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 아프로디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사랑받는 난봉꾼.
와장창!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우렁차다.
평화롭다 못해 지루하게도 느껴지는 방 안 공기와는 사뭇 다르게.
살짝 열린 문 밖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에도 불구하고, 문 안의 사람들은 그저 사락거리는 종이 넘기는 소리 하나를 끼얹느라 여념이 없다. 또는, 그럴 필요를 못 느낄만큼 익숙해 보이기도 하는 얼굴들에는 피곤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침대에 온갖 서류를 늘어놓은 채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남자는 미동도 없이 글자만을 눈으로 훑어내리다가, 맨 마지막 장에 휘리릭 싸인을 마친다. 이명헌.
제 할일을 다한 만년필을 손가락 사이에 대충 끼워넣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손으로는 눈가를 꾹 누르는 행동 하나하나에 피로가 묻어나온다. 누가 좀 가서 또 왜 지랄인지 물어봐 뿅. 어렴풋이 귓가를 간지럽히는 두번째 파열음에 결국 비실비실 새어나온 목소리는, 그 덩치에 비하자면 한없이 갸냘프다.
지난 번엔 내가 갔어.
나도.
흠. 검은 구두를 신은 발을 턱하니 흰 시트 위에 걸쳐 올리고 상체는 바닥에 누운 남자가 살짝 목소리를 높여 말한다. 그럼 한 사람밖에 안 남는다, 성구야. 방 한켠에 차려진 바에서 에스프레소를 내리던 장신의 남자가 순간 찾아온 정적에 눈을 끔뻑거린다. 침대에 앉은건지 누운건지 헷갈리는 두 남자의 뜨거운 시선에, 잘 다려진 셔츠 등판을 해먹기 일보 직전인 정성구가 고개를 돌려 둘을 살핀다. ...나? 어설프게 들어 가리킨 손끝에 일말의 희망이 담긴다.
으아아아악!!!! 신경질적인 비명소리가 저 멀리서부터도 선명하게 들려오자 그는 넓은 어깨를 한차례 움츠린다.덩치만 커버린 아이 하나의 보모 노릇을 하기에는 딱 적당한 크기의 어깨가 순식간에 볼품없게 구겨졌다.
벌써 내 차례냐?
뿅.
어.
빨리 가.
정성구는 투덜거리며 막 뽑힌 투샷에 얼음을 하나 끼얹는다.
아, 정우성. 이 예쁜 또라이같으니.
쨍그랑!!
아 빨리 가라고! 김낙수가 기어이 비명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바닥에 등을 붙인 채인데도 성대에서 긁혀져 나온 소리가 여간 까랑한 것이 아니다. 간다, 가. 정우성!! 집안 살림 그만 부서뜨려라! 정성구가 큰 덩치를 날렵하게 놀려 소리가 연신 들려오는 방향으로 달려간다. 잠깐 쉬자 뿅. 침대 헤드에 기대 앉은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최동오의 손이 서류를 시트 위에 집어던지고, 김낙수는 침대 위로 뛰어올라간다. 낙수의 몸이 푹신한 매트리스에 반쯤 파묻히고 최동오가 이불을 끌어다 위에 얹어주는 꼴을 힐끗 보던 명헌은 쓰고있던 안경을 벗어 테이블에 툭 던져놓는다.
여기 집 아니잖아요!
지금 그게 문제냐?
부서진 건 돈 내면 되죠!
그건 그렇지만.
저 바보들... 복도를 타고 들려오는 목소리들에 혀를 차기를 몇 번, 결국 이명헌은 푹신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정성구의 당황한 음성은 정우성의 당찬 목소리 아래에서 번번이 힘을 잃고는 했다. 말 없이 목을 양쪽으로 한번씩 까딱, 하는 몸짓에서 들리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 우두둑. 뚜둑.
오늘 명헌이 상태 별론 거 같은데, 정우성 죽는 거 아니야? 속닥속닥. 낙수의 동그란 머리통에 턱을 기댄 동오가 중얼거리자 게임기를 만지작거리던 낙수가 대답한다. 정우성 빡치게 만든 놈이 먼저일걸. 결과보다 원인을 조지니까.
이명헌이 바닥에 놓인 슬리퍼 하나를 꿰어신고서는 문을 연다. 성구 보낼테니까 마저 일해라 뿅. 자리에 없다고 빈둥빈둥 놀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이다. 낙수와 동오가 각자 한손씩 들어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이명헌은 방을 나서서 소리의 근원지로 뚜벅뚜벅 걷는다.
정우성.
혀어어어어엉. 성인 남성의 머리 하나만한 도자기를 막 집어 던지려던 남자가 목소리를 듣자마자 순한 양같은 목소리를 낸다. 분을 이기지 못해 울려퍼지던 소리가 아직도 귀에 남을 만큼 징징거렸는데도 명헌을 바라보는 얼굴은 기미 하나 없이 깨끗한 예쁜 얼굴이었다. 손에서 톡 떨어트린 도자기가 조금 덜 큰 파열음을 내며 깨졌다. 이명헌은 동요하지 않고 발치에 튄 조각을 툭 밀어냈다.
성구는 들어가서 해남파 자료 정리 마저 해라 뿅.
어, 수고해라.
그러니까 좀 조용히 떠들라니까. 성구가 말썽을 피운 똥강아지를 보는 눈을 하곤 우성의 까까머리를 한차례 헤집어놓고 명헌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고해. 정성구는 제 바짓가랑이를 허망하게 붙잡으려는 정우성의 시도를 사뿐하게 피하며 도망친다. 오늘은 정우성도, 이명헌도 날을 잡은 것 같으니 부디 정우성의 울부짖음이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해도 되었을 만큼 타당한 이유가 있었기를 바라면서.
뿅. 문이 닫히고 이명헌은 삐딱하게 서서 정우성을 바라본다.
하도 떼를 써서 가장 크고 예쁜 방을 내어준 것이 바로 어제의 일인데 지금 이 곳은 당장 폐가체험을 해도 좋을 만큼 엉망진창이다. 정우성은 딱 하나 남은, 리본이며 조화가 주렁주렁 달린 예쁜 의자에 앉아 눈물을 꾹 참는 표정으로 이명헌의 눈치를 본다. 어째서인지 조화는 나이프로 박박 찢겨져 있어, 꽃잎이 크고 무성했던 것이 수국처럼 되어버린 걸 제외하곤 문제가 없는 유일한 의자였다.
이명헌은 정우성을 내려다보는 척 하며 시선을 맞추는 대신 그 꼴이 된 꽃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커다란 눈망울이 그렁그렁 해진 것을 쳐다보고 있자면 끓어오르던 열불도 자동으로 연소되는 것이 문제였다. 마음을 굳게 걸어잠그고 사는 이명헌이라지만, 지루함으로 점칠된 삶에서 즐거움을 주는 몇 안되는 존재에게. 그 재밌는 얼굴에. 뻣뻣하게 구는 것은 그에게도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오래 쳐다보고 있다가는 머리나 몇번 복복 쓰다듬고 방으로 돌아가게 되는 미래까지 그려져 명헌은 늪에 빠진 목소리를 낸다.
우성. 설명해 뿅.
혀엉... 그게 말이죠.
제 잘남을 백프로 알고 있는 눈에 금방 이슬이 맺힌다.
매끄럽고 흰 피부, 점이며 잡티 하나 없이 조금 홍조가 올라 사랑스러운 뺨. 촉촉하게 젖은 속눈썹과 애달프게 휜 눈썹. 살짝 깨물었다가 놓은 듯 발그레한 입술 사이로 이 모든 외모가 아주 살짝 빛을 잃을 만큼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피곤할 때 우성이 얼굴 몇분 붙잡고 보고있으려면 풀리는 얼빠 기질의 소유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줄담배를 피는 애 목에서 어떻게 저런 목소리가 나오지? 실로 팔불출다운 소리였다.
나이도 먹을대로 먹고, 못볼꼴도 볼 대로 다 본 시커먼 것들 사이에 끼어든 뽀얀 어린애 하나가 얼굴도 예쁘니 곁에서 모두 오냐오냐 해준 것이 문제였을까.
정우성은 제가 신이라도 된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실로, 그러한 취급을 받고 있기도 했으니 정우성만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방 하나를 조져놓은 놈과, 그 꼴을 보고도 아랑곳 않는 이들. 그들이 속한 세계는 방에 난 커다란 창 밖으로 보이는 한가한 도시 풍경 속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제대로 된 사회 논리같은 건 무용지물에 불과했고, 손에 쥔 무기가 무언지, 입 밖으로 뱉을 수 있는 말이 어느정도 수위인지, 뽀얗고 예쁜 얼굴을 가지고도 한번도 뒤를 따인 적이 없는 것은 왜인지. 같은 것들이 이름값인 세계에 그들은 살고 있었다.
정우성은 하늘 위의 세상에서도, 땅 밑의 세상에서도 인기있는 남자였다. 사회의 기준을 따르자면 아름다웠고, 이쪽 룰을 따르자면 어떤 난장판에서도 살아남았다. 버르장머리가 없는 것은 사랑스러움으로 포장되었고, 다이아몬드를 갈아넣은 것 같은 포장값을 내줄 가족이 있었다. 피 한방울 통하지 않았으나, 서로 치고받고 싸우면서 흘리고, 뿌리고, 마셔댔으니 유사 가족으로 묶어도 무방할 터였다.
우리 골목에서 카페 하는 소희 있잖아요, 왜 그 단발하고 제일 귀여운!
진짜 내가 제일 좋다고 맨날 쿠키도 주고 그랬거든요. 그야, 제가 제일 잘생겼잖아요!
그리고, 그리고 서윤이도 다빈이도 재영누나도 그리고 또 …
그만 뿅.
그래서 뭐 어쩌라고. 너 예쁘고, 여자들이 줄줄이 소세지처럼 선물을 줬다고? 그건 맨날 그러는 거 아니야? 이명헌의 얼굴에 짜증이 서렸다. 엄청난 별일 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답지 않게 울상에 서러움이 서렸길래 손수 달래주러 왔더니 서론이 길었다. 막상 들어보니 생각보다 더 별일도 아니었고. 동네의 슈퍼스타 자리를 빼앗겨 서러워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정우성이 혹시 곧 초등학교를 졸업할 나이인지를 되새겨보게 되었다. 21살이 아니라 12살 아니야 이거?
젖먹이 때부터 데려다 키웠더니 누굴 닮았는지(라는 주제로 밤샘토론을 한 적도 있었다. 술창고 하나를 가득 채운 궤짝을 털고도 버틴 김낙수만이 '정우성 싸가지의 원흉 책임전가 투표'에서 무효표를 얻었갔다.) 유아독존에, 우락부락한 조직의 녀석들과는 달리 조각처럼 아름답게 자라난 정우성.
동물의 왕국에서 사자의 새끼로 자란 예쁜 오리 새끼 하나. 오냐오냐 예쁘다 예쁘다 키우니 백조로 커서는 남녀노소, 국적을 가리지 않고 매력을 뽐내는 페로몬 덩어리가 되었더랬다.
정우성, 밖에 돌아다니게 나뒀더니 새끼도 쳐서 돌아오겠어. 정신차려 뿅.
언제는 제 우수한 유전자는 남기는게 이로울 것 같다면서요!
애 키우는 건 너로 충분하다 뿅.
눈에 넣으면 아플 귀여운 동생이지만 이렇게 일을 방해만 하게 두다가 천불나서 제 손으로 콱 죽여버릴 수도 있겠다 싶어 목소리를 깔고 경고를 하니 금새 옥구슬같은 눈물이 뚝뚝 볼 위로 흘러내린다. 금방 운다니까 뿅. 우성보다 어린 놈을 후려 팰때도 느끼지 못했던 애잔함에 마음은 잠시 말랑해졌지만, 겉으로는 그가 울든 말든 딱딱한 가면을 뒤집어 쓴 채였다.
이명헌은 은근히 마음이 여렸다. 티가 안나서 그렇지. 티를 낼 사람이라고 해봤자 그 수가 손에 꼽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더 무서워했다. 누구라도 제 가슴을 찔러 심장을 터뜨리던 칼이, 식탁 위에서는 밤 하나 못깎는 말랑한 재질을 자랑하면 기겁을 한다. 우성이 그 짧은 사이에 부어 통통해진 눈을 하고 철푸덕 주저앉아 곡을 했다.
요 며칠 다들 나는 예쁘다 안해주고 자꾸 그 못생긴 형한테만! 선물 주고, 고백하고, 그런단 말이에요!
으엉. 정우성이 기어코 이명헌이 가장 좋아하는 못생긴 얼굴로 어엉 울었다. 진정 서러운 것이 있다기보단, 얻지 못한 장난감을 탐내는 울분 담긴 울음소리였다. 그 사랑스럽던 얼굴이 있는 힘껏 찡그려지고 아이 울듯이 엉엉 울어재끼는 순간을, 이명헌은 가장 아꼈다.
하지만 동시에 제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면 가장 보기싫은 것이기도 했다.
원하는 것은 다 쥐어주며 키웠고, 필요 없다며 내던지는 것들은 치우는 방법까지 손수 가르친 아이였다. 제 손안에 들어온 것이라면 아무리 표면이 거칠고 뾰족하던 것이었어도 손바닥 위에서 데굴데굴 굴러 맨들맨들 둥글어져야 마땅했다. 몰랐는데, 팔이라는 것은 굽으라면 한없이 안으로 굽는다는 것을 팔자에도 없는 애를 키워가며 알았다.
제가 손가락 몇 번 퉁기면 구를 만큼 동그래야 할 터인데, 외부에 툭 튀어나온 돌기 때문에 흠이 생겨 손에서 헛돌면 그만큼 기분나쁜 것이 없었다. 나만 좋아해줘야 하잖아요! 내가 제일 예쁘다고요!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저러다 눈은 명헌의 입술만해지고, 목은 줄담배를 피우는 할아버지보다 쉬겠다 싶어 명헌이 긴 한숨과 함께 그만큼 기다란 다리를 접어 앉았다. 그 얼굴이 상하고, 저 목소리가 쉬면 손해인 건 이명헌이었다.
그만 울어 뿅.
킁...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군데 뿅.
크흥, 형... 형이 복수해 줄 거에요?
오똑한 코에서 콧물이 비죽 흘러나온 것을 보며 이명헌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발광을 하는 정우성을 며칠 더 감당하다가 기를 확 꺾어놓는 것과 그냥 한 명 치워주고 조용해진 틈을 타 구역 정리를 마치고 돌아가는 것. 어느 쪽이 덜 귀찮고 효율적인지를 따지던 명헌이 천천히 휴지를 꺼내 우성의 코를 감싸 꼬집었다. 꽤나 악력이 실려서 코 부러진다고 징징거리던 우성이 익숙하게 코를 흥 풀자 인상을 쓰며 휴지를 뭉쳐 던졌다.
하, 이걸 내다 버릴 수도 없고. 시터라도 구해야 하나.
알았으니까 그만 울라고 뿅. 이제 들어가서 일해 뿅.
명헌이 형이 최고에요!!
명헌을 와락 끌어안은 우성이 얼룩덜룩 젖은 얼굴을 대충 소매로 뭉기고서는 벌떡 일어나 달려나갔다. 성구형!! 저랑 같이 해요!!! 이명헌은 흔들림없이 정우성의 돌진을 받아냈다가 그의 그림자마저 눈에 보이지 않게 될 때쯤 뒤로 벌러덩 누웠다. 자, 이제 그 놈을 어떻게 묻어야 한동안은 정우성이 조용해질 수 있을지 생각해보자 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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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모두에게 사랑받는 프시케, 아프로디테의 질투.
산왕 그룹.
훌륭하게 깡패에서 , 회사로.
회사에서 사회로 나오기 시작한 조직.
한 때 산에서 곰을 때려잡으며 자리를 잡았다는 전 두목들은 안정적으로 그룹의 이미지를 만들고 은퇴했다. 표백제를 들이부어가며 세탁한 돈을 뒷돈으로 쑤셔넣어 폭력의 잔재는 그림자로, 겉으로 보기엔 문신 하나 없이 깨끗한 몸을 가진 젊은이들은 낯으로 꾸며놓자 산왕 그룹은 곧 자본 탄탄하고 미래가 밝은 대기업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반짝반짝 빛이 나게 닦아놓은 얼굴들 중에서도 대표이사의 명함을 단 이명헌은, 뒷방으로 들어간 불곰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있는 사람으로, 새롭게 단장한 산왕의 이름을 보다 드높이는 데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이였다. 인재를 보는 눈이 높았고, 손끝으로 찍은 이름들은 전부 데려와 잘 굴러가는 주사위로 썼다. 늘 희고 각이 잡힌 셔츠를 입었고, 수많은 가터벨트들로 잘 짜여진 모양새를 유지했다. 통제자이자, 완벽주의자. 이명헌의 운영에 모든 것을 맡긴다. 그는 교체불가한 산왕의 구심점이었다.
최근 산왕은 이미지를 정말 많이 세탁해 더러운 뒷소문이 전무한 도시에서 9층짜리 건물을 올리고, 산왕 인터네셔널이라는 간판을 내거는데 성공했다. 번화가에 비하면 조용했으나 얼마든지 개발 가능성이 있는 구역을 천천히, 본래 그 구역을 먹어가던 세력보다 합법적으로, 조금은 불법적으로 삼키기 위해 그들은 꽤나 바빴다.
한동안 피라고는 날카로운 서류에 손을 베이는 것이 전부인 삶을 살다보니 몸에 묻은 피냄새가 옅어져있었다. 1차전은 이겼고, 찾아온 짧은 휴가. 이명헌은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낙수.
왜?
사람 하나 조사해줘 뿅.
이명헌이 정우성이 밤낮없이 투덜거리며 씹어대던 사람의 이름 세글자를 읊어주었다. 복잡한 문양에 알이 커다란 안경을 쓰고 타자를 두드리던 낙수의 손이 멈칫한다. 명헌의 눈썹도 아주 살짝 움직인다. 김낙수가 이미 아는 이름이라. 돌이켜보니 정우성이 징징거리기만 하고 진작에 직접 손을 쓰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김낙수는 화면에서 눈을 떼고 이명헌을 담는다. 정우성 때문에 그래?
해결해주겠다고 했거든 뿅.
음...
거물인가?
여러 의미로 거물이긴 하지. 조용히 덧붙이는 말끝에 웃음기가 묻어난다.
이제는 이명헌의 코끝이 찡한다. 이 정도로 반응한다고.
사진 있어 뿅?
눈으로 보는게 빨라. 지금 시간이라면 아마 나와있을거야.
김낙수가 안경을 고쳐쓰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완전히 덮은 암막커튼 한쪽을 걷는다. 눈이 부셔 찡그렸다가, 방 한쪽을 통으로 낸 창으로 다가서니 한산한 거리가 눈에 띈다. 쭉 뻗은 도로, 쓰레기 없이 깨끗한 거리. 낮은 건물들이 여러개, 오밀조밀 붙어있다. 정성구가 좋아하는 빵집, 단골의 명함을 받기에 충분할 만큼은 방문하는 카페.
그리고 온통 회빛인 이 건물과는 대조될 만큼 알록달록하니 사랑스러운 꽃들을 바구니에 담아 내놓은 소담스러운 꽃집이, 하나. 시원스레 문을 열어놓고 꽤 사이즈가 큰 물통을 들고 나와 서서 옆집 카페사장과 담솔를 나누는 듯한 남자가, 한명.
남자네.
남자지.
안 예쁜데.
얼굴은 그렇지.
이명헌이 제 옆에 와서 선 김낙수를 쳐다본다. 김낙수는 밖에 내놓은 꽃들을 죽 살펴보며 말했다. 신현철, 동생 하나 있고 그게 우리의 야근을 책임져 주는 저 카페 사장님. 나이는 한 살 차이래. 신현철 본인은 우리랑 동갑이고. 그 설명 하나로 이명헌은 이 건이 정우성 손에 해결되기에는 불편한 가시가 달린 것임을 알았다.
정우성의 까다로운 입맛에 딱 맞는 커피를 내리는 동글동글한 남자 사장. 정우성이 되도 않는 떼를 쓸 때, 100번 중 9번은 그 집 커피를 사다 물려주면 금새 차분해지는 지라, 그 카페 사장은 산왕의 모두에게 인기가 좋은 편이었다. 회사에 데려오고 싶은데, 형제가 함께 돈을 들여 가게를 차린 탓에 여러번 거절했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도 가게가 코앞에 있으니 아직까진 욕심이 놀부의 혹만큼 커다래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흠.
형제가 나란히 가게를 차린 것 같은데, 부모님은 외국에 있대. 동생은 커피, 형은 꽃. 덩치만 보면 참 안어울리는데.
저 정도로 말한다는 건 이미 조사를 마친 후일 터다. 짭새도, 다른 파에서 보낸 깍두기도 아닌. 걸리는 것 없이 깨끗한 일반인. 이명헌은 개미처럼 조그맣게 보이는 두 머리통을 보았다. 빡빡이네 뿅. 운동을 오래 했나봐, 태어나 지금까지 머리 한번 기른 적 없더라. 용캐도 아무도 안주워갔군. 저정도 피지컬이면 어느 파에 들어갔어도 한 자리 했을 상이었다.
되게 친절해.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뿅.
꽃 사러 갔다가 다리 부러질 뻔 했다.
뭘 그렇게 얹어주던지. 김낙수가 중얼거렸다. 저 꽃 향기 좋던데. 이명헌은 낙수를 따라 창밖을 보다가 말을 얹었다.
그래서 뿅.
정우성이 싫어하는 건, 신현철이 인기가 많아서 그래.
남녀노소 말이야. 여자들은 꽃을 사다가 꽃집 사장한테 주고, 남자들은 꽃 배달이라도 오면 자기가 가겠다고 나선단다. 그 덩치인데도 말이야. 예전엔 정우성이었지, 그런 추앙을 받는게. 심지어 카페 사장도 제 형이라면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할 정도로 우애가 좋다대. 이명헌은 말을 받았다. 너도 지금 꽤나 열심히 실드를 치고 있고 뿅. 김낙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 더 싫어하지. 알면서도.
우성이는 제가 다 가져야 되는 애잖아. 니가 그렇게 키워놨고.
뿅...
야, 가끔은 못 가지는 것도 있는 걸 알려줘야지.
저 사람은 건들면 여럿 신경 건드린다. 최동오는 단골이고, 정성구 점심 메이트야. 카페는 어쩔거고. 김낙수의 말이 길었다. 구구절절 틀린 점 하나 없는 것은 여전했고. 이명헌은 관자놀이를 툭툭 건드리며 생각에 잠긴다.
나만 한번도 못만났네 뿅.
그동안 바빴으니까 뭐.
그럼 만나러 가야지.
내 손바닥 위에 난 거스름인데, 난 있는 줄도 몰랐네. 이명헌은 다시 커튼을 쳤다. 암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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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신도, 인간도 두려워하는 그의 이름은 에로스.
이명헌의 출근 복장은 늘 같았다.
결제서류를 칼같은 각도로 정리해 넣은 가방을 들고, 시계에 관심이 있는 이 본다면 눈이 휘둥그래질 만한 것을 손목에 둘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그를 두려워했다. 광원에 가장 가까워 눈이 멀 것 같은 산왕의 정상을 아는 자들도, 질척한 그늘에서 늪 아래에서 발목을 잡아채는 산왕의 바닥을 아는 자들도. 이명헌의 이름을 들으면 저도 모르게 몸을 한차례 떨었다.
하지만 진정으로 이명헌을 아는 자들은, 그가 운동복에 후드티 하나를 걸쳤을 때 더 혀를 내둘렀다. 각잡힌 복장을 한 이명헌은 뭍으로 나온 멀쩡한 낯짝에 불과했고, 온몸을 무기로 삼을 수 있는 편안한 복장을 했을 때 그는 알몸과 다름 없었다. 무엇이 묻고, 무엇에 젖어도 물로 뛰어들어 그 끈적한 점액이며 살점을 씻어내면 그만인. 이명헌은 가벼운 바지주머니에 키링이 달린 차키를 밀어넣었다.
짤그랑.
두 개의 참이 주머니 안에서 서로 몸을 부딪히며 자그만 소음을 냈다. 하나는 금으로, 하나는 납으로 만든 키링은 화살처럼 한쪽 끝이 뾰족하고, 한쪽은 링처럼 둥글었다. 급할 땐 꺼내어 둥근 쪽을 손에 끼고 반대쪽을 급소에 박아넣으면 되는 간단한 물건은 이명헌이 중요한 자리라고 생각하는 곳에는 꼭 들고가는 것이었다.
살려두고 손에 담으려면 금으로 된 무른 것을, 깨끗하고 소리없이 마무리하고 싶으면 납으로 된 무거운 것을. 금 촉은 자극을 받으면 미약이 발린 침이 튀어나오는 종류의 것이었고, 납 촉은 그 자체로 단단해 뼈도 뚫을 수 있었다. 무서운 것을 태연하게 평범한 키링처럼 바지주머니에 넣으니 축 늘어진 바지춤이 사람을 더 물러보이게 만들었다.
여리고 약해보이는 것 앞에서 사람들은 긴장을 풀기 마련이다. 이렇게 최대한 감춰도 여린 사람들은 겁부터 집어먹고 대하기는 하지만, 그때 본 남자는 덩치도 있고 심지도 곧아보였으니 이정도 했으면 벽을 세우고 들지는 않겠지.운동화를 신은 발은 구두를 신은 것과는 달리 뚜벅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아침 7시, 해가 막 뜨기 시작한 시간의 거리는 한산했다. 부지런한 형제의 두 가게만이 불이 환했다. 커피의 향이 가느다란 꽃향기와 섞여 흘렀다. 돌아갈 땐 커피나 한잔씩 사갈까. 태평한 아침이었다.
이명헌은 습관적으로 발소리를 죽여 걸었다. 꽃집의 문은 이미 열려있었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간다. 작은 온실에 들어온 것처럼 꽃냄새가 흠씬 풍긴다. 리본을 다듬는 가위질의 서걱거리는 소리에 자신을 묻고, 꽃집의 문턱을 넘는 순간 주인이 고개를 돌린다.
안녕하세요.
... 네, 좋은 아침입니다 뿅.
뿅? 신현철의 눈썹이 양쪽 모두 번쩍 들렸다가 커다란 입에서 웃음소리가 터지는 것과 동시에 부드럽게 쳐진다. 웃긴 말꼬리네요. 좋은 아침입니다. 꽃 찾으세요? 이명헌은 우뚝 섰다가, 발끝을 뒤로 물렀다가, 고개를 돌린다.
... ... 꽃을 보러 온 것은 아니고... 뿅.
네, 그럼 원하시는 게 따로 있을까요.
친구 분 꽃다발, 아니면 화환이라던가. 친구? 이명헌이 의아한 표정으로 신현철을 다시 쳐다보았다. 시선을 알아챈 그가 리본을 가다듬던 손을 멈추고 앞치마 주머니에 넣어둔 작은 수건으로 커다란 손을 닦는다. 손톱이 가지런하고, 마디가 굵은 손. 이명헌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바짝바짝 말라가는 목구멍이 꼭, 물을 갈망하는 꽃들의 줄기같았다.
친구, 라면...
저기 저 회사 분 아니십니까?
신현철의 손끝이 코앞의 산왕 인터네셔널을 가리킨다. 머리가, 단정하시길래. 빡빡이 소굴인 회사가 주 손님층인 가게에 빡빡이가 찾아오면 그의 소속을 가늠하기가 얼마나 쉬울까. 김낙수마저 아쉬운 소리를 늘어놓는 주인장이라면 아마 다른 녀석들에게도 이리저리 줄기를 엮어놓았을 터다. 정우성을 달래는 1등급 커피집 사장의 형이니, 아마 그런 관계들에도 훤하겠지.
이런 저런 계산기를 바쁘게 돌려도 모자랄 판에, 머리가 뜨끈했다. 꽃집의 온도가 높아서 그럴지도, 라고 생각할 때 열린 문 밖으로 차가운 공기가 훅 들어와 남자의 앞치마를 펄럭 들추었다.
어이쿠.
젠장.
심봤다.
이명헌은 얇다란 앞치마가 젖혀지며 드러난 튼실한 허벅지며, 틈 없이 근육이 붙은 것이 청바지 밖으로도 보이는 정강이며, 깔끔하게 꼭 조여진 운동화의 끈까지 1초만에 눈으로 싹 훑었다. 내도록 체육부였다고 하더니, 풀리지도 않게 꽉 묶인 운동화의 끈이 아쉽다. 끈이라도 풀려있었으면 묶어주겠다는 명목으로 거리를 좁히기 쉬웠을 텐데. 이명헌의 계산기가 아주 쓸데없는 곳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방금 눈앞의 남자에게 가능했다면 속옷 브랜드까지 탈탈 털렸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현철은 성큼성큼 걸어 문을 닫았다. 이명헌은 그 틈을 타서 혀에 고인 침을 한번 더 꿀꺽 삼켰다. 문 틈으로 새어들어온 바람 소리가 침 삼키는 소리를 숨겨주었다. 신현철은 문을 닫고선 아직은 날이 쌀쌀하네요, 같은 소리를 했다. 이명헌은 날이 더워지면 저런 니트 스웨터 말고 몸에 딱 붙는 반팔셔츠를 입어줄까, 하는 생각을 하는 자신과 낯을 가리고 있었다.
저기, 손님?
아, 네. ... 뿅.
푸흑, 뿅은 꼭 붙이시는 겁니까? 아, 웃어서 죄송합니다. 그냥.
좀 귀여우셔서요. 신현철의 눈빛이 대번에 부드러워졌다. 이명헌은 주먹으로 허리께를 퉁 쳤다. 정신 차려라 뿅. 이명헌은 살면서 이렇게 허들이 낮은 남자를 대한 것이 얼마만인가 생각했다.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그가 아무리 부드러운 낯을 꾸며낸들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딱딱하게 굳은 사람들에게 약인지 독인지 모를 말들을 흘리고, 녹진하게 녹여 잡아먹는 것이 그의 주특기였는데... 애초에 말랑하게 구는 커다란 고릴라는 어떻게 먹어야 하지? 신현철이 웃음기가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이명헌 입니다.
뿅을 까먹으셨습니다.
뿅.
푸핫. 아이고, 또. 크흠. 죄송합니다. 이명헌은 이번엔 다른 쪽 손으로 좀 더 세게 허리께를 내리쳤다. 윽. 조준이 잘못되어 쭉 뻗어나간 주먹이 골반 근처를 강타했다. 이명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금빛 화살촉에서 뭔가가 툭 튀어나와 이명헌의 허벅지를 쿡 찌르곤 다시 들어갔다. 신현철은 손님 앞에서 너무 웃은 것을 자책하며 손으로 입술을 툭툭 때리다가 비틀거리는 이명헌을 반사적으로 부축한다.
괜찮으세요?
아...
손님, 아니 갑자기 땀을 이렇게... 손님? 이명헌 씨?
실수했다 뿅... 이명헌은 부풀어오르기 시작한 바지 속 또다른 흉기를 가리기 위해 최대한 허리를 숙였다. 첫만남부터 이름을 불렸다고 텐트를 세우는 미친놈으로 낙인찍힐 수는 없었다. 신현철의 눈에는 갑자기 배를 감싸고 숙이는 모습이, 갑자기 맹장이 터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대번에 심각해진 표정으로 이명헌의 낯을 살폈다. 정신 차려보세요, 배가 아프십니까?
아니, 그런게 아니라...
네. 이거 보이세요?
손가락 두개를 쭉 펼쳐서 눈 앞에 들이민다. 두툼한 손가락을 보니 당장 뒤에 쑤셔박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영 정상은 아니라, 이명헌이 고개를 살래살래 젓는다. 신현철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첫 손님이 제정신이 아닌 상태가 되다니, 이대로 그를 보내면 오늘 하루종일 운수가 안좋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하자 신현철이 이명헌을 훌쩍 부축해 안는다. 이런 미친, 가슴이 닿았다. 이명헌은 이를 악물며 니트 속을 헤집어 희롱하려는 손을 그의 어깨를 부여잡는 것으로 참아낸다. 보통이 아닌 악력에 신현철의 얼굴도 일그러졌으나, 그는 최대한 티내지 않고 그를 똑바로 세우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
병원에 데려다 드릴게요. 윽, 일단 몸에 힘을 좀 빼시고...
벼, 병원은 말고... 말고, 회사로.. 뿅...
아니 이렇게 땀을 흘리시는데 무슨 회삽니까.
절대로 똑바로 설 수는 없는 남자와 똑바로 세워 걷게 도우려는 남자의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이명헌은 어깨를 잡아 정신을 차리려다 죽 늘어난 니트 사이로 드러난 쇄골에 온통 눈을 빼앗겼고, 신현철은 감싸안은 허리의 후드티가 밀려올라가 닿은 맨 살결이 부드러워 순간 엄한 상상을 했다.
저 쇄골에 물 흘려서 빨아 마시고 싶다.
무슨 남자한테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냐.
이명헌과 신현철의 시선이 얽힌다. 신현철은 딱 봐도 아파보이는 손님을 두고 엉뚱한 생각이나 하는 자신을 자책하느라, 그리고 이명헌은 조금만 더 쳐다보다간 그냥 뒷목을 쳐서 기절시키고 제 방에 가두어버릴 것만 같아 자제하느라 고개를 팩 돌린다. 그리고 꽃집의 문이 벌컥 열린다.
... 이명헌?
너 거기서 뭐하냐. 최동오가 완벽한 출근 복장을 하고선 꽃집 안으로 들어선다. 신현철은 꽃집 단골의 등장에 저도 모르게 이명헌을 안은 손에 힘을 풀었고, 이명헌은 우당탕 고꾸라졌다.
명헌아!
아이고, 손님!
허억...
이명헌의 인생에서 손에 꼽히는, 최악의 첫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