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매점누나 | @gogogogo_bbyong
**현철명헌 에로스x프쉬케 합작으로 작성한 느와르au입니다
개인적으로 풀었던 느와르철뿅(나비이야기)썰 기반이기는 하나, 모르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이처럼 헬레니즘 시기에 작품들이 후대의 해석에 큰 영향을 준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이전 시기에는 에로스가 좀 더 근원적이고 태초의 의미를 가졌고..."
낮고 차분한 목소리의 큐레이터가 한 그림 앞에 멈춰 섰다. 회랑을 따라 이어진 복도를 돌아온 그들은 그녀의 손끝을 따라 벽으로 시선을 던졌다.
"지금 보고 계신 이 그림이 지난 달 이탈리아 꼬모 지역의 작은 성당에서 발견된 작가 미상의 작품입니다. 지하 창고를 리모델링하던 중 무너진 벽 사이에 숨겨져 있던 금고에서 발견되었고, 16세기 당시에 주로 쓰이던 화풍과 물감의 질감으로 보았을 때 16세기 중반에서 후반의 작품인 것으로 보입니다."
큐레이터의 조근조근한 말소리에 남자는 몸을 일으켰다. 앉아 있을 때부터 눈에 띌 만큼 거대한 덩치였던 남자는 검은 트렌치코트에 검은 캡모자를 눌러 쓰고 있었다. 지나가는 관람객 중 두어 명이 기둥같이 우직하게 서 있는 그를 힐끔거리며 지나쳤다. 미술관 내에는 그다지 많은 관람객이 있지는 않았으나,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씨, 그것도 평일 이 시간에 미술관에 찾아오는 인원으로 치자면 평소보다 꽤 많은 편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저기에 걸린, 조금 전부터 여덟 명이 넘는 관람객들을 손수 이끈 큐레이터가 정성 들여 설명하고 있는 한 점의 그림 때문일 것이다.
"정말이지...기사에서 사진으로 본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아름답네요. 작품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한 노부인의 질문에 큐레이터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에로스와 프쉬케>입니다."
-현철명헌 에로스x프쉬케합작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
-아가 4장 7절
"아직 연구가 끝나지 않아 전시가 허락되지는 않았지만, 특별히 저희 미술관의 관장님 지도 하에 하루에 정해진 시간 동안만 저희 관에서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본 작품은 이번 한 달 동안만 전시가 이루어질 예정이며 기간이 끝나면 다시 연구소로 돌려보낼 계획입니다."
"아, 이런. 그 전에 더 자주 보러 와야겠네요."
"언제든 방문해 주신다면 저희도 환영입니다, 부인."
큐레이터와 수행원들이 한 무리의 관람객을 데리고 장소를 이동했다. 남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들이 2층에 있는 이집트 지역 전시실로 향하는 것을 본 남자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조금 전 큐레이터가 열심히 설명하던 그림 앞으로 가 섰다.
"..."
남자의 시선이 삐뚜름하게 기울어져 미약한 조명을 간접적으로 받고 있는, 유리관 안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잠든 두 남녀의 얼굴 위로 머물렀다. 부드럽고 따뜻한 색채와 살짝 거칠 질감의 물감 자국이 독특하게 어우러진 작품이었다. 무표정하게 그림을 응시하던 남자는 하,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웃음에 담긴 의미는 퍽 긍정적이었다. 남자는 그림에 두었던 시선을 내려 자신의 주머니에서 징징 울리는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어, 자기야."
-찾았어?
"성격도 급하셔라."
남자는 끌끌 웃으며 귀에 휴대폰을 댄 채 몸을 돌려 중앙 홀을 걸어 나갔다. 조금 전 그림 앞으로 다가갔을 때와는 달리 매우 빠르고 경쾌한, 그러나 그 큰 덩치로서는 놀라울 만큼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최대한 덜 띄도록 재빨리, 그러나 딱 평범할 정도로 전시관을 벗어난 그의 귓가에 낮은 웃음소리가 퍼졌다. 재미난 것을 발견한 아이처럼 숨을 죽이고 장난스럽게 웃는,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 웃음.
-어떻게 됐어뿅.
"낙수 말이 맞더라. 완전 퍼펙트지, 뭐."
-상태는?
"아주 좋아요~ 역시 윤 박사가 전문가라서 그런지 보존을 기가 막히게 잘해서 들고 왔더라고."
-그래, 잘했어뿅.
"아, 그런데 상태는 상태인데, 가까이서 보니까 있잖아, 자기야."
-응.
언제부터 대기하고 있었는지 검은 세단에서 내린 부하 직원이 이미 우산을 펼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철은 눈짓으로 다른 부하들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게 한 후, 우산을 받쳐 준 부하를 대동하고 세단 뒷좌석에 올라탔다. 이미 입가에 미소를 가득 문 주제에, 그는 잠시 뜸을 들이며 반대쪽 귀로 휴대폰을 바꿔 대고는 덧붙였다.
"하나도 안 닮았더라, 우리랑."
***
"이명헌!!!!"
명헌은 머릿속으로 셋을 셌다. 하나, 둘, 셋, 뿅. 정확히 3초 후 대표실의 문이 우당탕 열렸고, 잔뜩 성이 난 낙수의 뒤로 난처한 얼굴의 성구가 뒤따라 들어왔다.
"문 닫고 들어와라뿅."
"지금 문 처닫게 생겼냐?"
"성구."
명헌의 피곤하다는 듯한 눈짓에 성구가 한숨을 푹 쉬며 등 뒤로 문을 닫았다. 금방이라도 누구 하나 걸리면 찔러 죽일 기세로 들이닥친 낙수가 살벌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장동에 있는 타운 다음 달까지 정리하라고 했다며. 왜 나한테는 말을 안 하지?"
"안 그래도 부르려던 참이었다뿅. 네가 이렇게 눈 뒤집혀서 올 줄 진작에 알고."
"내가 찾아오게 만들지 말고 어련히 알아서 전달을 했어야지. 아니면 애초에 그걸 정하는 자리에 나를 불러서 같이 얘기를 하든가!"
"야, 낙수야! 일단 자리에 좀 앉고 말해라, 임마!"
"성구는 어쩐 일이야뿅."
명헌의 담담한 시선에 성구는 뒷머리를 벅벅 긁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니, 나도 할 얘기가 있기는 했는데, 김낙수 이게 이렇게 독이 바짝 올라 가지고 애들 다 줘팰 기세로 대표실까지 가고 있는데 어떻게 안 따라오냐. 괜히 밑에 애들이 눈치 없이 막아서다가 송장 치를 일 있냐."
"나랑 이명헌 사이에 해결해야 할 일이니까 너는 빠져."
"나도 명헌이랑 할 얘기 있다니까?"
"인기가 너무 많아도 피곤하다뿅."
"너 진짜 뒤질래?!!?"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치는 명헌의 반응에 결국 다시 열이 오른 낙수가 소리쳤고, 성구는 점점 더 아파오는 머리를 엄지로 꾹꾹 누르며 내 팔자야, 하고 한탄하기 시작했다. 시끄러우니까 소리 좀 그만 지르고. 뭔 애새끼들도 아니고 어릴 때처럼 네가 잘못했니 내가 잘못했니 하면서 빽빽거릴 거냐. 성구의 진지한 타박 끝에, 간신히 열을 가라앉힌 낙수가 대표실 한 가운데에 놓인 소파 중 제일 위쪽에 걸터앉았다.
대표실의 구조는 단순했다. 방의 주인인 이명헌의 책상은 문을 열었을 때 오른쪽 맨 끝에 있었고, 그의 책상이 보는 방향으로 방의 중앙에 긴 탁자와 검은 소파가 놓여 있었다. 1인용 소파 한 개와 길쭉한 다인용 소파 두 개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구조. 그리고 환하게 난 창문은 항상 블라인드가 내려가 있었지만, 명헌의 책상 가까운 쪽에 난 창문에는 최근 생겨난 화분 몇 개가 창틀을 따라 조르륵 놓여 있느라 그쪽 창문에는 블라인드가 반쯤 올라가 있었다. 어두운 갈색의 마호가니 책상 위에는 검은 명패에 심플한 서체로 대표 이명헌, 과 역시나 심플한 회사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이따금 명헌의 책상 위에는 결재가 늦어진 보고서나 서류 더미들이 쌓이곤 했고, 또는 이상한 인형이나 장식이 달린 펜, 또 어쩌다 가끔씩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 인형이 엎어진 채로 굴러다닐 때도 있었다. 그래도 보통 명헌의 책상은 깨끗했다.
<산왕 파이낸셜>이라는 기업의 대표 책상이, 저 정도로 아무것도 없이 휑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일단...마장동 타운은 정리하기로 한 게 맞다뿅."
"씨발..."
"화내지 말고 들어. 얼마 전에 우성이가 담당하던 미아리 쪽 하우스가 털렸다뿅. 어차피 예전부터 철수하기로 해서 미리 조금씩 정리하던 곳이라 크게 문제 될 건 없었지만..."
"거기가? 이제 와서 갑자기 왜?"
"아마 끄나풀이 있었거나, 아니면 뒤늦은 정보로 누군가 찌른 거겠지뿅. 지금은 별로 남아있는 게 없어서 헛걸음이나 했겠지만."
명헌은 잠시 입을 다물고 턱을 괸 손을 내렸다. 언뜻 보면 멍해 보이는 담담하고 고요한 눈으로, 책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는 검지로 엄지손톱의 끝을 틱틱 튕겼다.
"이미 우성이가 찾고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뿅. 주기적으로 그랬잖아. 꼭 한 놈씩 쥐새끼 같은 놈이 몰래 기어들어 와서 들쑤시고 다니고."
"현철이도 알아?"
"아직. 이제 복귀하면 말해줘야지뿅."
"쯧, 짜증 나게."
팔짱을 끼고 소파에 기댄 낙수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어쨌든 명헌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어디서 정보가 새어나갔든 간에 경찰이 다시 냄새를 맡았다면 꼬리를 빼는 게 우선이니까. 어차피 경찰이란 것들은 단서가 확실할 때만 움직일 수 있다는 걸 낙수는 잘 알고 있었다. 서울 내에는 물론 근교까지 통틀어 낙수의 손 아래에 있는 업장은 크고 작은 것을 전부 합치면 백 개가 넘었다. 한두 개 잃는다고 해서 아쉬울 것은 당연히 없지만, 단순히 가게 셔터를 내리는 일과 그 안에 줄줄이 소시지처럼 엮여 있는 장부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경찰 쪽에 정보가 들어간다면 거기서부턴 얘기가 아주 달라지는 거니까. 낙수는 예전부터 그랬다. 조금의 위험 부담이라도 있는 선택지는 아예 선택지 취급조차 하지 않았다. 게다가 명헌이 먼저 손을 쓸 정도라면 그만큼 확실한 사안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니 정우성에게 맡겼겠지. 거기까지 빠르게 머리를 굴린 낙수는 이제 자신이 할 얘기는 이게 끝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 하고 올렸다. 네가 알아서 하라는 듯이. 그 행동에 맞은편 소파에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있던 성구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명헌아, 네가 지난 주에 얘기한 거 말인데."
"뿅."
"그거...꼭 해야겠나 싶어서."
명헌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휑하니 비어 있는 책상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지루함이 뚝뚝 묻어나는 눈으로 턱을 괸 채.
"뭔데?"
"비밀이다뿅."
"어쭈. 또 이상한 거 꾸미나 본데."
"아직 애들한테 말 안 했어?"
다시 서로 투닥거리기 시작하는 명헌과 낙수를 보며 성구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곧 모아서 말하려고 했다뿅. 아니 그니까 그게 뭐냐니까? 지금 말하라고. 싫다뿅. 중대 발표는 모두 모아놓고 제대로 하고싶다뿅. 또 무슨 염병을 하려고...
낙수와 명헌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을 보며 성구는 난처한 듯 팔짱을 끼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푹신하고 탄력 좋은 가죽의 감촉이 등을 안락하게 감쌌지만, 성구는 입 안으로 혀를 찼을 뿐이다. 의도치 않게 제일 먼저 알게 된 사람인지라 왜 너는 입 닫고만 있었느냐며 비난을 듣게 될 것이 뻔했지만, 글쎄, 명헌이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성구로서도 입을 열 이유는 없었다. 그저 낙수와 투닥거리는 것을 보면서, 아무래도 나중에 다시 와서 얘기해야겠다 싶은 성구였다.
안 되나! 전화 안 끊어?!
"성구 형!"
낯익다 못해 지긋지긋한 얼굴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채웠다.
맡긴 일이 조금 늦어져서인지 제일 늦게 얼굴을 내민 우성이 붙임성 좋게 성구의 등을 한 번 끌어안았다가 놓았다. 웬일이래, 우리 전부 불러다 놓고? 그 정도로 중요한 얘기인가? 아, 형, 그런데 있잖아요, 끝나고 오는 길에, 어 동오 형! 나나나 나 형 옆자리! 맨 앞에! 형 있잖아요 나 오는 길에 어떤 할머니가...
"우성아, 나 어제 잠 못 잤으니까 조용히 좀 닥치고 있자."
넓은 공용 회의실에는 가운데에 길쭉한 회의용 테이블과 그 양옆으로 10개의 의자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더 큰 규모의 전체 회의나 주주총회, 시무식과 같은 모임을 가질 때는 8층에 있는 회의실을 사용했던지라 자리에 모인 이들은 왜 우리를 전부 이 회의실로 불러 모았나, 하는 눈치였다. 제일 상석에 위치한 의자에는 명헌이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의자를 끼릭끼릭 돌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고, 명헌의 기준으로 왼쪽에는 성구와 낙수, 오른쪽에는 공석 하나를 두고 동오가 앉아 있었다. 보통 앉는 순서는 잘 변하지 않았으나 우성이나 낙수가 먼저 온 경우에는 두 사람이 제일 앞, 그러니까 명헌의 양옆에 앉을 때도 있기는 했다. 동오가 일부러 공석을 두고 떨어져 앉은 이유를 그 자리에 모인 간부들이라면 전부 알 테지만, 부산을 떨며 뒤늦게 들어온 우성이 당당하게 명헌의 옆자리에 앉는 것을 굳이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늦게 온 녀석이 시끄럽기는, 얼른 앉기나 해라. 그나마 공식적인 회의라는 명분이나마 챙기기 위해 문가에 서서 인원을 체크하던 성구가 우성에게 잔소리를 하며 앉자마자, 내내 조용히 의자나 돌리고 있던 명헌이 입을 열었다.
"...오늘 갑작스럽게 모이라고 한 이유는."
그의 발언에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쏠렸다.
"...다름이 아니라 외로워서다뿅."
"..."
"..."
"...헤."
"나 간다."
"아, 잠깐만, 낙수야!"
살얼음 같은 침묵 끝에 우성이 얼빠진 웃음소리를 냈고, 그와 동시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낙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거 진짜 또라이 아냐, 바쁜 사람 불러놓고 뭐? 외로워? 진짜 외로워지게 한 번 해줘 봐 내가? 이를 갈듯 화를 쏟아내는 낙수와 간신히 그런 낙수를 뜯어말리는 성구를 보며, 맞은 편에 앉은 동오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웃지 마 개새끼야! 팍 짜증을 부린 낙수를 잡아 눌러 다시 앉게 한 성구가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명헌아, 아직 현철이도 안 왔는데."
"오고 있대. 어차피 현철이는 아니까 미리 얘기하고 있어도 상관 없다뿅."
"그런..."
"정성구, 너 뭐 알아? 이명헌 저거는 왜 자꾸 어제부터 별 같지도 않은 농담이나 치고..."
"농담 아닌데."
명헌의 담백한 대꾸에 낙수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퍽 진지해진 명헌의 표정을 보며 웃음을 멈춘 동오가 의아하게 물었다.
"뭐, 진짜 외롭다고?"
"최근 내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데."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린 명헌이, 정장 재킷 안쪽으로 한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매끈한 대리석 테이블 위에 올려진 것은 다름 아닌 흰 봉투 넉 장이었다. 돈 봉투도 아니고, 그냥 편지도 아니고 이게 대체 뭔가. 자연스레 명헌이 꺼내든 봉투에 시선이 집중된 네 명의 얼굴 위로 커다란 물음표가 띄워졌다. 제일 먼저 알아챈 것은 역시나 동오였다.
"어, 이거 설마."
"맞아."
"설마가 뭔데."
"청첩장이다뿅."
뭐????????????????
성구를 제외한 세 명이 동시에 고장난 표정으로 명헌을 올려다보았다.
"...청, 첩장이면 누구..."
"내 거."
네?????????????????????????????????????????????
뜨악한 얼굴의 친구들을 찬찬히 둘러본 명헌은, 어느새 누그러진 얼굴로 베시시 웃으며 덧붙였다.
"나 결혼한다, 뿅."
훗날, 김낙수는 그 순간을 회상하며 '그 자식, 진짜 무슨 새신부처럼 처웃고 있었지...' 하며 중얼거리게 된다.
***
"아니! 잠깐!!! 잠깐만, 명헌아, 아직 날짜 정해지지도 않은 건데 언제 뽑은 거야, 그건?!"
"정성구 너 알고 있었어?!"
"그야 결혼식 준비를 하려면 성구한테 미리 말해야지. 회계 담당이잖아뿅."
"회사 돈으로 식을 올리겠다고? 너 임마 이거 횡령인 건 알고 있냐?"
"내 돈인데 뭐가 횡령이냐베시."
"명헌이형----!!!!! 저는 아직 형이랑 결혼할 마음의 준비가!!!"
"아 또 시작이다뿅."
"정우성 닥쳐 봐! 야, 성구, 네가 말해. 지금 상황이 대체 뭔 상황인지 네가 설명하라고."
조용했던 회의실은 어느덧 난장판이 되었다. 사람이라고 몇 명 모이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정신이 없어질 수가 있는 거냐. 하여튼 이 새끼들은 나잇살이라고는 뒷구멍으로들 처먹은 건지. 성구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아, 또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나, 이거를..."
설명은 길지 않았다.
얼마 전, 아니 한 몇 달 전쯤인가, 그때부터였다고 했다. 이명헌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날이었다. 간만에 또 주제넘게 나대는 녀석들이 있어서 한 번 눈도장을 찍으러 만난 날이었고, 눈에 다 보이게 뻔한 수를 쓰는 녀석들이었다. 고작 두 명이 행차하실 거였으면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보다고 비웃으며 폐공장의 셔터를 내리는 어줍잖은 기세의 패거리들을 보며, 명헌은 뒷짐을 지고 공장 내부를 휘 둘러보았다. 자동차 공장이었나보네. 기름 냄새가 난다뿅. 이제는 안 쓰는 곳이죠. 우리 이 대표님 묻기 딱 좋은. 여기가 또 인터넷에 쳐도 안 나오는 곳이고 그러거든. 짭새들도 이런 게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는 곳이라.
"멘트 진짜 구리다."
명헌의 뒤에 뒷짐을 지고 서 있던 우성이 툭 내뱉자, 패거리 중 제일 우두머리로 보이는 녀석의 낯빛이 흉흉해졌다.
"...우리도 쪽수로 밀어붙이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통수라도 치지 않으면 우리 이 대표님 목은커녕 손끝 하나도 댈 수가 없으니까는. 쟤가 그 우성이인가 하는 걘가 본데,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다구리 앞에는 장사 없잖아. 그렇지? 그래도 진짜 두 명만 달랑 나올 줄은 몰랐는데."
"다른 애들까지 죄 끌고 나올 정도로 값어치 있는 자리는 아니었으니까뿅. 애들 밥값도 안 나온다뿅."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아직도 뿅뿅 이 지랄을..."
"우성아."
"예!"
명헌은 뒷짐을 지고 있던 한 손을 뻗어 검지를 까딱였고, 얌전히 상체를 숙인 우성이 귀를 대자 몇 마디 귓속말을 했다. 우성의 맑은 눈 위로 묘연한 빛이 감돌고,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면서 주위를 둘러싼 무리들이 살짝 동요하는 것이 보였다. 귓속말을 끝낸 명헌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뭔가를 눌렀고, 그것이 필시 경찰이나 아니면 다른 녀석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라 짐작한 무리들은 비웃음을 흘렸다.
"응, 자기야."
자기?
뒤지기 전 마지막으로 애인에게 유언이라도 남길 작정인가? 무리들은 당황한 눈으로 서로 눈빛 교환을 하다가, 말로만 듣던 그 이명헌의 애인이라는 년이면 대체 어떤 여자인가, 하는 호기심에 저도 모르게 그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차피 그쪽도 평범한 쪽은 아닐 게 분명했으니 이명헌을 여기서 담그고 거기도 조지러 가면 딱 깔끔하고 좋을 것 같았다.
"아니, 우성이랑. 응. 아니, 거기 말고."
묘하게 부드러워진 목소리며 말투가 누가 봐도 지긋하게 사랑하는 사람의 태도였다. 허 참, 씨발. 살다 살다 이명헌이가 끼고 산다는 그 애인도 알게 되네, 뭐 어차피 상관없나 이젠. 너털웃음을 터뜨린 무리의 우두머리가 중얼거리더니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아, 씨발 거 상황 파악 안 되나! 전화 안 끊어?!
"...자기. 나 라이터가 없다뿅."
"뭐? 갑자기 뭔..."
"라이터가 필요할 것 같아서. 응...지금? 정면?"
정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되묻자, 명헌이 살짝 웃는 얼굴로 눈을 들어 맞은 편에 선 그와 눈을 마주쳤다. 나름대로 우두머리랍시고 거들먹거리며 앞에 나서 있던 주제에, 이명헌과 똑바로 눈을 마주한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기묘한 감각에 휩싸여 뒤로 물러났다.
무어라고 욕이라도 한 마디 내뱉고 싶었으나, 그 순간 그러니까, 그래, 혀가 아예 굳어버린 것처럼.
고요하고 새카만 그 눈동자와 눈을 마주한 순간, 뒤쪽에서 뭔가가 폭발하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등 뒤로 무언가 뜨거운 열기가 확 뿜어져 나왔고, 그의 시야에 마지막으로 잡힌 명헌은 자신의 앞으로 튀어나온 우성의 뒷덜미를 붙잡고 옆으로 비켜선 모습이었다. 뒤에 우루루 몰려 있던 부하 녀석들의 비명소리와 몇 차례의 폭발음, 그리고 무언가가 우지끈하며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단 몇 초 만에 이런. 방금 전까지 곳곳에 먼지와 거미줄만 가득하고, 빈 드럼통과 고철 더미, 이제는 가동되지 않는 오래되고 녹슨 기계들과 공장 설비들로만 이루어진 폐공장이었다. 그러나 그 잠깐 사이에 난 굉음과 연이어 터진 폭발들이 순식간에 이곳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제 눈으로 봐도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믿기지 않는 것은, 불길이 옮겨붙어 비명을 지르거나 이미 쓰러져 버둥거리는 부하 녀석들의 아비규환 사이로 보이는, 집채만 한 로드 롤러 한 대였다. 그냥 차도 아니고, 트럭도 아니고 웬 로드 롤러? 이미 밑에 몇 명이 깔려 들어갔는지 더욱더 비명 소리가 커지고 있었고, 불길에서 그나마 떨어져 있던 녀석들이 살아남은 동료들을 이고 지며 재빨리 몸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대피가 무섭게 그들이 잠가 둔 셔터는 쉽게 열리지 않았다. 이리저리 셔터를 두들기고 얼른 다시 열라며 저들끼리 아우성치는 모습이 퍽 우스웠다. 그리고 몇 명이 더 로드 롤러의 밥이 되었고, 그 기세에 놀라 다른 쪽으로 도망치는 녀석들을 보며 어디선가 푸학, 하고 날선 웃음이 터졌다. 자업자득이다뿅. 이를 갈며 돌아보자, 언제 꺼낸 건지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은 명헌과 손바닥으로 제 입을 막고 웃음을 참는 우성이 보였다. 폭발에 휘말리기는커녕 불씨 하나도 안 튈 정도로 멀찍이 물러난 채로.
"말했지. 다른 애들까지 데려와 봤자 밥값도 안 나온다고. 머릿수 채워서 끌고 와봤자 불장난 한 번 했다고 저렇게 겁먹어서 튀는 꼴 좀 봐라뿅."
"이...이 씨발 새끼가...대체 무슨 짓을..."
"우리 자기가 좀 과격한 면이 있어서...이렇게까지 대차게 등장해 주실 줄은 나도 몰랐지만뿅."
알쏭달쏭한 말을 던지는 명헌의 얼굴을 죽일 듯이 노려보자, 명헌의 옆에서 눈을 땡그랗게 뜬 채 손으로 코와 입을 막고 있던 우성이 별안간 외쳤다.
"현철이 형!!"
"현...뭐? 신, 신현철?"
신현철.
역시...역시 그랬구나. 이딴 짓을 할 새끼는 세상천지에 그 자식 말고는...서둘러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아니, 살피려 했으나, 어느새 다가온 건지 자신의 바로 뒤에, 뜨끈한 열기를 내뿜는 그가 서 있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곳곳에서 샌 기름에 옮겨붙은 불길이 더욱 거세지고, 연달아 뒤늦은 폭발음들이 터지고, 아끼던 부하들이 마치 개미 떼처럼 거대한 로드 롤러의 밑에 깔려 눈 뜨고 볼 수도 없을 정도로 곤죽이 된 채, 여전히 목숨이 붙어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현장에서. 흡사 지옥이나 다름없는 이 혼돈 속에서, 이렇게까지...뒷목이...싸늘할 수가 있는 건지.
말이 되는 일인가, 이것이. 숨이 가빠졌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지만 저도 모르게 기어코 고개를 돌려 뒤에 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신...ㅎ..."
남자의 험상궂은 얼굴이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투박하고 거친 얼굴의 생김새와는 달리, 그 얼굴을 덮은 매끈한 구릿빛 피부가 씨익 올라가 있었다. 아, 역시. 이 새끼가 아니고서야 이런, 이런 짓을, 이런 걸 할 사람은...
"워!"
마치 어린애들이 장난치는 것처럼 가볍게 얼굴을 들이밀자, 남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러다 제풀에 놀랐는지 다리가 꺾여 바닥에 나뒹굴듯 넘어지는 꼴을 보면서, 우성은 다시 한 번 크흥, 하고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우성, 가스를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은데뿅. 엥, 그런가?
"우리 나비, 드디어 찾았네."
히죽 올라가는 입꼬리와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가 휘어지는 것을 본 명헌이 작게 웃었다.
"라이터만 필요하다고 한 거였는데. 너무 과격하다뿅. 배기관이 모여 있는 쪽으로 바로 뚫고 들어올 줄을 몰랐는데."
"엥? 여기가 정면이 아냐?"
"아, 형! 정면은 여기죠! 우리 차 대고 들어온 방향!"
"그거나 그거나지 임마. 너도 얼른 이거나 써."
아직 흉흉히 진동하는 로드 롤러의 운전석에 다시 올라간 현철은 생수통 하나를 꺼내더니글로브 박스에 들어 있던 천에 뿌렸다. 삐죽거리며 현철에게 건네받은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감싼 우성이 코맹맹이 소리로 대꾸했다.
"반대쪽으로 들어왔으면 어쩔 뻔했어요? 명헌이 형이랑 우성이가 깔려 뒤질 뻔했는데."
"씁, 내가 그 정도 운전도 못할 것 같냐, 우성아. 형 몰라? 척하면 척이지."
하여튼- 입술을 툭 내민 채 투덜거리는 우성의 얼굴에는 언뜻 아쉬움이 스쳤다.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기세를 하고 팽팽히 긴장시켰던 몸의 근육을 다시 정돈시켜야 하는 데에서 오는 아쉬움. 간만에 사방 다 막힌 데에서 마음대로 날뛸 기대에서 왔던 감각들을 다시 눌러야 하는, 그런 아쉬움이 우성의 얼굴에 가득한 것을 보며 명헌과 현철을 조금 웃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아비규환의 현장은 전혀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 재미없다는 얼굴로 척척 빠져나가는 우성을 보던 명헌이 아, 하고는 현철에게 다시 물었다.
"자기, 라이터는?"
"여기 있지.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필요한 거냐?"
순순히 주머니에서 꺼내 준 은색 지포라이터를 보던 명헌이 슬며시 웃었다. 라이터를 들고 바닥에 쓰러진 채 여전히 신음하고 있는 우두머리 녀석에게 다가간 명헌이 쭈그리고 앉아 그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이...이명헌...너..."
"뿅."
짤막한 대꾸와 함께 명헌은 라이터를 켰다. 퐁, 하는 인상적인 소리와 함께 켜진 고고한 불꽃이 명헌의 마음에 쏙 들었다. 싸구려 기름 라이터와는 다른, 불이 켜지는 소리에까지 돈을 굳이 처발라야 하냐고 낙수가 욕을 바가지로 하던 라이터. 하지만 소리가 마음에 들잖아. 불도 조용하고, 흔들림이 없어 움직이지 않는다. 불장난하면 밤에 오줌 싼다. 장난스럽게 던진 동오의 농담에도 명헌은 그저 웃기만 했었다. 이 정도로는 불장난도 아니지. 그치, 자기야.
"...우, 우아아아아아악---!!!!"
"아이고, 참나."
명헌은 아무렇지도 않게 라이터를 내려, 마치 생일 초에 불을 붙이는 아이마냥 가벼운 손짓으로 남자의 머리카락에 불을 붙였다. 삽시간에 올라붙은 불길에 남자의 몸이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질렀고, 머리카락은 물론 얼굴 가죽이 점점 녹아내리는 것을 보며 뒤로 물러난 명헌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 천진한 웃음에 팔짱을 끼고 대체 뭘 하나 보고 있던 현철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오징어 굽는 냄새."
"나비야, 불장난 그만하고 얼른 가자. 가스 너무 나온다."
"뿅."
라이터를 다시 현철에게 내민 명헌이 구둣발 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폐공장은 어느새 시체와 기름이 타는 냄새로 가득 찼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불길에 낡은 건물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현철과 우성의 경호를 받으며 세단에 올라탄 명헌은 코트 어깨에 묻은 그을음을 손으로 툭툭 털어냈다. 불길이 치솟고, 건물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매끄러운 세단 몇 대가 그 자리를 조용히 떠났다. 아마 기사도 한 줄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들 말마따나 이곳은 아무도 모르는, 외진 교외에 위치한 폐공장이니까.
"...그때 난 생각했다뿅. 사람의 인생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고, 인생은 내 생각보다 짧으며, 살아 있을 때에 충분히 감사하고 사랑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이다, 뿅."
"...지금 저거 사람 머리 불로 지진 얘기 하면서 하는 말 맞지?"
"그래서 난 결심한거다뿅! 다음으로 미루는 건 없다고, 지금, 현재에 충실하고, 사랑에 충실하자고 말이다뿅!"
"누가 저거 입 좀 막아."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린 동오의 말에, 낙수가 피곤한 얼굴로 머리를 싸쥐며 덧붙였다. 그러나 명헌은 뻔뻔한 얼굴로 재차 외쳤다. 심히 당당하고도 가련한 태도로 말이다.
"그래서! 결혼을 하기로 한 거다뿅!"
"미치려면 곱게 미치라고 내가 그랬지, 이명헌."
"...그래서 다른 녀석들도 아니고, 청첩장은 너희한테만은 제일 먼저 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뿅."
"이젠 아예 무시하네."
"낙수야, 네가 참아라..."
"그런데 왜 4개밖에 없어요? 현철이 형이랑 현필이 것까지 6개 아닌가? 우리 7명인데."
희고 고급스러운 소재의 봉투를 이리저리 형광등에 비춰가며 구경하던 우성이 불쑥 물었다. 그 말에 성구가 뭔가 대답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끙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현철이랑 현필이는 받을 필요 없다뿅."
"왜, 왜요? 설마 회의 지각했다고 안 주고 그러는 거..."
그러나 바로 그때.
복도 멀리서부터 들리던 묵직한 발걸음이 점차 가까워지는 것이 들렸다. 자연스럽게 문 쪽으로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묵직한 회의실의 문이 호쾌히 열리고, 제일 늦게 등장했음에도 당당한 웃음을 문 현철이 외쳤다.
"좋은 아침이다, 개자식들아!"
"...현철이 본인이 결혼하는데 청첩장을 왜 주냐, 뿅."
"느에?"
"예?"
"뭐?"
"뿅."
"뭐야? 다들 왜 그러고 쳐다봐?"
어리둥절한 얼굴의 현철과, 뻔뻔하기 그지없는 명헌의 대답에 네 명, 아니 세 명은 뜨악하게 굳은 얼굴로 현철을 쳐다보았다. 오직 성구만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한숨을 푹 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누를 뿐이었다.
불길이 집어삼킨 건물을 보면서, 꼭 골판지 상자로 만든 장난감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명헌은 지루한 얼굴로 턱을 괸 채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끔찍하게 터지고 죽고 타는 것을 본 사람의 얼굴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하고 따분한 얼굴이었다. 사람의 생명이란 참 별 것도 아니지. 그렇게 덩치가 크고 으리으리한 기세의 녀석들도, 로드 롤러까지도 필요 없다, 그저 칼로 배때지 한 번 쑤시면 끝날 목숨. 사람은 어째서 그렇게까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지. 명헌의 무료한 눈가에 긴 터널이 그림자를 만들었다.
항상 그랬단 말이야.
아무리 셀 수도 없이 많은 부와 명예, 권력, 사람들을 거느리며 산다고 해도 고작 날붙이 하나에도 비명횡사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재미없는 일이냔 말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명헌은 예전부터 항상 궁금했다. 어째서 세상은 이렇게 재미가 없고 그토록 수많은 인간들이 죽어도 변함없이 잘만 돌아가는지. 물론 이 세상은 원래 이전부터 그랬다는 걸 명헌은 잘 알고 있었다. 아무렴. 그게 비단 현대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명헌은 눈을 감았다.
이젠 세는 것조차 의미가 없어진 그 세월에 대해 생각했다. 그 기나긴 세월을 몇 번이나 반복해가며 살아온, 몇 번이나 죽어서 사라지고 다시금 태어나 살아온 자신의 육체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변하지 않고 끊임없이 살았던, 아니 존재했던 자신의 영혼에 대해 생각했다. 일종의 저주인 거겠지. 신의 노여움을 샀을 테니. 평생 사는 것을 두고 우리는 그것을 '산다'고 하지 않으니까. 그저 물질처럼, 공기처럼 세상이 끝나기 전까지는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것.
이명헌은 아주 오래전부터 세상에 존재했다.
그것은 신현철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갑자기 생긴 심경의 변화라는 게...이거라고?"
"응. 우리 결혼한다뿅."
"명헌이형---!!! 저는요!!!!!"
"저는요는 뭐가 저는요야 임마."
눈물을 뿌리며 거의 절규하는 우성의 이마를 밀어내는 현철을 보며 살짝 웃은 명헌이 덧붙였다.
"그냥, 살면서 한 번도 안 해 본 것 같아서."
"보통 사람들은 살면서 원래 한 번만 해."
"그건 그렇다뿅."
"아니, 둘이 뭐, 사이 그렇고 그런 건 동네방네 다 아는 사실이긴 한데...결혼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렇게 갑자기 정할 일은 아니잖냐. 이런저런 준비도 필요하고..."
동오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명헌이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준비랄 것도 없다뿅. 식장 잡고, 정장 맞추고, 사랑하는 친구들과 가족들이 모여 축하해주는 거면 되는 거잖아. 사랑하는 친구이자 가족이신 여러분이 모두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주세요뿅."
"아, 미친..."
"하하하! 내가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이명헌!"
이마를 싸쥔 낙수가 짜증스럽게 욕을 내뱉었고, 그 맞은편에 앉은 동오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대리석 테이블 위에 엎드려 청첩장을 만지작거리던 우성의 머리 위로 명헌의 손이 가만히 내려앉았다.
"우성, 부탁이 있는데."
"...뭔데요."
"형아들 결혼식 하는 데 필요한 물건이 있는데, 우성이가 구해다 주면 기쁠 것 같아서, 뿅."
"..."
못 들은 척하려던 우성의 얼굴이 조금씩 펴지는 것을 보면서 명헌이 조그맣게 웃었다. 아직 키도 요만했던 어린 시절부터 저를 따라 하겠다고 멀쩡한 머리카락도 단숨에 밀고 등장한 우성이. 시키는 일은 안 하고 자기가 잘하는 걸 하겠다고 대들던 우성이. 형들한테 죽을 만큼 맞아가면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기어코 따라와 준 우성이. 그래, 네가 딱 적임자일 것 같아. 원래 결혼식에는 화동이 필요한 법이니까. 명헌의 입에서 '부탁'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덩치는 산만한 주제에 어린애처럼 입을 내밀고 투덜거리던 우성의 얼굴 위로 뿌듯함이 번졌다. 알겠어요, 하고 순순히 나온 대꾸에 명헌은 웃는 얼굴로 까슬까슬한 머리통을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결혼하자.
아직 화마가 삼킨 건물이 멀어지지도 않았건만, 불쑥 튀어나온 말에 현철이 명헌을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냐며 되묻진 않았다. 귀는 아직 멀쩡했고, 나비가 그런 말을 농담으로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현철이 누구보다도 잘 알았으니까. 잠시 이어진 침묵 사이로 조용하게 차가 흙길 위를 지나는 소음이 흘렀다. 그저 현철은 언제, 하고 물었고, 명헌은 여전히 차창 너머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처음 그 모든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언제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현철을 처음 만났을 때일 수도, 아니면 그보다도 더 전일 수도 있다. 아쉽게도 현철을 만나기 전의 어릴 적의 기억은 지금은 드문드문했다.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으니 그냥 뇌가 자동으로 지워버린 걸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명헌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저 어느 순간, 불현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모든 기억들이.
단지 꿈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한 꿈을 꾸었구나. 전생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는데. 그것도 내가 완전히 대륙 너머 다른 곳에서 살았던 사람이었고, 신을 사랑했다니. 아마 현철이가 읽어준 동화 내용이 꿈에 나온 것일 테다. 아, 현철이. 신현철. 어린 명헌은 현철의 이름을 발음해보며 젖은 눈을 들어 방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참 어렸던 그때.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제 아비를 제 손으로 죽이는 날이 올 것도 모르고 마냥 천진하고 무지하던 그때. 멀거니 천장을 올려다보던 명헌의 입에서, 문득 저도 모르게 낯선 이름이 흘러나왔다.
카와타 마사시가 누굴까.
이것도 모르는 이름. 내가 혼자서 알 리가 없으니 현철이 언젠가 읽어준 책에서...아니. 책은. 책은 아닌데. 분명히. 머리를 꾹꾹 눌렀다. 이건 내 기억이 아닌데. 내가 기억하는 게 아니고, 분명 누군가가...
그 순간, 마당에서 누군가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낯익은 현철의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는 것이 들렸고, 명헌은 자다 깬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마루로 나갔다.
-나비야!
평소와 같은 울림이 아니었다. 평소와 같이 부름이 아니었고, 평소와 같은 감각이 아니었다.
현철도 같은 꿈을 꾸었구나. 명헌은 멍한 얼굴로 그렇게 생각했다. 말도 없이 뛰어 들어와 자신을 와락 끌어안는 모양새가 딱 그랬다. 아, 너도. 너도 같은 꿈을 꾸었구나. 같은 걸 봤구나. 그렇지? 그러니 이렇게 아무 말도 없이 나를 꼭 안아주는 거지.
현철은 명헌과 같은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러나 같은 일이어도 현철이 본 것과 명헌이 본 것은 조금씩 달랐다. 꿈 속에서 현철을 명헌을 보았고 명헌은 현철을 보았다. 둘은 서로를 보았다. 서로에게 있었던 일. 두 사람 사이에,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역사에는 그저 아름다운 전설이나 우화로만 남아있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고 일어났던 일.
-드디어 찾았구나.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명헌은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말해놓고도 스스로 놀라 눈이 동그래진 명헌을 보며 어린 현철이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래, 드디어 찾았어. 너를. 얼마나 걸린 지도 모르겠지만, 몇 번의 생과 사가 우리를 거쳐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전히 나는, 몇 번이고 너를 찾은 거야.
그리고 한참을 끌어안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이렇게 훌쩍 커버렸지만.
그동안 명헌과 현철은 나름대로 조사를 했다. 이것저것 알아보고 찾아가면서 단서가 되거나 조금이라도 기억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들은 전부 손에 넣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것들이 꽤 많았다. 그건 단순히 꿈이 아니었고, 기억을 찾으면 찾을수록 명헌과 현철은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 오래전부터 서로의 곁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세간에 남은 이야기의 조각들로는 완전히 기억을 찾을 수 없었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새로운 기억을 찾을 때마다 명헌은 기쁨에 겨워 몸을 떨었고, 이미 제 것이었던 사랑도 새로이 찾은 것처럼 밤새 현철과 사랑을 나누었다. 질리지도 않고.
성구나 동오, 낙수나 우성이 같은 녀석들에게는 당연히 말할 수 없었다.
애초에 믿을 리가 없지 않은가. 당사자들이 아니고서야 그걸 믿을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 그건 현철의 하나뿐인 동생인 현필도 마찬가지였다. 사랑하는 가족에게도 자신의 모든 걸 털어놓지 못하는 현철을 보면서, 명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의 너른 등을 안아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현철은 그거면 족했다.
"낡은 것, 새로운 것, 빌려온 것, 그리고 파란 것."
"요즘 그런 걸 누가 지켜?"
만년필을 들고 종이에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적는 명헌을 보며, 낙수가 어이없다는 듯 투덜거렸다. 하지만 자신의 상사가 의외의 구석에서 고지식하고 로맨틱한 구석이 있다는 걸 아는 낙수였기에, 그는 더 이상 어깃장을 놓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누구 말마따나 좋은 날인데. 욕하고 난리 치는 것보다 차라리 축하해주는 게 나을 테니까.
"새 거는 어차피 정장 새로 맞추니까 그거면 되고...낡은 것도 준비 완료다뿅. 그리고 역시 버진 로드 양옆에 둘 꽃은 파란 장미로."
"버진은, 씨발..."
"후다 로드라고 할 수는 없잖아뿅."
"진짜 더럽다, 명헌아."
"새신부한테 못 하는 말이 없다뿅."
브라이덜인지 부랄인지, 그딴 거 내 알 바 아니니까 난 빼라고 소리치던 낙수를 기어코 끌고 온 것은 역시나 명헌이었다. 명헌 외의 말은 거의 듣지 않는 낙수였기에 어쩌면 당연했다. 낙수. 내 들러리가 되어 주겠니뿅. 이명헌 너 미쳤니. 아 뿅~
"그러면 부케는 누가 받냐뿅!"
"내가 알 바야?! 다른 새끼들 받으라고 해!"
"싫다뿅! 너 말고 누구 주냐뿅!"
"우성이나 현필이 있잖아! 걍 애들 시켜!"
"우성이는 따로 시킨 일 있어서 안 된다뿅...그리고 현필이는 화동 시킬 거라서 안 된다뿅..."
"이메다 넘는 애를 화동을 시킨다고."
"제일 애기고 귀여우니까..."
낙수는 말을 말자는 듯 이마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드메는 못해도 새 정장은 맞춘다며 굳이 테일러샵을 돈다고 해서 따라와 줬더니, 이런 거는 나 말고 최동오 시켜라 명헌아. 걔가 잘 하지 않겠냐, 아무래도.
"낙수. 진짜 들러리 안 해?"
"하겠냐고-"
"뇽..."
순식간에 입술이 불어 터진 명헌을 보며 낙수는 혀를 찼다. 이거를 진짜 한 대 쥐어박아, 말아. 대표인지 미친인지...결혼하는 건 즈그들 사정이니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애먼 자신까지 끌어들이는 건 절대로 사양이었다. 게다가 부케는 무슨 부케. 웃음거리 될 일 있나.
"그럼 부탁 하나만."
"뭐."
"빌린 물건이 필요하다뿅."
"...나한테 빌린다고?"
명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낙수는 하, 하고 헛웃음을 터뜨리면서도, 그것까지는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니 괜찮겠다 싶었던 것이다. 별 생각 없이 대충 주머니를 뒤지던 낙수가 손안에 잡힌 것을 꺼내 내밀었다.
"넥타이도 안 매면서 이건 왜 들고 다니냐뿅."
"내가 산 거겠냐. 최동오가 준 거지."
"오, 프라다."
"프라다고 지랄이고 몰라. 아무튼 쓸데없는 데에 돈지랄은...그냥 너 해라. 돌려줄 것도 없어. 어차피 안 쓰니까."
마치 주머니에서 굴러다니던 단추 하나를 던져주는 것과 같이 가벼운 동작으로, 낙수는 가느다란 은색의 넥타이핀을 건넸다. 어차피 명헌도 넥타이핀 정도야 차고 넘쳤지만,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서 빌린 물건'을 준비하는 게 중요했으므로. 명헌은 군말 없이 만족한 얼굴로 낙수의 넥타이핀을 주머니에 넣었다.
나 일 있어서 가 본다. 알아서 애들 불러서 가라. 주머니에 손을 꽂은 낙수가 테일러샵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보면서, 명헌은 자신이 적어 내려가던 리스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음정이 엉망인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조금 전 적었던 리스트 중 하나의 위에 선을 쭉쭉 그어 없앴다. 빌려온 것, 완료.
시간은 눈 깜짝할 새에 흘러 대망의 식 당일이 되었다.
성구가 고용한 웨딩 플래너는 꽤 능력이 좋았고, 명헌의 마음의 쏙 드는 완벽한 식을 설계했다. 남들이 보기에 객관적으로 조금 괴상한 구석이 있기도 했지만 아무렴 어떠랴. 결혼하는 당사자들의 취향에 맞기만 한다면, 그리고 남들의 시선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자리까지 올라간 남자가 자신의 마음대로 식장에 괴상한 조각상과 장식들을 둔다는데. 거기에 그 누가 감히 흉을 볼 수가 있겠는가...물론 조금 이상한 건 맞지만 말이다.
"역시 우리 자기한테 어울리게 르네상스 풍으로 꾸미는 게 탁월한 선택이었다뿅."
"이건 또 무슨 지랄이지..."
"현철이가 좀 고대 신 같이 멋지고 우아한 느낌이 있잖아뿅."
"...너 오늘 내가 아는 현철이 말고 다른 신현철이랑 결혼하는 거 아니지?"
"낙수도 참, 농담은."
"농담 아닌데."
아 몰라, 그냥. 식 끝나고 뷔페나 처먹고 나는 빠질란다. 답례품도 받아가라뿅. 비싼 거 아니면 안 받아 갈 거야. 낙수와 명헌이 신부 대기실에서 투닥거리며 장난치는 것을 본 성구가 문 위로 노크했다.
"그만저만 장난치고, 명헌이 얼른 준비해. 다 입었어?"
"어때. 쌔끈하냐뿅."
"음, 평소처럼 이상하다. 완벽해."
"묭..."
성구는 농담이라며 킬킬 웃고는 명헌의 어깨를 두드렸다. 깊은 푸른색 맞춤 정장을 입은 명헌은 성구의 말대로 평소와 같았다. 그냥 새 옷을 입은 이명헌. 하지만 오늘의 이명헌은 다르다뿅. 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이명헌이다뿅.
"...너, 또 무슨 이상한 사고 치면 가만 안 둔다."
"사고 아닌데뿅."
"왜 이렇게 불안하지."
낙수와 성구가 한숨을 내쉬며 명헌의 뒤를 따라 대기실을 나섰다. 명헌은 그저 신난 얼굴로 콧노래를 흥얼거릴 뿐이었다.
식은 순탄하게 흘러갔다. 수상할 정도로 말이다.
명헌은 평소보다 더 얌전했고, 이상한 말이나 저질 농담으로 좌중의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지도 않았으며, 고분고분하게 도우미와 직원들의 지도를 따라 움직였다. 그것은 현철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잘 어울렸고 사실 친지라고 할 수도 없는 사람들로만 채워진 식장이었다. 그나마 정말 피가 섞인 가족은 현철의 어머니와 동생인 현필이 전부였고, 그 안에 모인 이들은 전부 피가 섞인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 사람들이었다. 오직 산왕이라는 조직에 속한 사람들로 가득한 자리. 그 외의 사람들에게 받는 축하 따윈 필요 없었으므로, 명헌은 그거면 충분했다.
"명헌이 형----!!!"
그러나 아무리 비밀스럽게 진행하다 하여도 잔치라는 것은 본디 이곳저곳에 소문나기 마련이었다.
좋은 소식에 끼어드는 불청객들이 없을 리가 없었다. 물론 얼굴에 수상쩍은 핏자국과 검뎅을 묻히고 활짝 웃는 얼굴로 나타난 우성이 불청객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우성이 달고 나타난 녀석들이 문제였다.
"이명헌!!!"
"이명헌 이 개새끼야, 당장 나와!!"
저 새끼들이 누구였더라. 아. 명헌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채 잠시 고민하다가 깨달았다. 그 공장에서 타죽은 녀석들의 패거리였던 것 같은데. 아마 그때 살아서 도망친 녀석들이 몇몇 있었을 것이다. 귀찮아서 굳이 잔당 소탕까지는 하지 않았던 거였는데, 역시 뒤끝 없이 처리해두지 않으면 이렇게 일을 그르친다니까. 불씨는 제때제때 꺼야 하는데 말이지. 한숨을 푸욱 내쉬는 명헌의 맞은편에서 뜨악한 얼굴로 현철이 이마를 짚었다. 아, 지금 막 맹세의 키스를 하려던 참인데. 명헌은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며 현철의 뒤로 몸을 물렸다.
"정우성, 너 뭘 달고 온 거야?!"
"몰라요! 명헌이 형이 시킨 일 처리하고 돌아오는 데 저 자식들이 갑자기 따라붙잖아요! 짜증 나서 마포대교에서 차로 몇 대 밀어버리긴 했는데 기어코 여기까지 따라오고 지랄이야, 진짜."
"현필아, 엄마 모시고 나가, 어서!"
현철의 모친이 에그머니, 소리를 내며 작은아들의 손을 잡고 식장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면서, 잔뜩 인상을 찌푸린 현철이 단상 위에서 성큼성큼 내려오며 목을 풀었다. 이 새끼들이 매너가 없어도 유분수지, 하필 날을 잡아도 이런 날에 찾아오고 말이야. 어? 아주 죽여달라고 고사를 지내는구나, 니들이. 우렁찬 고함을 지르며 달려드는 조무래기들 따윈 관심 없다는 듯, 현철은 가뿐하게 주먹을 휘둘러 제일 앞에 있던 녀석의 턱을 날려버렸다.
사람의 몸에서 나서는 안 될 소리가 났는데, 방금. 질린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린 낙수의 말에 동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성구는 이미 현철의 모친을 대피시키고 식장에 앉아 있던 부하들을 시켜 다른 직원들을 내보내던 중이었다. 자식들이, 너희는 구경만 하냐?! 가서 얼른 수습시켜! 성구의 짜증 섞인 고함에 멀찍이서 구경만 하던 동오와 낙수가 한숨을 쉬었다.
"빨리빨리 끝내고 가자. 나 이따가 약속 있다."
"난 오늘 너랑 데이트 없는데?"
"너도 같이 여기서 담그면 되겠다, 최동오."
"무서워~"
동오가 맑은 얼굴로 웃으며 손목시계를 풀어 주머니에 넣었다. 갑갑한 넥타이를 대충 풀어낸 낙수가 진절머리 난다는 듯한 얼굴로 옆에 있던 의자를 들어 바닥에 내리쳤다. 날카롭게 끝이 부서진 각목을 들고 먼저 제일 가까운 쪽에 있던 녀석에게 다가가 머리를 내려치는 낙수를 보며, 동오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즐거운 얼굴로 싸움에 동참했다.
"형!"
"신현철 이 씨발새끼가!"
현철의 뒤에서 욕설을 내뱉으며 망치를 휘두른 녀석의 손이 현철의 뒤통수에 닿기도 전에, 우성의 발이 더 빨랐다. 어억 하고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고꾸라진 녀석의 등을 퍽 소리가 나도록 밟은 우성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아 형, 그거 밟으면 어떡해!!"
"이게 뭔데?"
"명헌이 형 선물이란 말이야!"
난 또 뭐라고. 현철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밟고 있던, 조금 전부터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던 큼직하고 흰 천에 싸인 판을 들어 올렸다. 이게 뭐야. 액자야? 사진? 뭐가 이렇게 커. 너는 뭘 이런 걸 들고 오냐. 네모난 판 위에 꼼꼼히 싸인 천을 뜯어보려던 현철의 팔을 막아낸 우성이 재빨리 그것을 뺏어갔다.
"현철이 형 거 아니고 명헌이 형 거거든요?!"
"부부는 일심동체, 몰라 임마?"
"일...일...아 아무튼! 알아서 수습하고 있어요, 우성이는 명헌이 형이 시킨 거 갖다주러 가야 하니까!"
메롱 혀를 내민 우성이 바닥에 쓰러진 반 시체들을 피해 폴짝폴짝 뛰어 건너갔다. 주변은 이미 한바탕 난장판이었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각목이며 주먹들을 가뿐히 피해 가며 싸움판을 빠져나간 우성은 옆구리에 네모난 판을 낀 채, 단상 위에서 심드렁한 얼굴로 뒷짐을 지고 서 있는 명헌에게 다가갔다. 헤헤, 하고 웃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풀어진 얼굴의 우성이 자신이 가져온 것을 불쑥 내밀었다.
"내가 부탁한 거?"
"네!"
"수고했다,뿅."
착하다. 만족스럽게 웃으며 우성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자, 기대했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기다리고 있던 우성이 아이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튼 애기라니까, 아직.
"...우성."
"네!"
"라이터 있니?"
"...저, 저 담배 안 피우는데?"
"담배는 안 피우겠지."
명헌의 눈이 자신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우성은 당황한 듯 시선을 돌리며 우물거렸다. 아, 씨발, 들켰나. 현철이 형한테 또 개처맞을텐데. 주춤주춤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낸 우성의 얼굴이 삽시간에 우울해진 것을 본 명헌이 작게 웃었다. 이번엔 현철이한테 말 안 할게뿅. 진짜요?! 다음엔 안 봐줘. 라이터를 받아든 명헌은 우성이 가져온 판에 싸인 흰 천을 매만졌다. 부드럽고 실키한 느낌의 감촉이 손가락을 기분 좋게 휘감았다. 힘을 주어 끝부분을 찢어내자 천은 맥없이 제 몸을 찢어 안에 담긴 것을 보여주었다.
"...정말, 우리랑 하나도 안 닮았네."
"뭐가요?"
"그런데 있다뿅."
호기심 어린 얼굴로 대체 뭐냐며 캐묻는 우성을 뒤로한 채, 명헌은 천을 죽죽 찢어냈다. 안에 담긴 것은 다름 아닌 액자였다. 아주 오래된 그림이 담긴, 그토록 명헌과 현철이 찾아다녔던 마지막 단서.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며, 명헌이 형?"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도 교만도 아니하며,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명헌은 담담한 얼굴로 액자를 들고 단상의 뒤로 다가갔다. 그의 입에서 높낮이 없이 흘러나온 말들을 우성은 의아한 얼굴로 들었다. 무슨 뜻인지 그로서는 알 수가 없었으나, 왠지 명헌의 기분이 지금 매우 좋다는 것 정도는 우성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우성의 기분도 좋아졌다. 정말 단순하게도.
"...이 세상 끝까지 영원하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단상 뒤에는 고급스러운 예식장의 품위에 알맞은 커다랗고 아름다운 명화가 걸려 있었다. 아마 돈깨나 나가는 작품이겠지. 정작 그 그림을 그린 작가가 누구인지, 어느 시대에 어떤 기법으로 그려진 것이라 어떤 가치를 지니는 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는. 그저 얼마에 팔렸고 이런 식장에 걸려 있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값어치가 나간다는 것만이 중요한 그런 그림. 명헌은 망설임 없는 동작으로 그 그림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 우성이 가져온 그림을 걸었다. 화려했던 그 전의 것과는 달리 턱없이 작고 수수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이 자리에 어울리는 그림이었다. 명헌은 몇 걸음 물러나 그 그림이 주변의 배경과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지 깨닫고는 킥킥 웃었다. 마지막으로 입 안으로 중얼거리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마치 주기도문을 외우듯 마지막 문장까지 완벽히 읊어낸 명헌은 후, 하고 숨을 내쉬었다.
다시 가슴 속에 무언가가 몽글몽글하게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래,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인 것을.
명헌은 고개를 돌려 한창 시끌벅적하게 벌어진 싸움판을 내려다보았다. 새신랑이 저기서 주먹질을 하고 있으면 쓰나.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했으니, 당연히 명헌도 함께였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신현철!!"
식장 내부에 달린 스피커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쏟아졌다. 삐이익, 하는 소음이 날 정도로, 잔뜩 겁먹은 사회자가 쥐고 있던 마이크를 뺏어 외친 명헌의 부름에 한창 주먹질을 해대던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단상 위에는 짙은 푸른색의 정장을 입은 이명헌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항상 같은 자세로, 변함없이.
"...신랑 신현철은, 신부 이명헌을 자신의 평생의 반쪽으로 맞이하겠습니까?"
낮고 명확한 목소리가 식장 내의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방금 막, 자신의 앞으로 달려든 녀석의 머리통을 잡고 주먹을 날리려던 현철은 얼빠진 얼굴로 눈을 꿈벅거리며 명헌을 올려다보았다. 명헌은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
"..."
"...네."
모두가 침묵한 순간.
단상 밑에서 주먹질을 하던 현철과, 단상 위에서 마이크를 들고 뒷짐은 진 채 그를 내려다보던 명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그리고 현철은 씩 웃었다. 백 번이든 천 번이든, 내 대답은 정해져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고, 우리는 줄곧 그랬으니까.
이 세상에 너는 오직 나밖에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이건 내 선물이다, 뿅."
현철의 단단한 대답에 흡족하게 웃은 명헌이 마이크를 놓고 뒤에 걸린 그림으로 다가갔다.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긴 현철의 눈이 다시금 커졌다. 어, 저거...!
"나비야, 그거...!"
"야, 이명헌!!"
"저 미친 새끼가!"
깜짝 놀란 성구가 황급히 단상 위로 뛰어 올라갔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라이터를 찰칵, 하고 켠 명헌의 손이 그림 위로 올라갔고, 손톱만 하던 불씨는 어느새 액자를 전부 삼켜버리고 말았다. 불길에 휩싸여 서로를 안고 있는 에로스와 프쉬케를 보면서 명헌은 웃었다.
행복했다. 진심으로.
이번에는 정말.
그러니 이제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아무것도. 이젠 모든 것이 충분했다. 충만하고 행복이 넘치는, 이렇게 우리를 축하해주려고 찾아온 인간들로 가득한 시끌시끌한 결혼식. 명헌은 그것이 퍽 마음에 들어 입 안으로 계속 발음해보았다. 결혼. 결, 혼. 너랑 나랑.
신현철이랑 이명헌. 카와타 마사시랑 후카츠 카즈나리.
그리고 에로스와 프쉬케.
옆에서 우와- 하고 신난 우성이 펄쩍펄쩍 뛰는 소리와 함께, 그림은 불씨를 남기며 활활 타올랐다.
세상에 더 이상 그 무엇도 남기지 않겠다는 것처럼. 서로를 꼭 안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