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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無侵森歌

햄니 | @sniddled

햇볕은 짱짱하고 후텁지근한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제끼는 어느 창창한 봄날, 강 하나를 옆구리에 끼고 모인 서너 개 마을 사람들이 죄 모다 들이닥치는 오일장이 열린 날이렷다.

 

그 흔한 밭뙈기 하나 없이 날날하니 널따랗게 천막이 서고, 사이사이 길 내며 사람 지나다닐 자리에 굄목 박지 못하도록 단속하는 놈이 돌아당기고, 은근슬쩍 남의 좌판 벌여놓은 물건 탐내는 놈이나, 제 맘에 쏙 든 것이 빤히 보이는디 고것 한 번 싸게 사보것다고 한참을 흥정하는 놈이나, 사람이 아주 복작시러 정신없이 어지러운 날 되시겠다. 꺼먼 대가리들이 이리로 와르르르르, 저리로 와르르르르, 사방팔방 재게 놀리는 발걸음에 모래구름이 어깨까지 피어오르는 와중에, 고 사잇길 한 데 모여 휑하니 빈 자리 복판에서 웬 것들이 조물조물 깃발을 하나 세우지 않겠는가?

깃발에 매달려 휘날리는 천은 색이 바랬을지언정 알록달록하니 시선을 끌고, 고 아래 짐 쌓아놓은 자리가 상석이라는 것마냥 거들먹대며 왼편 무릎에 오른 발목을 떡하니 얹고 앉은 놈이 하나가 있고, 그 옆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놈이나, 꽁꽁 묶은 매듭을 솔솔 풀어 둘러 쳐서는 사람 하나 제멋대로 돌아다닐 둥그런 공간을 만드는 놈들이나, 하나같이 풀칠을 어찌나 했든지 가죽을 씌운 것모냥 빼곡하게 털이 붙은 가면을 쓰고 사람 머리는 아닌지 회갈색 털로 길게 땋은 머리꽁지 한둘을 매달고 있더라. 하여간 고놈들, 하는 꼬라지가 따악 봐도 재주로 벌어먹고 사는 놈이요, 한 놈 옆구리에 꿰찬 낡은 바구니가 또 이놈 재밌는 것을 봬줄 것이다, 하고 사방팔방 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제대로 판을 벌이기도 전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둘러싸 앉았다.

얼추 사람이 모여 밖이 내다보이지 않을 정도로 인파가 빽빽할 적에 그제사 움직이던 것들이 주변에 새끼줄 두르는 것을 마치고 짜기라도 한 것마냥 동시에 한데 앉은 놈을 돌아보는데, 요놈요자식요거 혀를 딱다그르르 굴려 소리를 내는 것이, 아직 운 뗀 것 한 마디 없는데도 아주 솜씨가 좋은 전기수가 아닌가. 전기수치고는 또오 손에 책 든 것이 없었으나 요 근래 돌아다니는 것들은 제멋대로 이야기를 재미나게 바꾸어 이르는 버릇들이 있다 허니 아무도 이 놈 전기수인 것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는 거라.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조용해지고, 서로 수군대며 옆구리 찔러쌌는 것도 잠잠해지고, 한참을 기다렸다는 것마냥 어슬렁어슬렁 내려오는 품에 사방 두른 군중이 제놈들도 모르게 숨을 팍 죽이고 이야기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린다.

 

자아, 그래서.

 

적막을 가르고 쏘아올린 목소리는 커다란 목청으로 시원하게 터져 까랑까랑하게 귀에 꽂히는 좋은 소리다. 말을 많이 해 그러는가 끄트머리 묘하게 긁는 소리 남는 것이 이놈 믿음직한 놈이요, 하고 보증하는 어음이나 다름없으니 사람들 기대치가 굼실굼실 정수리까지 치솟아 오르지, 그 기대를 아는가 모르는가, 이 태평한 놈은 뒷짐을 지고 슬근슬근 한 바퀴, 사람들 앞을 쭈욱 둘러보고서야 툭 하니, 꽹가리처럼 쨍쨍한 소리를 시끄럽게 잇는다.

 

 

보자, 보자

여기 계신 분들은

멧돼지신의 사랑을 받아 산이 되어버린 여인네 이야기를 아시는가?

아는 놈도 모르는 놈도 입은 무겁게 귀는 가볍게 집중들 하시게나,

어디 한 번 들어들 주시지요,

요것은 나뿐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올시다.

 

 

 

옛날옛날 먼 옛날에, 아주 고릿적 표현으로 산 넘고 물 건너 능선을 한 서너 개쯤 넘고도 다시 굽이치는 산길을 한참 올라가야만 있는 외딴 산 속에 처자 하나가 살았더랬다.

고 숲에서는 신기하게도 이 처자 걸어가는 자리마다 길이 열리고 손을 대는 나무마다 열매가 맺히고 산 속 못가에라도 갈라치면 고 찰방찰방한 수면 가장자리로 웬갖 물괴기들이 모여들어서 저를 좀 잡아가시라고, 잡아가시라고 물 밖으로 주둥이를 내밀고 빠끔빠끔하는데, 오래 입어 낡고 해진 의복을 여전히 단정하게 몸에 뚤뚤 두르고, 날이 추우나 더우나 가리지 않고 산을 타고 오르내리며 제 먹고 살 것을 따고 꺾고 수확하여 거처로 돌아가는 요 아해는 고것 이상한 줄을 전혀 모르고 태평하니 오늘 캐온 칡뿌리 끊어낸 것을 질겅질겅 씹으며 집 앞 마당이라 부를 만한 흙바닥에 드러누운 것이 취미였든 것인데,

 

이 처자 이름이 명헌이라 헌다.

 

명헌이라는 이 처자, 살아온 행적이 기이하기 짝이 없는데, 여기를 잘 들어보소, 명헌이라는 이름자는 어데서 났는가 하니 스스로 지었다, 날 적부터 요 산골짜기 처박혀서 저 키워준 사람이 뉜지도 모르고 부모도 형제도 자매도 없이 기억하는 것이라곤 저 혼자 걸음마 뗄 적부터 넘어질라치면 배를 받쳐주고 자빠질라치면 등을 받쳐주고 길을 벗어날라치면 손을 잡아 제자리로 당겨주는 낭창하니 부드러운 버드나무가지뿐이렷다. 줄글 읽고 쓸 줄은 아는데 그것 어찌 배웠는가도 모르고 그것 사용하여 대화할 사람도 없으니, 이 숲 속에 명헌의 목소리 들어 아는 것 처음 옹알이를 할 때 주변을 빼곡하게 둘러싸 돌쟁이를 향해 기울어졌던 접시꽃들뿐이었다든가.

 

헌데 이 명헌의 이야기를 내가 어찌 들어 알고 있는가 하며는, 아이고 목이 마르다 내가 말을 많이 했더니 입이 말라 그러는데 어디 무어 입 적실만한 것은 없는가, 고렇지 고것 감사허네 내가 아주 잘 마시겠수다, 그럼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봅세.

 

 

커흐흠, 아 글쎄 명헌의 삶이 홀로 되어 있으니 그 외진 숲 속에서 이 처자가 어찌나 외로움이 사무쳤을꼬, 세상에 남은 것이 저 혼자 아님을 알았겠지만서도 당장 눈에 뵈는 사람이라고는 잔잔한 샘에 비친 제 낯뿐이었으니 이것은 명헌을 홀로 남겨두어 길렀던 그 치의 잘못이 맞다. 이쯤 되면 짐작들을 다들 했을 것인데? 그렇지 옳지 옳지, 이 처자, 명헌이라는 아해, 아니 내가 처음에 멧돼지신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 않았나, 저 영감탱이 기억력 후진 것 좀 보게? 여기 계신 영리하신 분들이 짐작하신 대로 명헌을 기른 자가 다른 뉘도 아닌 이 숲과 산의 주인 멧돼지신이올시다. 신위에 올랐으니 신 자요, 명헌이 부르기를 현철이라, 이 멧돼지신 현철의 생김새가 어떠하였는가 하며는,

 

키는 구척 장신이오

머리터럭은 박박 깎아 맨들한 대가리가 드러나있고

험상궂은 눈매 속에 먹물을 톡 떨군 양 시꺼먼 눈깔 하며

떡 벌어진 어깨에다 전신이 울퉁불퉁 부풀었는데

길쭉이 두툼한 입술 비집고 튀어나온 것은 짐승의 엄니이고

열손가락 달린 것은 짐승의 발굽이고

허리 아래 달린 것은 멧돼지 뒷다리라

두툼한 허리가 가히 백년은 묵은 나무등걸 같고

뻑뻑한 가죽은 어지간한 날붙이에 상처조차 나지 않으니

이것 신인 줄 모르는 것도 영물이기는 하겠거니, 하는 거라

 

아무래도 이 신께서는, 얼추 보기엔 사람처럼 생겼다마는 무식하게 큰 덩치며 개중에 그나마 사람다운 입성 아래루다가 비죽비죽 튀어나온 털까정 감출 생각은 없었는갑지, 사람 같지 않은 데다 사람이 되겠다 노력조차 않는 것이 사람을 기르고저 하였으니 그 과정이 어찌 순탄할거나, 어릴 적의 명헌은 아주 작고 보드라운 살덩이였으매 이리 깨지고 저리 부딪히고 행여나 다칠까 죽을까 으깨질까 짓눌릴까 제 거대한 뒷발로 조막만한 갓난쟁이를 잘못 보아 짓밟기라도 했다가는 아주 큰일이다, 하는 절절한 걱정으루다가 현철은 명헌이 아주 어릴 적에는 조그만 짐승들로 하여금 아이를 키웠고 아이가 얼추 자라 사리분별을 하고 말씨를 익히기 시작할 무렵에는 숲 속에 사람 지나다닐 오솔길을 만들어 아이가 홀로 되지 않도록 나름대로 주의를 기울였다 이말이외다.

그 누구도 허락지 않았던 숲에 오로지 명헌을 위해서 세상으로 향하는 길을 뚫어놓은 것인데, 신께서도 당시에는 순진하셨던 모양이지, 내가 아끼는 아이라는 티만 내며는 인간들이 알아서 명헌을 대접해줄 줄로만 아셨는가배? 거 다들 알지 않소, 인간은 생각보다 멍청하고, 기대한 것보다 어리석어, 제 이익이 걸린 일이라 치면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으레 무식한 짓을 일삼기 마련이라, 아 이 숲 드나들기를 허락 받은 치들도 별다를 것은 없었던 모양일세.

 

첫 시작은 저 갈 길이 바빠 지름길을 뚫어보것답시고 금지된 숲을 얼쩡거리던 보부상 무리였소. 커다란 보따리에 이런저런 짐을 한가득 움켜다가 이고지고 어정버정 땅땅한 걸음으루다가 숲길을 지나가것다 제를 올리고 걸음을 들이지 않았겠느냔 말이오, 늘상 그르든 것처럼 쬐끔 맴돌다 쫓겨나겠거니, 그리 해도 뱅 돌아가는 것보담은 낫겠거니 하고 수풀을 헤치고 숲으로 들어섰는데?

 

헌데 참으로 이상허다, 평소라면 안에서 뱅글뱅글 돌다 어느 순간 엉뚱한 길로 엉덩이를 걷어차인 것모냥 아이고 뜨거라 뛰쳐나가야 했을 것이, 그 날 따라 신기하게도 안으로 안으로 풀 뿌리 걷어진 오솔길이 이어지고 있더라는 게요. 그 길을 따라 열심히 걷다 보니 고 끝에 웬 머리를 산발을 한 계집애 하나가 오도카니 서서 낡아빠진 천으로 어중띠게 몸을 가리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멀거니 올려다보고 있더라거든.

고 계집애 생김새가 지저분하고 머리털이 산발이라 처음에는 큼직한 산짐승인 줄로만 알았더마는 가만히 뜯어보니 눈은 동그랗고 입술은 도톰하고 그럭저럭 입성을 갖춰놓으며는 여느 여염집 처자 못지 않도록 생긴 것을 상품 감별하는 데에 도가 튼 요 장사치들이 알아채버린 게지, 예끼 이놈들아 내가 그리 보았다는 게 아니잖느냐? 아이구 무슨 사람을 죽일 듯이 노려본담, 이 아이들이 이 얘기를 유독 좋아해서 그런 것이니 흐름이 끊겼다 서운해 마십시요들, 여튼간에 이놈들이 처음부터 그리 배은망덕한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외다.

 

생각을 해보시오, 신의 손길이 닿아야 들락거릴 수 있는 숲에서 그 신이 귀애하는 아이에게 해꼬지를 한다니, 기겁을 하며 펄쩍 뛰고 아서라 육시럴 놈의 새끼야 죽으려거든 너 혼자나 죽거라, 우리는 감히 생이 귀한 줄을 안다 소리를 지름이 마땅한 일이 아니었겠나, 이 말입니다만, 인자 이 이야기를 듣는 여러분네들은 아시지 않소, 언제나 비극은 인간의 손에 의해서 일어나는 거요.

 

은제 아니 그런 적이 있든가? 우리네들도 인간이지만서도, 인간은 어찌 돼먹은 겐지 잘 해주며는 잘해주는 대로 고마운 줄을 모르고, 거듭되는 호의를 당연한 권리인 줄로만 알고 주어진 것에 만족할 줄을 모르고 욕심을 부리는 족속 아니겠소? 이것이 인간 종의 문제인지 으르신네들의 문제인 지는 알 수가 없겠지마는 예서 중요한 것은 그렇게 숲에 발을 들인 인간 놈들 중에 그 명확한 의미를, 뚜렷하고 적확한 성문으로 남기지 않았다는 연유루다가 제멋대로 해석하려 드는 놈이 있었다는 것이 되겠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앞서 말하지 않았는가, 명헌이라는 요 여아가 어찌나 매끈헌 상인지 잘만 씻기구 다듬어놓으며는 단아하고 새초롬하니 말꼼한 미인이 될 낯이었다 이 말이외다. 신께서 이 아해를 숲에서 내쫓지를 않고 거두어 먹이고 입혀 키우는 것이, 없던 길을 뚫어가며 세상을 봬주시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아 이 호로 잡놈이 모르기를 지독허게 몰랐던 거라, 에그머니나 남사시럽구나, 결국 이놈의 새끼는 제 분수도 모르고 이 명헌을 숲 밖으로 끄집어낼 궁리를 하기 시작한 게요.

현철의 허락을 받아 이 숲 드나드는 것이 보부상무리인 것뿐만은 아니었지마는 명헌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간 것은 개중에 한 놈을 필두로 한 무리였다는 얘기지요.

 

이런 새끼들 생각하는 것이 죄 뭐 하나 특출 난 것이 없이 다아 똑같구 멍청하여 제 좋을 대로 통박을 굴리기 시작했대는데, 그놈 머릿속 명헌이 어떤 아이루다가 생겼는가 하며는,

 

비단모냥 매끄럽게 굽이치는 머리타래 하며

녹음이 드리워 새까맣게 짙은 동자는 빛이 들지 않아 신비스럽고

피부는 가무잡잡하다마는 허름한 입성 아래루다가 하얗게 내다보이는 것이 색다른 맛인데다가

암만 신님네 사랑을 받는다 한들 저도 별 수 없는 계집이라

저희 말하는 것 고분고분히 잘 듣는 것 보아하니 심성이 순하기 그지없고

호기심이 많아 재미난 것 봬주며 살살 꾀어내기가 어렵지 않겠으니

그 말인즉 봉변을 당하고서도 타이르기가 쉽다는 얘기가 아닌가?

이토록 순진한 아해는 낯선 이가 쉬이 들락거리는 무서운 숲에 있을 것이 아니라

건장하고 든든하여 저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의 품에서 커야 한다

 

하는 요상하고도 괴이쩍은 모습이 되었는데, 이게 실재하는 명헌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모습이지 않은가? 하여간에 인간놈의새끼들 저들 좋을대루다가 생각하기는 차암 잘하는 것은 알아주어야 한다니까. 그리하여 이놈이 그때부텀 숲을 들락거릴 적마다 명헌을 지그시 관찰하며 제깟놈이 파고들 틈새를 찾아보기 시작허는데, 명헌이라는 여아가 암만 얌전한 낯짝을 하고 조용히 앉았더래도 신의 사랑을 받고 신의 손아래서 큰 아해인 것을, 평범한 구석을 찾을래야 찾기가 한참을 어렵것다, 이 명헌의 주변서 일어나는 일들을 줄줄이 나열해보자면,

 

손을 뻗으니 산새가 날아들고 펼친 옷자락에 열매가 떨어지고 행여나 머리칼이 엉킬라 발이 걸릴라 온 사방을 어지러이 엉켜있던 넝쿨이 명헌이 가까이만 갔다 하면 이리로 우르르 저리로 쿠르르 꼭 다리 달려 살았는 것마냥 제 몸뚱이 물리기에 바쁜 와중에 웬갖 산짐승이 꽃가지를 주고 가고 산나물을 캐다 주고 덤불이 벌어져 길을 만들고 없던 물길이 트여 졸졸 흐르는 실개천이 생기는 기적이 명헌을 졸졸 따라다니더란 말이오.

 

그에 이놈과 함께 명헌의 뒤를 졸졸 쫓아당기던 놈들이 한 짐 무겁게 짊어진 것들을 죄 내팽개치고 어디 계신 줄도 모르든 산신님께 두 손을 삭삭 비벼 빌기 시작했든 거라, 실상 이놈들이 그놈새끼 계획에 동조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마는 적어도 산신 무서운 줄은 알았던 게지, 그리 삭삭 빌다 바람이 휙 불어 눈을 뜨니 요것들은 어느새 숲 밖으로 쫓겨나 본래 졌던 짐마저 잃고선 허둥지둥 가까운 마을을 향해 도망을 갔다는 것인데, 이제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고 딴 맘을 먹었던 이 자식이오.

제 친구놈들 죄 쫓겨나간줄도 모르고 치렁치렁한 명헌의 머리채에 홀려 발밑서 부서지는 나뭇가지 소리도 듣지 못한 채루다가 어정어정 엉거주춤한 자세로 사박거리는 발걸음을 따라 어기적어기적, 제 아랫도리 체면치레할 것두 없이 꿈틀거리는 것을 훤히 내놓은 채로 발정난 개새끼모냥 명헌의 뒤를 졸졸 쫓아가드라는 거거든. 그놈 뉘게 홀린 것인지 이쯤 되거든 이상한 풀이라도 주워 씹지 않었는가 의심이 될 판이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구 아름드리 나무 등걸에 등 대어 앉은 명헌의 지척에서 손 뻗는 그놈새끼,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탐스러운 머리타래가 그 손에 쥐였을 것인데, 아 글쎄 바루 그때, 그 놈 손 뻗는 때 두 사람의 곁에 홀연히 커다란 덩치가 나타나더니 지저분한 머리통 위로 묵직한 그림자가 지더라.

저 따라온 놈들은 죄 도망을 갔고, 그놈들은 다 낯이 익어 모르는 치가 없을 것임에도 이상하게 익숙허고 낯선 낯이 옆에 섰는데도 이상한 것을 몰랐든갑지, 신께서 출입을 허한 이만 드나들 수 있는 숲에 모르는 놈이 어찌 갑자기 나타난다는 말이더냐? 헌데 이놈의 멍청함은 그 정도를 알기 어려울 지경이더라는 건데,

 

허기사 이게 신인 것을 어찌 알았겠나? 현철은 지금 다들 떠드는 것모냥 두 배 정도 되는 덩치도 아니고, 짐승의 엄니가 입술 새로 비죽이 삐져나오지도 않았으니 모를 법 하다 싶다가도 말이오? 그 낯에 어린 기이함이며 조그만 소리조차 나지 않는 걸음이 희한할 수도 있었을 것인데, 이놈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에 대고 얼빠진 질문을 던졌댔다.

 

뉘시우?

 

제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 치는 친절하게 대답도 해줬대지?

 

숲에 들어오니 어떻더냐?

 

을매나 어리석었으면 신이 귀애하는 아해를 훔치려 들었겠소, 그 멍청함이 어지간한 것이 아니었는지, 아 이놈이 수상한 낌새에 엎드려 빌 생각은 않구 묻는 말에 곧이곧대로 대답을 했다지 않나?

 

나무가 무성하니 빛이 영 들지 않아 못 쓰것고,

길은 좁고 풀이 우거져서 걸음마다 바짓단이 해지는 것이 느껴지고,

그나마 널린 것 중에 귀한 것이 있으니 참을 만 하거니와,

가로질러 갈만한 지름길이 있으니 들를만한 숲인 것 같소?

 

그놈이 제멋대로 지껄이는 새에 현철의 키가 무럭무럭 자라 아름드리 거목만한 덩치가 커지더라, 턱을 찢고 튀어나온 엄니가 한 자요 새끼줄로 동여맨 물동이 같은 허벅지는 길이만 석 자인데다가 팔 척이 무어냐 그것으로도 다 모자란 열 척 넘는 장신이 되어놓고서야 이놈이 그제사 제 멍청함을 깨닫고 제자리에 주저앉아 지린내를 풀풀 풍기며 납작이 엎드려 빌어보는데, 바짓가랑이로도 모자라 제 엉덩이 아래 흙까지 더러운 물로 흠뻑 적셔놓구는 제 잘못이 무언지도 모르고서 한 번만 살려주십사, 한 번만 살려주시면 다시는 이 숲에는 발도 들이지 않겠다, 지나가는 개가 웃을 헛소리를 지껄이며 삭삭 빌었거든.

그 못난 꼴을 한참을 내려다보던 신이 입을 여는데, 그 목소리가 우렁차게 천지를 크게 울리고 뒤흔드는 분노가 담겨 삽시간에 숲이 조용해졌드랬다.

 

빛이 들잖아 어두운 것은 네놈 욕심이 눈을 가린 탓이겠고,

수풀이 바짓단을 잡는 것은 네놈 걸음이 욕심으로 조급한 탓이겠고,

네 말하는 지름길은 내가 대어줄 생각이 없는 것인데,

널린 것 중에 귀한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게냐?

 

신이 걸친 옷은 기이한 광택이 흐르고 투명하지만 뒤가 내다보이지는 않는 옷이었는데, 그것은 인간이 짠 직물이 아니라 이 숲에서 나는 이름 모를 풀을 비벼대어 가닥가닥 갈라져 생긴 실로 짠 천으로 만든 탓에 그렇다지, 그 옷가지 너른 소맷자락 뒤에서 신의 옷깃을 꼭 움켜쥔 명헌이 은제 그리로 몸을 피했나 고 아래로 불쑥 고개를 내밀었는데, 입때껏 입 한 번 떼잖고 앓는 소리 한 번 하잖은 고 계집애가 입을 열더니 첫마디루다가 그런다,

 

저 아저씨, 더러운 냄새늇.

 

그리곤 뭐, 벌을 받었겠지.

 

그 멍청한 놈이 어찌 되었는가는 내가 여기 저잣거리에서 대대적으로 떠들 바는 아니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명헌은 그런 일을 겪고도 딱히 우울해지거나 서러워지는 일이 없었다는 게다. 실상 명헌이 그 치들에게 마음을 주었던 것은 아니고, 정을 붙였던 것은 더더욱 아닌데, 하면 그 더러운 시선을 왜 죄 참아가며 주변을 맴돌았는고 하니, 명헌은 저와 같은 이 하나 없는 숲속에서 상당한 외로움을 탔던 모양이라. 높은 곳에 올라가면 딛고 내려올 가지가 뻗어나오고, 깊은 물로 들어가면 못 바닥에서 하늘거리는 풀들이 더 들어오지 말라 얘기하듯 저들끼리 엮어 만든 그물로 저를 밀어내고, 행여나 다칠까 추울까 배고플까 더울까 비가 오면 오는 대로 해가 뜨면 뜨는 대로 온 숲이 저를 돌보아 살피는데 정작 숲의 주인은 저를 들여다보지 않는 채루다가는 제가 혼자인지 둘인지도 알 수가 없고, 명헌이 외로워 시름시름 시들어가던 것은 그가 나를 아끼는 것이 자명하다만 그것이 몸까지인지, 내 맘까지인지를 알 수 없는 탓이었던 것인데, 숲의 주인이 저를 염려하여 바깥 것들을 들이고 그것들이 제게 불손한 마음을 품었으니 이것은 현철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지 않은가?

명색이 신임에야 현철이 이런 명헌의 속내를 몰랐을 리는 없고, 그래도 혹시나, 명헌이 같은 인간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을까, 하여 꾸민 일이었다마는 이 현철이 간과한 것도 명헌은 저가 키운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에 어느 인간이 저 홀로 클 수가 있겠는고? 명헌은 현철이 키웠고, 그 말인즉 신의 손을 탄 인간인데, 이미 어깨가 솟고 가슴이 부풀고 살갗이 부드럽게 뭉개질만치 성장할 즈음에는 명헌조차 인간이 아닌 것의 기운을 품고 풍기며 인간의 접근을 저 스스로가 거부할 것이니, 결국 명헌은 낳아준 태는 고르지 못했으나 곁에 머무를 자는 제 손으로 고르기를 강경하게 주장한 것이고, 그러한 명헌이 움켜쥔 이가 다름 아닌 인제사 처음으로 낯을 본 현철이라는 제 부모이자 양육자이며 낯도 모르고 사랑하게 된 신이었던 거라.

 

명헌의 원대루다가 명헌의 앞에 저를 온전히 드러낸 현철은, 이 자리서니까는 솔찬히 말하지만서도 애진즉에 명헌의 기이함을 알고 있었을 신은 큰 두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명헌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언제나 매끈허게 생긴 것들보다는 울퉁불퉁하고 각이 져 괴상한 형태를 지닌 쪽이었으니 제가 명헌이 싫어하도록 생기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어림짐작하여 눈치 채고는 있었으나, 아무래두 고것을 더듬어 아는 것과 실지로 부딪히는 것은 다르지 않겠나, 염려하던 바가 또 그것이었던 것인데.

 

하니, 현철은 답지 않게 등줄기를 굳히며 긴장을 했고, 명헌은 고개를 길게 빼어 제 반응만을 기다리는 제 신을 올려다보았지.

 

뇨옷…….

……왜 그리 해?

현철...... 높다늇.

 

현철은 키 큰 이들이 으레 그러하듯 허리를 낮춰주기보담은 명헌을 두툼한 팔뚝에 얹어 번쩍 들어올렸는데, 아니글쎄 고 팔뚝이 어찌나 두꺼운지 거진 명헌의 허리만 한 것이 뭔지도 모르고 명헌이 뺨을 발그랗게 물을 들였다? 입꼬리는 휘어지고 얼굴은 붉어지고, 소담하니 솟은 광대를 단단한 엄니로 문지르며 현철이 명헌의 대답을 기다리는 중에, 이 발칙한 가시내, 보부상들에게 못된 것만 배워 온 아이가 가만히 눈을 감고 고 무시무시하게 크고 날카로운 이빨에 입을 맞추더라!

 

 

현철은 어마무시하게 놀랐고

깜짝 놀라 굳어버린 현철을 따라 온 숲도 움직임을 멈추고 삽시간에 고요해졌는데

그 와중에 명헌만이 슬그머니 눈을 뜨고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현철, 현철. 나를 사랑해늇?

 

그리고,

 

영원히 내 곁에 있어줄거야늇?

 

저를 받쳐든 근육이 흉기와 같아 무섭도록 꿈틀대는 것을 깔고 앉은 채로도 명헌은 명헌이라, 제가 입술 맞댄 엄니에 연신 푹신한 뺨을 문대어 부비며 깔깔대고 웃드라니, 그 찬연하고 낭랑한, 새소리마냥 가볍고 팔랑거리는 소리에, 내가 졸지에 키우던 아이에게 마음을 내어주었구나, 허고 깨달은 현철이 명헌을 안고 천천히 바닥에 앉었다. 현철은 알았던 거라, 저가 진실로 명헌을 사랑하게 되었으니, 그리고 그것을 알았으니 이 입맞춤을 되돌려준다면 명헌은 현철과 같은 존재가 되도록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오래오래 잠들어 사랑을 대가로 기약 없는 기다림을 얻게 되리라고, 그리하여 명헌이 평생의 배필이 되겠으나 사랑을 깨달은 신은 이번에는 명헌에게 외로움을 배우겠다고.

허나 어찌할꼬, 우리 같은 민초 나부랭이들모냥 높으신 분들도 감정에 휘둘려 휘청휘청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라는 놈인데, 암만 신이래두 사람을 아끼고 귀이 여겨 사랑한 이상 우리와 다를 게 무어야, 그것이 상당히 괴롭고 고생스러울 것을 알면서도 현철은 명헌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는 게다.

 

명헌아.

으응. ……늇.

네 영원이 내 영원과 같으냐?

 

현철의 사랑은 강요하지 않는 사랑이라, 현철이 명헌에게 묻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것지마는 네가 세월에 깎여 마모되는 정신으로도 나와 함께 영원을 살겠느냐, 나와 같은 생을 살겠느냐, 하는 물음이지 않겠소? 기실, 이런 질문은 말이오, 스무 해를 훨씬 넘어 세상 물정도 놈 알고, 인간사 돌아가는 형편도 좀 알만치 경험을 쌓고 나서야 묻는 것이 옳은 일인 것이 아닌가 한다마는, 현철이 어찌 그를 모를까, 눈 한 번 깜짝할 새에 죽어버리는 인간들의 생리를 아는 신이라 오히려 조급한 마음으로 성년조차 채 되지 않은 아해에게 그리 질문을 했던 것인데, 어리고 용감하여 무서울 것이 없는 명헌이 이번에는 냅다 굵은 엄니 두 개를 붙들고 고 사이 입술에 저를 확,

 

갖다대려던 것이 현철이 고개를 뒤로 휙 빼어 막혀버리드라. 그것은 암만 현철이 새파랗게 어린 것에게 터무니없는 질문을 던졌다 한들 순간의 열정에 명헌이 휩쓸리게 하지 않으려는 상냥함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생각을 헙니다마는, 여기 계신 분들은 또 그리 생각하지 않으실 수도 있겠지요, 하여간에, 다시 현철의 엄니가 다정하게 명헌의 이마에 닿고, 그쯤 되며는 명헌도 저가 소리를 내어 대답해야 현철이 제 하는 것에 응해줄 것을 알었으니, 발갛고 어여쁘게 상기된 뺨을 하구서는 대뜸 큰 소리를 내었다.

 

내가 먼저 얘기했다늇! 나랑 영원히 함께 있어달라고뇻.

 

현철은 명헌에게서 이야기하는 것보담 더 많은 글을 읽어낼 수 있는 자이고, 때문에 명헌의 절절한 진심이 현철에게 고스란히 닿았으니, 사랑에 빠진 신이 고통을 핑계 대어 사랑을 회피하지 못하는 것은 불가항력이 아닌고?

명헌은 영원을 각오하고, 현철은 외로움을 각오하고, 후에 어떤 원망을 듣는다한들 그것은 죄 제 죄가 될 것이라는 것을 통감하면서, 지극히 인간다운 생각으루다가 결심을 했단다. 지금은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라는 확신이 섰지마는, 사랑임을 갓 깨달았을 때와 수없이 많은 날이 지나는 동안 사랑임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면서 더욱 절절하게 묵힌 마음으로다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허니 명헌의 말소리에 대답은 따로 않고 가만가만, 고 하얗고 매끈한 이마며 곱게 솟은 콧날에 찬찬히 입술을 내리누르다가, 드디어 명헌이 그토록 바라던 입에 제 것을 내려붙였다.

 

네 바라는 영원을 내가 채워주마.

 

 

그렇게 명헌은 잠이 들었는 게야. 그 어떤 허기짐과 욕구와 자극과 위협에도 깨지 않을 곤하고 깊은 잠에 빠진 것을 현철이 가만히 옮겨다가 사방팔방 몰려온 덩굴이 커다랗게 뭉쳐 덩굴마다 커다란 이파리를 내어 저들을 덮은 뭉치 위로 내려놓는데, 늘어진 팔다리가 아주 천천히 녹음으로 덮여 덩굴무덤 속으로 잠겨들었는 것을 현철이 그 위로 제 모가지를 빼어 덮고 늘어져 눈을 감었다. 인간의 형일 적에는 열 척이 넘는 장신이요 짐승의 형일 적에는 집채만한 멧돼지라, 팔다리 달린 몸으로는 따뜻하게 덮어줄 수 있는 털 한오라기가 없으니 현철은 짐승으로 돌아가 명헌을 길게 품어 누운 게다.

그 처자, 명헌이 언제 깨어날지는 아무도 모르지, 어제오늘내일 개중에 언제가 될 지도 또 모르지, 허나 현철은 아직까지두 기다리고 있는 거요, 그때부텀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풀무덤에 묻혀 잠이 든 제 반려가 깨어나는 순간만을 고대하믄서, 고른 숨으로 오르내리는 가슴팍에 털복숭이 턱을 턱하니 올리고 비벼 몸이 식지 않도록 마냥 지키면서, 고 멧돼지 한 마리가 언제까지고 대가리를 기대어 함께 잠들어가지구서는.

 

 

아마 요것은 한번씩들은 들어보셨겠소, 손을 대선 안 되고 들어가선 안 되는, 살아 움직이는 아주아주 먼 곳의 숲의 이야기를 말이오?

이것은 말했다시피 아주아주 먼 옛날, 아주아주 먼 곳의 이야기이고, 그러하여 명헌은 실지로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있다 하더이다. 혹시 모르지요? 명헌의 이름을 알고, 명헌의 존재를 믿고, 그이가 언젠가 눈을 뜨리라 기대하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나면 명헌이 지겨운 잠을 이겨내고 일어나 현철에게 영원의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 따악 고만큼, 하루이틀만큼 가까워질지.

 

 

이 사람이 아는 이야기는 여기까지요.

어찌, 들을만 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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