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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길 수 있겠지
뾰롱 | @bbbbbiiyong
신현철은 산의 주인으로 태어났다. 오랜 수행 기간을 거쳐 겨우 신의 자리에 오르는 뭇짐승들과 달리, 눈 뜬 첫 순간부터 덩치가 집채만 했기 때문이다. 신성은 인간들의 믿음에서 비롯되고 믿음을 잃은 모든 신성한 것들은 참으로 빠르게도 타락했다. 처음에는 손톱만큼 줄기 시작해, 스스로 깨닫기도 전에 손톱만 한 크기까지 형편없이 쪼그라들었다 끝내는 소멸하기를 반복했다. 그런 가운데 현철의 산만 한 덩치는 기형이라는 표현이 오히려 적합할 만큼 꿋꿋했다. 산에 기생하는 다른 것들에게 현철의 크기는 놀랍게도 믿음과 아예 무관한 듯 보였다. 그리하여 산의 모든 것들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믿게 되었다. 신현철이, 그 커다란 멧돼지가 버티고 있는 한 그의 산은 영영 저물지 않을 것이라고.
... 그러거나 말거나, 대단한 영광과 관계없이 신현철은 저를 둘러싼 대부분의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범박한 종자였다. 신현철만이 아니라 이 나이대 영물들이 하나같이 다 비슷했다. 찰나를 사는 인간들도 그 얄팍한 인생 주기를 쪼개고 쪼개 사춘기라는 걸 끼워 넣는데 인간들의 배 이상을 존재하는 영물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소년 신은 벌써부터 억겁이 지겨웠다. 또한 그 반대급부로 부질없고 연약한 것들을 더욱 탐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인간. 더 나아가서는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한 명에게 집착하게 되었다. 종을 떠나 어떤 생물의 역사에도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저보다 작은 것에 마음을 주는 일은 신령스러운 존재들에게 추락과 같았고, 심지어는 그 낙하 속도가 다른 어떤 삿된 행위에 비할 바 없이 빨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못한 것은, 신현철은 가진 힘과 무관하게 아직도 새파랗게 어린 신이었고 그리하여 그만큼 오만했기 때문이다. 신현철 그 자신과 다름없는 산을 자주 찾기 시작한 여자애는 늘상 보던 그 또래 인간 여자들에 비해 키가 늘씬하게 크고 항상 무표정했다. 대개 무겁게 가라앉은 그 애의 눈은 신현철의 땅 안에서도 유독 둔중하고 어두운 빛깔의 바위를 마주할 때만 잠시 이채를 띄었다. 그러나 그 순간조차 지독하게 짧아 신현철은 그 영롱한 빛을 조금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권능이 있는 한, 현철은 제 땅 위 어디에서든 누구나 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 애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꼬박 한 달이 걸렸다. 인간의 미추 기준에 대해 잘 알지 못해 나름 공을 들여 꾸며낸 인간의 거죽에도 영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즈넉한 산길을 따라 그 애가 자주 다니는 계곡 쪽으로 향하며, 신현철은 몇 번이나 물 위로 제 모습을 비춰 보았다. 두피가 드러날 정도로 하얗게 빡빡 민 머리, 다소 그을린 피부. 그 애의 나이에 맞춰 퍽 앳된 얼굴이었는데도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 탓에 신의 기준으로도 썩 인상이 좋지 않았다. 제 새 얼굴을 마주하는 내내 자꾸 낯설은 의문이 들었다. 그 인간은 정말로 이런 얼굴이 좋은가. 실은 거죽을 만들기 전 이미 그 여자애의 속내를 훔쳐 듣고 있었다. 한 가지 변명해보자면 맨질하게 민 머리를 좋아하는 건 소리를 듣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그 여자애의 머리도 똑같았으니까.
“여기서 뭐해?”
“...베시.”
“베시?”
근래 매일 같이 산을 찾는 여자애는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계곡 근처의 편평한 바위 위에 긴 팔다리를 늘어뜨리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볕이 뜨거워 돌 위에 등을 대고 있는 자체가 고역일 텐데 신기할 만큼 미동이 없어 다가가던 신현철도 어쩌면 죽은 걸까, 잠깐 고민을 했을 정도였다. 확실히 인간은 쉽게 죽으니까. 다행히 그 위로 고개를 숙여 그늘을 만들고서 본 여자애는 눈을 뜨고 있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도 선명하게 들렸다. 순간 신현철은 왜인지 모르게 제 등 위를 간질이는 땀방울을 느꼈다. 신들은 더위도 추위도 알지 못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넌 누구, 베시.”
“그건 내가 물어 봐야 될 말 같은데. 나는 여기 근처 살거든. 근데 넌 처음 보는데.”
“이렇게 험한 산에 산다고?”
인간 기준으로는 험준한 땅임을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아차 싶어 혀를 차며 눈을 굴리다 결국 어깨나 으쓱 올렸다. 부모님이 나 어릴 때부터 이런 산에 살고 싶어 하셨거든. 궁색한 변명이었지만, 크게 궁금하거나 의심스러웠던 것은 아닌 듯 현철의 빈약한 말에도 여자애는 별 반응이 없었다. 신현철은 이미 이 애의 이름도 알고 있었고, 무심하고 딱딱한 낯 뒤에 숨긴 알맹이가 얼마나 되바라지고 제 멋대로인지도 훤히 꿰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로 생전 처음 본 것처럼 굴지 않으면 곤란했다. 넌 이름이 뭐야, 묻자 여자애의 도톰한 입술이 소리 없이 한번 열렸다가 그대로 닫혔다. 경계를 낮추려고 부러 또래 남자애의 거죽을 뒤집어썼는데, 덕분에 바짝 옆까지 다가설 수는 있었지만 그 이상은 이 대담한 알맹이의 계집애도 망설여지는 모양이었다. 이름을 끌어내기 위해 한 걸음 더 나가 인간의 미소를 모방한다. 그러자 한참 침묵하던 여자애의 입술이 드디어 소리를 냈다. 신현철 역시 그와 동시에 속으로 그 애의 이름을 따라 불렀다. 이명헌.
“이 근처는 나랑 내 동생 말고는 없는데,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거야?”
“... 철이 많아서, 베시.”
“철?”
“이 곳 저곳에, 베시...”
“돌 속에 들어있는 것들?”
“넌 이름이 뭔데.”
“나는 신현철이야.”
“으음.”
지루함을 이기려고 미리 인간다운 이름을 지어놓은 것이 꽤 도움이 되었다. 제법 자연스럽게 자신을 소개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물어온 이명헌은 그에 대한 마땅한 대답도 없이 이번에는 뜨고 있던 눈을 감고 손을 곧게 펴 제 등을 받치고 있는 바위를 뭉근히 쓰다듬는 것이다. 신령한 존재답게 그리 참을성이 좋지 않은 신현철은 순간 울컥했으나, 그간 이명헌을 지켜보며 이미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라 결론을 내렸기에 제법 태연하게 참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분쯤 지났을까, 완전히 내려갔던 눈꺼풀을 다시 들어 올린 명헌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현철 쪽으로 손을 뻗었다. 일으켜 줘, 베시. 붙들어 일으킨 몸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가벼웠다. 현철이 변한 모습보다 한 뼘은 더 커 보이는 키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뜨거운 볕 아래 한참 지져지느라 어지러운지, 슬쩍 휘청였던 이명헌은 이내 몸을 곧게 세우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귀엽게 생겼다, 베시.”
어쨌든 속내를 훔쳐 들은 보람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