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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들

뿅쟁아놀자 | @sanwang_lee

"아이고! 죽겠네, 죽겠어!"

산신령이 있다하여 산을 두 개도 더 넘고 배로 물도 넘어왔건만. 어찌 이리 눈에 걸리는 게 하나도 없느냐? 더 이상 움직이지도 않는 무거운 몸뚱어리를 털썩 내려놓고 자리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골랐다.

"근데 이 안개는 무어야? 구름 한 점 없이 맑더니 날씨가 뭐 이리... 잠깐, 원래도 이만큼 꼈던가? 헉! 신령님이 나오시려 이렇게 안개가 끼는구나!"

하얗고 빳빳했을 마옷이 누리끼리 해진 사내가 눈 밑에는 진한 주름을 달고 겨우 식은땀의 흔적을 닦아내며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까만 눈동자의 사방에 흰자를 가득 띄우고는 오른쪽으로, 위로, 왼쪽으로 도르륵 굴리며 가만 서서 귀를 바짝 세운다. 사악 사악 나뭇잎 날리는 소리, 찌르르 우는 새 소리, 까르르 웃는 꽃 소리를 하나씩 지우고 있으면 곧이어 사내의 피부에 제 능력으론 지울 수 없는 소리가 닿는다. 옳다구나. 사내는 입을 활짝 찢은 채 소리를 향해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풀을 해치며 걸어가니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 뿌연 시야 너머로 민머리의 건장한 사람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다.

"어허, 신체발부 수지부모라 하였다. 대체 어느 집 자제가 저리 머리를 바짝 민다는 말인가? 아하, 중인가 보구나! 어휴 이렇게 또 허탕을 치네 그려."

수풀 더미에 숨어있는 주제에 주먹을 손바닥에 탁! 치고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있었을까. 민머리의 인영이 몸을 비스듬히 돌려 앉았다. 따뜻한 온도에 적당히 풀린 눈꼬리, 살짝 붉게 달아오른 볼, 색은 없으나 촉촉하고 탱글한 입술. 사내 치곤 너무도 색정적이라 훔쳐보던 이의 혀 아래에서 침이 가득 고인다. 계속해서 밑으로 내려가는 눈을 도저히 거부할 수 없던 그는 이상하리 만치 매끈한 목을 지나 약간은 굵직하고 튼실한 어깨를 따라 시선을 아래로 더, 더 내렸다.

꿀꺽-

엄마야, 그는 그만 입안에 조용히 모아둔 침들을 삼키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래에는 탐스러운 입술보다 더 먹음직한 덩어리가 덜렁 달려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그동안 봐왔던 수많은 여인의 것보다 한참이나 컸기 때문이다.

‘이거이, 이게... 여기서도 되는구나...’

침 소리가 너무 커 혹여나 들키진 않았을까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그의 시야에 걸린 것은 여인의 곁을 지키는 무언가였다. 팔을 걸친 돌덩이 옆에 채 지워지지 않은 줄무늬가 선명한 새끼 멧돼지가 있는 것이 아닌가?

 

"현철 등 좀 밀어줘라뿅."

"너는 지금 새끼 멧돼지한테 그런 걸 시키고 싶냐."

"이럴 때만 새끼라고 한다뿅. 인간체로 해주면 되잖아뿅."

"너 내가 아무리 내려놨대도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니."

"먼저 괜찮다고 한 건 현철이다뿅. 나랑 있을 땐 다 상관 쓰지 않기로 했다뿅."

"허? 참나... 그래 내가 너를 어떻게 이기냐. 자, 와서 등 대봐."

 

에구머니나, 저게 뭐란 말이냐? 지금 저 처자랑 대화를 나누는 게 짐승이 맞는가?

훔쳐보던 남자는 턱이 빠질세랴 손으로 냉큼 붙잡아 올렸다. 그때, 조그마하던 멧돼지의 관절이 부득부득 움직이더니 거대하고 아무것도 두르지 않는 건장한 남자로 변했다. 

악! 내 눈! 천축국(天竺國)의 동물과 닮은 거대한 그것과 눈이 마주쳐 버렸다. 이게 또 이 나라에서 가능하다니!

 

"근데 현철, 어떤 발칙한 놈이 나를 훔쳐보고 있다뿅. 나는 이제 순결을 잃었다 뿅."

"알아. 곧 현필이 녀석이 내려오기로 한 시간이 됐어. 알아서 처리해 줄 거다."

"순결을 잃었다니까뿅? 왜 그냥 넘어가뿅?"

"명헌아, 네가 잃을 순결이 어딨니. 그런 건 진작에 내가 다 먹어 치웠는데."

"어머 현철, 아직 새끼면서 못 하는 말이 없다뿅. 주책뿅."

 

"형들 저 왔어요...!"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쨍하니 마른하늘이 소리 없이 번쩍이더니 남산만 한 어른 멧돼지가 천으로 휘감은 인간을 구름에 태우고 내려왔다. 땅에 닿아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멧돼지는 같이 데려온 자에게 휘감은 천을 가져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제 몸에 감았다. 사나워 보이는 눈썹과 다르게 폭신한 눈이 접히며 헤헤 웃는다. 인상이 훨씬 누그러졌다.

'안개, 코끼리, 구름. 의심할 필요가 없다. 드디어 내가 만고 끝에 신을 보는구나! 고단하던 생활을 청산할 수 있겠구나!'

희열에 차 있는 사내의 두 눈이 반짝였다. 한걸음에 달려와 그들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몸을 바짝 엎드렸다.

"헉! 드디어 제가 만산의 주인들을 뵙습니다요!"

"만산뿅?"

"쟤 지금 뭐래니. 나 놀리는 거냐?"

"예. 몸은 징그럽게 큰놈이 이까짓 쬐그마한 산에 눌러붙었다고 비꼬는 거 같네요."

"현필아 네 짝이 입을 함부로 놀린다. 확 받아치기 전에 네가 말려라. 나는 정식으로 도전해 오면 적당히 상대하는 남자가 아니야."

"혀, 혀엉..."

안그래도 무거운 몸에는 존재들이 내뿜는 기만으로도 버겁건만 점점 적대적으로 눌러오는 공기에 사내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압박감에 눌려 차오르는 흉곽이 뻐근하다는 것을 알아챌 새도 없이 비정상적으로 커지고, 그는 더 이상 사고하기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 방금 물에 들어왔는데뿅! 다 튀었다뿅!"

"아이고 큰일 났다. 야 현필아, 이거 처리 좀 해줘라. 내가 너 이 놈이랑 붙어먹을 수 있게 해주려고 지금, 이 산에 뿌리 틀고 앉은 지 몇 년이냐."

"거 지겹지도 않아요? 그걸로 대체 얼마나 우려먹을 생각이야 진짜. 그러는 뭐 형님네는 떳떳하오?"

"뭐? 너 이 자식 네가 먼저 우리 현필이한테 꼬리치지만 않았어도...!"

"현철, 말을 이상하게 한다뿅? 현필이가 꼬리치지 않았으면 뭐뿅. 너는 나랑 안 만나도 괜찮아뿅?"

"혀엉... 석이가 먼저 꼬리친 거 아니라고 했잖아...."

"아니 명헌아 그게 아니라, 신현필 너는 가만히 있어봐. 야 너 이쪽으로 와, 야!"

야!!!!!

노한 산신. 그러니까 이 작은 새끼 멧돼지였던 남자의 함성이 어찌나 큰지 땅이 지잉지잉 울릴 지경이었다. 더 이상 그들에게 방금까지 인간이었을 것이 분명한 널브러진 조각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

 

"너 조심해라 옆 산의 호랑이는 짝 지키겠다고 그 난리를 부리다 결국 자리에서 밀렸잖아. 바로 밑에 어화둥둥 키운 백호랑이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데. 에잉, 세상이 말세라 해도 어찌 이리 말세인가. 제 아비와 같이 따른 신을 밀어내고 거기에 떡하니 들어서다니. 하여간 요즘 것들은 정이 없어요 정이. 그동안의 네 행실이 있고 현필이가 워낙에 이쁨을 많이 받았잖냐. 매번 헤헤 웃고 다니던 순둥이가 어쩐 일로 일을 키웠는진 몰라도 현필이니까 이 정도에서 끝난 거지. 정신 바짝 차리고 거기서 덕 좀 잘 쌓았다 와. 어차피 네 자리야 이미 보장되었으니 무슨 걱정이냐. 너는 아무 생각 말고 폐허 그거나 잘 키워."

그거야 이놈은 신현필이 그게 정확히 뭔 짓을 벌였는지 모르니까 하는 소리다. 옆 산의 호랑이가 짝이라며 뱀신을 데려왔다지? 너는 걔가 뭘 데려왔는지 아느냐? 인간이다 인간. 인간이라고... 종족이 다를 거라면 그나마 신중에서, 하다못해 영물이라도 데려오던가 그 덕에 내가 이게 무슨 꼴이냐.

"근데, 그래서 현필이는 뭐 때문에 이 난린 거냐? 어? 대체 우리끼리 못 할 말이 어딨누. 좀 알려줘 봐라. 우리 사이에 그런 게 어디 있겠어?"

눈치 없이 캐묻는 이의 행동에 현철은 하고 싶은 말이 당장에 위에서부터 끌어올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모두 토해내면 꽉 문 어금니가 좀 느슨해질 거 같았지만 간신히 배에 힘을 주고 입을 꾹 다물었다. 눈앞에 이 사슴은 생각보다 입이 가벼우니 조심해서 나쁜 것은 없지.

 

어머니 다음으로 집안의 주인은 장자인 자신이 아니라 현필이로 정해져 있었다. 멧돼지 신가네가 어떤 곳이던가. 태초의 신이 세상을 다섯 쪽으로 나눠 땅의 주인을 정할 때, 두 번째로 큰 산을 받은 멧돼지 신의 핏줄이 아니던가. 지금이야 산이 많아져 이 산에도 신, 저 산에도 신이 있다지만 내로라하는 산신들이 다 모여도 그중 가장 튼튼한 뿌리는 틀림없이 신가네렸다. 보통 큰 무리가 아니니 중앙 역시 후계자의 죄를 사하고자 온갖 설득을 했다. 계절 하나가 변하고도 반 달 동안 설득과 회의가 계속됐다. 그리고 나온 결론을 현필이는 당연히 거부했다. 완전히 요지부동이었다. 호랑이네 이야기가 잠잠해질 동안만 떨어지면 될 터인데 도통 생각을 바꿔 먹질 않는 현필에 결국 형인 현철이가 대신 받도록 하였다. 겨우 얻은 신의 자리를 다시 내어놓고 귀(鬼)자를 붙여 강등되었다. 한 번 우회하여 받는 벌이니 더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죄목이 숨겨졌으니, 벌도 숨겨졌다. 표면적으로는 덕을 쌓아 부정을 다 털어내면 본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고 알려졌으나 사실 현철은 이제 평생 태어난 산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현철은 자신도 꽤나 노력했다고 생각했다. 성장에 결점이 있다지만 어떠한 술수도 없었으며 오히려 그 결점 탓에 더 노력하고 더 괴로워야 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 말짱 도루묵이 되었으니 아, 허탈하다. 그걸 모르지 않을 현필이가 이렇게 나와서 더 허망하다. 동생인지 미친인지 속이 부글부글 끓고 그 흉악한 낯짝을 가진 인간 놈의 매끈한 머리통을 확 받아쳐 버리고 싶지만, 현철은 결국 오게 됐을 미래가 조금 가까이 왔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머니의 보호 아래 겨우 버티고 있었던 것이지 결국 집안의 흠인 자신은 내쳐졌었을 것이다. 궤도를 벗어난 이의 종말이란 쉬이 변하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현철도 현필이 이리도 말을 들어 먹지 않고 고집부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거 같기도 했다. 현필이 짝으로 정한 인간은 환갑이면 잔치를 열 정도로 생명이 짧은데 겨우 거기까지 버틴다 해도 십 년은 훨씬 이전부터 현필의 활동량을 따라오지 못하고 방 안에서만 붙어있게 될 것이 뻔했다. 딱 그 인간이 살아있을 때까지만 부릴 고집임을 알기에, 그 이후 현필이의 인생이 저가 받는 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현철은 그냥 그러기로 하였다. 그 아이도 가엽지 않은가. 까짓 사랑이 무어라고.

"다 되었다. 불씨에게나 가서 땅이나 태워달라 해야지."

 

***

 

완전히 위엄을 잃었다. 크고 단단하며 완벽한 곡선을 이루고 남 부러울 것 없이 하늘로 고개를 쳐올리던 엄니를 맨정신으로 뽑아냈다. 날카롭던 눈매가 동그랗게 갈렸으며 걸을 때마다 움찔대던 등 근육들을 모조리 방망이로 쳐 판판하게 다듬었다. 자그마한 통에 들어가 몸이 규격에 맞게 줄어들 때까지 총 열흘이 걸렸다. 당장이라도 그저 그런 멧돼지 새끼 무리에 던져놓아도 구분을 못 할 것이 분명했다.

"젠장."

현철의 성장은 유독 고통스러웠다. 신들은 삶이 긴 만큼 성장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허나 현철은 백 년에 걸쳐 천천히 커야 했을 몸이 스무 해부터 멈춘 채로 예순일곱 해를 보냈다. 그리고 남은 해에 급격하게 자랐다. 나뭇잎이 열세 번 떨어지는 동안 현철은 매일 밤 몰래 울었다. 저녁이면 등을 쓸어주러 온 어머니도 모르게 입술을 터트려 가며 참았다. 다음 날이면 퉁퉁 부은 입술을 보고 사슴 귀신이며 아기 도깨비가 깔깔 웃는 탓에 눈을 꼭 감고 주먹을 휘둘렀다. 백이면 백 모두 땅과 가장 가깝게 깔리는 것은 현철이었다. 밤 동안 고통을 참는데 모든 힘을 쓰느라 남은 것이 없어서였다.

"이 꼴을 그놈들이 못 봐서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한숨을 푹 내쉬며 불씨에게서 받아낸 발가락 하나를 떨어진 낙엽 더미에 툭 던졌다. 이맘때쯤이면 공기 중 물이 턱없이 모자란다. 수령(水靈)들이 모두 최고 수신을 따라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물이라는 것들은 자신들의 중요함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 이기적이었다. 가끔은 이렇게 멋대로 푹 숨어버리거나 무엇이 거슬렸는지 모든 걸 쓸어버리기도 했다. 한 해의 성장표는 모두 그들의 변덕에 달렸다고 해도 무방했다. 아플 때면 그 변덕에 영향을 많이 받아 짜증이 일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다행이었다. 이때의 산불은 그렇게 특별한 일도 아니니.

그렇게 산을 다 태우는 걸로 하루를 보낸 현철은 가장 먼저 물길이 들어설 적당한 땅을 찾았다. 얄밉긴 하여도 만물의 근원은 물이니, 물이 있어야 식물도 자리를 잡고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재도 털어내야 한다.

우선 땅을 크게 덜어낸다. 물길의 중심이 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두 번째로는, 산과 함께 성장할 물 씨앗을 심는다. 아직 의식이 없어 그나마 쉽게 데려온 아인데 제발 잘 자라서 까탈을 부리지 않길 바랄 뿐이다. 심은 씨앗에서 물이 나와 점점 차오르기 시작하면 뽑아내고 챙겨온 엄니를 이용해서 곳곳에 점 찍어 둔 공간과 이어지게 길을 판다. 이렇게 각 지점까지 물이 다 흐르면 산이 살아나기까지 거의 완성되었다.

마지막으로는, 가장 중요한 신의 목욕. 비록 현철이 강등되어 귀신이라고 하나 이런 작고 허름한 땅에는 귀신도 신이라 충분히 기운이 채워질 것이다. 준비된 연못에 현철이 첨벙 들어갔다. 연못에 비하여 워낙 작은 몸이라 넘치는 물도 없지만 몸에서부터 시작된 파동이 끝까지 이어진다. 휘적휘적 헤엄을 치니 몸에 묻은 재가 물과 섞인다. 이제 산에 새 생명이 자랄 준비가 완전히 끝났다.

다만 현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다면, 안에서나 파릇한 기운이 넘실거려 생명력을 뿜을 준비를 하고 있었지, 밖에서 본다면 불길이 산 하나를 통째로 먹어 치워 시커먼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에게는 재앙과 같이 보였다. 산이 연결된 마을에서는 회의가 열렸다. 마치 종교, 정치 하여튼 별것들의 대통합과 같은 모양이 되었다. 회의는 산 바로 아래에 허락도 없이 들어앉아 사는 돌팔이 무당의 입에서 나온 ‘어리고 깨끗한 재물을 바치라’라는 말로 끝이 났다. 아무리 먹고 살기 힘들어졌다고 하나 어느 부모가 제 아이를 신령인지 뭔지가 정말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곳으로 보내겠는가. 아직 살이 보들보들한 자식을 둔 부모들의 관자놀이에서 땀이 흐르고 서로 마주치지 않기 위해 눈알만 도르륵 굴러갔다. 그때, 웬 주정뱅이 하나가 손을 들었다.

"거 보내면 얼마나 주는교?"

굴러가는 눈알들이 일제히 멈추고 군데군데 구멍 난 누런 이에 고정됐다.

 

 

"아이고, 명헌아... 내 새끼 명헌아... 아이고, 아이고... 내 예쁜 손녀, 우리 새끼 명헌이 불쌍해서 어찌할꼬..."

노인이 펑펑 울며 품에 안긴 작은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아이는 그저 가만 노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아직 채 빠지지 않은 젖살이 눌렸다. 도망간 어미와 무능한 아비. 방치되어 굶던 명헌을 할머니가 발견하여 거둬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비가 활짝 웃으며 양팔을 벌리고 들어오더니 이제 막 열 살이 된 아이에게 대뜸 노상인한테 시집을 가라 했다. 변태로 유명한 작자였다. 그 상인에게 잡혀간 아이들은 똥오줌도 가릴 수 없게 되어 내쳐진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집으로 들이닥친 여인네들에게 뽀득뽀득 씻겨지고, 분칠을 당하고, 양 볼에 곱게 그려진 연지곤지와 앙다문 입술에 꽃물이 들여졌다. 처음 입어보는 딱 맞는 옷에 천을 여러 개나 덧대어 입힌 빨간 혼례복. 펄럭이는 옷이며 찰랑이는 장신구가 발을 질질 끌리게 했다. 그래서 명헌은 첫날밤에 도망을 나왔다. 하나씩 버려진 옷가지들과 장신구는 도망간 아이를 잡으러 온 야차의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얼마 안 가 붙잡힌 명헌은 눈두덩이가 붓고 입이 터지고 팔과 다리에 멍을 달고는 가둬졌다. 야차가 다시 한번 그 누런이를 드러냈을 때, 명헌은 가둬진 농 안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명헌은 현철에게로 갔다.

시퍼런 멍을 가릴 새하얀 분, 창백한 볼에 다 번진 연지곤지, 바짝 밀린 머리, 커다란 혼례복 그리고 천으로 가려진 눈. 자신에게 받쳐진 재물의 꼬락서니를 본 현철은 나중에야 이게 무슨 감정인지 이름을 붙였으나, 당시에는 그저 울렁이는 속을 달래며 처량한 아이를 거두기로 하였다.

"내 너를 거두는 이유는 네가 탐이 나서도, 네가 가여워서도 아니다. 마침 일손이 부족하던 차였을 뿐이니 그렇게 알고 쓸모를 다하라."

눈앞의 거드름을 부리는 작은 멧돼지가 정말 어른들이 말한 산신님인지 무엇인지는 모르나 아이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것은 호도, 불호도 아니다. 그저 천성. 이자가 너그럽고 다정하여 내려지는 작은 빛줄기. 명헌은 그것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내 이 기회를 절대 놓지 않으리.

현철은 아이를 열심히 먹이고 재웠다. 몸이 커야 뭐든 할 것이 아니냐. 읽고 쓰는 법도 가르쳤다. 그래야 내가 이것저것 시킬 수가 있지. 몸을 쓰는 법도 가르쳤다. 나는 나약해서 픽픽 쓰러지는 것들엔 취미 없다. 그렇게 현철은 아이와 여덟 번의 겨울을 보냈다.

그런데 이 아이, 커도 너무 컸다. 원래 인간 암컷이 저 정도로 크던가? 체격도 어찌나 다부진지 탄탄한 근육이 그 쓰임이 아주 훌륭했다. 현철은 겨우 명헌의 팔 하완 정도 될까, 아직 자그마한 멧돼지 새끼에 머물러 있는 제 몸을 한 번 보았다. 현필이 한참 자라고 저는 멈춰 있던 시기가 떠올랐다. 머리는 또 어찌나 좋은 지, 무슨 열매의 씨앗인지 말만 해줘도 척 알아듣는 건 물론이요, 어느 자리에 어떤 아이가 있어야 보기에도 살기에도 좋은 지 꿰뚫고 있었다. 감시하러 다녀보면 생각보다 잘 배열된 식물들에 현철은 속으로 조금 놀라기도 했다. 물도 양쪽 어깨에 이고 지고 길러와 두꺼운 팔을 자랑하며 척척 뿌려댄다. 사실 물은 현철이 능력을 써 기운을 끌어오면 금방 해결될 일이지만 이리 흘린 땀을 꽤 뿌듯해 하는 거 같아 그냥 두었다. 자식이 생긴다면 이런 마음일까 싶기도 했다. 명치께가 든든하다. 몸이 손끝까지 따스하다.

 

***

 

쓰레기 같은 신현철. 양심도 없는 신현철. 자식 같다며 이 미친놈아... 명헌이 산에 꽃씨를 뿌리면서 제 속에도 뭘 심었는지 그것이 땅을 간지럽히다 기어코 싹을 틔웠다. 아니 근데 뿌린다고 그걸 뿌리가 뻗도록 내버려 둬? 지가 먹이고, 재우고 그렇게 키웠으면서. 진짜 넌 분리수거할 생각은 하지를 말아라. 싹 태워서 재로 날려버려야지. 아니다, 재도 환경 오염이다! 등신 같은 놈. 처지도 모르는 놈. 지금 네가 무슨 죄의 벌을 대신 받는지 까먹은 거야? 하. 

아이를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 싹은 이미 나버렸으니 땅 채로 뽑아서 내던지면 알아서 죽겠지.

 

***

 

현철뿅, 어디 있어뿅?

현철뿅, 오늘 계곡물 시원한데 수영할래?

현철, 동쪽 절벽에 꽃 핀 거 봤어? 현철이 가져다주면 좋겠다뾰옹...

현철, 산에 없어?

이제 돌아간 거야?

.

.

.

"야 명헌아!!!!!!!!"

"뾰옹... 현철 아기가 아니다."

순식간에 인간체로 변한 현철이 떨어지는 명헌을 낚아챘다.

아 미친.

X 됐다.

 

***

 

현철은 제 머리를 쳤다. 정말 뻑뻑 쳤다. 매끈하고 잘생긴 이마가 파이도록 쳐댔다. 현철이 본인의 마음을 인지하기 훨씬 이전부터 명헌은 본인의 마음을 알았고, 현철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챈 순간 명헌도 현철의 마음을 알아챘다. 그리고 마침내 현철과 명헌의 마음이 닿았다. 이게 만약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의 결말이라면 좋았겠지. 하지만 이것은 이야기도 아니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남녀가 사사로이 정을 나누는 그런 부류의 것도 아니다. 골이 아프다. 누가 두개골 가운데 떡하니 자리 잡고는 힘줄을 체중을 실어 눈알 뒤에서 당기고 있는 것만 같다.

하... 알려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하지만 이내 현철은 다 내려놓기로 하였다. 명헌의 천진함이 옮은 것인지 모르지만 이대로도 좋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돌아갈 수도, 돌아가서도 안 되는 몸. 그래서 그냥 이대로 지금을 살기로 하였다. 현필이 말마따나 길지 않을 명헌의 삶에 앞으로 함께할 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고작 인간체로 살아가는 것쯤이야. 뭐, 이런 거도 나쁘지 않네.

현철은 명헌이 고이 자고 있는 방에 들어갔다. 등을 돌리고 불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어깨를 봤다. 자신이 들어온 기척에 깼으면서도 모르는 체하며 가만 누워있는 게 애중하여 그만 동그란 머리통에 입을 맞췄다. 신의 운명으로 태어나 자연이 아닌 다른 모양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모욕적인 인인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종이 다른 것끼리의 합이 평탄할 리 없을 것이며 또한, 그것의 후폭풍은 모두 남겨진 자만이 감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너를 보낸 이후에 그리워할 것이 있다면, 뭐든 되겠지. 안 그러냐 명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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