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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멧돼지는
첫사랑의 꿈을
꾸지 않는다
네버 | @n2vrmnd
※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지역을 기반으로 합니다.
바람이 살랑대고 꽃잎이 휘날리는 계절이 오면 명헌은 가끔 그 시절의 꿈을 꾼다. 알코올에 절어 제정신이 아니었던 그와 맨정신이지만 멀쩡하지는 않았던 남자. 바깥에는 따스한 햇살과 벚꽃잎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어둑한 방에서 불쾌한 체온과 땀방울에 젖어야만 했던 나날들. 두 개 세 개로 흩어지는 시야를 애써 겹쳐보려다 포기하고 눈을 감은 채, 몸에 닿아오는 손길을 감내하며 깊숙이 침잠하던 감각. 모든 행위가 끝나면 몸을 웅크리고 오래도록 숨을 참아보던 날의 꿈을. 눈을 뜬다. 어두운 방이 아닌 푸른 녹음이 끝도 없이 펼쳐진 자연이 그를 반겼다.
벚꽃과 목련, 철쭉이 탐스럽게 핀 풍경을 눈에 담다가 시원한 물을 들이키고 그는 마을을 내려다본다. 꼭 미니어처로 만든 풍경마냥 빨갛고 파랗고 알록달록한 지붕들이 보였다. 익숙한 기와지붕을 찾아보았으나 분명 마당에 있어야 할 몽실이가 보이지 않는다. 아마 또 제멋대로 산책을 나갔으리라. 목줄 없는 개가 꼬리를 살랑이며 마을을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누구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고, 빌라나 아파트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곳. 편의점이나 대형 마트에 가려면 버스를 타고 시내까지 나가야 하고, 가장 높은 집이 마을에서 제일 부자라는 백씨 아저씨가 최근 새하얗게 리모델링한 3층짜리 저택이 전부인 작은 시골 마을. 명헌은 이 작은 마을의 유일한 20대였다.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도시로의 청년 유출로 인해 40대가 총각이라 불릴 정도로 고령화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농촌에서 젊은 남자는 일종의 공공재다. 마을을 걸어 다니기만 해도 여기저기서 도움을 필요로하는 이들이 그를 붙잡는다. 도시에 사는 자식이 보낸 문자에 답장을 보내달라, 문고리가 고장 났으니 고쳐달라, 밭까지 비료를 다섯 포대나 옮겨달라. 그러면 명헌은 군소리 없이 그들을 도왔다. 가끔은 게임 속 NPC가 주는 퀘스트 같기도 했다. 그에 따른 보상이 갓 쪄낸 옥수수 한 소쿠리, 감자, 무슨 맛인지 당최 알 수 없는 과일 제리 같은 것이긴 했지만. 그는 가끔 아가라고 불리기도 했다. 덩치가 태산만 한 성인 남성이라 해도 그들의 입장에서는 갓난쟁이 같았으리라. 그를 불러다가 손에 젤리나 사탕을 하나씩 쥐여줬고, 심부름을 시킬때면 남는 돈으로 과자를 사 먹으라는 소리를 했다. 그렇게 받아온 거스름돈은 과자를 사 먹는 대신 마을 회관에서 받아온 돼지 저금통에 넣어, 칠이 벗겨진 3단 서랍장 위에 올려놨다. 돈을 모아봤자 딱히 쓸 곳도 없었지만, 그냥 그렇게 했다.
착한 사람들이다. 어디서 굴러들어 온 건지 출신도 신원도 불분명한 사람에게 밥도 주고, 있을 장소까지 제공해 주었으니. 외지인에게 폐쇄적인 농촌 커뮤니티의 특성치고는 후한 대접이었다. 아주 깊숙한 내부까지는 들어가지 못하지만.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다. 부르면 가고 아닐 때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삶. 그러니까, 목줄은 없어도 이름 적힌 목걸이는 차고 돌아다니는 몽실이처럼 말이다. 명헌은 제가 딱 그짝이라 생각했다.
어르신들이 부탁하는 대로 무엇이든 묵묵히 해주는 그였지만, 가끔은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는 법이다.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어디에 있어도 들키기 쉬웠다. 저기 마을 입구 평상에 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으면 할아버지들이 심부름을 시켰고, 집에 있으면 아무나 대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불쑥 안방에 들이닥치곤 했다. 그가 혼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오직 산뿐이다. 물론 산에도 어르신들이 등산을 온다든지 나물이나 삼을 캐러 오기는 했지만, 누구도 깊은 곳까지 들어가지는 않았다. 삐걱이는 관절에 사고라도 당하면 큰일이 날 테니까. 그래서 명헌은 혼자 있고 싶을 때마다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는 산속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다. 황씨 할아버지의 새끼 강아지를 도랑에서 건져주고 받아온 옥춘 하나를 물고 산을 올랐다. 값비싼 디저트 대신 싸구려 종합 제리나 옥춘, 달고나 따위에 입맛이 길들여진지 오래다. 명헌은 금방이라도 길을 잃어버릴 듯한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다. 누가 본다면 죽고 싶어서 환장했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당장 조난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아주 깊숙한 곳까지. 시퍼런 하늘이 가려질 정도로 나무가 빽빽한 곳에 들어서자 여린 울음소리가 그의 귀를 잡아챈다.
사람인가 짐승인가.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니 짐승임이 틀림없다. 바람이 불자 나뭇가지와 잎이 살랑거렸다. 명헌은 홀린 듯이 바람이 부는 곳으로, 짐승이 우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냥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청설모가 황급히 나무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바라보다 주변을 살핀다. 절벽 밑에 웬 갈색 털 뭉치가 웅크려 있다. 크기나 등의 무늬를 보아 새끼 고라니가 아닐까 싶었으나……가까이서 보니 무늬가 좀 다르다. 하얀 점박이가 아니라 줄무늬다.
"……멧돼지?"
몸을 웅크리고 애처롭게 몸을 떨면서 우는 짐승. 그것은 종종 보았던 고라니 따위가 아니라 멧돼지다. 아직 줄무늬도 안 사라진 어린 새끼 멧돼지. 이따금 어르신들에게 민가로 내려오는 멧돼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그냥 구전설화 쯤으로 생각했었다. 집채만 한 놈이 내려와 밭이며 농작물을 파헤치고 있는 걸 갈퀴와 괭이로 때려잡아 구워 먹었다나 뭐라나. 누린내 때문에 그날 온 동네에 소주가 다 거덜 났는데 그리 맛있지도 않더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명헌이었는데……눈앞에 보이는 건 명백한 멧돼지다. 하긴, 산에서 사는 녀석들이니까 마을로 내려오는 거겠지. 그는 차근차근 새끼 멧돼지의 상태와 주변을 살폈다. 야생 산짐승을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된다. 주변에 있을지 모르는 어미에게 공격당할 수도 있고, 반대로 인간의 냄새 때문에 새끼가 어미에게 버림받을 수도 있었다.
무릎을 굽혀 시야를 맞추니 멧돼지가 웅크린 몸을 벌떡 일으킨다. 정확히는 일으키려다 실패했다.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가 다시 일어서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다리를 유심히 살폈다. 상처의 모습을 보아하니 아마도 유해조수를 잡기 위한 덫에 걸린 모양이다. 안타까운 상황이었지만 명헌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당장 치료할 소독약이나 붕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녀석을 데리고 읍내의 동물병원에 갈 수도 없다. 치료 해 봤자 야생동물보호센터가 데려가 좁은 곳에서 사육하듯 가둬 키우다가, 좀 크면 다시 야생으로 돌려보내겠지. 어미도 가족도 없는 낯선 곳에. 그렇다고 상처 입고 우는 짐승을 모른 척 지나가기에는 영 찜찜하다. 너에게 해를 입히지 않겠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양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천천히 웅크린 녀석에게 다가간다. 저를 노려보는 멧돼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주머니에서 물병과 손수건을 꺼내고, 흙과 나뭇잎으로 엉망이 된 환부에 천천히 물을 부었다. 녀석이 고통스러운지 통증에 몸을 비틀고 운다. 명헌은 그 등을 어루만져 주는 대신 입술을 달싹였다.
"쉬. 괜찮아. 아프게 하려는 거 아니야 뿅."
착하지, 금방 끝나. 너 도와주는 거야 뿅. 말로 살살 달래보니 정말 사람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지 녀석이 얌전해진다. 한껏 날카롭게 치뜬 눈도 완만하게 바뀌어 꿈뻑거린다. 자신을 해치지 않으려는 의도를 기민하게 알아채는 듯싶었다. 물로 한차례 씻어내자, 털 사이로 빨갛게 드러난 속살이 보였다. 명헌은 손수건으로 상처 입은 다리를 감싸 묶었다. 자기 다리에 묶이는 새하얀 손수건의 존재를 알아차렸는지, 콧구멍을 씰룩대며 냄새를 맡던 작은 멧돼지가 그를 올려다본다. 새끼 멧돼지를 이렇게 가까이서 볼 기회가 언제 또 있을까. 녀석은 제법 귀여웠다. 통통한 몸이며 촉촉한 코, 작지만 반짝거리는 눈. 털 결을 만지고 싶은 욕구를 참고 있으려니 녀석이 명헌의 입가에서도 킁킁 코를 움직였다. 달달한 옥춘의 냄새라도 맡은 걸까. 어르신들이 여름철 기력을 잃은 개나 송아지에게 가끔 설탕물을 타서 먹이곤 했던 것을 떠올린 그는, 얼마 녹지 않아 여즉 커다란 옥춘을 뱉는다. 설탕물 대신은 못 되겠지만 그걸 손바닥에 올려 내밀자 멧돼지가 다가와 냄새를 맡고 조심스레 핥았다. 달큰한 맛이 제법 마음에 든 모양이다. 기어코 녀석은 사탕을 핥다 못해 날름 입에 넣고 삼켰다. 다행히 목에 걸리진 않았는지 더 달라는 듯 입맛을 다신다. 명헌이 굽혔던 무릎을 일으키고 흙을 털어냈다. 사탕은 이제 없어 뿅. 어미나 다른 성체가 오기 전에 새끼와 멀어져야 했다.
"앞으로는 다치지 말고. 잘 살아, 뿅."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왔던 길로 걸어가자, 뒤에서 작은 기척이 느껴진다. 녀석이 명헌을 따라오고 있었다. 짧은 보폭과 다친 다리로 절뚝이는 모습을 무시하고 더 빠르게 걸어가니 애처롭게 우는 소리를 낸다. 뒤를 돌아보자 녀석이 우뚝 멈추어 선다. 명헌이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다음에 또 올게. 그때 또 사탕 가져올 테니까, 저리 가 뿅."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녀석은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명헌은 제자리에 망부석처럼 서서 자신이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멧돼지를 힐끔, 바라보고 산을 내려갔다. 다음에 온다는 말은 물론 거짓말이다. 녀석도 어차피 한번 만난 인간 따위는 금방 잊을 거다. 그런데 왜 자꾸 촉촉하게 젖은 눈이 신경 쓰이는 건지……혹시 어미를 잃었나?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한 그가 마을로 들어서자 지금까지 어디 있었느냐며 동네 사람들이 말을 걸었다. 백씨 아저씨가 돼지를 한 마리 잡았으니 마을 회관에서 다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다. 산에서 본 멧돼지의 맑고 동그란 눈동자를 잠시 떠올리던 그는 고개를 주억이고 바비큐 그릴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생각했다. 어느새 저를 바라보던 작은 멧돼지는 머릿속에서 사라진 채였다.
*
여름이 왔다는 걸 알리듯 여기저기서 매미 우는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머리 위에서도, 저 멀리서도 시끄럽게 울었다. 명헌은 심부름을 하고 남은 거스름돈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슬리퍼를 끌었다. 손목에서 달랑거리는 까만 비닐봉지가 묵직하다.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살 걸 그랬나, 뿅. 입안에서 녹아내릴 차갑고 달콤한 맛을 그리워하며 마을 어귀를 향해 걸었다. 나무 그늘 밑에서 부채를 살랑살랑 부쳐가며 장기를 두는 어르신의 옆에 막걸리를 내려놓고 종이컵에 내용물을 따른다. 그걸 장기에 열중해 흥분한 이들에게 한잔씩 건넸다. 종이컵을 받아 든 할아버지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허허 웃는다.
"하이고, 안 덥드나?"
"할배는요?"
"내는 괘안타."
"저도 괜찮아요, 뿅.“
니도 한 잔 주까? 명헌이 고개를 저었다. 저 술 못하는 거 아시잖아요 뿅. 글나. 예의상 권한 말이었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시 장기판에 시선을 고정하기에 명헌이 그 뒤에 앉아 장기판을 본다. 어깨너머로 배운 게임이었지만 아마 여기 있는 누구보다도 그의 장기 실력이 가장 뛰어나리라. 할아버지의 뒤에 딱 붙어 훈수를 몇 번 두자 앞에 앉은 황씨 할아버지가 참다못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명허이, 니 저짝으로 안가나! 그러자 명헌이 눈을 끔뻑이며 슬슬 물러나 평상 가장자리로 엉덩이를 옮겼다. 아한테 와 소리를 질러쌌노! 매미 우는 소리와 할아버지들이 시끌벅적 언성을 높이는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뒤로 젖힌다. 나뭇잎이 습한 바람에 흔들린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사이로 비쳐 들어오는 햇빛의 편린을 노려보고 있으려니, 저 멀리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뒤로 한껏 젖혔던 고개를 원상 복구시키자 경찰차 한 대가 마을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익숙한 번호판과 꼬질한 범퍼를 보아하니 저 앞에 있는 파출소 차량이다.
"어르신들 잘 지내셨습니꺼~"
"어야, 여까지 먼 일잉교. 갸는 또 누고?"
경장이 차에서 내리자, 조수석에서도 누군가 그를 따라 내렸다. 커다란 발과 두꺼운 허벅지, 명헌은 끝도 없이 올라가는 시선에 속으로 내심 감탄을 내뱉는다. 거의 2m는 되지 않나 싶을 만큼 커다란 키에 두툼한 몸이 딱 맞는 제복에 감싸여 있었다. 저 몸이 대체 어떻게 작은 경찰차에 쏙 수납되어 있었지? 짧은 반팔 소맷단 밑으로 드러난 팔뚝에는 핏줄까지 선명하다. 사람이 아니라 무슨 곰 마냥. 그건 어르신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두던 장기도 멈추고 연신 감탄뿐이다. 이야, 등치가 장사고마. 니보다 더 크다 안카나? 명헌도 나름 어디 가면 제법 크다, 덩치가 좋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와는 비교조차 안 됐다. 명헌은 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것도 굉장히 젊은. 경장이 젊은 남자의 등을 두드렸다. 이짝이 오늘 막 발령받았다 안합니꺼. 인사 한번 싹 돌리러 왔심더.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깍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건 표준어다. 아주 오랜만에 들어보는.
"니는 거, 스울서 여까지 온기가?"
"나고 자란 고향은 여깁니다, 어르신. 부모님이 서울말을 쓰셔서요."
"글나. 이름이 머라꼬?"
"현철입니다. 신현철."
제 이름을 밝힌 현철이 사람 좋게 웃었다. 그 밑의 두꺼운 목이나 어깨너비는 아무리 봐도 이런 시골 마을 파출소가 아니라 강력계에 들어가야 할 인재다. 마약전담반, 그런 거. 한걸음 뒤로 물러나 현철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경장이 명헌에게 물었다. 니는 인사 안 하나? 나이도 비슷허이 둘이 같이 좀 댕기라. 결국 관찰하던 시선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 다가가 보니 현철의 덩치가 더 커 보인다.
"이명헌이요, 뿅."
"신현철입니다."
손을 내밀자 크고 투박한 손이 맞잡아 온다. 가벼운 악수 이후 손을 놓으려던 명헌이 멈칫했다. 강한 손아귀 힘이 그의 손을 꽉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놓아 줄 생각이 없다는 것처럼. 설핏 눈썹을 찌푸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 힘이 풀리고 손이 떨어져 나간다. 기분 탓이었나 싶을 정도로 담백하게 손을 빼낸 현철의 곁으로 경장이 다가왔다. 저보다 훨씬 큰 덩치의 어깨에 가까스로 손을 올리곤 두드린다. 이제 다른 사람들한테도 소개하러 가 보겠다나. 차는 여기 세워두고 걸어가려 하기에 명헌은 안녕히 가시라며 고개를 꾸벅였다. 다시 그늘 밑에 들어가 푸른 하늘이나 감상할 셈이었다. 평상에 주저앉기 전, 현철이 말을 걸지만 않았더라면.
"명헌 씨가 같이 가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뿅? 명헌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오지랖 넓은 어르신들도 끼어들었다. 그게 좋겠다면서. 둘이 이 마을의 유일한 또래니까, 같이 다니면서 젊은 친구들끼리 친해지라는 거였다. 어느새 경장은 명헌 대신 평상에 앉아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명헌은 울며 겨자 먹기로 오늘 처음 보는 순경과 예정에도 없는 마을 한 바퀴를 돌게 된 거다. 마을 쪽으로 걸으며 흘긋 현철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그는 왜 도시로 안 올라가고 이런 촌구석 작은 파출소에 들어온 걸까? 경장처럼 나이가 들었으니 여유롭게 지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닐 테고, 늘 투덜대고 불친절한 김순경처럼 윗선에 잘못 보여 좌천당한 것도 아닌데. 아무리 고향이라지만, 시험에 합격해 놓고 식구가 그를 포함해 총 셋밖에 안 되는 파출소에 제 발로 들어오는 청년이 세상에 어디 있다는 말인가.
"왜 서울 안 올라가고 굳이 여기로? 뿅."
"도시는 팍팍하고 정이 없어서."
"그건 편견 아닌가 뿅."
"어, 발끈하네. 혹시 도시에서 왔나?"
가만히 듣다 보니 어째 말이 좀 짧다. 운동화 코로 괜히 돌멩이를 차서 날리던 명헌이 우뚝 멈춰서 현철을 돌아본다.
"자연스럽게 말을 놓네용?"
"그쪽이 먼저 놨으니까. 뭐, 다시 존댓말 해드릴까요?"
그리 길지는 않은 아이컨택이 이어졌다. 이거 만만찮은 놈이구나.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바람 빠지듯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아까보다는 느린 속도로, 한걸음 뒤에서 걸어오는 현철의 보폭을 맞춰 나란히 걸었다. 나이가 몇이에용? 현철이 대꾸한다. 명헌 씨랑 대충 비슷해요. 어쩐지 뭉뚱그려 대답하는 것 같다. 나이를 알려주고 싶지 않은 걸까. 그가 씩 웃었다. 왜요? 꼰대도 아니고, 나이가 뭐 중요한가. 그 뻔뻔스러움에 명헌은 혀를 내두른다. 진짜 하나도 안 지는구나 뿅. 어르신들 앞에서 봤던 깍듯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결국 서로 정확한 나이도 모른 채, 편하게 말을 놓기로 합의를 봤다. 어차피 그 역시 마을의 누구에게도 나이를 정확히 밝힌 적이 없었다. 그러니 피차일반이다.
명헌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동네 슈퍼 앞이라든지, 그늘 밑 평상 따위를 쏙쏙 골라 찾아다니며 현철을 소개했다. 파출소에 새로 들어온 신입 순경. 그것도 새파랗게 어리고 커다란. 뉴페이스에 대한 관심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특히 할머니들한테서. 이야, 니는 저기 천하장사를 해도 되것다. 단단한 팔뚝을 두드리듯 만지고 더듬는 손길은 이제 익숙할 지경이다. 어째 옆이 허전하다 싶더라니, 명헌은 그새 할머니들과 함께 평상에 둘러앉아 옥수수수염을 떼고 있었다. 현철은 가만히 그걸 바라봤다. 저보다는 아니지만 크고 두툼한 손으로 옥수수를 다듬는 솜씨가 제법 익숙해 보인다. 결국 현철도 그 커다란 덩치를 구겨 앉아 옥수수를 손에 쥐었다. 아따 니도 손은 참 야무지다잉. 자연스럽게 섞여 웃고 떠들다 정신을 차려보니, 파출소 식구들과 먹으라며 한가득 챙겨준 옥수수 봉다리 두 개를 손에 들고 있더라. 명헌이 뒷짐을 지고 고개를 까딱했다. 가자, 뿅.
크지 않은 마을이라 그런가. 슬렁슬렁 돌아다니며 어르신들 사이에 끼어들어 수박도 얻어먹고, 토마토 한 봉지를 얻고, 아이스크림까지 하나씩 쪽쪽 빨며 다시 마을 어귀로 걸어왔는데 아직 해가 쨍쨍하다. 빈손으로 갔는데 현철도 명헌도 두 손이 묵직하다. 경찰차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데 경장은 어딜 갔나 살펴보니, 이젠 장기가 아니라 화투판으로 번진 평상에 앉아 있더라. 신나게 고도리를 외치던 경장이 현철을 발견하곤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투쯤이야 돈을 건 것도 아니니 괜찮다는 게 그의 모토였다. 명헌은 차에 올라타는 그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 현철에게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마을 밖으로는 잘 나가지 않는 그였기에, 어차피 그렇게 자주 볼 일은 없을거라 생각하면서. 털 때문에 더위를 많이 타는 몽실이 집에 얼린 페트병을 하나 더 놔주기 위해 집으로 돌아간다.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몽실이 집을 들여다본다. 파란 페인트로 칠한 조금 커다란 집 안에 몽실이가 들어가 혀를 내밀고 숨을 헥헥 쉬고 있었다. 많이 더웠구나. 손을 뻗어 곱슬한 털을 쓰다듬는다. 미리 얼려둔 페트병을 꺼내오자 이장님이 담벼락 너머로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명허이. 니 이따 회관으로 온나."
"……왜용?"
"신순경 환영회를 거서 하것단다."
"표옹……."
"느 환장허는 치킨 사오라캣다. 꼬추 머시기."
"저녁에 갈게요 뿅."
공짜 치킨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장님은 담벼락 위로 불쑥 올라왔던 것처럼 다시 밑으로 사라져 유유히 걸어갔다. 키도 작은 양반이 어떻게 그렇게 올라오는 건지 모르겠다. 명헌은 비어있는 밥그릇에 사료를 채우고 물까지 새로 갈아준 뒤, 선풍기를 틀고 마루에 누웠다. 어느새 옆으로 올라온 몽실이의 털을 쓰다듬는다. 내일은 꼭 깔끔하게 밀어줘야겠다고 다짐하며,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할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얻어먹은 수박 말고는 텅 비어있는 위장에 치킨을 열심히 쑤셔 넣을 요량으로 마을회관에 들어서자, 왁자지껄한 가운데 텅 빈 현철의 옆자리가 보인다. 누가 봐도 일부러 비워놓은 듯한 모양새다. 또 젊은 친구들끼리 같이 앉으라는 배려였으리라. 터벅터벅 걸어가 그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갓 부임한 신입의 술잔에 알코올이 한가득 부어진다. 경장과 김순경이 번갈아 가며 잔을 채웠다. 상 위에 늘어진 온갖 종류의 주종 대신 명헌은 차가운 콜라를 홀짝였다. 현철이 곰 같은 손으로 넙죽넙죽 술을 받아 마시는 모습을 구경한다. 술을 마셔보는 건 처음이라더니 거부감 없이 물처럼 술술 넘기는 모습이 제법 호쾌하다. 평범한 소주잔도 그의 손에 들리니 저렇게 작았나 싶을 정도로 미니어처 같았다. 페이스 조절도 없이 그는 계속해서 잔을 비웠다. 안주는 손도 안 댄 것 같은데, 어느새 주변에 빈 소주병이 쌓여간다. 명헌은 날개를 뜯으며 다시 술을 권하는 김순경을 바라봤다. 그 고약한 성격이 어디 가겠나. 문득 현철이 치킨 뼈를 발라내는 명헌을 돌아보더니, 그의 앞에 놓인 콜라를 보고 묻는다.
"넌 안 마셔?"
명헌의 손이 순간 멈췄다가 이내 다시 움직인다. 순수한 의문을 담은 질문이었으나, 잘못이라면 앞에 앉은 이가 잘못된 거겠지. 김순경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비아냥거리듯 끼어들었다.
"저놈은 죽어도 안 마실걸. 비싼 몸이라."
현철이 잠시 김순경 쪽을 바라봤다. 제법 시뻘게진 얼굴을 보아하니 저쪽은 이미 취한 모양이다. 경장은 이미 이장님 옆에 앉아 비싼 인삼주를 얻어 마시며 수다를 떠느라 이쪽에 관심이 없었다. 저 혼자 무어라 중얼거리던 김순경이 잔을 내밀었다. 새 잔도 아니고, 본인이 마시던 잔이다. 소주가 찰랑이다 흘러넘쳐 손을 적셨다. 명헌은 그걸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한참이 지나도 받을 생각이 없으니, 그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언성을 높이기 시작한다.
"한 모금이라도 마시면 죽냐? 어?"
씨바 거 존나 비싸게 굴어요. 그럼에도 여전히 명헌은 묵묵부답이다. 그 사이에 낀 현철은 관찰하듯 두 사람을 살폈다. 한 명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허연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고, 한 명은 제 성질을 못 이겨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빠르게 내뱉고. 저거 무시하는 거 봐라. 내가 우습냐? 야, 내가 우습냐고. 니가 뭔데 날 무시해? 자기가 예전에는 얼마나 잘나갔는지 아냐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하기에 명헌이 작게 한숨을 내쉬자, 불쑥 그 사이로 손이 뻗어져 나온다. 현철의 손이다. 그가 김순경이 내민 소주잔을 빼앗아 들고 목으로 넘겼다.
"오늘 제 환영회 아닙니까? 안 마시겠다는데 그냥 저 주세요."
아무렇지도 않게 잔을 빼앗아 원샷해놓고 명헌의 쪽은 바라보지도 않는다. 마치 김순경과 그의 사이를 가로막는 것처럼 커다란 덩치를 앞으로 숙여 기다란 교자상 가까이에 붙는다. 못해도 현철이 김순경의 배는 마셨을 텐데 얼굴색 하나 변함없이 멀쩡하다. 술독에 빠트려 죽이려는 것처럼 한잔, 두잔, 쌓여가는 병이 무섭도록 늘어난다. 소주가 떨어지니 맥주를 까고, 막걸리도 섞고, 저기 김씨 할머니가 복분자주를 꺼내오고……흔들거리다 기어코 쿵! 밥상에 머리를 박는다. 접시가 들썩이고 잔이 떨어져 바닥을 적신다. 쓰러진 건 당연히 김순경이다. 요란한 소리에 어르신 몇 분이 이쪽을 돌아봤다. 하이고, 저놈 또 저러고 잔다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알딸딸하게 취한 경장이 현철에게 고갯짓했다. 쩌어기 방에 눕혀놔라. 현철이 벌떡 일어나 그를 부축해서 방에 던져놓고 돌아왔다.
귀찮게 굴던 시끄러운 놈이 사라지자 명헌의 주변은 금세 조용해졌다. 본인 몫의 치킨을 다 먹고 남은 콜라나 홀짝이던 그의 옆에 현철이 털썩 주저앉는다. 각 잡힌 새 제복이 그새 구깃해졌다. 그렇게 미친 듯이 받아먹더니 이제야 술기운이 도는지 그가 한 손으로 상을 꽉 쥔다. 얼굴은 티가 안 나는데 목덜미와 귀가 벌겋다. 바보 같아. 명헌이 물을 한 잔 건네자 그걸 그대로 마셨다. 의심 한번 없이. 김순경은 방에 들어가 죽어있고, 경장과 이장님도 얼큰하게 취해 이장님댁 말벌주를 마시러 간다고 나갔다. 자연스럽게 파하는 분위기에 어르신들을 배웅하고 나니 남은 건 둘 뿐이다. 귀찮은데 내일 치울까, 뿅. 다시 자리로 돌아온 명헌이 털썩 주저앉으며 그렇게 말하자, 남은 오징어 다리를 질겅질겅 씹던 현철이 물었다.
"말끝에 뿅, 그건 왜 붙이는 거야?"
"무서워 보일까 봐. 친절해 보이려고용."
"영화 대사 같네."
금자씨는 친절해 보일까 봐 그런 거였지만. 명헌도 오징어를 입에 물었다. 입맛을 다시던 현철은 명헌이 마시던 콜라나 따라 마셨다. 애매하게 남은 소주는 물잔에다 버렸다. 술을 버리는 기술 따위는 누가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더라. 탄산이 다 빠져 미지근한 콜라를 한 모금 마시면서 경장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린다. 그러니까, 명헌이 이 마을에 처음 왔을 때의 이야기를. 몇 년 전 터미널 주변을 배회하는 수상쩍은 남자가 있다는 신고에 출동해 보니 그가 있었다고 한다. 관광지도 없고, 그렇다고 볼만한 바다나 계곡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깡촌인 여기는 젊은 사람이 여행도 잘 오지 않는 지역이다. 덥수룩한 머리에 덩치 큰 남자가 서성대니 어르신들로서는 무서웠을 수밖에. 작은 짐가방을 품에 안은 채 마스크에 모자까지 푹 눌러쓰고. 꼭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주변을 둘러보면서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이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혹시 범죄자일까 싶어 그대로 파출소로 끌고 갔다고.
그러나 신원조회를 해보고 이것저것 조사를 해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실종 신고가 된 것도 아니고, 집이 어디냐고 물어도 묵묵부답이다. 사지 멀쩡한 성인 남성에,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 그대로 귀가를 권유하면 됐을 텐데 어째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고 한다. 돌아갈 차비가 없느냐. 고개를 내젓는다. 그럼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거냐. 그렇게 물으니 그냥 고개를 푹 숙였다. 분명 무언가 사정이 있는 사람 같아서 우선 저녁밥이라도 먹이려 했더니 시켜준 국밥엔 손도 안 대고, 그냥 의자에 파묻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그러다 마침 파출소에 들른 이장님이 그를 보게 된 거다. 무슨 사정인지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대뜸 이렇게 물었단다. 니, 갈 데 없나?
그럼 우리 집으로 가자며 그대로 데려갔다나. 아무리 그래도 타지에서 온 외지인을 갑자기 집에 데려가다니. 안 그래도 힘없는 노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경장은 수시로 마을에, 특히나 이장님 댁에 자주 들렀다고 한다. 그러나 목덜미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아주 짧게 밀어버리고, 누군가의 몸빼 바지를 주워 입은 채 잡초를 뽑는 모습을 보고 의심을 거두었다. 파출소에서 마주한 죽은 눈이 뿌리까지 뽑힌 잡초를 보고 반짝이고 있었으며, 퍼석하게 마른 피부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장님이 그걸 보면서 흐뭇하게 웃는 광경을 보니 정말 괜찮겠구나 싶어졌다고. 그렇게 명헌은 이 마을의 일원이 됐다.
질긴 오징어 다리를 되새김질하듯 씹는 그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그는 왜 그런 모습으로 터미널을 서성였을까? 왜 연고도 없는 지역까지 내려온 걸까? 그 이유는 마을의 누구도 모른다. 이장님까지도. 그에겐 분명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을 사정이 있을 거다. 가족이든 직장이든 연인이든 그게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으리라.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는 유명한 얘기도 있지 않나. 그가 그렇게 도망쳐 준 덕분에 이런 인연이 생기기도 한 거고……갑자기 취기와 졸음이 몰려오는 것만 같아서, 현철이 주르륵 미끄러지듯 몸을 뉘었다. 명헌도 물을 한 잔 벌컥 들이키고는 벌렁 뒤로 누웠다. 옆으로 몸을 빙글, 돌려 현철의 얼굴을 바라본다.
"여기서 그냥 자려고, 뿅.?
"안잔다. 잠깐 누워있는 거야……."
그런 것 치고는 목소리가 점점 느릿해진다. 누가 봐도 갑자기 취한 사람이다. 눈까지 감더니 점차 숨소리가 안정적으로 바뀌어갔다. 일정하고 커다란 숨소리를 들으며 명헌은 그의 코를, 입술을, 감긴 눈꺼풀을, 크게 오르내리는 가슴팍을 하나씩 찬찬히 뜯어본다. 이상하게 입 안이 쓰다. 졸린 것 같기도 했고. 숨을 내뱉으니 미약하지만 알코올 냄새가 났다. 설마, 하는 생각에 침을 꿀꺽 삼킨다. 방금 원샷했던 물은 자신의 것이었던가? 힐끔 눈을 굴려 상 위를 바라보니 물이 가득 차 있는 컵이 보인다. 그는 현철의 물을 마신 거다. 소주를 버렸던 그 물을. 발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오기 시작한 간질거리는 감각이 어느새 아랫배를 가득 메웠다. 이대로 마을회관에서 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유일한 방에는 김순경이 잠들어 있었고. 거기로 가느니 차라리 여기가 나을 것이다. 어차피 현철도 잠들었는데 뭐가 대수일까. 묵직해지는 상체를 내려다볼 생각도 못 하고 명헌은 눈을 감았다. 눈을 뜨면 다시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와 있을 거다. 그래야만 했다. 눈을 감고 숨을 참았다. 고로롱, 깊게 잠든 현철의 소리를 들으며 그 역시 정신을 잃듯 잠에 빠져들었다.
끔뻑. 명헌이 잠들자 이번에는 현철이 눈을 떴다. 언제 잠들었더라. 잠결에 손을 뻗어 주변을 더듬는데, 그의 커다란 손아귀에 물컹한 뭔가가 잡혔다. 묵직한 양감이 손바닥 밑으로 생경했다. 손이 상당히 큰 편인데도 손가락 사이로 흘러넘칠 것만 같았다. 물이 가득 들어찬 물풍선을 만지는 것 같기도 하고, 무게는 모래주머니 같기도 하고……어쨌거나 크고 부드러웠다. 이상할 정도로. 대체 이 말랑거리는 물건의 정체가 뭔지 그가 가늘게 눈을 뜬다. 상이 맺히지 않아 흐릿한 눈을 최대한 찡그려본다. 눈앞에는 명헌이 있었다. 천천히 시선을 옮긴다. 명헌의 목 밑으로 흉근이라고는 부르기 힘들 정도로 크게 부푼 가슴이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걸 터질 듯 쥐고 있는 건 자신의 손이었고. 화들짝 놀라 손을 뗀 현철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직도 부드런 감촉이 느껴지는 것만 같은 손바닥을 한번, 옆으로 몸을 웅크리듯 누운 명헌을 한 번씩 번갈아 가며 내려다본다. 분명 아까랑 똑같은 빡빡머리인데. 같은 사람인데……왜 가슴이 달렸지? 어쩐지 몸집이 조금 왜소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평범한 반팔 티셔츠의 그래픽이 찢어질 듯 늘어나 있는 부분을 빤히 바라본다. 명헌이 몸을 뒤척이자 고정해줄 것 없는 가슴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현철이 다시 벌렁 드러눕고 눈을 감았다. 내가 진짜 취했는가 보다. 꿈이네, 이거. 그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게 아니고서야 멀쩡한 남자한테 갑자기 가슴이 생길 리가 있나. 그는 눈을 꾹 감고 양손을 모아 얌전히 가슴 위로 올렸다. 잠이 오지 않아 몇 시간이나 눈만 감고 있다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닭 우는 소리에 다시 번쩍 눈을 떴다. 옆을 바라보니 여전히 명헌이 잠들어 있었다. 부드럽고 풍만한 가슴이 아니라, 납작하고 판판한 가슴을 가진 채로.
간밤에 보았던 건 대체 뭐였을까. 명헌이 여기까지 내려온 이유는 설마……세수하는 현철의 등 뒤로 김순경이 요란하게 뛰쳐들어와 변기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의 등을 아프게 두들겨 주면서도 현철의 머릿속에는 오직 이명헌만이 가득했다. 늘 그랬듯이.
*
아무리 할 일이 없는 평화로운 마을이라지만, 순경이 저렇게 자주 파출소를 비우고 놀러 나와도 되는 건가. 명헌은 털이 밀려 민둥해진 몽실이의 맨들한 등을 쓰다듬으며 현철을 올려다봤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수박이 들려있었다. 손님맞이를 해주고 싶어도 차가운 물과 얼음이 담긴 대야에 발을 넣고 앉아있는 상태에, 허벅지 위에 몽실이가 잠들어 있는 터라 일어날 수가 없었다. 명헌이 엉덩이를 들썩이자 손짓으로 만류한 현철이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주방 좀 빌린다?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더니 그가 콧노래를 부르며 주방으로 들어가 수박을 손질했다.
"넌 할 일도 없어 뿅?"
"일하잖아. 마을 순찰."
"양심까지 없다 뿅……."
한참 후에 커다란 락앤락 통에 깍둑썰기한 수박을 담아와 포크로 찍어 명헌에게 내민다. 그걸 받아 들고 입에 넣었다. 잘 익은 모양인지 당도가 높다. 푸석하지도 않았고. 씨 없는 수박인가 싶어 통을 내려다보니 씨를 죄다 발라낸 것 같다. 수박씨를 싫어하나? 왜 이렇게까지 한 건지는 모르겠다. 둘이 같이 앉아 수박을 퍼먹고 있으려니, 몽실이가 코를 킁킁대며 눈을 떴다. 입이 찢어져라 하품하는 얼굴을 바라보는데, 옆에 앉은 현철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명헌의 허벅지에서 벌떡 일어나 황급히 밑으로 뛰어 내려갔다. 몽실이는 늘 저랬다.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는 녀석이건만 이상하게 현철만 보면 무서워하는 것처럼 꼬리를 말고 집에 들어가 눈치를 본다. 덩치가 커서? 그럴 리는 없고. 얼굴이 험악하게 생겨서? 도깨비라는 별명이 붙은 할아버지를 봐도 좋다고 꼬리를 치던 녀석이다. 아니면 현철이 저를 버리고 간 전 주인과 비슷하게 생겼다든지. 이쪽이 신빙성 있는 가설이긴 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뭐, 저보다 무서운 짐승 말곤 더 있나.
"너 사실 호랑이지 뿅."
"쑥이랑 마늘을 좋아하긴 해."
현철이 입맛을 쩝 다셨다. 얌마, 내가 간식을 그렇게 사다 바쳤는데 섭섭하게. 물론 정말 섭섭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평소 몽실이가 자기를 무서워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 굴었으므로. 명헌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관찰했다. 얼음물에 발을 담그고 그늘 밑에 있는 자신의 이마에는 그새 땀이 송골송골 맺혔는데, 제복을 단정히 챙겨입고 있는 현철은 땀 한 방울 없이 뽀송하다. 땀이 없는 관상이 아닌데 말이다. 그는 유독 땀을 흘리지 않았다. 더위는 보통 사람들처럼 타는 편인데도. 수상한 신현철. 더 수상한 점은, 이상하게 자신한테 잘해준다는 점이다. 유일한 또래 친구라서? 명헌은 제 이마의 땀을 닦아내는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뜬다. 어떤 친구가 이런 짓을 하냐고.
소고기를 받았는데 같이 먹자던지, 치킨을 사 들고 온다든지, 어르신들을 도와주러 포대를 들고 가면 어느새 나타나서 자기가 대신 들어주기도 했다. 명헌이 연약한 편도 아니고 혼자 쌀 포대 4개는 거뜬히 들어 올리는 힘을 가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소고기가 가장 의심스러웠다. 돼지고기는 몰라도 소고기는 사심의 영역이라던데. 파출소에서 마을을 계속 오가며 어르신들께 눈도장을 단단히 찍고, 명헌의 작은 집을 제집처럼 드나들고. 자주 웃어주고 같이 밥도 먹고 틈만 나면 노닥거리고……대야에서 발을 빼내고 옆에 둔 수건을 찾으니 현철이 밑으로 내려가 자기가 발을 닦아준다. 명헌은 눈치가 빠르다. 친구는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현철은 나를 왜 좋아할까. 어쩌다 좋아하게 됐을까. 잘 대해 준 적이 없는데. 이것이 요근래 명헌의 고민이었다. 그는 누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해도 받아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기를 닦아내는 현철의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그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
갑자기 뭐가 뿅? 되물어 보니 현철이 수건을 치우고 맨발을 손으로 감싼다. 아니, 좀 슬퍼 보여서. 명헌이 잠시 입술을 꾹 물었다가 놓았다. 잘못 본 거겠지, 뿅. 언제나와 같은 얼굴을 해본다. 내가 평소에 어떤 얼굴을 했더라? 꿈틀거리는 안면 근육을 올려다보던 현철이 손을 뻗는다. 차마 손바닥으로는 닿지 못하고 손등으로 명헌의 뺨을 쓸어내렸다.
"너는 어떻게 하면 웃냐?"
"나 잘 웃는데 뿅."
"거짓말."
분위기가 미묘해지기 시작한다. 뒤쪽도 앞쪽도 도망갈 곳은 없다. 명헌이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그때 어디선가 아이고, 아이고! 하는 비명이 들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리가 들린 곳을 기민하게 알아챈 현철이 먼저 달려 나가니, 명헌 역시 대충 슬리퍼를 구겨 신고 그 뒤를 따라나섰다. 어떻게 알았는지 현철은 밭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허리를 붙들고 있는 할머니를 부축하고 있었다. 어르신, 무슨 일이에요?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린다며 가슴을 쥐던 어르신이 띄엄띄엄 설명했다. 멧돼지가 저기 서 있었다는 거다. 멧돼지라고? 그것보다 시급한 건 우선 어르신이다. 놀라 넘어지면서 허리를 다친 건지 제대로 등을 피지 못하고 계셨기에 명헌은 우선 이장님댁으로 달려갔다. 이장님, 다마스 좀 빌릴게요 뿅! 한가롭게 텃밭에서 방울토마토를 따던 이장님까지 따라 나와, 할머니를 업은 현철과 함께 넷이서 시내의 종합병원으로 향했다.
"엑스레이상으로 골절은 없으시고요. 급성 요추염좌, 그러니까 놀라서 삐끗하셨어요. 약은 3일 치 지어드릴 테니 물리치료 꼬박꼬박 받으시면 되겠습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다. 간호사가 할머니를 물리치료실로 안내하는 것까지 지켜본 현철이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할머니에게 멧돼지가 나왔다던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듣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아마 119나 야생동물보호협회에 연락을 취해야 하기 때문일 거다. 물리치료가 끝난 할머니와 함께 마을로 돌아오니, 마침 경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말로는 글쎄 멧돼지가 이 마을에만 나타난 게 아니란다. 각 마을에 동시다발적으로 목격 신고가 있었다고 했다. 그동안 이런 적이 없었기에 협회에서도 비상이 걸려 지자체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한다나. 끝까지 듣지 못하고 할머니를 댁으로 모셔다드리니 이장님의 방송이 흘러나온다.
아아. 거시기, 현재 멧돼지들이 출몰하고 있사오니, 밤에는 외출하지 말고, 만약 낮에 마주친 경우에는……
할머니가 이부자리에 누워 곡소리를 내다가 명헌의 손을 한번 꽉 잡는다. 참말로 고맙데이. 그가 고개를 내저으니 한숨을 푹 쉰다. 뭔가 이상하다는 거다. 근 몇십 년간 보인 적이 없었던 멧돼지가 갑자기 한 번에 내려오는 것도 이상한데, 밭을 파헤치거나 사료를 훔쳐먹지도 않고 뭔가를 찾는 것처럼 둘러보다가 돌아갔다고 한다. 멧돼지의 습성이 어떤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보통 야생 동물이 민가를 습격할 때는 먹을 것이 없을 때가 아니던가. 집으로 돌아가서 몽실이의 귀와 턱을 긁어주며 당부했다. 멧돼지가 내려오면 맞서 싸우지 말고 도망가야 해, 뿅. 활기차게 멍! 하고 짖었으나 정말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마을 곳곳, 특히 산에서 내려오는 지역과 밭에 포획틀이 설치되고 파출소에서도 순찰을 강화했다. 이장님과 명헌도 마을을 틈틈이 돌아다니며 확인하기로 했다. 그런데 제법 똑똑한 모양인지 멀리서 멧돼지를 목격했다는 제보는 들어오는데 단 한 마리도 포획틀에 잡히지 않는다. 이쯤 되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조차 이거 정말 뭔가 이상하구나 생각하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인간이나 농작물에 해를 입힐 생각이 없고, 하나같이 뭔가를 찾고 있었다. 그게 대체 뭘까? 동물과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너희도 말을 할 줄 알면 좋을 텐데. 엎드려 있던 몽실이의 귀가 쫑긋, 하더니 고개를 들고 담 너머를 바라본다. 익숙한 두상이 보였다. 현철이다.
명헌이 대문을 열고 나가자 현철이 왜 나왔냐는 듯 들어가라 손짓했다. 그는 가볍게 무시하고 현철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여전히 제복 차림인 걸 보아하니 이 야밤에 순찰을 도는 중인가 보다. 밤길은 위험하니 들어가서 자라며 그가 명헌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당 떨어지지 않냐 뿅."
"어, 죽겠다."
"사탕 줄까?"
현철이 고개를 끄덕이기에 명헌은 잠시 집에 들어갔다 나온다. 그의 손에 들린 건 투명한 원형 플라스틱 통이었는데, 그 안에서 알록달록하고 커다란 사탕을 두 개 꺼냈다. 옥춘이다. 평소 주전부리를 사놓지 않아 이것밖에 없었다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하더니, 본인이 먼저 그걸 한입에 집어넣는다. 현철은 물끄러미 손바닥 위에 올려진 옥춘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더니 하, 헛웃음에 가까운 웃음을 터트렸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푱?"
"……아냐, 됐어."
불룩 튀어나온 볼을 찔러볼까 하다가 똑같이 사탕을 한입에 넣었다. 워낙 커다란 사탕이라 넣기만 해도 입에 가득 들어찬다. 자기는 마저 돌아볼 테니 자러 가라며 그가 가던 길을 걸어간다. 명헌은 가만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뒤를 밟았다. 어차피 잠이 오지도 않았으므로. 몰래 따라가다 놀래켜야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발걸음 소리를 죽인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현철이 점점 산길로 들어가고 있었다. 산 밑에 설치해 둔 포획틀을 보러 가는 건가? 싶었는데 포획틀엔 눈길도 주지 않고 산으로 올라갔다. 한밤중의 산은 어둡다 못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입고 있는 조끼가 야광으로 빛나서 길을 잃지 않고 그 뒤를 따라갈 수 있었다. 대체 이 야밤에 왜 산을 오르는 걸까? 그가 우뚝 멈춰서기에 명헌 역시 커다란 나무 뒤에 몸을 숨긴다. 눈만 빼꼼 내놓고 그쪽을 바라보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가……천천히 옷을 벗었다.
조끼를 벗고, 셔츠를 벗고, 바지에 이어 속옷까지. 곱게 개켜 옆에 내려놓고 완전한 나신이 되어 우뚝 서 있다. 명헌은 입이 떡 벌어지려는 것을 애써 손으로 막았다. 현철이 변태였다니 뿅……. 경찰이 이래도 되는 거야? 혹시 노출 욕구를 밤에 이런 곳에서 채우는 걸까. 보면 안 되는 비밀을 본 것만 같아서 기분이 미묘해지려 하던 그때, 펑! 소리와 함께 안개가 깔렸다. 안개가 사라지고 달빛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멧돼지다. 커다랗고, 송곳니가 날카로운 멧돼지. 신현철이 사라졌다. 적어도 명헌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상식적으로 인간이 멧돼지가 될 리가 없지 않나. 그러나 그런 기대는 이내 산산조각났다. 멧돼지가 말을 했다. 다름 아닌 현철의 목소리로.
"내가 반려 찾으러 간다고 했지! 왜 자꾸 마을로 내려와?!"
거세게 화를 내는 목소리. 낯설었으나 분명 그의 목소리가 맞았다. 누구에게 화를 내는 건가 싶었는데 달을 가린 구름이 움직이자 다른 멧돼지들이 보인다. 그중에는 유난히 큰 녀석이 있었는데, 다른 멧돼지들이 꾸익대는 소리를 낼 때 덩치 큰 녀석만 똑같이 사람 말을 했다.
"미안, 형아……내가 말하긴 했는데……."
명헌은 어지러웠다. 멧돼지 두 마리가, 아니, 하나는 사람인가? 모르겠다. 아무튼 멧돼지가 말을 한다고요. 당장 TV 특종 프로그램에 제보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이야기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현철은 계속해서 화를 낸다. 난 여기서 계속 사람으로 살 거다, 다시는 내려오지 마라. 너네 때문에 괜히 피해를 본다는 등……열심히 다른 멧돼지들을 혼냈다. 짐승의 시무룩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계속해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으니, 저들끼리 합의가 됐는지 다른 멧돼지들이 산으로 올라갔다.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쯤에야 현철은 다시 사람으로 변해서 바닥에 놓인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는다.
나는 아무것도 못 봤다 뿅. 천천히 뒷걸음질 치다가 산에서 내려갈 생각으로 움직인 명헌의 발밑에서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마른 나뭇가지를 밟은 거다. 셔츠를 꿰어입다 말고 홱 뒤를 돌아본 현철의 안광이 형형하게 빛났다. 기백만으로 사람을 죽일 기세다. 저거 멧돼지 탈을 뒤집어쓴 호랑이 맞는 것 같은데. 코를 킁킁대던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와라, 명헌아.“
여기서 모른 척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명헌이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마저 옷을 입은 현철이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처음부터 다 봤지? 명헌은 깨달았다. 내가 뒤를 밟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일부러 그랬구나. 그렇다면 그건 뭘 위해서일까. 왜 자신에게 이런 비밀을 보여준 걸까 곰곰히 생각하다가 우선 툭 내뱉는다.
"우리 이제 서로 비밀 하나씩 아는 거네, 뿅."
"무슨 비밀."
"너도 내 가슴 만졌잖아 뿅."
무, 뭐? 현철이 눈썹을 들썩인다. 명헌이 눈을 끔뻑였다. 왜 모른척해. 열심히 내 젖 주물러놓고. 현철이 마을회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려 냈는지 얼굴이 벌게진다. 한낮의 땡볕 밑에서도, 술을 그렇게 마시고도 멀쩡했던 주제에 젖이니 뭐니 한 걸로 얼굴을 붉히는 꼴이 좀 웃겼다.
"야 넌 무슨 말을 그렇게……!"
"젖이 젖이지 뿅."
"아오 진짜!"
커다란 손이 기어이 입을 틀어막는다. 더 말하지 말라는 뜻이다. 명헌은 입술을 쭉 내밀어 손바닥을 밀어냈다. 아무튼 서로 비밀 하나씩 알고 있으니 퉁치자는 뜻에서 꺼낸 말이었으므로, 거리낌 없이 궁금했던 것을 물어봤다.
"근데 반려를 찾는다는 건 뭐야, 뿅?"
손을 떼어내더니 입술에 본드라도 바른 듯 꾹 다문다. 머리를 벅벅 긁다가, 갑자기 허리에 손을 짚고 하늘을 올려다봤다가, 다시 숙였다가. 왜 저러나 싶어 바라보던 명헌 역시 번뜩 어떠한 사실 하나를 떠올린다. 그러니까, 현철이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을. 깨닫고 나니 입안이 쓰다. 동성애를 하는 동물도 있다곤 하지만, 멧돼지가 그런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혹시 내가 여자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나를 반려로 생각한 걸까. 쓸데없이 땅을 파는 건 그의 나쁜 버릇이었다. 혼자만의 생각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명헌을 찔렀다. 한참을 망설이던 현철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손수건이다. 깨끗이 빤 것 같은데 얼룩이 묻어있다. 그런데 어쩐지 낯이 익었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 지난 봄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산, 절벽 밑, 다리를 다친 새끼 멧돼지에게 묶어주었던 그 손수건. 말을 잃은 그에게 현철이 물었다. 기억하지? 네가 해준 거잖아.
"반려 얘기는 신경 쓰지 마. 강요할 생각은 없어. 그냥……너랑 있고 싶어서 내려온 것뿐이니까."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신현철이 그 아기 멧돼지였다고. 걔는 품에 쏙 안길 정도로 작았는데. 얜 너무 크잖아. 천천히 현실에 순응하니 그간의 행동들이 전부 이해가 됐다. 이제 갓 성체가 된 새끼의 구애 행위였던 거다. 나름대로 식량을 조달해 오고, 도와주고, 괜히 주변을 맴돌고……. 현철이 뒷말을 이었다. 받아주지 않아도 돼. 신경 쓰지 마. 그냥 나 피하지만 말아주라. 하지만 어떻게 신경을 안 쓰겠는가. 어영부영 산에서 내려오고 난 후에도, 명헌은 한참동안이나 별이 빛나는 밤하늘만 올려다봤다. 열대야 때문인지 신현철 때문인지 도통 잠이 오지 않아 밤새 뒤척이다 아침에나 겨우 눈을 감았다.
다음날부터 거짓말처럼 멧돼지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야생동물보호협회에서도 이례적인 일이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진실은 오직 명헌과 현철만이 간직한 채로, 멧돼지 사건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이 났다. 철거되는 포획틀을 바라보며 명헌은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 달린다. 아직도 자신을 쳐다보고 있을까 궁금했지만, 뒤를 돌아볼 용기가 부족해 그저 앞만 바라본 채로.
*
그냥 나 피하지만 말아주라.
현철의 그 한마디가 매일 밤마다 명헌을 괴롭혔다. 저 멀리서 커다란 덩치가 보이기만 하면, 둥그런 두상이 보이기만 하면 몸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이러면 그가 상처받을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마음과는 다르게 몸이 먼저 반응했다. 본능적인 방어기제였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현철을 피하려고 노력하면서도 문득 그가 대문을 열고 들어오진 않을까 자꾸만 문을 바라볼 때가 있었다. 씨가 발라지지 않은 수박을 먹을 때마다 현철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면 그렇게 당해놓고도 또 누굴 좋아하고 싶냐는 날 선 생각이 불쑥 그의 머리를 헤집곤 했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렇게 모든 걸 내던지고 도망쳐놓고 다시 누군가를 마음에 들이려 하다니. 인간이란 학습 능력이 없는 게 분명하다. 평상에 누워있다가 엎드려 이마를 쿵쿵 박았다. 커다란 소리에 화들짝 놀라 위로 올라온 몽실이가 명헌의 얼굴을 핥았다.
겁쟁이. 현철이 그렇게 말했다. 물론 꿈에서다. 진짜 신현철은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가 점점 멀어진다. 분명 그걸 바랬건만 막상 멀어지니 명헌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닿지 못하고 툭, 떨어진다. 시야가 반전되었다. 현철 대신 남자가 보였다. 얼굴이 일그러져 있다. 그 남자가 어떻게 생겼었더라. 그래도 2년을 같이 살았는데. 그중 절반은 늘 일그러진 채로 봐서 그런가 보다. 야. 지금 상황파악이 안 돼? 기분 나쁘게 뺨을 툭툭 치던 남자의 손에는 비디오테이프가 들려있다. 아, 테이프. 내가 저걸 부쉈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일그러진 얼굴처럼 테이프도 일그러진다. 맞다, 전부 부쉈다. 그 김에 놈의 대가리도 같이……죽었을까. 아니, 안 죽었으니까 신원조회를 해도 말끔했겠지. 억지로 목구멍에 꽂아 넣던 알코올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명헌은 헛구역질을 하며 눈을 떴다. 세면대에 물을 받고 얼굴을 처박았다. 겁쟁이에 병신. 명헌은 스스로를 그렇게 칭했다.
현철은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대화라도 한번 해보고 싶은데 자기가 무슨 몽실이도 아니고, 냄새를 맡고 도망가기라도 하는 건지 명헌은 귀신같이 그를 피했다. 혹시 어디 갔냐고 물어보면 아까까진 있었는데 방금 막 떠났단다. 아마 장기 두는 아재들 심부름 갔을건디. 막걸리사러 쩌어기 갔겠구먼. 고갯짓하는 곳을 따라가 보니 슈퍼 쪽이었다. 어차피 심부름을 하고 돌아오면 집일 거다. 현철은 슈퍼로 가는 대신, 가만히 명헌의 집 대문 앞에 서서 길을 바라봤다. 몽실이가 경계하듯 안에서 빙글빙글 돈다. 그러다가 저 멀리서 걸어오는 명헌을 발견했다. 그는 어르신들이 애매하게 남긴 막걸리 한 병을 손에 쥐고 있었다. 바닥에 쏟아 버리자니 양이 많았고, 마땅히 버릴 곳을 찾지 못해 집에서 버릴 요량이었다. 오늘은 몽실이가 왜 마중을 안 나오지? 고개를 쭉 빼들고 앞을 바라보자 현철이 있었다. 대문 앞에 오도카니 서서, 누가 봐도 저를 기다렸다는 티를 내면서.
"오랜만이다."
현철이 담백하게 말을 걸었다. 그러게, 응, 오랜만이야 뿅. 이 세 마디 중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달싹이고만 있으려니 그가 먼저 선수를 친다.
"우리 얘기 좀 하자."
명헌은 결국 그를 집 안으로 들였다. 작은 평상에 나란히 걸터앉는다. 한참 동안 조용하던 명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해가 안 돼, 뿅. 아무런 주어도 없이 튀어나온 말이지만 현철은 그걸 알아들었다. 그깟 손수건 하나가 뭐라고. 그거 때문 아니잖아. 명헌이 막걸리 뚜껑을 열고 그대로 입 안에 부었다. 입 밖으로 질질 흐르는데도 쏟아붓고 구역질을 눌러가며 모조리 삼킨다. 현철이 뭐 하는 거냐며 병을 빼앗았을 때는 이미 한 방울도 남김없이 털어 넣은 이후다. 익숙해질래야 익숙해질 수 없는 감각이 명헌을 뒤덮는다. 딱 맞는 티셔츠의 흉통 부분이 답답해질 만큼 작아졌다. 오히려 당황하는 건 현철이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제대로 파악도 하지 못한 주제에, 우선 자기 덩치로 명헌을 가리듯이 담장을 등지고 섰다.
"너도 결국 내가 이런 몸이라서 좋은 거지."
순간 현철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명헌은 지금까지 생각만 하던 것들을 모조리 토해내듯 내뱉었다. 맞잖아. 반려라고 해 봤자 결국 번식이 목적이고. 내가 남자도 여자도 되니까, 굳이 배려해 줄 필요도 없는 편한 몸이라서 그런 거잖아. 쏘아붙이듯 나오는 말이 사포처럼 거칠었다. 자신에게도 현철에게도 상처를 주는 말에는 짙은 체념이 함께 배어있었다. 현철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어떤 새끼가 그러는데. 누가 너한테 그딴소리를 했어? 그는 그게 진심으로 궁금했다. 대체 어떤 이름 모를 새끼가 저 머리통에 그딴 내용을 흘려 넣었을까. 차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깊게 내쉰다.
"난 네가 남자건 여자건 상관없어.“
꽉 깨문 그의 교근이 두드러진다.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냥 너라서 좋은 거야, 이명헌."
명헌이 그와 시선을 마주한다. 안다. 그게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신현철이 정말 그럴 사람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두려움이 덜컥 앞섰다. 또다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게 두렵다. 그는 여전히 겁쟁이였으므로. 나 좋아해 달라고는 안 했잖냐. 그냥 옆에만 있을게. 그것도 안 되는 거야?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현철이 고개를 푹 숙였다. 명헌이 할 말을 고르고 있으려니 한참이나 그렇게 고개를 떨구고 있던 그가 홱 머리를 치켜들었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만큼 일그러진 얼굴로 말한다.
"알았어. 그동안 불편하게 해서 미안."
다신 네 앞에 안 나타날게. 그러고는 차마 붙잡을 새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명헌은 그가 나가버린 대문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눈을 감고 평상 위에 드러누웠다. 여름날의 더운 공기가 그를 질식시키려는 것처럼 짓눌러서 숨을 크게 내쉴 엄두조차 안 났다. 몸을 모로 돌려서 태아처럼 웅크렸다. 이상하게 시야가 흐려서 눈을 감는다. 얼마 후 현철이 사직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처음부터 여기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 갑자기 사라졌다. 졸지에 다시 막내가 된 김순경이 그렇게 욕을 하고 다닌다더라. 이걸로 다 끝난 걸까.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한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명헌은 이따금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슈퍼에서 한 박스씩이나 사 온 까스활명수를 마셔도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몽실이가 자꾸만 대문을 쳐다본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귀를 쫑긋 세웠다가 실망한 듯 내렸다. 이윽고 경찰차가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지나갔다.
그 안에 현철은 없었다. 당연하게도.
가을과 겨울이 지나고, 이제 곧 봄이 오고 있는데도 눈이 미친 듯이 쌓였다. 뉴스에서도 이례적인 폭설이라고 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치우기 위해 제설용 삽과 각종 도구를 미리 꺼내두고 방문을 꼭 닫는다. 따끈한 전기장판에 몸을 뉘인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명헌은 요란한 소리에 눈을 떴다. 비척대며 일어나 패딩을 주워 입고 마당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면, 커다란 소리에도 몽실이가 짖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기 집에 들어가 누운 채로 빤히 대문을 응시하고 있다. 다시 한번 대문에서 큰 소리가 났다. 으레 철문을 두드리는 노크가 아니라 쿵, 몸통을 부딪히는 듯한 소리다.
대문 너머에 대체 뭐가 있는 거지? 평소 대문을 잠그지 않는 명헌이었기에, 새벽의 방문자가 마을 사람이라면 직접 문을 열었을 거다. 평상 옆에 세워둔 제설 삽을 들고 천천히 대문으로 다가갔다. 대문을 발로 밀어젖히고 삽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멧돼지다. 그것도 세 마리나. 멧돼지는 자극하거나 공격해선 안 된다고 했는데, 삽을 휘두르지도 내려놓지도 못한 채 멈춰있자 맨 앞에 있던 멧돼지가 다가왔다. 주춤대며 뒤로 물러나자 녀석이 입에서 뭘 뱉었다. 손수건이다. 현철에게 줬던 그 손수건.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그는 천천히 삽을 내리고 손수건을 주워들었다. 다른 녀석이 명헌의 뒤에서 코를 벌름대다 축축한 코로 바지에 자국을 내며 그를 떠민다. 어어, 하면서 그는 멧돼지들에 둘러싸여 길을 걸었다. 향하는 곳은 산이다.
뽀득뽀득. 누구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을 밟으며 걸었다. 아무리 패딩을 걸쳐 입었다지만 슬리퍼에 잠옷 바람으로 산에 오르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춥지는 않았다. 멧돼지들이 따뜻하게 해주려는 것처럼 가까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끌고 간 곳에는 이상하게 눈이 쌓여있지 않았다. 나무가 너무 울창해서 그런 걸까. 어쩐지 익숙한 공간이다. 중앙에는 납작한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그 위를 자세히 살펴보니 작은 형체가 웅크려 있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 본다. 낯익은 녀석이다. 어느 봄날 마주했던 새끼 멧돼지. 본능적으로 이게 신현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커다랗던 멧돼지가 왜 갑자기 처음 만났을 때처럼 작아진 걸까. 명헌이 조심스레 무릎을 굽히자, 유난히 커다란 멧돼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현철의 동생이라며 본인을 소개한 현필이 우물쭈물대다가 본론을 털어놓는다.
"사실……형이 명헌 씨에게 각인했어요."
"……각인?"
"네. 그런데 수인과 사람 간의 일방적인 각인이라 상태가 많이 불안정해요. 각인된 상대 곁을 떠나면 힘이 약해지는데……형이 너무 힘들어해서 이렇게 모셔 올 수밖에 없었어요."
울먹이는 목소리를 들으며 시선은 현철에게로 고정한다. 떨어져 있으면 힘이 약해진다고.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다. 고작 그 몇 개월 떨어져 있었다고 그는 이렇게나 작아졌다. 전에는 몇 개월 만에 커져서 나타나더니, 이제는 또 작아져서 만나게 되는구나. 바보 같아. 바보 같다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신현철도, 이명헌 본인도. 현필이 말했다.
"주제넘은 말이지만, 그래도 형이 명헌 씨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서……죄송해요."
안다. 그걸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그를 피한 거다. 자기도 똑같이 그를 정말 좋아하게 될까 봐, 그래서 그를 기어코 마음 한켠에 받아들여 버리고 말까 봐 그랬다. 명헌이 울컥하는 감정을 다스리는 듯 눈을 감았기에 현필이 무리를 데리고 자리를 피해준다. 사방이 고요해지자 다시 눈을 뜨고 색색 얕은 숨을 내쉬는 현철에게 툭 내뱉는다.
"그러게 왜 나 같은 놈을 좋아해서 이 고생을 해."
내가 뭐라고 각인까지 하고, 왜 너 혼자 아파하고 있냐고. 그를 타박하는 말이었지만 본질은 자신을 향한 비난이었다. 이렇게 아플 거라면 그냥 억지를 부려서라도 내 옆에 있었어야지. 내게 강요를 해서라도 네 몸을 챙겼어야지 대체 나 따위가 뭐라고. 사랑이라는 건 정말 이상하다. 등신 같았다. 작은 멧돼지가 눈을 뜬다. 명헌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다 갈라지고 쉰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말했잖아,
"그냥……너니까."
나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가. 괜히 귀찮게 불러서 미안하다. 느릿느릿 내뱉는 말들에 숨이 턱 막힌다. 왜 이 지경이 되어서도 미안하다고 말하는 거야. 명헌이 참았던 숨을 후우 내뱉었다. 목울대가 떨린다. 손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품에 꽉, 숨이 막히도록. 직접 끌어안아 보니 여실히 느껴지는 작은 크기와 미지근한 체온. 목젖 끝까지 뭐가 차오른다. 두근대는 현철의 심장 소리가 너무 느릿하고 희미하다. 그에 반해 자신의 것은 빠르게 쿵쾅거렸다. 그만하자. 이젠 인정해야만 한다. 명헌이 짓씹듯 내뱉었다. 내가 졌어. 졌다고, 신현철. 그는 인정했다. 자신 역시 갱생이 불가능 한 등신임을. 배 안쪽이, 가슴이, 목 끝까지 차오른 말들로 온통 간질거렸다.
"나도 너 좋아해, 뿅."
거친 털에 얼굴을 파묻었다. 심장과 가까운 곳에 볼과 입술을 부볐다. 그러니까 반려인지 뭔지 하자. 각인할게. 어떻게 하는 건지 알려주라. 뽀뽀라도 할까. 횡설수설하지만 하고자 하는 말은 이거 하나였다. 그러니까, 널 사랑하게 해줘. 세상에 이따위 고백이 또 어디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무드라곤 없었다. 품에 안겨있던 무게가 점점 묵직해지기 시작한다. 단단한 몸과 올라가는 체온 위로 계속해서 말을 쏟아냈다. 같이 살자. 그동안 몽실이도 너 기다렸는데, 우리 셋이 살면 되겠다. 귓가에 울리는 쿵쿵 소리가 누구의 심장 소리인지 모르겠다. 어느새 전세가 역전되어 사람이 된 현철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명헌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얼굴이 문어마냥 벌겋게 익어있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홀린 것처럼 현철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찍어 눌렀다. 빈틈없이 밀착해 부서트릴 것처럼 서로를 꽉 끌어안는다. 뜨거운 온기에 데일 것만 같았다. 가볍게 입술끼리 부딪히던 버드키스를 하다가 그사이를 가르고 혀를 집어넣으니 현철이 깜짝 놀라 어깨를 붙들고 떼어냈다. 명헌이 자기 입술을 핥으면서 그와 코끝을 맞댄 채 숨을 내쉬고 웃었다. 키스도 모르고 아직 애기네 뿅. 허리에 손을 감던 명헌이 물었다.
"근데 우리가 애를 낳으면 그건 멧돼지야, 사람이야 뿅?"
"우리가 애를 어떻게 낳냐."
"내가 있잖아 뿅."
"됐네요. 너 힘든 일 안 시켜."
그 한마디에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발끝이 찰랑거리다 이내 가슴 깊은 곳까지 충만하게 차올랐다. 너에게 그런 일을 시킬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단호한 확언. 처음 자신의 체질을 알게 된 날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을 기다려 왔던 것 같다. 그토록 끔찍하고 저주스러웠던 몸이 이제는 조금도 싫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현철은 정말 그 말을 지킬 수 있는 남자니까. 명헌이 현철의 허리를 꽈악 끌어안았다. 등을 토닥이는 다정한 손길을 느끼며 웃음을 터트린다. 현철이 오매불망 기다린 웃음을. 이른 봄이 오고 있었다.
*
그리 넓지는 않은 마당,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차는 평상과 몽실이네 집. 이장님과 마을 사람들이 낯선 타지인에게 선뜻 내어준 작은 기와지붕 집에는 이제 사람 하나 개 하나가 아니라, 사람 둘 개 하나가 산다. ……가끔은 사람 하나가 멧돼지가 되기도 하지만. 현철이 마루에 누워 손을 내밀면 몽실이가 꼬리를 흔들며 달려와 커다란 손에 얼굴을 비비고 핥았다. 대문이 덜컹 열리기도 전에 몽실이가 화색을 띠며 달려 나갔다. 벌떡 일어난 건 현철도 마찬가지였고. 퇴근한 명헌의 얼굴은 땀으로 축축하다.
"많이 더워? 주말에 머리 좀 다듬을까?"
몇 년간 제법 기른 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냉장고에서 아이스 팩을 꺼내와 명헌의 목이며 얼굴에 대주던 현철이 그의 손에 달랑이는 봉투를 발견했다. 군것질거리를 사 왔나 싶어 받아 들어 보니 생각보다 묵직하다. 설마 하는 마음에 봉투를 열자 보이는 건 한가득 담겨있는 맥주였다. 아니, 자기야. 갑자기 술은 왜……. 그가 현철의 손에서 맥주 한 캔을 빼앗듯 낚아채고 그대로 캔을 따 원샷했다. 차마 말릴 틈도 없었다. 손등으로 입가를 훔쳐내는 명헌의 어깨를 감싸 안고, 밖에서 누가 볼세라 현철은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가 커튼을 쳤다. 혼자 있을 때는 꺼 두었던 에어컨까지 틀고 명헌을 바라보니, 어느새 완전히 여자의 모습으로 변해있다. 아무도 본 사람은 없을 테니 다행이다. 한숨을 내쉬던 현철이 텅 빈 맥주캔을 한 손으로 콰직 우그러뜨리며 분리수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걸 거기서 마시면 어떡하냐!"
"현철. 멧돼지일까, 사람일까 뿅?"
"……너, 설마."
"궁금하지 않아?"
임신하면 계속 여자인 상태일지 안 궁금해, 뿅? 금방이라도 단추가 터질 듯 팽팽하게 부푼 가슴 밑으로, 명헌이 그의 손을 잡아다 자기 아랫배에 가져다 댔다. 커다랗고 두툼한 손이 살집 없는 아랫배의 유일하게 볼록한 부분을 전부 덮었다. 나는 궁금한데. 꿀꺽. 목울대를 타고 넘어가는 침 소리가 적나라해서 결국 명헌이 참지 못하고 작게 웃었다. 기어코 셔츠 단추가 터지며 현철의 가슴에 날아가 부딪힌다. 속옷을 하지 않아 셔츠 밖으로 그대로 흘러넘치는 가슴을 내려다보던 현철이 작은 한숨과 함께 결국 그의 입술을 집어삼킨다. 질척하게 섞이는 혀를 타고 침이 꿀떡 넘어갔다. 옅은 맥주 맛을 느끼며 명헌이 현철의 목에 손을 둘렀다. 막힌 입 사이로 계속해서 웃음을 터트리고, 더 이상 달아나지 않아도 되는 어느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몸을 겹친다. 이젠 누구도 웅크릴 필요가 없었다. 우리의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