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전유물
감자독 | @baske_reach
<문학> 수업은 지루해서 깨어 있는 학생이 몇 없다.
말끝을 늘이는 버릇이 있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느리고 졸려서 수면제 그 자체다. 활짝 열어둔 창문 안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봄바람까지 합쳐지면, 그 엄청난 수면 폭탄에 버틸 수 있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맨 뒷줄, 창문가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한 이명헌은 <문학> 시간에 깨어 있는 몇 안 되는 학생 중 하나다. 그가 잠들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수업을 듣지 않기 때문이다.
이명헌은 턱을 괴고 무념무상의 눈을 한 채 창밖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언제 빨았는지 모르겠는 아이보리색 커튼. 이 커튼은 원래 깨끗한 흰색이었을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
한 톤 올라간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명헌은 눈동자만 굴려 교실 앞을 바라보았다. 단상에 선 백발의 노선생이 ‘이건 내 비장의 무기야.’ 하는 눈을 하고서 졸음과 씨름을 하고 있는 학생을 쓱 둘러보고 있었다.
“그리스 신화 이야기인데, 혈기왕성한 너희들이 딱 좋아할 이야기지.”
목을 가다듬은 선생님이 수업 때와는 다른 톤으로 신화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 선생님의 대학 전공이 고전문학이랬지, 참. 그래서인지 이 <문학> 담당 선생님은 자기 수업이 지루하다 싶으면 곧장 신화 이야기를 꺼내는 버릇이 있었다. 어쨌거나 수업 내용이 아니라면 아이들은 뭐든지 좋아한다. 그런데 그게 신화라면? 좋아하지 않을 녀석은 드물다.
선생님의 의욕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자 잠들었던 아이들이 하나둘 깨어났다. 저 선생님은 고등학교 <문학> 수업을 할 때보다 신화 이야기를 할 때 항상 생기가 돌았다. 그럼 <문학> 선생님이 될 것이 아니라 대학교에서 계속 신화 공부를 해야 했던 게 아닌지, 뿅.
“어머니 아프로디테의 명으로 프시케에게 화살을 쏘러 갔던 에로스가 말이다. 그만 프시케의 미모를 보고 놀랐지 뭐냐. 게다가 인기척에 프시케가 눈을 뜨니 더 놀라는 바람에 실수로 들고 있던 화살촉에 푹! 하고 찔려버리고 만 거지.”
에로스는 큐피트……를 말하는 거였지. 사랑의 화살에 맞아버린 큐피트라. 그거 큰일이네. 눈을 뜨고 처음으로 본 사람을 사랑하게 되니까 이제 에로스는 프시케를 사랑하게 된 거구나, 뿅.
“에로스는 그날 이후 매일 밤 프시케를 찾아와. 에로스가 원래 날개 달린 어린 아이 모습인 거 너희들도 알지? 근데 프시케를 만날 때면 장성한 청년의 모습이 된다고, 신화에서는 말하지. 프시케를 사랑할 때는 어른으로 변한다는 건데…… 이게 중의적인 의미를 가지지. 애들이 듣기에는 좀 야한가?”
뿅.
“야하다니까 이것들 다 일어나는 거 보게. 평소에 그렇게 초롱초롱해 봐라, 쫌.”
이명헌은 다시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에 바람이 닿자 분홍 꽃잎이 춤을 추듯이 쏟아져 내렸다. 따스한 햇볕, 매년 보아도 질리지 않는 꽃비, 낮잠을 부르는 바람의 온도. 이명헌은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책상에 엎드렸다.
내 눈이 그렇게 초롱초롱했나, 뾰옹.
**
“현철.”
“응?”
“에로스 신화 이야기 아냐, 뿅.”
농구부 훈련이 끝나고 체육관을 나오는 길. 학교 교정의 커다란 벚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숨을 돌리던 신현철에게 이명헌이 물었다. 현철은 “아아, 그거.”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문학 선생님이 한 이야기? 너네 반에서도 이야기했냐?”
“현철 반에서도 이야기했냐, 뿅.”
“엉. 반마다 돌아다니면서 하나 보네. 요즘 그 이야기에 꽂혔나.”
신현철은 피식 웃더니 허리를 세우며 벤치 등받이에 두 팔을 척 걸쳤다.
“그 부분 되게 좋아하면서 말하더라.”
“너네도냐, 뿅.”
“어어. 에로스가 밤마다 프시케를 찾아가면 어른이 되는 부분.”
큭큭대며 신현철이 이를 드러내보였다.
“야한 이야기하니까 다들 일어난다고 뭐라 하는데, 그게 야한 거냐? 애초에 그 이야기를 반마다 돌아다니며 하는 자기가 더 변태 아니냐고.”
“뿅.”
동의한다. 이명헌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침 바람이 불어와 뺨을 간지럽혔다. 벚나무 가지를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귓가에 노랫소리처럼 울려퍼졌다. 무겁게 꽃을 매단 가지가 푸르르 몸을 떨더니 수천의 꽃잎이 팔랑팔랑 떨어져내렸다. 꽃잎 하나가 신현철의 파르스름한 정수리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현철은 어떻게 생각하냐, 뿅?”
“뭐가?”
꽃잎을 얹은 신현철이 이명헌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명헌 자기도 모르게 쿡, 하고 웃었다.
“야, 왜 웃어?”
“아무것도 아니다, 뿅.”
하여튼 웃기는 놈. 눈썹을 구기는 신현철의 얼굴에 그런 말이 써 있었다.
이명헌은 몸을 구부려 제 무릎에 양쪽 팔꿈치를 댔다. 그는 구부정한 자세로 동아리 활동을 끝내고 하교하는 학생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래서 현철은 어떻게 생각하는데, 뿅.”
“그러니까 뭐가.”
“사랑을 하려면……”
나란히 하교하던 두 남학생이 티격태격하더니 갑자기 한 녀석이 다른 한 녀석의 엉덩이를 퍽! 하고 걷어찼다. 얻어맞은 놈은 열을 내며 때린 놈을 쫓아가고, 때린 놈은 필사적으로 도망을 쳤다. 이명헌은 그들을 눈으로 좇았다.
“꼭 어른이 되어야 할까, 뿅.”
“어엉? 뭔 소리를 하나 했더니만.”
어이가 없다는 듯이 신현철이 콧방귀를 뀌었다.
“야, 이명헌. 그게 그런 뜻이 아니잖냐.”
“뭐가, 뿅?”
“그게 야한 뜻이라잖아, 선생님 말에 의하면.”
“뾰옹…….”
“……진짜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너 그렇게까지 순진하지는 않잖아. 신현철이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명헌을 쳐다보았다.
“제발 진짜 모르는 거라고는 말하지 마라. 나 거기까지 알려줄 자신 없다.”
“그게 아니라, 뿅.”
쌈박질을 하던 두 학생의 모습이 멀어지자 이번엔 농구부원의 모습이 보였다. 농구부원은 전원 기숙사니까, 저 녀석들은 하교 중이 아니다.
동급생들. 이제 곧 2학년이 되고, 선배가 될 녀석들. 올해는 농구부에 어떤 신입생이 들어올까, 벌써부터 두근두근 상상의 나래를 펼치느라 연습시간에 도통 집중을 못하는 녀석들.
실컷 상상을 해봐야 어차피 들어올 놈들은 거기서 거기일 텐데. 산왕에 들어올 정도면 중학교 때부터 농구로 두각을 드러냈을 것이고, 학교 추천에 담임 추천도 받았을 것이고, 이 농구 명문 산왕에서 내가 역사의 한 획을 그어보겠다는 야망으로 절절 들끓는 놈들……. 보나마나 또 그런 놈들이 농구부에 들어오겠지, 뿅. 너희들 같은, 우리들 같은. 새로 깎은 까까머리가 어색해서 자꾸 뒤통수를 만지는 그런 16살이.
교문을 나서는 농구부원들 손에 하나같이 촌스러운 무늬의 장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새로 입부하는 농구부원에게는 엄마에게 물려받은 장바구니가 필수였다. 매번 비닐을 받아오면 처리가 곤란하니까. 이명헌은 그들의 팔뚝에 걸려 흔들흔들 좌우로 흔들리는 장바구니의 무늬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꽃무늬. 호피 무늬. 기하학적인 도형 무늬. 두툼한 입술이 매력적인 산리오 캐릭터…… 아, 저 캐릭터 나도 좋아하는데. 저건 뭐야. 나방 무늬? 진짜 같다, 뿅. 이따가 어디서 샀냐고 물어봐야지, 뿅.
다들 장바구니를 가지고 길을 나선 걸 보니 점호 전에 시내에 나가 야식을 사올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런데 내 장바구니는 어디 있더라. 나도 카라아게 먹고 싶다, 뿅…….
장바구니를 쑤셔 넣은 곳을 곰곰이 생각하며, 이명헌은 말했다.
“사랑은 어른의 전유물이냐, 뿅.”
**
4월이 되면 이명헌과 신현철도 2학년이 된다. 신현철은 후배에 대한 기대에 차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선배가 되는 것에 대한 기대에 차있다고나 할까.
2학년이 되며 그는 키가 훌쩍 자랐다. 농구 실력은 상위이나, 신체 스펙에서 밀려 주전 자리를 따내지 못했던 1학년 때와는 달리 이제 그는 모든 것을 갖추었다. 2학년 주전 자리는 따 놓은 당상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제 정식 시합에서 너와 함께 코트에 설 수 있어, 명헌아.”
아직 주전도 달기 전인데. 신현철은 마치 그것이 기정사실이라는 듯이 당당하게 말했다. 그의 말에는 어떠한 자만도, 거들먹거림도 없었다. 그게 사실이니까. 아무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건 이명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그가 할 대답은 이미 1년 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뿅.”
아직 주전은 아니었지만, 이명헌은 신현철과 페어를 이루어 콤비 플레이 연습을 자주 했다. 왜냐하면, 신현철은 주전이 될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 미리미리 합을 맞춰놔야지, 뿅.
신현철과 정식 시합을 함께 한다. 이명헌이 패스를 하면, 그곳에는 패스를 받아줄 신현철이 반드시 있다. 그 상상만으로도 이명헌은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신현철과 정식 시합을 함께 한다. 우리의 콤비 플레이를 드디어 세상에 보여준다. 아무도 우리를 막지 못한다. 시합에서 이긴다. 우리는 모두의 적이자, 라이벌이자, 반드시 무너트려야 하는 산이 된다. 그러나 아무도 우리를 무너트릴 수 없다, 뿅. 우리는 산이니까. 애들이 장난으로 쌓으며 논 모래산 같은 게 아니니까, 뿅.
**
“사랑이 어른의 전유물을 아니지만…… 으음.”
곤란하다는 듯이 신현철이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그건…… 그러니까 그런 뜻이 아니잖아? 그, 선생님이 말한 사랑이라는 건, 그게…… 그러니까아…… 그 ‘사랑’이 아니라 다른 ‘사랑’…… 어른의 그, 뭔지 알잖아. 밤에만 그, ‘사랑’ 말이야.”
“현철이 말하는 ‘사랑’은 정말 밤에만 가능한 거냐, 뿅.”
“뭐?”
“사실 그건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시간 상관없이 가능한 거 아니냐, 뿅. 보니까 그렇던데.”
“뭐라는 거야, 이 자식이. 그리고 너 대체 혼자서 뭘 본 거냐?”
“볼 만한 걸 봤다, 뿅.”
이명헌은 곁눈질로 힐끗, 신현철을 쳐다보았다.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신현철은 이명헌과 눈이 마주치자 정말 못 말리겠다는 것처럼 “하!” 하고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어쩌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 거냐?”
“몰라, 뿅.”
아직 신현철의 정수리에 꽃잎이 붙어 있었다. 도통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네. 거기 좋지. 그 마음 나도 알아, 뿅.
이명헌은 흐음, 하고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찌푸렸다.
“알고 싶다, 뿅.”
“뭘 알고 싶은데?”
“사랑 말이야, 뿅. 에로스가 어른이 되어가면서까지 할 정도면 굉장히 좋은 게 아닐까, 뿅. 궁금하다, 뿅.”
“뭣…….”
신현철의 다음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이명헌은 마침내 허리를 세워 앉았다. 큰 키를 한참 구부리고 있었더니 허리가 뻐근해졌다. 허리를 퉁퉁 치며 이명헌은 신현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현철.”
“…….”
“나도 사랑을 하고 싶다, 뿅.”
“…….”
“이왕이면 에로스의 사랑, 뿅.”
“…….”
신현철은 그대로 얼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으로 이명헌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가 눈을 깜빡이지 않았더라면, 이명헌은 그가 너무나도 놀라서 앉은 채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신현철의 두툼하고 큰 입술이 작게 달싹거렸다. 그러나 무언가 말이 되어 그 밖으로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신현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명헌의 눈길이 무심코 그의 아랫도리를 향해 내려갔다.
“어?”
“…….”
“현철.”
“…….”
“어른이 되었다, 뿅.”
“…….”
이명헌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신현철의 얼굴이 마치 군불에서 꺼낸 넓적한 조약돌 같았다. 그 얼굴을 보자니 뭔가…… 아랫도리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이…….
이명헌은 고개를 숙여 이번엔 자기 바지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신현철을 쳐다보았다.
“아.”
이명헌은 주먹으로 자기 무릎을 통, 하고 가볍게 두드렸다.
그게 이런 뜻이었냐, 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