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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지 마세요,
사랑에 양보하세요!
삼헌댁 | @noway9gle
일본, 아키타
키가 큰 대학원생이 옆구리에 아이패드를 끼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대학원생이 뛰어가자 모두가 그쪽으로 한 번은 시선을 줬다. 단지 키가 크기 때문에 이목을 끄는 것은 아니다. 야마오 대학교 생명과학부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감히 ‘그’ 후카츠 카즈나리 박사 밑으로 제 발로 들어간 용자이자 15년 동안 8번 졸업 논문을 거절당한 후카츠 카즈나리 박사의 최대 피해자.
대학원생은 근 4년 중 제일 기쁜 얼굴이었다. 지긋지긋한 다윈관 3층 A05호실을 탈출할 날이 머지않았다. 그의 눈에서는 총기를 넘어 광기까지 느껴졌다. 그는 극도의 흥분 상태였으나 후카츠 카즈나리 박사의 방 앞에 멈추자 학습된 공포감으로 일단 멈추고 숨을 골랐다. 똑똑똑. 노크를 세 번 하자 ‘들어오세요뿅’하는 소리가 들렸다.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대학원생은 배꼽인사를 하며 방에 들어갔다.
“노베 군. 채점 다 끝났나뿅?”
후카츠 카즈나리 박사는 ‘나는 창조론이 싫어’라는 문구가 적힌 머그컵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초록색 끈적한 액체를 담아 마시고 있었다.
“옙. 다 끝냈습니다.”
“수고했뿅. 무슨 볼 일이라도뿅?”
“교수님, 드디어 전설의 ‘그것’을 찾았습니다.”
“전설의… ‘그것’?”
안경 너머로 후카츠 박사의 눈이 번뜩였다. 대학원생은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아이패드를 양손으로 공손히 박사에게 건넸다. 대학원생이 손가락이 가리킨 곳의 사진을 발견한 박사의 눈이 반짝 빛났다. 노베군, 이것은….
“맞습니다. 교수님의 연구를 완성할 그것.”
“그것!”
“잃어버린 그것!”
“드디어!”
“마침내!”
“뾰오오오오옹-!”
한 사람과 한 대학원생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방안을 꽉 채웠다. 화면에는 웬 동물의 사진이 크게 띄워져 있었다. 사진 속 새끼 멧돼지는 놀란 표정이었다. 멧돼지에만 집중한 박사와 대학원생은 멧돼지가 어디에 있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을 쓸 법도 한데 말이다. 그 멧돼지는 여자의 가슴 사이에 끼어 있으니.
먹지 마세요,
사랑에 양보하세요!
주의 : 등장인물들이 상상 이상의 바보들입니다.
적폐를 주의하십시오.
~제1장~
한국, 강릉
목련이 피었다 지고, 개나리가 온 동네에 요란하게 인사하는 봄이다. 산왕공업고등학교에도 봄이 왔다. 까까머리 신입생들이 한 무더기 우르르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유독 키가 작고, 머리를 박박 깎은 신입생 현철은 몸에 비해 큰 캐리어와 큰 가방을 등에 지고 기숙사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조심해야 한다. 절대로 정체를 들키면 안 돼.’
‘걱정 마셔요. 신축 기숙사라 뜨거운 물이 잘 나온대요.’
‘그래도….’
‘저 같은 애들이 많다 안 합디까. 어머니 걱정두 참.’
집을 나설 때는 걱정하지 말라고 호언장담을 했다만, 으리으리한 기숙사 신관 건물을 보니 절로 긴장되었다. 현철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24시간 학교에서 먹고 자는 생활의 시작이다. 언제라도 정체를 들키기 쉬운 조건이었다.
그래도 평생 숨어살 수 없었다. 농구선수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최고이자 최선의 선택이 바로 여기, 전국 최고의 농구 명문 고등학교 산왕공업고등학교였다. 산왕은 실력만 있으면 된다고 했으니까. 산왕은 신체에 이상이 있어도 실력만 있으면 주전으로도 뽑아주는 학교였다. 그것 하나만 믿고 왔다. 실력은 자신 있었다. 그리고 현철 같은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도 새로 지었고.
207호면 2층이겠다. 캐리어의 무게는 들만했지만, 키가 작아 그 큰 가방을 들고 계단을 오르기 힘들어 벅차하던 때였다.
“신입생인가용?”
“아…. 네.”
“도와줄게용.”
허여멀건한 남학생 하나가 쭈쭈바를 물며 나타났다. 키가 꽤 컸다. 180cm 정도 되려나. 현철이 멍하니 그를 보는 사이 남학생은 현철의 캐리어를 쉽게 들고 2층에 올랐다. 거북이처럼 큰 가방을 메고 올라간 현철이 감사합니다, 고개 숙여 인사하자 그는 친구니까용, 이라고 답했다.
“나도 1학년이에용.”
아! 현철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가셨다. 공간이 익숙해 보이길래 선배인 줄 알았는데. 남학생은 얼마 남지 않은 아이스크림을 쪼옥 빨아 마셨다. 우물거리는 발음으로 말했다. 이명헌이에용.
“나는 신현철.”
“반가워용.”
그는 현철의 방이 몇 호인지 물었다. 207호. 옆 방이네용. 나는 206호예용. 명헌은 그의 캐리어를 방 앞까지 밀어주었다. 어디서 왔는지, 언제 학교에 도착한 건지, 간단하게 서로의 정보를 탐색하고 나니 방 앞에 도착했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 이번엔 현철이 손을 내밀었고, 명헌은 그 손을 우두커니 내려다보다가 살짝 힘을 주어 잡았다. 잘부탁해용.
방 안에 들어간 현철은 어쩐지 좋은 예감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옆 방 애는 약간 멍해 보였지만 손에 굳은살이 잘 자리 잡은 것이 농구를 잘할 것 같았다. 기숙사 방도 원래 지내던 본가의 방보다 더 깨끗하고 쾌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애는 현철이 ‘무슨 이상’이 있는지 묻지 않았다. 그 애도 이상이 있겠지? 같은 불편함을 공유하는 사람 간의 배려는 편안한 기분이었다. 들키더라도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물론 들키면 상당히 곤란해진다. 현철의 이상은 남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현철이 아직 법적으로 인간의 지위를 얻기 전, 그러니까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로 돌아간다. 현철의 임신 소식을 듣고 사냥이 취미인 작은 아버지는 형수님 몸보신하시라고 친히 고기를 대접했다. 맛있어서 두 접시나 먹고 나서야 근데 서방님, 이 고기가 뭐예요? 물었더니 멧돼지란다.
멧돼지. 야생 돼지. 길들이지 않은, 기생충이 있을 수도 있고 인간의 몸에 해로운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는 멧돼지. 잘 익혀 먹었으니까 괜찮다고 말하는 통에 그날의 사건은 유야무야 넘어갔다. 애는 다행히 4.1kg의 우량아로 잘 태어났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울고, 잘 싸고. 건강하고 평범한 아기였다.
애가 발발거리며 온 집안을 기어 다니는 시기가 왔다. 부엌에서 저녁밥을 짓던 현철의 어머니는 목격했다. 발발거리던 아기가 실수로 페트병에 있던 찬물을 엎질렀고, 물에 닿는 순간 아기 멧돼지로 변하는 것을.
까무러치게 놀라 기절했다 깼는데 여전히 아기 멧돼지가 꾸룩꾸룩 울고 있었단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냐고 아기 멧돼지를 품에 안고 울고 있는 사이에 현철의 아버지가 퇴근했고, 찬물 때문에 멧돼지가 된 거면 뜨거운 물은 어떻겠냐고 아이디어를 냈다. 뜨거운 물을 조심히 대야에 담아 멧돼지를 퐁당 담그니 아니 글쎄, 그들의 아기 인간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안도하는 한편, 또 다른 문제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니까 그들의 자식은 찬물에서는 멧돼지, 뜨거운 물에서는 인간이 되는 돌연변이였다.
병원에 데려갔다가 실험체로 끌려갈지도 모르고, 무당집에 가자니 애를 죽이라는 소리를 할까 두렵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발칵 사건이 하나 터졌다. 유전자 조작 엽산 파동이었다.
당시 임신을 계획하던 젊은 부부 사이에서는 직구 사이트를 통해 유럽 소국가의 엽산 직구가 유행이었다. 입소문에 입소문을 타고 임신 전 필수템으로 자리 잡은 그 엽산은 대한민국이 뭐야, 전 세계 임산부 열에 여섯이 먹었다.
그리고 그 엽산은 유전자 조작을 일으켰다. 주장하는 바로는 그랬다. 어느 날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에서 한 남성은 자신이 이 엽산을 만든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이렇게 말했다. 멍청한 인간들아. 이 엽산은 인류의 진화를 촉진 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너희들의 아이들은 모두 진화된 인류로 태어날 것이다! 으하하하하하!!
채널은 3일에 걸쳐 조회수 1억을 기록하고 갑자기 폐쇄되었지만, 그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곧이어 전 세계에서 이상한 능력을 갖춘 아이들이 보고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그 엽산을 먹은 아이들이었다. 목 뒤에 아가미를 지닌 아이, 손가락이 7개인 아이,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염력을 지닌 아이, 등등등. 개중에는 방송 특수를 노린 사기꾼 부부의 희생양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진짜 피해자였다. 일명 엽산 파동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의 피해자는 대한민국에만 해도 약 3만 명이었다.
상당수는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의 가벼운 변화를 겪었지만, 일부 아주 극심한 변화를 겪기도 했다. 그들 덕분에 현철의 이상 현상도 넘어갈 수 있었다. 엽산을 잘못 먹었다고 하면 현철의 상태를 알더라도 아, 그러시구나, 하며 넘어갔다.
그렇지만 인간이 완전히 동물로 변하는 것은 세계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특이 사례였다. 아무리 그래도 인간이 멧돼지가 될 수는 없을 텐데. 정말 엽산을 먹은 게 맞나요? 한 예리한 의사의 지적을 받은 후로부터 현철은 자신의 증상을 숨겨야 했다.
산왕공업고등학교는 엽산 파동 피해 아이들이 입학하는 시기에 맞춰 기숙사를 신축했다. 1인 1실로 사생활을 보장하면서도 아침과 저녁 훈련으로 단체 생활도 적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 엽산 파동 피해 학생이 신체 능력이 우수하다는 비공식적인 연구 결과가 발표되고, 우수한 선수를 영입하려는 이사장의 꼼수였다.
의도야 어찌 되었든 현철에겐 좋은 환경이었다. 현철이 너는 어떤 능력이 있냐며 묻는 친구도 없고, 1인실을 쓰니 여름이면 편하게 찬물 샤워를 하고 나올 수도 있었다. 그리고 옆방을 쓰는 애도 좋은 애처럼 보였고.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기대감으로 현철의 광대가 위로 빵긋하게 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