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료함에 짓눌리니 에로한 호기심이 넘쳐 흐른다.
금요일 오후 3시 이명헌이 딱 그랬다. 월화수목 쳇바퀴를 네 바퀴를 돌리고, 금요일 오전까지 반 바퀴를 더 돌리니 무료해서 죽기 직전이다. 심심한 와이셔츠와 정장 바지 차림의 회사원들에 둘러싸인 삶은 무료하다. 배 나온 아저씨들을 보면 무료하다 못해 역겹다.
반작용으로 이명헌은 호기심이 충만한 상태였다. 그의 호기심은 주로 아랫도리에 쏠린다. 남자가 고프다는 얘기를 어렵게도 한다.
명헌은 퇴근하기가 무섭게 지하철역에 가서 시력 보호용 안경을 벗고 왁스를 꺼내 머리를 쓸어 넘겼다. 명목상 캐주얼 데이인 금요일에 그가 고른 차림은 회사와 밤놀이 모두 애매하게 소화할 수 있는 흰 자켓, 얇은 검은 니트에 검은 슬랙스. 흰색 스니커즈를 신었으니 영 칙칙해 보이지는 않겠다. 립밤을 도톰한 입술에 펴 바르면서 가방 안쪽 주머니를 확인했다. 콘돔 네 개. 부족할지도. 과하게 발린 립밤을 혀를 내밀어 핥아먹고 지하철을 타러 갔다.
그가 향한 곳은 이태원에 위치한 단골 가게였다. 낙수주의라는 노란색 입간판을 지나치고 가면 주의해야 할 주인장 김낙수 씨가 운영하는 게이바가 나온다. 오늘은 기분이 좀 별로인지 주인장은 로우파이를 틀고 유리잔을 천으로 뽀득뽀득 닦고 있다. 오랜만. 명헌은 눈짓으로 인사하고는 항상 시키는 걸로, 라며 주문한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래봤자 보드카에 스프라이트를 타고 곽 얼음 하나 큼지막하게 올린 놈이다. 말술을 말게 생겨서 말술을 잘만 말았다만 취해서 정신이 흐트러지는 건 싫어서 그런다.
어디 한번 보자.
명헌은 한 손 위에 턱을 괴고 검지로 뺨을 톡톡거렸다. 사람은 제법 있는데 맛있어 보이는 놈이 없다.
이제 시간이 8시를 겨우 넘었으니 사람이 많이 올 때는 아니었다. 밥 먹고 들어오는 놈들은 별론데. 웬만큼 체지방이 적은 게 아니고서야 밥 먹고 볼록 나온 배가 귀여워 보이기란 쉽지 않으니까. 그게 취향인 사람도 있다고는 하던데 얼굴보다는 몸을, 몸보다는 그곳을 더 보는 명헌에겐 해당 사항이 없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표정이 매력적인 명헌이었지만, 바 안의 대부분은 그의 검은 속내를 알고 섣불리 다가오지 못했다.
명헌은 이 판에서 제법 유명인사였다. 존나 잘 느끼고 잘하는 만큼 눈도 높은 놈으로. 겨우 꼬시기에 성공해 방 잡고 옷까지 다 벗었는데 사이즈가 기준 미달이면 애걔? 하고는 그대로 셔츠 단추를 잠근다고. 전직 운동선수였던 몸뚱이 때문에 어디 가서 맞지 않고 사는 게 다행이다. 이정도 개매너면 입밴을 당할 만도 한데도 명헌은 금요일 밤이면 꾸준하게 낙수주의에 출석했다. 바 사장과 고교 동창이라는 게 이래서 좋다.
“넌 눈을 낮출 필요가 있어." 명헌이 스프라이트 탄 보드카를 한 잔 다 마시고 두 번째 잔을 시킬 때였다. "10인치가 한국에 어딨어?”
“있어. 한 번이었지만. 하아. 걔 잘했는데.”
뾰옹…. 하룻밤 스쳐 지나간 인연을 떠올리며 다리를 꼬았다. 얼굴도 기억 안 나는 그 남자는 명헌에게 신세계를 맛보여 주고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 후로는 웬만해서는 만족을 못 하는 제 팔자야말로 기구하지 않나. 사지 멀쩡한 창창한 젊은이가 독수공방을 하고 있다는 건 정말로 국가적 손해다.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느낌이 왔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보드카가 아니라 위스키나 시킬까 하고 낙수에게 메뉴판을 달라고 했다. 고개를 달랑거리면서 메뉴판을 뒤적거리는데 옆자리에 누군가 앉았다. 내내 비어있던 자리에 어떤 간 큰 놈이 와서 앉나 하고 봤더니,
간 큰 놈이 아니라 XX가 큰놈이 왔네?
본능적으로 남자의 고간부터 확인한 명헌의 손이 멈췄다. 중앙부의 존재감이 어마어마하다. 눈을 위로 굴리니 단추가 도망가기 일보 직전인 셔츠 자락으로 보이는 팔근육과 가슴근육에 숨이 꼴깍 넘어갔고, 취해서인지 조명이 어두워서인지 구분되지 않으나 섹시하기까지 한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꾸울꺽. 사람을 대놓고 쳐다보면 침까지 삼키는 건 어느 나라에서도 예의가 아니다만, 군침이 돌다 못해 천고마비의 계절이 성큼 온 줄 알았다. 그는 불쾌한 기색도 없이 눈을 돌리고는 주인장에게 노아스 밀을 시켰다. 이런 대어를 놓칠 수 없다.
“혼자 오셨어요?”
그를 향해 몸을 살짝 틀면서 물었다.
“아, 예.”
“여기는 처음이세요?”
“세 번 정도 왔네요.”
남자는 대답을 하고 위스키를 한 모금 시원하게 들이켰다. 살짝 찌푸려지는 인상이 섹시하다. 취향이다. 근데 이런 남자가 세 번이나 올 동안 김낙수는 아무 말이 없었단 거지. 명헌의 레이저를 느낀 낙수가 때마침 들어오는 손님을 향해 웬일로 어서오세요, 라며 인사하면서 자리를 떴다.
“게이바인 거 알고 온 거죠?”
“그 정도로 순진해 보입니까?”
“이쪽으로는 안 보여서요.”
가만 놔두면 담백할 눈매를 반달로 접는다. 없는 애교살을 위로 모아 올린다. 그러면 제가 보기에도 넘어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예쁜 얼굴이 나온다. 술에 약간 취했겠다, 옆에 앉은 대어를 놓치기도 싫겠다, 명헌은 전력을 다해 그를 자빠뜨릴 생각이었다. 그런가요. 남자는 명헌을 따라 한 번 미소짓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름이 뭐예요?”
“신현철입니다.”
“이명헌이요. 그거 맛있어요?”
“좋아하는 맛입니다.” 남자는 잔을 들어 안의 액체를 돌렸다. “궁금하세요?”
남자, 현철은 명헌에게 자신이 먹던 잔을 내밀었다. 손으로 받을 수 있지만, 고개만 내밀어 잔에 입을 대었다. 이것 봐라, 하는 웃음을 지으면서도 현철은 그가 먹을 수 있게 잔을 살짝 기울였다. 스카치 위스키만은 못하지만 목 넘김이 부드럽다. 입 안에 달큰한 향이 감돌았다. 도수가 높아 목구멍이 뜨거우면서도 좋은 맛이 느껴져 얼굴이 풀어졌다.
괜찮죠? 현철도 같이 미소지었다. 예의상 웃는 아까와는 달랐다. 입이 커서 살짝만 입꼬리를 올리는데도 인상이 바뀌었다.
이거 좀 위험하다. 제 취향을 제대로 노렸다. 호기심을 동하게 한 게 그의 다리 사이에 중앙부였다면, 호기심을 키우는 건 낯선 남자의 도발에도 흔쾌히 응하며 친히 잔을 기울여주는 배포와 저 여유로운 미소다.
위스키 좋아하세요? 명헌이 아는 거라곤 위스키에는 스카치와 버번이 있다, 정도였으나 현철과 대화를 이어가려면 아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잘 아는 건 아닙니다. 그 덩치로 무안한 표정을 짓는 건 반칙이다. 지식이 많아 으스대며 아는 체하지 않고, 왜 그 술이 좋은지 진솔하게 생각을 공유하는 건 당장 경기 퇴장감이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 술을 언제 처음 마셨는지는 왜 얘기하는 건지. 허스키하지만 다정한 말투가 중독성 있었다. 그에 맞춰 고개를 까딱거리다 보면 여기까지 말할 생각 없던 제 생각까지 술술 흘렸다. 모르는 사이에 시간이 지나 붐비던 가게 안이 한적해졌을 때 마음을 굳혔다. 놓칠 수 없다.
참 나쁜 버릇인데, 원하는 것 앞에서는 참을성이 없어진다. 극에 달한 호기심에 잠식당한 뇌는 대담하게도 첫 만남에 참 무드 없는 멘트를 던진다.
“나 잘해요.”
현철이 입을 살짝 벌린 채로 멈췄다.
“아… 그래요.”
“피차 알고 온 거 아닌가?”
명헌은 앞에 남아있던 잔을 들어 입을 벌린 채 목구멍을 열어 스트레이트로 넘겼다.
“안 갈 거예요? 밤은 짧아.”
이미 다음 날이 되어버린 시각, 해가 길어지고 있어 밤이 더 짧아지는 봄 밤. 의자 뒤에 걸쳐둔 자켓을 잡고 몸을 현철 쪽으로 틀었다. 현철은 큼직한 손으로 아랫 입술을 매만지더니 턱을 움켜쥐고 웃음을 흘렸다.
“오늘 밤은 길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