 모르는 척, 사람을 착각 하셨나봐요. 제 이름은 김뭐시기인데. 하면서 만났어도 됐잖아.
군 기숙사로 다시 들어가기 전 짐을 빼기 위해 살던 오피스텔에 마지막으로 갔던 날, 너를 마지막으로 만났지. 검은색 옷과 장갑. 건물 사이 야음에 몸을 감춘 그날 밤, 너는 몰개성한 얼굴로 서 있었다. 나는 네가 원래 표정이 다양한 줄은 몰랐는데, 정말로 아무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은 너는 내가 아는 너 같지 않고, 얼마 전 기록 속의 너처럼 보여서.
나는 평소처럼 네게 안기지 않았고 너는 품을 벌리지 않았지. 머뭇거리다 나는 손을 뻗었지만 너는 받아주지 않았다.
"나는 너와 함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사랑스럽고 만족스러웠는데, 너는 아니었나 봐."
"…"
"내가 네 앞에서 감히 떳떳할 수는 없겠지. 물론 너도 내게 이전과 같은 마음은 없겠지만."
"아냐 그런……, 난 네가…"
"너 역시 나의 사랑과 신의를 져버렸으니……벌이라고 생각해. "
그렇게 말한 너는 내 턱을 한 손으로 잡고
아주 부드러운 키스를,
무자비한 가이딩을 하사했다.
장갑 낀 손으로 잡힌 턱…… 너와 닿아 있는 것은 입술과 입 안의 살덩이 뿐이었는데도. 얇은 피부 아래로 맥동하는 감각이 나의 모든 영혼을 사로잡았다. 내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갈증을 일깨우는 자우(慈雨). 그 단비가, 메말랐던 정신을 흠뻑 적셨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센티넬의 육체는 퍼부어지는 가이딩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이기만 할 뿐, 만족도 여유도 모르고 네 영혼의 향도 비감도 알아보지 못했다.
영원 같은 찰나가 지나고 네가 날 밀어냈을 때, 나의 이지는 온전하지 못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인식되기 시작한 세계와, 감당할 수 없었던 침범으로 인해, 나 자신이 얇은 껍데기와 같은 외피 아래 모든 것이 뒤섞여버린 곤죽처럼 느껴졌다.
나의 페어 가이드가 되어달라고 너에게 제안했지만, 나는 네게 결코 가이딩에 안달난 센티넬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너를 너로 사랑하고, 나로 사랑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물러서는 너의 발목을 더듬으며 조금의 살갗이라도 닿으려 개처럼 기었다.
그런 나를 내려다보는 너 역시 내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방식으로 웃었지.
"너도 센티넬이군. 진작 이럴 것을."
"혀, 현철아… 제발……흐윽, 나…"
"선물이기도 해. 맘에 들었길 바란다."
안녕.
그리고 너는 떠났다. 내게 영원한 갈증과, 불가역한 변태를 남기고.
네가 사라진 수도에서는 센티넬이 엮인 조직범죄가, 반대편의 국경에서는 테러가 기승이었지. 센티넬이 엮인 큼직한 사건마다 나는 투입되었고 간간이 네 이름이 언급되는 곳이라면 어디든 기꺼이 자원했다. 가이딩은 받으란 대로 받고 있었지만 내게는 그 가이딩들이 그렇게 의미 있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주한 적은 없었으므로, 군의 가이딩 프로그램이 잘 작동하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몇 년을 흘려보냈을까. 마지막에 내게 맡겨진 기회는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이라고. 죽는 날에 후회할 그런 순간이라고.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냥 질러봤다.
해갈 없는 그리움…….
이것이 센티넬의 광기가 아니라 온전히 너를 향한 사랑이라는 것을 내가 확신할 수 있었다면 그냥 처음부터 국경으로 도망쳐서 널 찾았을 텐데.
둘 다이든, 아니든. 어느 쪽이든 꽤 괴로워. 네가 바란 대로라면 그래도 조금 다행인 것 같기도 하다.
근데 이 감정은, 아니 이 감각은 영원할까? 죽는 순간까지?
센티넬의 평균 수명은 38세라 하지. 페어 가이드가 있는 경우는 조금 더 살고, 없으면 조금 덜 살고.
의젓한 척 했지만 결국 내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을 뿐인, 널 처음 만났던 시절의 사춘기 남자애는, 내게 예비된 시간이 너무 짧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축복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한번은 널 다시 보고 싶어서 한 짓이었는데.
결국 그러지 못 했다는 것은 아쉽다
***
"명헌아."
커다란 손이 땀에 젖은 명헌의 이마를 쓸어올렸다.
"명헌아, 너무 긴 꿈은 좋지 않아."
***
가이딩 파장이 섞인 현철의 손길이 명헌을 깊은 잠에서 건져내었다. 흐으으윽, 급하게 숨을 들이쉬며 정신이 든 명헌이 튀어 오르려 했다. 현철은 강한 힘으로 어깨를 눌러 명헌이 계속 누워있게 했다.
괜찮아, 명헌아. 좀 더 쉬어. 괜찮아. 토닥이는 손과 어루만지는 말에 명헌이 눈앞의 이를 알아보았다. 꿈인가. 시야가 어그러진다. 이왕이면 자세히 보고 싶은데, 아무리 흘려보내도 눈물은 계속 차올라 시야를 방해한다.
“현철아……”
“…”
"미안해, 현철아. 미안……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미안해…… 난 몰랐…,"
"…"
"또 갈거면 나 데려가…… 나 버려두지 마. 네가 가이드라서 그런거 아냐. 난 너 가이드인거 모르고서도 사랑했어. 내가 말 안 했지. 미안해. 미안해 나 너 사랑해. 근데 너도 나 사랑해줬잖아. 너는 내가 센티넬인거 알고 예뻐해 준거잖아. 그냥 계속 예뻐해줘…… 아니 아냐 안 해줘도 돼. 그냥 나 혼자 두지 마……."
쌓인 말을 다 전하기 전에 사라질까, 손가락이 희게 질릴 정도로 현철의 팔을 강하게 팔을 잡고 명헌이 횡설수설했다. 그 얼굴을 머리를 쓰다듬으며, 현철은 명헌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헷갈릴 수 없는 가이딩 파장이 몸에 스며들자, 명헌도 이것이 현실임을 차츰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현철아, 지금… 왜……? 괜찮아…? "
괜찮아. 지금은 그냥 자도 돼. 옆에 있을게.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신의 말과 같은 그의 손길에, 명헌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어떤 꿈도 없이 평온한 침잠이었다.
***
명헌이 투입되었던 작전은 그로 인해 실패했지만, 그를 통해 목적을 달성하였다.
최초의 작전 목표는 유소년 센티넬들과 가이드 적성자로 간주 되어 납치, 구금된 피해자들의 구출이었으나, 침투조 오퍼레이터로 투입된 센티넬 이명헌의 단독행동으로 작전은 철회되었고 이명헌을 제외한 현장 작전 요원들도 모두 철수했다.
센티넬이 개인적으로 가이드와 관련될 경우 가이드를 따라 변절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지휘부에는 이명헌의 대학 시절 기록을 이유로 이번 작전 투입을 반대한 간부들이 있었다. 그들의 제안으로 전투모에 장착되었던 자폭 장치는 이명헌이 작전지역 침투 중 적 가이드와 접촉한 순간 발동되었다. 그러나 주로 물을 다루는 염동력계 센티넬인 이명헌이 반사적으로 원시적인 ESP를 방출해 자신과 적 가이드를 감싸며 충격을 상쇄했다.
명헌이 정신을 잃은 사이, 카르텔 소속 가이드인 신현철은 정신계 센티넬을 통해 작전지휘부에 유소년 적성자들과 일부 조직 센티넬들과 함께 전향 의지를 밝혔다. 인질들이 사전에 정신계 센티넬에 의해 조정되어있을 가능성, 그리고 전향의 진위 여부가 불투명하여 오랜 심문 과정이 예고되었지만, 국제경찰의 적색수배자인 센티넬 2인을 포함한 전향명단과 상당한 숫자의 납치피해 미성년 인질의 석방이 함께 제시된 만큼 요구는 수용되었다.
간부급 요인으로 다수의 센티넬과 함께 전향 의사를 밝힌 가이드 신현철은, 여러 제한 조치는 받아들었으나 몇 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먼저 가이드 등록자에게 부과되는 의무 봉사시간을 예외로 해줄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군 소속 센티넬인 소령 이명헌과의 향후 접촉 제한 해제였다.
본래 일정 등급 이상의 군 소속 센티넬은 소속이 불분명하거나 망명 가능성이 있는 가이드와의 접촉이 제한된다. 그러나 가이드 관련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명헌은 작전 중의 명령 위반 등 몇 가지 중대한 군법 위반으로 군사 법정에 회부 되어 상당한 기간 구금 등의 제한적인 생활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참작되고, 센티넬 특수작전사령부 특유의 사정 아는 사람끼리 알음알음 할 수 밖에 없는 주먹구구식 행정을 통해, 특정 시점 이후, 정확히는 2건의 조직범죄와 3건의 국내 테러 사건 관련자로 조사 중인 신현철이 민간인 신분을 회복한 후에, 센티넬 이명헌을 신현철의 가이딩 대상으로 등록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
명헌은 생사고락을 함께한 부대원들을 위험에 빠트리고 현철은 이전 동료들과 특작부 전체를 앞에 두고 사사로운 거래를 하며, 둘은 재결합을 위해 특별히 서로의 의사를 확인하지 않고 별짓을 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로도 명헌은 좀처럼 현철과 만날 수 없었다.
대질심문을 위해서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일방적으로 두어 번 본 것 외에, 두 사람이 제대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현철이 그를 재워주었던 밤으로부터 4개월 후였다.
명헌이 구금된 센티넬 전용 특수 수감시설은 감옥보다는 정신병원과 비슷한 곳이다. 상시 낮은 강도의 가이딩 파장을 깔아 놓는 공용공간에서 멍하니 있다, 일이 있으면 ESP 차단 수갑을 차고 면회실로 이동한다.
징그럽게 쾌적한 공간에서, 주는 밥과 정기적인 가이딩을 받으며 명헌이 하는 일은 멍 때리다 호출이 오면 면회실에 들어온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태평하게 멍 때릴 수 있었던 적이 얼마만인가 싶었다. 최근까지는 이런 시간이 주어진다면 가장 견딜 수 없는 형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거의 최종목표였던 신현철한테 미안하다고 말하기를 해치우고 나니, 시간은 쉽게 쉽게 흘러갔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날,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호출에 따라 면회실로 들어서니, 뜻밖에, 현철이 앉아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봐서 낯선 것인지, 아니면 그간의 적성검사니 심문이니 조사가 대충은 아니었는지. 비교할 데는 명헌의 꿈에 나오는 사내밖에 없지만, 천하의 현철도 약간 헤쓱한 얼굴이었다. ESP 사고 방지를 위해 근무자들과 방문객들에게 강제되는 흐리멍텅한 단일섬유 유니폼을 입고 있는 현철이 너무나 어색해 보여서, 이명헌은 이번엔 현철을 보며 웃을 수 있었다.
"웃어?"
현철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 5년 만에 제대로 얼굴 보는데 웃음이 나오냐? 다시 울어 빨리."
"아니, 너 유니폼 가슴이랑 가랑이가 끼잖아뿅...근데 근육이 빠졌는데 낀 거면 원래라면 어땠겠어뿅… 존나 네 감방동기 하고 싶다뿅."
"이딴 정신병원 아니면 사회봉사랍시고 개처럼 뺑이 돌리는데 센티넬이랑 가이드가 뭔 감방 동기야."
이런 건 정부가 더 심하다니까. 요감시 대상일 터인 현철이 위험한 발언을 한다. 살짝 불안해진 명헌은 현철 뒤의 문에 난 작은 창문을 힐긋 쳐다봤다.
명헌의 시선을 눈치 챈 현철이 수갑을 찬 명헌의 손을 잡아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사이를 꾹꾹 누르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명헌의 주의를 돌린다.
"됐어. 오늘 너 데려가려고 온 거야. 군 센티넬 기숙사 거주에 외부 활동 시 동급 이상 센티넬 또는 가이드 감독관 동행 조건으로 가석방이다."
"…그럼 너 만날 때도 다른 센티넬 동행해야 해?"
"무슨 소리야."
가이딩 파장을 섞으며 접촉하고 있는데도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는 명헌을 내려다보며 현철이 씨익 웃었다.
"나는 너랑 같이 기숙사 들어가지. 우리 그저께부터 페어야."
“…”
“가석방 요건 때문이었는데, 말도 안하고 등록해서 미안. 전에 네가 말도 안 하고 가이드 등록하려고 했던 거 달아 둔 걸로 퉁 치자.”
현철은 수감시설로 입소하며 짧게 깎아 고등학생 같은 명헌의 뒤통수를 다른 손으로 복복 쓰다듬었다.
명헌이 불안하게 쳐다보던 문으로는 성구가 건들거리며 들어왔다. 성구는 현철도 같이 다닌 고등학교 시절부터의 친구이자 전우였다. 현철은 둘 다 안면이 있는 군 소속 가이드인 정성구가 당분간 명헌의 가석방 감독관 겸 현철의 동향보고 담당이라고 알려주었다. 앞으로 한동안은 성수 스케줄 눈치 보며 살아야 한다며.
관련자 배제도 안되고 특작부 일처리 개판뿅…… 하며 피식 웃는 명헌의 뒤통수를 성구가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며 세게 때렸다.
명헌은 반쯤 엄살로 아프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숙인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현철의 손이 크고 따뜻했다.
너무 좋아……. 명헌은 이런 정도의 접촉으로 달아오르는 얼굴이 부끄러웠다. 그러다, 어느 순간 현철의 다정한 가이딩이 너무나 낯설고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잃어버린 시간과, 설익은 채로 너무 깊어진 감정을 깨닫는 순간 내뱉는 숨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눈가의 물기를 들키기 싫었던 명헌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현철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품에 웅크려 들어오는 사랑스러운 육체는, 그 떨림을 현철에게 고스란히 알려왔다.
“미안해, 명헌아.”
“내가…… 아니, 아…….”
명헌을 도닥거리던 현철의 말에, 숨죽여 떨던 어깨가 힘을 잃고, 긴 숨을 내쉬듯 명헌은 눈물을 토해내었다.
“내가 제대로 된 가이드가 된 것도, 인간 구실을 하게 된 것도 모두 널 다시 만나기 위해서였는데. 내가 나의 혼란에 눈이 멀어 정작 네게 잔인했어. 미안하다.”
현철은 무너지는 명헌을 품에 안고, 자신을 어지럽히던 꿈에 대해 언젠가 모두 이야기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그의 사랑이 그에게 무엇을 알게 했는지를. 조금씩, 아주 오랫동안.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