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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 앞에 부쳐
오랭지 | @MonsterLasagna7
1. 피와 살
199X년 XX도 YY시의 산왕공업고등학교 농구부가 전국을 평정하게 된 일에는 남들은 모르는 약간의 비밀이 있었다. 인간 같지 않은 그들의 경기력이 실제로 인간의 정의에 애매하게 걸치는 이가 한 몫 거든 결과라면 그 영광은 빛이 바래는가? 하지만 대도시 복판에서만 가능한 일이 있듯, 산골에서만 가능한 일도 있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공간이 만나는 곳에서 자신이 속한 두 세계를 조율하며 살아가던 이들은 남은 초록을 찾아 산이 깊은 지역으로 이동하고 다시 이동했다. 산왕공고 주전 센터 신현철도 그렇게 XX시 인근에 자리 잡은 멧돼지 산군 집안에서 태어났다.
서구의 전설에서는 동물과 인간의 형상을 오가는 이들을 라이칸 또는 웨어비스트를 이성을 통제하지 못하는, 짐승만도 못한 괴물로 생각해왔으나, 이 땅에서는 예로부터 동물종과 인간의 중간자적 존재로 숭앙해왔다. 이 땅에서 대형 포유류로 변신할 수 있는 이들을 묶어 특별히 지칭하는 이름은 없었으며 종종 사람들에게 산군이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이 땅에 녹지가 유실되고, 더 이상 경계에 몸을 숨기기 어렵게 되자, 산군들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서구화된 인간 사회에 몸을 맞출 것인지, 녹음에 정신을 녹일 것인지. 대지의 정기로 빚어진 이들이 인간 사회에 몸을 구겨 맞추는 일은 쉽지 않았으며 여러 부작용을 초래했다. 그 중 서구의 전설이 연상되는, 광증에 가까운 발작적 변신은 피가 짙은 산군 가계의 모든 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비인간 혈족들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즈음, 그러니까 한반도에 담배가 수입된 17세기 이후부터 재생산 통제하며 비밀을 지켜왔다. 갑자기 산엣것들과 연고도 없는 아녀자가 새끼 짐승을 낳으면 본인은 얼마나 당황스러울 것이며, 또 관에서는 아무개 동네에 요괴가 나타났다 어쨌다 난리를 칠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여러 산군 가계에서는 동류들의 안전을 위해, 다음 대를 이을 산군이 태어나면 산군을 제외한 위아래의 모든 친족들이 더 이상 자손을 보지 않는 것을 불문율로 삼아왔다.
전근대 시대에도 그런 규율이 필요했는데, 어딜 가든 인간의 시선과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지금 시대에 인간이 갑자기 거대한 고라니나 산양, 멧돼지로 변해 주택가를 휘젓고 다니면 어떻게 되겠는가. 비극이었다.
신현철은 전국 국립공원 산군들의 고민이 깊어지던 시기, 두세 대를 건너 한 번씩 멧돼지 산군이 나오던 가계에서 태어난 다음 대 산군이었다. 그의 어린시절은 아주 깜찍하여, 심려에 코끝이 촉촉함을 잃어가던 당대 산군, 그의 증조모가 전국에 전화를 돌리다 못해 그를 데리고 온 산을 쏘다니며 증손 자랑을 하고 다닌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 현철의 2차 성징이 시작되기 전, 그의 증조모는 그를 산엣것들 사이에서 유명한 꼬리 다섯 개 달린 여우무당에게 데려가 일종의 ‘제한조치’를 받게 했다. 인간의 형상과 멧돼지 본신 사이의 변신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도록 정신적 성숙이 완료될 때까지, 폭주의 원인으로 거론되는 본신 쪽의 기운과 성장을 제한하는 주술이었다. 일종의 봉인이었다.
현철은 발작과 폭주가 어떤 감각인지도 모른 채, 가족의 안전을 위해 제한조치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주술의 부작용인지 인간 쪽의 성장도 거의 멈춰버렸다. 현철은 변함이 없는 높이를 보면서도, 영혼의 절반에 그런 봉인을 했는데 부작용 하나 없는 것이 이상하지, 하고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그런 자신 대신 가슴앓이를 하는 증조모나 집안 어른들을 보며, 과연 나는 내 자식들에게도 이런 식의 삶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인지, 현철은 번민했다.
성장이 멈춘 듯 초등학교 6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한 뼘도 제대로 크지 못했던 신현철이 어떻게 산왕공고 최전성기의 주전 센터로 활약하게 되었는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주전 선수의 개인사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전국의 포인트가드를 절망에 빠트리며 명실상부 산왕공고의 최전성기를 이끈 주역 이명헌. 그 역시 출생에 비밀이 있어 산세가 험한 XX도에 터를 잡게 된 가문에서 태어났다.
명헌은 500년 전, 제 2차 정마대전 당시 마교에 협력하는 사파세력으로 취급당해 중원에서 밀려나 한반도로 망명 온 조을파(早乙派) 문도의 마지막 후손이었다.
조을파는 문파 특성상 여성 제자만 받아왔고, 이 땅에 정착한 이후에는 대대로 모계로만 전수해왔기에, 원래대로라면 명헌은 비밀스러운 무림고수 가족을 둔 평범한 농구선수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날 때 조을파의 직전제자이자 유일제자였던 명헌의 어머니가 난산으로 사망하면서, 그의 운명이 요동쳤다.
700년 묵었다는 문파의 전통이 모두 끊길 위기 앞에, 조을파의 문주이자 장문인이자 일인전승자가 된 명헌의 외할머니는 선택을 내렸다. 쓸모없는 손자를 음양합일의 몸으로 만들어, 제대로 된 다음대 전승자에게 문파의 비전 무공을 전수할 징검다리로 쓰기로.
그렇게까지 해서 명헌이 전승받아야 했던 조을파의 문파 비전은, 흡성대법(吸星大法)을 채양보음(採陽補陰)의 묘로 응용, 창안한 내공심법(內功心法)을 핵심으로 하며 섭혼술(攝魂術), 방중술(房中術), 채기법(採氣法) 등의 색공(色功)을 집대성한 산철봉봉여신공(山徹奉鳳麗神功)이었다.
여자의 몸으로 변형한 채로 문파의 명맥을 이어갈 딸 하나만 낳고 나면, 남자로 살든 말든 맘대로 원하는 대로 하라는 유일한 법적 보호자의 존재는 이명헌의 삶을 크게 제약했다.
그러나 명헌은 그의 주성치 영화를 그의 장르로 삼겠노라 마음먹었기에, 노인네 말은 적당히 듣고 적당히 무시해가며 그래도 적당히 잘 살았다. 태어나자마자 여체라는 혹이 붙은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가 계셨던들 할머니 같은 사람이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있었을지도 모르는 여동생이 할머니 밑에서 방중술을 배우는 것보다는, 무녀독남으로 태어난 자신이 좀 참다가 성인 되자마자 튀어서 영영 조을파를 망하게 만드는 것이 20세기 다운 해피엔딩이라는 생각을, 명헌은 해보았다.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 또 배운게 도둑이라고, 학교 수업 따라가고 농구부 부활 일정 따라가는 틈틈이 명헌은 홈스쿨링 과목도 꽤 열심히 연습하고 복습했다. 인생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모든 수는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은 노망 난 노인네가 한 것 치고는 일리가 있었다. 그리하여 중학생 때 할머니 말씀을 따라 여러 사람을 다양하게 만나보며 산철봉봉여신공과 스스로의 몸에 대한 탐구를 끝낸 이명헌은, 보호자의 만류를 뿌리치고 전액장학금과 기숙사를 제공해준다는 산왕공고에 입학한다. 그리고 농구부에서, 신현철을 만나게 된다.
*
자아 발산에 온 에너지를 다 쏟는 중인 건강한 청소년들 사이에서, 반쪽짜리 영혼으로 섞여 있던 신현철과 이명헌은 처음부터 서로를 알아보았다.
호기심인지 불편함인지 모를, 알 수 없는 긴장감과 끌림 속에서 시선은 계속해서 얽혔다. 지금까지 그들을 둘러싼 너무 가깝고 무거운 세계를 상대로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했던 소년들에게, 그 모든 것들과 유리된 공간에서 발견한, 내면으로부터의 끌림은 그들 스스로를 비로소 고유하게 만들었다. 그 시선 끝에 서 있는 자는 또한, 스스로에게도 낯선 자신의 개별성을 발견해준 최초의 타인이었다.
두 소년은 서로를 향하는 시선 속에 자신의 닻을 내렸다.
*
현철과 명헌이 함께 어울려 다니며 열심히 입을 맞추고 배를 맞추는 동안, 현철을 속박하던 봉인은 느슨하고 헐거워졌다. 봉인의 목적은 인간 생활에서 해소할 수 없는 본신의 혈기를 제한하고 흘려보내는 것. 일상에서 소모할 수 없는 혈기가 축적되고 넘칠수록 봉인은 더욱 견고해지고 압력은 올라갔다. 결국에는 인간 신체의 성장까지 억제하게 된 그 속박은 상당히 강력한 것이었다. 그러나 명헌이 정기적으로 현철의 양기를 덜어내면서 그의 기혈이 일정한 수준에 머무르게 되자, 현철이 안정세에 들어선 것으로 판단되어 저절로 풀려버렸다.
현철의 급작스러운 성장은 놀랍고 기쁜 일이었으나, 영혼을 구속했던 잔재와 신체의 변화는 고통을 동반했다. 그 고통까지도 기꺼워하는 현철과 모든 시간을 함께하며 명헌은, 좋아하지도 자랑스럽지도 떳떳하지 않을 뿐더러 혐오하기까지 하는 자신의 힘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음에 정말 이상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이렇듯 사랑이 신현철을 자유롭게 했고 이명헌이 자신을 긍정하게끔 하였다. 현철이 일생에 한 번이라 다짐받았고 다짐했던 고백을 아직 앳된 볼살의 동기생에게 건낸 겨울 밤, 명헌도 자신의 출생과 가계에 대한 오랜 비밀을 털어놓았다.
현철은 자신이 남자인 명헌을 반려로 삼아서 산왕산 산군 맥을 끊어놓겠다 하면 증조모가 자신을 정말 죽이겠지만 상관없다고 했다. 도리어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가 싶어 마음이 설레고 기쁘기까지 하다고.
명헌은 평생 할머니를 엿 먹일 생각으로 살아오며 남자는 절대 안 만나려고 했는데 어째 할머니가 제일 흡족해할 만한 놈을 데려가게 될 것 같아 속상하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도 대 끊어먹기에 관심이 지대하니, 그와 함께한다면 평생 즐거울 수 있을 거라고.
눈 쌓이는 소리가 속닥이는 소년들의 작당과 음모를 덮어주었다.
2. 재와 먼지
소년들은 청년이 되고, 신현철과 이명헌은 대학 졸업 이후 프로 리그에서 몇 년 선수로 생활하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산이 인접한 현철의 영역이 그가 생활하기 편하기도 했고, 명헌도 의절한 외할머니와 가까이 사는 것을 꽤 기껍게 여겼다. 느긋하게 당신의 히스테리를 구경하는게 꽤 재미있다나.
그러나 꾹 참고 도시에 살았으면 이 꼴은 보지 않았을까. 귀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철은 진한 허탈감을 느끼게 되었다. 은퇴 후 편하게 살겠다고 돌아온 고향집 앞뒷문이 모두 민원창구처럼 쓰이게 된 상황이 힘들었다. 그 문제의 핵심은 더더욱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평생 강렬한 감정을 의식적으로 통제해온 현철이지만 이번에는 정말 쉽지 않았다.
건너건너 산이 밀리고 골프장이 들어온댄다.
현철이 이름만 올려놓고 있던 지역 환경단체며 골프장 건설을 반대하는 시의회 야당 지역의원들은 낮에 앞문으로 찾아왔다. 국가대표로 나름 이름이 알려진 현철에게 서명운동이라도 도와달라는 것이 요지였다. 서명이야 못할 것도 없지만 과연 어디까지 하게 될지 의미는 있을지가 고민이었다. 밤이 되면 근처 사는 멧돼지며 고라니 같은 놈들은 말할 것도 없고 너구리니 토끼, 말도 잘 안 통하는 새와 뱀이며 도마뱀붙이 같은 놈들도 지들 나름대로 대표랍시고 뽑아서 뒷문으로 찾아왔다. 그래도 산군이신데 어떻게든 해달라며 무작정 읍소하는데 그 가여운 것들에게 나도 인간 사이에서는 힘이 없다며 설명하는 것이 면이 안 섰다.
힘세고 오래 살기만 하면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옛날에야 산군이니 하는 말이 의미가 있었지, 요새 초대형멧돼지의 힘과 덩치가 산동물들 복지증진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냔 말이다. 그래도 나고 자란 동네에 대한 도리가 있다 생각해 적당할 때 내려왔다. 이 동네 산엣것들과 산아랫것들 분쟁이나 조정하면서 살려고 했더니, 눌러앉은 지 몇 년 되지도 않아 이런 대형사건이 터졌다. 이 근처 농가와 터줏대감 멧돼지 가족들 중재하는 것도 년 단위로 걸렸는데 정말, 산 너머 산이다.
아니, 산 너머 골프장 도로 도시 터널 리조트 그리고 나서야 산인 요즘 세상에 산 너머 산이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난 네가 그걸 다 니 일이라고 생각하는게 신기하다뿅’
멧돼지들이 성의라며 가져온 송이버섯을 죽죽 찢어 기름장에 찍어 먹으며, 명헌은 낮의 방문객들이 가져다준 두꺼운 보고서를 머리 싸매고 읽고 있는 현철을 구경했다. 명헌이 그의 친족들과 어떻게 절연하게 되었는지 아는 현철은, 그가 자신의 가족 일에 별 불만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사는 동네 일이니까 들어나 보는 거지, 하며 보고서를 치워버렸다.
괜히 몸을 붙여온 현철이 기름장 묻은 명헌의 입술을 핥았다. 오늘 명헌은 여성이었다. 송이버섯이 선물로 들어왔다는 말에 냉큼 변형했더랬다. 명헌의 말로는 여체인 쪽이 맛이 더 잘 느껴진다나. 현철도 멧돼지 본신과 인간 신체의 감각의 차이를 느끼기 때문에 이해했다. 현철이 벙벙한 홈웨어 아래 봉긋하게 솟은 가슴을 슬쩍 문지르며 내 일은 이쪽이지, 하자 명헌이 깔깔대며 뒤로 넘어갔다.
*
그러나 그런 느긋한 마음가짐도 곧 사라졌다. 골프장 건설을 위한 산지전용허가를 둘러싸고 갈등을 벌이던 숲에 기습적인 간벌이 이루어진 것이다. 간벌을 한 숲에서는 몇 년간 동물들이 살기 어려워진다. 물론 모든 간벌이 산림을 훼손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명목은 천연림 유지관리를 위한 산림 정비라고 했지만, 골프장 조성을 위한 환경영향평가를 앞둔 지역에 갑작스럽게 진행된 간벌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산 살던 이들이 전부 남의 영역에 나앉게 된 데다가, 서식지가 사라진 멧돼지 무리 몇이 지속적으로 농가를 침범하는 일이 발생하자 근처 민가에서는 포수를 고용했다. 결국 현철도 안면이 있던 산 터줏대감이 임신한 암컷을 도주시키다 잡혀 사살되었다는 소식에, 현철은 드디어 분노했다. 멧돼지 털을 잔뜩 세우고 어금니 난 얼굴로 공사책임자를 받아 죽이고 오겠다는 현철을 명헌이 만류했다.
‘깔끔한 방법이 있뿅.’
그러면서 자기가 심법으로 딱 죽기 전까지만 진기를 흡수하면 증거가 안 남아 현철이든 동네 멧돼지든 용의선상에서 안전하다는 것이다. 현철은 골을 부여잡았다. 어이가 없어서 화가 가라앉았다.
‘니가 그 지저분한 놈들 먹어치우겠다고? 아서라, 비위 버린다. 그냥 내가 엄니로 받아버리면 된다.’
‘나 입으로는 아무거나 안 먹는데 아랫입은 안 까다롭다뿅. 맛없어도 일단 먹어두면 다 피부에 양보할 수 있뿅. 안 그래도 현철 수명 따라가려면 슬슬 내공수련 해야겠다 싶었는데 이참에 시작해보지 뭐.’
명헌은 내가 반로회동해서 너무 어려져도 상대해주기 약속뿅, 하며 손가락을 내밀었다. 너 때문에 내가 제 명에 못산다, 이런 식이면 네가 노력 안 해도 내가 네 수명에 맞춰 죽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현철은 불평했다.
‘근데 복상사로 죽으면 근데 무슨 의미냐? 딴 놈이 와서 또 산 밀어버리면.’
현철이 지적하자 명헌은 거기까지 챙겨야 하냐며 가볍게 혀를 차더니 별 고민 없이 멧돼지 털이나 좀 뿌려주고 오자고 했다. 현철은 이게 말이 되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젓긴 하였으나, 호구처럼 산다며 산 일에 심드렁하던 반려가 모처럼 자기 일에 의욕적으로 나서는 것을 만류하고 싶지 않았다.
명헌과 대화하는 동안, 방금까지 폭주할 것 같이 술렁이던 심장과 전신의 욱신거림은 잦아들었다. 현철은 새들을 통해 일정 확인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 말하며, 명헌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그의 드러난 어깨에 작은 입맞춤을 뿌렸다.
*
큰 고민 없이 시작한 현철의 화풀이 및 산군적 영역활동 겸 이명헌의 몸보신 계획은 눈치 없는 인간들이 멧돼지 털을 알아보지 못해 원하는 효과를 얻지 못했다. 이명헌은 자신이 입안한 프로젝트가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자, 현철산군의 영역지키기 활동에 심하게 몰입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산림생태계 보전에 별 생각이 없었으면서, 경고가 너무 은근했던 것 같다, 죽는데 너무 오래 걸린 것 같다, 한두 놈 보내서는 이 산맥 전체를 환경테러범들로부터 지킬 수 없다며 의욕적으로 다음 테스트 일정을 궁리했다. 가방에 들어가는 사이즈로 변신한 아기멧돼지 현철과 국대센터 현철, 성별 다른 이명헌 원, 투. 이정도면 도합 네 개의 침투조 조합이 가능하다 열변을 토하는 명헌은 전설적 완전범죄를 꿈꾸었다.
일 년 후, XX도 건설토목업체를 중심으로 줄초상에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3. 그리고 모든 허위
산림에 좋고 이명헌 피부에도 좋은 연쇄심장마비는 꼬박 이 년 동안 이어졌다. 처음에는 하루, 이틀 지연되던 공사나 사업일정이 중단, 연기되고 마침내 다음 해 XX도 내 신규 건설사업계획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XX도 내 신임 산군인 신현철과 영역운영기획 관리자 이명헌은 꽤 뿌듯함을 느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인간 쪽의 문제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큰 업체들이 사업을 중단하거나 취소하자 그 하청이나 인력을 파견하던 중소규모 업체들이 폐업하고 지역을 이동하는 등 사라지기 시작했다. 일거리가 없어진 지역의 인구는 빠져나가고, 지역 원주민들의 삶도 팍팍해졌다. 인간 이웃들의 이러저러한 소식에 착잡해지기 시작하던 중, 충격적인 뉴스가 두 사람을 K.O.시켰다. 학령인구감소 문제가 심각하던 YY시에서 두 사람에게 각별한 모교인 산왕공업고등학교를 비롯한 4개 학교에 대해 통폐합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허무하다뿅….’
‘진짜 인간 좀 줄어도 되지 않나 싶었는데 이렇게 현실을 마주하니 착잡하네.’
아침 뉴스를 틀어놓고 우울하게 샐러드를 뒤적거리는 현철을 보며, 우울하게 간장계란밥을 비비던 명헌이 불쑥 말했다.
‘현철, 우리 애기 가질까.’
현철은 정말로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
‘뭔 소리야.’
‘말 그대로 뽕.’
‘…조을파를 네 손으로 멸문시키겠다던 포부는 어쩌고.’
‘조을파는 내가 딸만 다섯을 낳아도 제자로 안 들이면 그냥 끝이다뿅.’
‘….’
‘작년에 할매 가고 나서, 어차피 내 맘대로 할 일이었는데 뭐하러 곧 죽을 노인네가 원하는 대로는 안 산다고 굳이 다짐까지 하며 살았나 생각해보고 있었어. 근데 이건 내 생각이고, 난 나 말고 네 생각이 궁금하다뿅.’
쩝쩝대며 숟가락질을 하는 명헌의 눈은 평온했다.
자식? 현철은 이제 와서,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앞으로 이 땅에 산군이 계속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이런 종류의 비밀은 앞으로 계속 더더욱 숨기기 어려워질 것이다. 내 다음의 산군은 또 언제 나올 것인가? 다음 산군이 태어나기를 기다리며 내 자식의 자식의 자식들, 어쩌면 그 자식들까지 지켜보며 동시에 그의 앞으로의 삶을 걱정해야 하나?
증조모의 삶과 자신의 미래를 겹쳐보며 했던 어렴풋한 생각은, 고등학교 1학년 같은 학교 남자애를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며 미래에 대한 계획으로 발전하였다. 태어나면서 짊어진 자신의 무거운 책임, 동생을 비롯한 여러 친족들의 제한된 기회를 보며 이 운명은 내 대에서 끝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깎이고 밀리는 산들을 보면, 어차피 곧 산군이라 불러줄 이들도 존재하지 않을 날이 머지않아 보였다. 그러고 나면, 도시에 섞여 들어간 이들에게 이미 의미를 잃은 말일지라도, 우리들을 이르는 산군이라는 명칭은 정말로 소실될 것이다. 그렇다면 동류들은 자신을 무엇으로 정의해야 하는가? 최대한 중립적으로 표기해도 수인(獸人)이니, 짐승 취급이며, 압도적인 다수인 인간의 기준에서는 실상 유전에 의한 돌연변이 개체가 되는 것이다. 그런 미래 앞에 현철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조상들과 후손들과, ‘우리들’의 존엄을 일부나마 지키고 싶었다.
‘나는…, 내 문제는 가르치지 않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니까. 역시, 가지지 않는 것이 맞다 생각해.’
너랑 둘이 있는 지금이 행복하기도 하고. 현철은 깊은 고민에서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한 눈으로 덧붙였다. 명헌은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그에게 마주 웃어주며 식탁을 정리했다.
‘그래, 네 마음이 중요하니. 그래도 한번 생각은 해봐뿅. 우리가 몇백 년 전에 정해놓은 그대로 살 수는 없는 것 같더라고. 또 우리 다음 세대도 그렇게 살 필요는 없고.’
현철은 명헌의 말을 늘 허투루 듣지 않았다.
*
기업인 양기사냥 일정이 무기한으로 중단되며 남은 시간에 현철은 명헌의 말을 종종 생각했다. 현철로서는 장차 대가족을 이루며 살지 않겠다는 결심이 나름대로 어떤 미지의, 새로운 시도였다. 그러나 명헌은 현철이 가진 여러 판단 기준들을 재검토해볼 것을 요구했다. 명헌이 의도한 것은 반드시 어떤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었겠으나, 그렇다고 시원하게 무시할 수 없는 생각의 꼬리들을 현철은 그냥 어지럽도록 냅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알고 지내던 아랫지방의 산군이 연락해왔다. 곰 수인인 그는 아직 영역을 확보하고 있는 산군 중에서는 유일하게 현철과 연배가 비슷한 어린 이라 종종 소식을 주고받던 사이였다. 그런 그에게서 오랜만에 받은 연락은 비보였다. 그의 영역지의 개발제한이 해제되어 곧 밀릴 예정이라고 한다. 이웃들과 가족들끼리 미리 일부 임야를 구입해두었지만, 의미 없을 정도의 대규모 사업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마음이 커 현철은 말을 고르기 어려워하는 현철에게,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현철씨 영역 근처에 저희 가족이 이주할만한 땅이 있을지요? 어렵다면 전대 산군이신 고조부와 저와 남편만이라도 의탁하고 싶습니다.’
영역지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엇비슷한 산군들 사이에서 그의 부탁은 꽤 이례적이고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인근 산에서도 호의를 베풀어주었으나 그 근방은 계속해서 임야가 밀릴 예정이고, 결국에는 사람 사이로 들어가야 하는데 늙은 고조부에게 그런 마지막을 주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XX도는 산세가 험한 지형도 지형이거니와 최근 일 때문에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고 들었다며 영역의 산군이 자신들을 받아주길 간청했다.
어렵게 부탁하는 말을 들으며 현철은, 사실 전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닌데 왜 지금까지 이런 식의 조력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까 후회했다. 현철도 물론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역지에 대한 소유욕과 통제욕이 있지만, 굳이 옛날처럼 산군끼리 먹이터 경쟁을 할 필요가 없는 시대에 다른 이들을 내 산 내 영역에 들이거나 겹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줄곧 산군이라는 명칭에 얽매여 동류들끼리 가까이 사는 것이 무례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전화를 끊고 인근에 괜찮은 동네를 생각해보던 현철은, 곧 자신이 일가 한 둘이 아니라 마을 단위로 생각 중인 것을 깨달았다. 영역지가 없어지거나 너무 좁아져 인간들 사이에 숨어 농사짓고 빌딩 숲 사이에서 미쳐가는 동류들이, 근터에서 모여서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모여서 살면 굳이 친족의 규모를 강박적으로 통제할 필요는 없어질 것이다. 자라는 아이들도, 영문 모를 인간 친구들 사이에서 언제 본신을 들킬까 두려워하며 제한조치를 감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
현철은 언제나 누군가를 위해 살았다. 역할과 책무를 감당할 사람이 자신밖에 없으니, 불만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책임져야 하는 것들 중 명헌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현철이 선택하지 아니했다. 명헌을 만남으로써, 현철이 명헌을 위해 살기로 결정함으로써 현철은 그를 위해 살아가는 감각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이 땅에서 숨 쉬는 존재로서 또한, 앞으로도 미래에 닿은 이들을 위해 살고자 한다면. 현철은 그 안에 있을 명헌의 아이를 생각하며, 그를 위해 살고 싶었다.
생각해보라는 화두를 던진 명헌은 그 후에 한 번도 그 주제에 대해 현철에게 언급한 적이 없었다. 앞서가 차분히 기다리던 그에게 오늘에야 할 말을 생각해보니 조금 쑥스러운 기분이었다.
현철은 마당에 있는 명헌을 불렀다.
“명헌아.”
사랑하는 이름이 오래 기억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