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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통

소금 | @sogeum1114

오늘도 명헌은 펜을 들었다. 연필로 미리 써놓았던 내용을 정갈하게 다듬어 써 내려가는 것은 익숙했다. 그러다 문뜩 한 문장에서 손이 멈췄다. 그립다는 단어를 부드러운 입술이 곱씹는다. 정말로 나는 당신을 그리워하는 걸까? 고민 끝에 뾰오옹 하고 바람 빠지는듯한 목소리가 꽤 두께가 있는 아랫입술을 흔들며 터져 나온다.

손가락 사이로 힘을 주며 쥐었던 펜을 입술 위에 올리고 연필로 갈겨쓴 단어를 바라본다. 아무래도 이게 맞다면 나는 대체 당신을 만나서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요? 아무리 물어도 답을 들을 수는 없었기에 이명헌은 결국 그 단어를 지워버린다. 그 대신 대체할 단어가 없어 막혀버린 편지지에 펜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벌써 두 번째의 투고가 정말 잡지에 실릴지 자신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신중하게 글을 쓰고 싶었다. 가벼운 스트레칭 끝에 사전을 뒤적거린다.

팔랑거리며 질 좋은 종이가 넘어간다. 오랜만에 꺼낸 사전은 책냄새를 가득 품고 있었다. ㄱ으로 시작하는 단어이기에 금방 손이 멈춘다. 그리움, 그 옆의 유의어를 바라본다. 동경, 사랑, 사모. 그 어떤 것도 자신의 감정을 대신할 수가 없어 손끝으로 밑줄을 써 내려가는 심정으로 글을 이어 읽는다. 연수(戀愁). 그 단어에 손이 멈춘다.

그리움과 근심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는 단어에 손톱으로 동그라미를 그린다. 그래, 나는 당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당신을, 그저 자신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는 기억에서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는 이유로. 당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리고, 다시 만나자는 터무니없는 약속을 했다는 이유로.

꿈에서 몇 번이고 들어왔던 목소리를 다시 읊는다. 사실 목소리라기보다는 기억이었다. 이제는 끊어지기 직전의 비디오테이프처럼 노이즈가 잔뜩 들어가 그 낮은 소리를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음에도 확실하게 내용을 외우고 있으니까.

"언젠가는 나와 그대가 인연이 닿기를 진심으로 기다리겠어."

그 추억을 천천히 곱씹으며 말로 꺼내어보면, 자신이 할 말도 들을 말도 아니라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고1의 이명헌에게는 인연이라는 말은 교과서의 국어과목에서나 볼 법 한 단어였고, 진심이라는 말은 이제야 겨우 농구라는 종목에서 느끼고 있는 심정이었다. 그대라는 표현은 어머니가 좋아하던 사극 드라마에서나 좀 들었나.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계적인 목소리로 읊고 나니 더욱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결국 사전을 내려놓고 펜을 손가락으로 굴리듯 돌린다. 1학년인 이명헌이 주전이 된 지 몇 주가 지났다. 지금이라도 다시 공 한번 더 쥐어볼까 고민하다가 결국 습관처럼 펜을 쥐었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보내보자 결심하고 그리움 대신 걱정으로 단어를 바꿔 써 내려간다. 나머지는 연필로 미리 쓴 내용을 따라 쓰니 금방 편지를 완성할 수 있었다. 물론 꾹꾹 눌러쓰느라 시계를 확인하면 벌써 취침 준비를 할 시간이 되었기에 스탠드를 끄고 편지를 접어 봉투 안에 넣었다.

마침 문이 열리며 룸메이트가 들어왔다. 서랍을 열어 뒤적이다 들어온 존재에게 말을 걸었다.

"우표 남은 것 좀 빌려줘라 베시."

"또 편지 보내려고? 저번에도 그렇고. 연애편지냐?"

"시끄럽다 신현철."

"베시 빠졌다."

"... 베시이..."

자신보다 조금 작은 손이 내민 우표를 받아 들고 뒤편에 혀를 내밀어 적신다. 키는 훨씬 작은데 손은 이렇게 차이가 크지 않으니 어쩌면 자신의 키를 따라잡을지도 모르겠다. 끈적 미지근한 풀의 맛을 입안에서 느끼며 봉투에 고이 붙인 뒤 만족스럽게 봉투를 바라보니 현철은 먼저 자겠다며 머리 말리던 수건을 침대 한편에 걸어둔다. 잘 자라, 베시. 수신인과 주소는 이미 적어두었기에 보내는 사람에 이명헌이란 이름을 적으며 명헌이 인사를 했다. 여기에 와서 두 번째 겪는 일상이었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면서 기숙사 방에 앉아 선풍기를 같이 쬐는 시간이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번달의 월간농구를 넘기며 무료하게 점등 시간을 기다리면 낙수의 몸에도 가려질 작은 티비 앞으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선풍기 위치로 싸우고 채널권으로 싸우다가 막 자리를 잡은 탓에 아직도 어수선했다. 화면에서는 최근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는 전생의 꿈에 관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오른손으로 말아쥔 잡지의 왼쪽 부분을 심드렁하게 훑어보다가 누군가 다가와 그림자가 드리운다. 이 덩치는 성구인가? 싶었다. 이명헌. 맞았다 베시. 속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면서도 눈썹만 까딱이며 부르는 목소리에 대꾸하니 눈앞에 소포가 하나 내밀어진다. 받는 사람에 자신의 이름이 쓰여있는 포장에는 잡지사의 이름이 도장처럼 찍혀있었다.

"다른 잡지도 구독했었나? 농구에만 관심 있는줄 알았는데."

"취미, 베시."

"이명헌이 문학소년이라고?"

"안어울린다는 의미로 들린다 베시"

월간농구를 소파에 올려두고 소포의 포장을 뜯으며 슬쩍 성구를 바라보니 그게 맞다는듯한 표정으로 명헌을 내려보고있었다. 흥, 하고 새침한 시늉 하며 입술을 닫는다. 그래서 그게 뭐냐 물으며 잡지 대신 본인의 허벅지를 소파에 주차하는 성구 앞에서 잡지를 꺼내 표지부터 바라본다.

뽀빠이라는 커다란 글씨를 가장 위로 두고 살짝 웃고 있는 체크무니 셔츠를 입은 남자에게 시선을 오래 두지 않고 바로 무심하게 목차로 넘어간 이명헌의 손은 침착하게 페이지의 수를 가늠하고 있었다. 독자의 투고,라는 소제목을 따라 종이를 넘기고 그 페이지에 눈이 머문다. 손과는 다르게 눈동자는 빠르게 원하는 글을 찾고 있었다.

"뭐야 패션잡지잖아. 문학소년은 무슨."

"오, 베시."

"무슨 내용이길래?"

대부분이 농구부인 기숙사의 TV모임이 선보이는 투닥거림보다 이명헌이 들고 있는 잡지에 더 관심이 있던지 정성구는 이명헌이 고개를 처박을 기세로 바라보던 페이지에 얼굴을 들이대었고 묘한 부끄러움이 올라와 그대로 잡지를 닫아버렸다. 눈앞에서 읽으려던 페이지가 사라져 버린 성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허, 하고 한숨을 내뱉었고 이명헌은 감정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장난이 아닌 것처럼 성구에게 중얼거린다.

"숨소리 들려서 기분 이상하다, 베시."

"... 이명헌."

질색하며 떨어지는 성구에게서 슬쩍 멀어지며 일부러 양 가슴을 잡지로 가리니 어이가 없다는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래서 뭐냐는 물음에 이명헌은 잠시 고민을 시작했다. 솔직하게 말할까, 아니면 조금 꾸며서 말할까. 하지만 직접적으로 말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어차피 모두 섬세함이 부족한 공고남학생이고, 농구가 아니면 세심하기란 바닥에서 한참을 긁어모아야 얻을 수 있는 성질이었으니까.

"야한 꿈 베시."

"뭐?"

"야시시한 꿈을 투고했다 베시."

"이명헌 너, 드디어 농구하다 미친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잊을법한 꿈이고, 꿈을 꾸기 전에 읽었던 책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농구 외로 스트레스를 발산하지 못해 생긴 욕구불만이라던지. 하지만 입술을 내밀고 다리는 그에게 올린 채 힘없이 상체를 늘어트려 반절은 누운 자세로 성구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런 복잡한 심정을 누구에게 말해야 할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다. 몸을 기대고 발로 장난을 치고 있자니 쇠에 긁어내는듯한 소리를 담은 목소리가 현철의 몸보다 먼저 다가왔다.

"뭐 하냐 둘?"

"정성구가 내 끈적한 꿈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베시."

"야 너는 누가 들으면 오해할..!"

"부끄럽다..."

"이명헌!"

"베시이."

정성구는 의외로 타격감 좋다는 생각을 태연하게 하며 시선을 현철에게 돌린다. 성구가 다가왔을 때보다 더 낮은 시선. 좁은 어깨. 그럼에도 다부진 골격이 한눈에 들어온다. 신현철은 둘을 가만 바라보다 적당히 하고 들어오라며 머리를 마구 헝클어버린다. 동생이 있다고 했었나. 키도 훨씬 작은데 동갑내기인 남산만 한 남자 둘을 이런 식으로 애취급 하는 건 저 녀석뿐이었다. 어차피 전부 빡빡이라 흐트러질 머리카락도 없었다.

"신현철은 갑자기 나까지 애취급을..."

"원래 저런 성격 아니었냐 베시?"

"신현철이?"

"아, 야한 이야기 해서 좋아한 건가."

다시 질색하는 얼굴이 보여서 허벅지를 꾹 누른 채로 상체를 흔들었다. 반동에 난감하다는 듯이 끙 앓는 소리를 내는 성구가 즐겁게 느껴졌다. 몇 분 정도 실컷 성구를 놀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현철을 따라가듯 방문을 쥐었다.

"정성구 의외로 야한 이야기에 면역이 너무 없다."

이제는 조용해진 TV앞의 사람들이 보는 채널을 슬쩍 훔쳐본다. 품에는 전부 읽지 못한 잡지와 내용을 외우기 직전의 너덜 해진 잡지가 들려있었다.

방으로 들어가니 현철이 무릎에 아이싱을 하고 있었다. 연습 때 부상을 입었던가? 다가가 멋대로 그의 몸을 살피니 왜 그러냐는듯한 물음으로 받아들인 그가 입을 열었다. 성장통이래. 그렇게 말을 하니 다친 흔적 없는 반대편 무릎이 보였다. 현철이 직접 천을 감고 있는 무릎의 위. 그 위에 무언가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허벅지의 옅은 상처 자국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희미했다. 저건 예전에 생긴 상처일까? 거의 보이지 않는 흔적은 최근에 다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이스팩과 밴드를 감아내는 손에 보이지 않게 된 상처를 마찬가지로 생각에서 가리고 얼마나 더 크고 싶냐는 물음을 꺼냈다. 지금은 자신과 같은 포지션으로 연습을 하고 있는 그가 조금 더 키가 큰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해 본다. 분명 스몰 포워드나 어쩌면 파워 포워드도 잘 어울리겠지. 지금도 주전인 자신만큼은 아니더라도 연습량을 본다면 미래의 그는 충분히 자신의 공을 맡길만했다. 그래서 궁금했다. 어디까지 자신의 공을 보낼 수 있을까 하고.

"신현철. 나중에 감독님이 다른 포지션으로 보낼지도 모르겠다 베시."

"그럴지도."

"싫지 않다는 얼굴이다?"

"글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전부 하고 싶어서."

"의외의 대답이다, 베시."

"왜?"

"음... 하나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타입으로 보였으니까?"

"이명헌 너 은근 나 놀리는 거 좋아한다?"

"대놓고다 베시."

"짜식."

자신의 관찰은 틀림이 없었다. 지금 포지션에 미련이 없다는 것만이 의외랄까. 게다가 그의 연습량을 생각한다면 더욱. 주전인 자신만큼 연습량을 소화해 내는 1학년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번 1학년은 비교적 많은 1군 후보급이 들어왔다는 3학년 선배들의 안도하는 소리를 듣기야 했지만, 결국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자신의 곁에 남아있어야 의미가 있었다. 그렇기에 함께 입부한 동급생들을 유독 자세히 보곤 했던 이명헌에게 신현철의 모습을 표현하자면 집요함, 그 자체였다.

틀리면 다시, 몇 번이고. 체육관 청소가 끝나도 또다시. 그러다 문뜩 깨달음을 얻었는지 다음날 훌쩍 연습량의 두 배역량을 보이는 남자. 그러고 보니 입학식이 지나서 이제 몇 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키가 더 큰 것도 같다. 그러니 무릎이 아플 만도 하지. 앉아있는 그의 머리와 자신의 머리를 가늠하듯 이명헌의 손이 움직인다.

"아직 너보다는 작지만."

자존심이 상한 얼굴은 아니었다. 신현철은 이런 남자구나, 하고 알아가는 과정에 있던 명헌에게 지금의 얼굴은 꽤나 인상에 남았다. 미소가 열어둔 창문에서 퍼지는 여름의 바람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기숙사 주변의 풀내음이 섞인 기온이 높은 온도의 향기보다 더 따스했다. 그럼에도 시원스러웠다. 크게 퍼지는 입술의 모양이나 날카로운 눈매의 휘어짐이. 잠시 할 말을 잃은 사람처럼 명헌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근데 그 잡지는 뭐냐? 이명헌."

"선물로 받았다. 베시."

월간 농구야 다들 물고 빨고 보는 잡지라 익숙하겠지만 하나는 달랐다. 남성패션을 주로 다루는 영어로 제목이 적혀있는 잡지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챈 명헌은 별거 아니라는 말로 넘기려 했지만 오히려 그게 호기심을 부추겼다. 어깨를 으쓱이는 행동이 그런 것인지 아니면 늘 덤덤하고 생각이나 감정을 읽기 어려운 표정이 이명헌이라는 존재를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 아무도 명확하게 알지는 못했다.

"그러면 나중에 빌려줘라."

"어차피 방학때도 합숙훈련 하느라 봐도 못입을텐데, 베시."

"그건 이명헌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일부러 눈썹을 늘어트리고 표정을 뚱하게 바꾸니 현철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같은 빡빡이인 처지에 훈련도 함께 하는 동지다. 그럼에도 자신은 쏙 빠지겠다는 태도가 웃겼던 모양이지. 아까보다 더 크게 벌어지는 입술을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넣어보고 싶다는 충동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온다. 잡지들을 내려놓고 반대쪽 무릎에 밴드 감는 것을 돕는다. 차가운 팩을 고정시켜 주면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 위로 검은색 천이 둘러진다. 순간 손끝과 손등이 스쳤다. 시원한 감촉에 닿았던 손이라서일까, 그의 온기가 뜨겁게 느껴졌다.

무릎을 전부 감싸오는 밴드에서 손을 떼고 차갑게 식힌 젖은 수건을 그 위에 둘러주면 슬쩍 올린 시선이 마주했다. 간질거리는 손끝이 얼음 같은 천에 닿아있는데도 뜨거웠다. 심장이 손가락으로 옮겨진 것처럼 쿵쿵, 피가 몰린다. 처음 만났을 때도 이랬다. 기숙사 룸메이트라고 악수를 청했을 때 이상하게 손부터 몸이 터질 듯이 온도가 급격하게 올라가서, 감기에 걸렸나 고민할 정도였으니까.

자신보다 낮고 여리진 않지만 여전히 작은 몸이었다. 닿았을 때 골격이 주는 단단함은 확실하게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특별할 것은 없다고 느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니 그래서인가 더욱 기분이 요동쳤다. 졸업 전 감독의 방문으로 정해진 자신의 입부와는 달리 현철은 입부시험을 본 후에 정식으로 산왕공고 농구부의 소속이 되었다. 작은 키임에도 파워풀한 움직임. 힘을 버티는 뚝심. 늘 남을 바라보기를 좋아하는 이명헌에게도 그 작은 역동감에 눈을 못 떼는 순간이 있었다.

지금처럼. 이명헌에게는 이 상황이 아무런 맥락 없이 느껴지는 감정이라고 여겨졌다. 딱히 그가 무언가 특별한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도 신현철에게 타인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딘가 고장 난 사람처럼 반응하는 스스로가 낯설다. 왜,라는 의문을 가지다가도 일부러 외면하고 싶어서 눈을 돌린다. 꿇었던 무릎을 일으키고 명헌은 잘 자라는 말을 내뱉었다. 가만 자신을 바라보던 현철이 그 말에 정리를 시작한다. 아직 잘 시간이 아님에도. 잡지를 주워 들어 책상에 던져두고 기회가 되면 읽으려던 부분을 눈에 담으려 했다.

결국 이명헌은 잡지를 제대로 읽을 시간이 없이 침대에 누워야 했다. 머릿속에는 온통 자신이 적어 보낸 글이 맴돌았다. 그리고 풀벌레 소리보다 잠든 현철의 색색거리는 잠든 소리가 귀에 더 크게 들려왔다. 몽롱하게 잠에 빠지기 직전, 바르게 누웠던 몸을 벽으로 향하게 돌리고 얇은 이불을 품에 구겼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보다 여전히 그의 숨소리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

아침 연습에 가기 전에 잡지를 읽을까 생각하면서 몰아치는 잠기운에 취하기 시작하면 이명헌도 결국 조용히 잠에 든 현철처럼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날도 어김없이 명헌은 꿈을 꿨다. 평소에는 꿈이라는 것이 매우 엉뚱해서 앞뒤가 전혀 맞지 않고 이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비슷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이별하는 순간. 이별이라고 느낀 것은 자신의 몸이 너무도 무거웠기 때문도, 몸에서 짙은 피냄새가 나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가 자신에게 이별을 고하기 직전 행복했노라고 그리 인사하는 낯선 자신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대의 곁에서 늘 함께 하노라 맹세했으니, 지키겠습니다. 당신께서도 지켜야 합니다.'

그 말을 자신이 뱉는 감각과 함께 귀로 직접 듣고 난 직후가 지금까지의 꿈이 단순한 망상이나 무의식이 아니라 기억이었음을 자각한 순간이었다. 증거는 없어도 몸이, 마음이 그렇게 느꼈다. 명헌이 꾸던 단편적인 꿈이 자신과 같은 이름을 한 아주 먼 과거의 누군가의 역사의 파편들이었다. 소름 돋는 추억들은 아니었다. 다만 깨어나서도 곱씹을 정도로 생생할 정도의 기억들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유독 그 강렬함이 컸다.

꿈에서 이명헌은 자신의 신체가 평소와 많이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면 주변을 둘러본다. 그러면 늘 직접 가본 적이 없는 낯선 공간에 앉아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사위가 고요하다고 생각할 정도였지만 무거운 침묵은 아니었다. 아주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나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바람을 타고 흐르는 흙의 냄새와 나무의 냄새. 건물은 늘 말린 약초와 태우는 향의 냄새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여기까지는 똑같아서 오늘도 이 꿈이구나 하고 이명헌이 생각하면 익숙한 누군가가 다가온다. 커다란 몸, 근육으로 가득 채워진 체격. 대충 걸친 옷이 의미가 없다고 여길 정도로 굵은 골격. 거칠게 보이는 그 품에 이명헌의 의지와 관계없이 자신의 몸이 달려가 안긴다. 단단한 감촉을 만끽하면 자신의 부드러운 몸을 강하게 안아오는 힘이 버겁다. 하지만 아프지는 않아서 그대로 몸을 그에게 기대어 머리를 누른다. 포근한 기분이 온몸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이제 품에서 잠이 들거나 이야기를 이어가면 꿈이 깨겠구나 그렇게 생각한 명헌은 반쯤 감긴 눈으로 너른 품을 바라봤다. 그에게서 나는 희미한 진흙냄새가 자극적이었다. 코 안쪽을 간질이는 짙은 냄새가 불에 연소되는 향기와 섞여서 온몸을 감싼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전히 듣고 나면 누구의 목소린지 분간을 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듣는 순간만큼은 마치 머릿속까지 깊게 직접 소리를 내는 듯한 그런 울림을 느낀다.

반려여. 애정 어린 목소리가 자신을 부른다. 참으로 이상했다. 분명 자신의 속은 농구밖에 모르는 고등학생인데, 겉껍질은 여성이라고는 해도 안은 품에 마찬가지로 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충족되어 오는 감정이 몸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커다란 손이 허리를 감아온다. 자신에게 익숙한 몸보다 더 얇은 허리의 아래에는 골반이 발달한 둥근 엉덩이가 옷에 감춰져 있었다. 팔뚝이 그 아래로 뻗어 양다리를 들어 올려 붕 뜨는 감각에 자신의 손은 탄탄한 목을 감아낸다.

나무와 짐승의 가죽 따위로 만든 침대로 몸이 올라간다. 꿈에서 다시 잠이 들면 늘 깨곤 했기에 편안한 기분으로 느껴지는 모든 감각들을 받아내고 있었다. 두 개의 몸이 교차하듯 조악한 침대로 올라가면 가구가 푹 꺼져내려간다. 이제 잠에 들거라, 하는 평소라면 들을 목소리를 기다렸지만 잠에 들 기미가 없었다. 그 대신 풍만한 볼륨의 몸을 가린 천을 직접 잡아 벌려 다리 사이를 내보인다. 우악스럽게 둔부를 쥐는 손이 있었다. 이게 무슨 행위인가 깨닫고 나면 보드라운 손이 가슴께를 훤히 드러낸다. 경악할 시간도 없었다. 벌써 자신에게는 벅찰 만큼의 커다란 쾌감이 덮쳐왔으니까.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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