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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fiction

매점누나 | @gogogogo_bbyong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밤이 깊어 A는 오랜만에 단골 술집에 들러 옆구리에 삼삼한 여자 하나를 끼고 술이나 붓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는 대충 일을 마무리한 후 차를 몰아 단골 술집이 있는 사거리 갓길에 차를 세웠다. 고급 술집답게 입구에서부터 양복을 입고 건들거리며 서 있던 직원 중 한 명이 고개를 조아리며 다가와 우산을 받쳐주었다. A는 당연한 손짓으로 자신의 외제차 차 키를 던지듯 내민 후 술집의 정문을 열고 들어간다. 쿵쿵거리며 오장육부까지 온통 뒤흔들 만큼 우렁우렁한 가게의 음악 소리를 따라 주변을 둘러보니 웬걸, 평소 손님의 반도 되지 않는 가게의 상태에 A는 혀를 쯧쯧 찼다. 이러니 음악이나 괜히 더 크게 틀고 있는 후까시 없는 후까시를 다 잡는 거 아니야. 여기도 단물 다 빠졌구만. A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원래라면 이 시간대에 가게를 거의 가득 채우고 있어야 할 손님들과, 그 손님들의 수보다 더 많았던 여직원들을 떠올렸다. 물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는 곳 따윈 다니지 않는 그였지만 오늘은 이미 와버렸으니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비도 정신 사납게 하루 종일 내리기나 하니, 아끼는 정장의 바짓단이 더 이상 젖는 것은 사양이었다.

 

“찾으시는 아이 있으세요?”

“박 사장 없나? 저번에 맡겨두고 간 술이 남았을 텐데.”

 

A는 거들먹거리며 직원의 안내에 따라 작은 복도 너머에 있는 룸으로 들어갔다. 어두침침한 조명과 밖에서 흘러들어오는 쿵쿵거리는 음악이 한데 뒤섞여 왠지 모르게 습하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A가 익숙하게 가장 안쪽 자리에 앉자 뒤따라온 직원들이 기본 안주와 얼음, 잔을 세팅했고, 그의 말에 자리를 안내해준 직원이 빠릿하게 나가 술병을 양손으로 공손히 받치고 들어왔다. 자주 부르던 여직원들을 세 명 정도 호명하자, 직원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 이것 참 어쩌죠, 사장님, 마침 오늘 다 휴무네요.”

“뭐? 휴무? 휴무 같은 게 어디 있어? 다들 돈 벌기 싫은가 보네. 예전에는 아주 부르기만 하면 30분 안으로도 튀어오던 것들이 뭐?”

“하하하, 아이고 이런 날도 있으면~ 저런 날도 있고 그런 거지요. 마침 오늘 날이 날이라서, 쉬는 애들이 많습니다. 너무 화내지 마시고 새로 온 애들도 괜찮은데, 어떠십니까?”

 

직원의 달램에 A는 잔뜩 투덜거리면서도 정장 주머니에 넣어둔 담배를 꺼내 한 대를 입에 물었다. 잽싸게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주는 모습에 A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누그러든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 좀 괜찮은 애들로 데려와 봐, 지난번처럼 자꾸 빼고 지랄하는 년 말고.

 

“그럼 먼저 한 잔 하시면서 기다리고 계시면 금방 데려오겠습니다, 사장님.”

 

직원은 웃는 얼굴로 룸을 나섰고, A는 휴대폰을 꺼내 업무용 문자가 온 것은 없는지 대충 확인한 후 까만 테이블 위에 휴대폰을 엎어두었다. 룸 안은 어느새 컴컴한 담배 연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평범한 건물이라면 정도의 밀폐된 공간에서 이 정도의 연기가 감지되자마자 바로 소방 알림이 울리고 소화용 스프링클러가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 고작 담배 연기 하나하나에 알림이 울릴 정도면 아예 장사를 접는 편이 나을 정도일 거다. 그럼 여기서 문 닫고 씹 뜨다가 불 나도, 아무도 모르고 그냥 다 같이 개죽음이나 맞는 건가. A는 실없는 상상을 하며 허공에 대고 쿡쿡 웃었다. 몇 모금 마시지도 않았는데 벌써 술기운이 도는지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담배 한 대를 다 태우고 나서야 룸의 문이 다시 열렸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름이 뭐지?”

 

여자는 대답 대신 작게 웃으며 등 뒤로 문을 닫았다. 또각또각 걸어 자신의 옆자리에 와 앉은 여자는 짤막하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넸을 뿐이다. 살짝 낮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 흔한 콧소리 하나 섞지 않은 단정한 말투가 마음에 들어, A는 씨익 웃으며 위아래로 여자를 훑어보았다. 대놓고 자신을 품평하는 눈빛에도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잔 하나를 끌어다 얼음을 넣었다. 옮겨가던 시선이 자신의 상체 중간 즈음에 멈춰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을 눈치챈 여자는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어우, 사장님 응큼하다, 처음부터. 애교 섞인 핀잔을 주며 웃는 얼굴이 사근사근하고 묘한 구석이 있었다. 새로 온 애들 중에서도 제일 괜찮은 애라더니, 영 구라는 아니었나보다고 생각하면서 A는 새 술잔을 받아들었다. 역시 단골 취향 정도는 꿰고 있는 곳이라 그런지 눈치 있게 자신의 여자 취향에 맞춰 데려온 것이 A는 꽤 마음에 들었다. 오늘까지만 오고 다음부터는 다른 곳을 새로 뚫으려고 생각하던 차였지만, 이 여자가 있다면 다음에도 몇 번 더 올 용의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A는 흔쾌히 받은 술을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오늘따라 술기운이 빨리 돌아 기분이 좋았다.

 

 

 

 

 

“와, 그래서 그 비행기를 타신 거예요?”

“그럼, 진짜로 간발의 차였지. 내가 누군지 아냐, 지금 사람 막고 있는 거 후회할 거다, 딱 이랬지! 간신히 애새끼들 치우고 올라타니까 비행기 바아-로 뜨고, 바로 따돌리고.”

“저는 잘 모르지만, 밀렵이라는 게 그렇게 돈이 많이 되나요? 사장님 얘기 들어보니까 너무 위험한 일을 하시는 것 같은데.”

 

여자는 애교스럽게 웃으며 상체를 기울였다. 술 두어 잔을 연거푸 들이킨 탓에 A는 이미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로 기분이 붕 뜬 상태였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술잔을 흔들어 보인 A가 대꾸했다.

 

“돈이 되다마다. 그것도 존나게. 그러니까 오빠가 돈 많이 벌어서 여기에도 돈칠 많~이 해주는 거 아냐?”

“아이, 그래도 너무 무섭다. 얘기만 들으면 무슨 영화 같구.”

 

여자의 앞에서 이런저런 허세를 떨며 이야기를 늘어놓기를 한참, A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보통 여자들에게는 하지 않을 법한 이야기도 마구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저 일과 돈 관련하여 허세를 부리거나 농담 섞인 희롱을 좀 하다 보면 상대해주는 여자들이 반응해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말하는 스스로도 기분이 짜치는 바람에, 술 식게 떠들어대는 것 말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옷을 벗기거나 몸을 주무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A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았고, 자신의 취향에 꼭 들어맞는 여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무척이나 즐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그는 말이 많은 여자라면 딱 질색이었으니 대화라고 할 것도 없는, 그저 자신의 자랑과 허풍 섞인 무용담에 딱 보기 좋을 정도로 웃어주며 맞장구를 쳐주는 정도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것마저 A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기묘할 정도로, 보통의 술집 여직원이나 매춘부들에게는 느껴본 적이 없었던 감정이 샘솟기 시작했다. 그저 되는 대로 술이나 따라주고 분위기나 맞추다가 시키는 대로 옷을 벗는 싸구려 여자들이 아니라, 단정하고 부드러운 웃음과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대화’를 나누는 이 여자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A는 우습게도 자신이 이 여자와 사랑에 빠진 것 같다는 착각 어린 생각을 했다. 대화다운 대화는 한 번도 하지 않았고, 이 여자의 눈보다도 도톰한 입술과 풍만하게 자리 잡은 가슴 부분에 더 자주 눈길을 주었음에도 말이다. 어줍지도 않은 착각에 제대로 빠져버린 A는 거드름을 피우며 진지한 얼굴로 새로운 이야기의 물꼬를 텄다. 이거는 오빠가 정말 다른 데서는 말 안 하는 건데...

 

“...어머, 멧돼지요?”

“쉿! 목소리 낮춰. 이거는 진짜로 아무 데서나 말 안 하는 거니까.”

“너무 신기해서 그러죠. 그런데 멧돼지야 산에 널린 게 멧돼지 아닌가요?”

 

여자의 순한 눈매가 둥그렇게 커지는 것을 본 A는 이 주제가 그녀의 흥미를 끌었음을 알아채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차분하던 그녀의 표정이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드는 것을 보며 그는 더욱더 진지한 얼굴로, 심지어 둘 말고는 없는 주변을 괜히 둘러보기까지 하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게 그냥 멧돼지가 아니거든...사실 사람이다?”

“예? 설마요...”

“정말이라니까? 사진 보여줄까?”

 

남자는 키들키들 웃으며 정장 안쪽 주머니에 넣어둔 작은 봉투를 꺼냈다. 종이봉투 안에서 나온 것은 몇 장의 손바닥만한 사진이었는데, 전부 초점이 제대로 맞지도, 피사체가 선명하게 나온 것들도 아니었다. 그러나 무엇이 찍힌 건지는 알 수 있었다. 여자가 신기하다는 듯 입을 손으로 가리며 어머, 어머를 연발하자, A는 더욱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진 속에 담긴 것은 거구의 사내가 목과 손발에 쇠사슬이 달린 족쇄를 차고 어딘가 어두운 곳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앞에 난 철창이 그가 어딘가에 갇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고, 조명이나 창문이랄 것도 없는 사각지고 시커먼 공간에 앞에서 쏟아져나오는 침침한 조명을 받으며 사내는 눈을 찡그리고 있었다. 원래도 험악한 인상이기는 했으나 사진 속 상황이 상황인지라 남자의 표정은 더욱 흉흉해 보였다. 아마 사진을 찍는 사람을 노려보는 것이겠다. 스킨헤드마냥 짧게 깎인 머리는 두상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고, 한눈에 봐도 그 큼직한 덩치는 바위마냥 단단하고 위협적인 근육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 이런 남자가 발가벗은 채로, 보통 짐승들도 아닌 호랑이나 곰 같은 거대한 맹수들에게나 쓸 법한 족쇄를 온몸에 차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센 빛에 사진이 흐려지긴 했지만 사진 속 남자의 덩치와 기운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과, 족쇄를 채우는 과정에서 심한 저항이 있었는지 목과 손목, 발목은 물론 온 피부에 남은 크고 작은 상처들이 더욱더 남자의 상태를 좋지 않아 보이게 했다. 여자가 무섭다는 듯 살짝 인상을 쓰며 어머, 하고 작게 비명을 질렀다. A는 그녀의 그런 반응이 마음에 들었다.

 

“너무 끔찍해요, 사람을 왜 이렇게 해 둔 거예요?”

“이 새끼 그냥 사람이 아니라니까? 반은 사람인데, 반은 멧돼지야.”

“그게 무슨...”

 

여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A는 다른 사진 하나를 뒤집어 보여주었다. 방금 전 보여준 사진과 같은 구도의 사진이었으나, 이 사진 안에서 뿌연 빛이 밝히고 있는 것은 그 덩치 큰 남자가 아니라 작은 멧돼지였다. 평범한 강아지 크기의 새끼 멧돼지 한 마리가 오도카니 어둠 속 철창 너머에서 서 있었고, 목과 네 발에는 여전히 쇠사슬이 묶여 있었다. 여자는 놀란 눈으로 두 사진을 번갈아 보더니 조그맣게 탄성을 지르며 되물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세상에 이런...”

“어때, 네가 봐도 같은 녀석이라는 느낌이 딱 오지?”

 

정말 그랬다. 사실 그렇게 닮은 구석이랄 것도 없고, 애초에 인간과 짐승이지 않은가. 닮았으면 대체 어디가 얼마나 닮았을 것이며, 그것도 거구의 헐벗은 사내와 자그마한 새끼 멧돼지가 대체 닮기는 어디가. 여자는 동그란 눈을 깜박거리며 양손에 사진을 들고 신기하다는 듯 사진을 교차해가며 비교해보았다. 내내 차분하고 매혹적인 웃음을 흘리던 그녀가 아이같이 들뜬 눈으로 놀라워하는 것을 보자, A는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질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엉덩이를 조금 움직여 여자의 옆에 더 가까이 붙어 앉았으나 그녀는 그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남자는 히죽거리며 고개를 기울여 물었다. 오빠가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줄까?

 

 

 

옛날에, 아주 먼 옛날에.

고대 중국에 칭하이성이라는 도시가 있었거든. 거기에 주천향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수련장이 있었어. 뭘 수련하냐고? 몰라, 그냥 옛날 얘기니까, 그냥 영화 같은 거 보면 빡빡이들 나와서 무술 같은 거 배우고 하는 곳이겠지.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주천향이라는 수련장은 아무나 드나들 수가 없었대. 그곳을 관리하는 가장 대장 스님이 있었는데, 그 자식이 글쎄, 혼자서 그 주천향을 관리하면서 제자들에게 그곳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다는 거야. 스님에게는 많은 제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제자 일곱 명이 있었대. 그런데 그 녀석들이 어느 날 궁금해지더래. 대체 주천향 안에 뭐가 있길래 스승님이 저렇게 막아놓고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지. 일곱 제자 중 한 명이 스승님 몰래 거기에 들어가 보자, 정말 좋은 수련장이면 거기서 열심히 연습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고 나머지를 설득한 거야. 그래서 어쩌겠어, 다들 들어가 봐야지. 원래 이런 건 한 명이 독단적으로 하는 것보다 다 같이 저지르고, 다 같이 혼나는 게 낫잖아. 학교 땡땡이 한 번쯤 쳐 봤지? 그런 것처럼. 응, 아무튼 그래서.

 

그런데 생각보다 주천향 안에 들어갔더니 별것도 없는 거야. 조용하고, 크고 작은 샘들이 여러 개가 있을 뿐 기대했던 으리으리한 훈련용 장비도, 스승님도 없고, 그냥 곳곳에 퍼진 샘 위에 대나무 창과 낡은 표지판 몇 개만 있었다고. 괜히 헛걸음을 했다 싶어 다들 실망하고 돌아갔대. 스승님한테 들키기 전에 어서 다시 돌아가야 하니까. 응, 아니, 얼음 말고 술만.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그래, 거기.

그러던 날에, 스승님의 제자 중 하나가 혼자 밤에 심부름을 다녀오는데, 왠지 모르게 그날따라 달도 밝고 마음이 싱숭생숭하더래. 괜히 느릿느릿 돌아가려는데, 풀숲에서 웬 여자가 불쑥 튀어나온 거야. 그래서 이 늦은 밤에 누구요, 저기 마을까지 같이 갑시다, 하려는데 그 여자가 냅다 자기한테 안기는 거야. 왜 웃어? 그치,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아무렴 그래, 남자가 돼가지고 고자도 아니고, 제 발로 와서 따먹어달라고 안기는데, 그걸 거절하면 안 되지. 그래서 그 여자랑 밤새도록 뒹군 거야. 한참 따먹고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그 여자가 자길 모르겠냐고 묻는 거지. 오늘 처음 본 여자인데 알긴 뭘 알겠어. 당신이야말로 날 아느냐고 물어보는데, 갑자기 이 미친 여자가 자기 옷소매를 잡고 냅다 냇가까지 끌고 들어가더라는 거야. 이제 보니 물귀신이구나 싶어 밀쳐내려는데, 웬걸, 방금 전까지 물고 빨고 했던 여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매일 같이 훈련하는 동료, 그러니까 아까 스승님 몰래 주천향에 들어가자고 했던 녀석이 배를 잡고 웃어댔다는 거야. 그 여자가 땅으로 꺼졌나, 하늘로 솟았나, 이 녀석은 왜 잠도 안 자고 여기에 있나 싶어 물었더니, 그 녀석이 아직도 나를 모르겠냐고 묻더라는 거지.

 

“어머, 그럼 그 여자가...?”

“그래! 졸지에 뭣도 모르고 호모 새끼가 된 거지, 그 녀석은! 게다가 그것도 평소에 같이 훈련하던 군대 동기 같은 녀석이랑 말야!”

 

정말 이상하지 않냐는 듯 A가 일부러 큰 소리로 웃자, 여자는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 섞인 핀잔을 내밀었다.

 

“그 제자가 몰래 자기 친구를 좋아했었나 보네요. 그런데 어떻게 여자가 된 거래요?”

“사실 그 주천향에 있던 샘들은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전설 속 샘인데, 거기에 빠지면 멀쩡하던 남자도 여자가 되고, 멀쩡하던 사람도 곰, 돼지, 오리, 고양이 같은 짐승으로 변해버린대. 그 스승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그 샘을 지키는 산신령이었는데, 인간으로 둔갑해 아무도 그 샘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킨 거지. 그런데 그 제자 녀석이 호기심을 못 참고 혼자 다시 주천향에 들어갔다가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여자로 변하는 샘에 빠진 거고.”

“에이, 너무 지어낸 얘기인 거 티 난다.”

“지어내긴? 진짜래도? 그래서 주천향의 샘에 빠진 인간은 찬물을 맞으면 본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지만, 따뜻한 물을 맞으면 그 샘에 걸린 저주대로 모습이 변해버린다고 하지. 이래 보여도 우리 업계에서는 꽤 알음알음 아는 녀석들이 많은 전설이거든.”

“아, 중국에서 주로 사업하신다고 했죠?”

 

A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잔에 담긴 술을 비웠다. 이제는 술이 물인지, 물이 술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면 방금 든 게 술잔이 아니라 그냥 물컵을 든 것일 수도 있었다. A는 짐짓 과장된 얼굴로 거드름을 피우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중국 말고도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지. 아무튼, 최근에는 티벳 쪽, 티벳 알지 티벳? 그 웃기게 생긴 여우 있는 곳.”

“네, 알지요.”

“거기 쪽에서 주천향이 발견됐대.”

 

여자는 다시 술잔을 채우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A를 올려다보았다. 이야기의 완급을 조절하기 위해 입을 다문 그는 일부러 뜸을 들이며 술잔을 돌렸다. 찰랑거리는 연갈색의 액체와 둥근 얼음 너머로 여자의 흰 얼굴이 흔들거렸다.

 

“처음 발견한 건 그냥 등산객이었는데, 그 사람이 찍어서 올린 사진에 이미 업계에 소문이 쫙~ 하고 돈 거지. 거기는 원래 아무것도 없는 고산지대라서 샘이고 뭐고, 그냥 마른 땅만 있는 곳이거든. 그런데 그 위치며, 샘의 모양이나 개수며, 그 낡은 표지판에 적힌 한자들이며 전부 전설 속에나 남겨져 있던 그 주천향과 일치한 거야.”

 

여자는 이야기에 완전히 집중한 듯 보였다.

 

“나도 바로 애들 뽑아서 보냈지. 그랬더니 그 녀석들이 어떤 사진을 보냈는 줄 알아? 정말로 그 주천향의 샘 앞에서 셀카를 떡하니 박아서 보낸 거야, 그 자식들이. 나도 당장 비행기 타고 날아갔지. 거기가 접경지대라서 사실 중국 공안 쪽에 걸리면 영영 다신 못 찾는 거라. 당장 가서 말뚝 박고, 우리가 접수하고, 바-로 우리가 먹어야지.”

“그런데 그냥 샘이잖아요? 만에 하나 정말 전설대로 사람이 동물로 바뀌고, 성별이 바뀐다고 해도...보물이나 금괴가 묻혀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게 그렇게 돈이 될 일이 뭐가 있어요?”

 

여자의 질문에 A는 뭘 모른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왜 돈이 안 돼? 당연히 어마어마하게 되지.”

“어떻게요? 짐승들로 바뀌면 뭐, 서커스라도 여나?”

 

여자의 농담 섞인 대꾸에 A는 히죽 웃었다.

 

“당연히 실험을 해야지. 인간 몇 명 잡아다 넣고.”

 

그의 낮은 대답에 여자의 얼굴이 가볍게 굳는 것이 보였다. 아마 이런 얘기에는 면역이 없어 조금 무서웠으려나. A는 속으로 이 정도 분위기만 잡아도 쪼는 것을 보니 어쩔 수 없는 계집이구만, 하고 작게 비웃었다. 그리고 동시에 왠지 어깨에 더 으쓱하고 힘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당연히 아무나 넣을 순 없고, 또 함부로 물에 다가갈 수도 없으니까 우선 사람들 접근만 막아두고 있었지. 그러기를 한 며칠 지났나, 밑에 애 한 명이 와서 그러는 거야. 이 근방에 수상하게 돌아다니는 남자가 있어서 잡았는데, 이놈 이거, 뭔가 이상하다고.”

“...어디가 이상했는데요?”

“분명 인간이었는데, 일단 잡아서 대가리에 자루 씌우고 기지 세워둔 곳까지 차에 싣고 데려왔지. 그런데 분명 트럭 뒤 칸을 보니 남자는 없고 웬 새끼돼지 한 마리가 자루 안에 있더라는 거야. 주변에 같은 편이 있어 그 새끼들이 중간에 바꿔치기를 했구나, 했는데 묶어둔 끈이 풀린 흔적도 없고, 잡았던 남자랑 그 돼지랑 이상하게 같은 사람인 것 같더래. 아, 사람은 아니고, 아무튼.”

“부하들이 놓치고 나서 변명한 거 아닐까요?”

“아니, 아니지. 그래서 기지에 있던 녀석이 운전하던 놈이랑, 뒤 칸에서 지키고 있던 놈한테 똑바로 본 거 맞느냐고 했더니, 분명 그랬다는 거야. 근데 자루가 뭔가 뜨끈뜨끈하게 젖어 있어서 이게 뭐냐고 물으니까 사실 아까 커피를 마시려고 물을 꺼내다가 그 새끼 위에 쏟아버린 거지. 푸드덕거리면서 반항하던 녀석이 갑자기 조용해진 걸 보고 그냥 별 생각 없이 운전해서 기지까지 왔는데, 자루를 열어보니 남자는 없고 돼지 새끼가 나오더라는 거야.”

 

여자는 뜨악한 얼굴로 입을 벌리고 A를 쳐다보았다. 살짝 벌어진 도톰한 입술을 보며 A는 뻐근해져 오는 아랫도리를 슬슬 문질렀다. 자신을 보며 은근하게 제 사타구니를 만지작거리는 걸 알았는지 모르는지, 여자는 천진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럼 그 남자가 정말로 돼지로 변한 거였대요?”

“돼지로 변하는 샘, 돈익천이 진짜로 있었던 거지. 몇 번이나 찬물 더운물 퍼다가 그 새끼한테 부어가면서 확인했는지 몰라. 진짜 신기하긴 하더라고, 물만 맞으면 갑자기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이 됐다가, 돼지 새끼가 됐다가.”

“그 남자가 이 사진 속 남자인 거네요?”

“그래. 처음엔 덩치가 이만해서 좀 쫄았는데, 어쨌든 뜨거운 물만 부으면 요만한 돼지가 되니까 아무것도 아닌 거지, 그냥. 중요한 증거인데 자꾸 도망가려고 해서 가둬 놓고 뜨거운 물 부어가면서 좀 팼더니 가만히 있더라. 역시 사람 새끼든 짐승 새끼든 매가 약이야.”

 

A는 낄낄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잔이 비자 여자가 옆에 놓았던 술병을 다시 집어 들었고, A는 손을 내저으며 이제 그만, 이라고 대답했다. 술은 이만하면 됐고, 재미난 얘기도 이 정도면 많이 떠들었으니 이제 슬슬 할 일을 할 때였다. 두툼한 손을 들어 아무렇지 않게 여자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자, 여자의 도톰한 입술이 벌어지며 짤막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어디 숨겼어?”

“뭐라고?”

 

쿵쿵거리는 음악이 심해지고 있었다. A는 문득, 룸 밖에서 들리던 음악이 한층 더 커지고, 밖에 있던 손님들의 말소리가 뚝 끊겨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 현철이, 어디에 숨겨놨냐고 묻잖아, 이 씨발 새끼야.”

 

뭐, 하고 대꾸를 하기도 전에 A의 입에서 컥, 하고 채 마무리되지 못한 비명이 퍽 터져 나왔다. 어쩌면 터진 건 비명이 아니라 그의 정수리였을 수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마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린 뜨끈한 액체를 더듬더듬 만지고, 황망한 얼굴로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조금 전 A가 거의 다 비워 낸 양주병이 반쯤 박살 난 채 들려있었다.

 

“...너...ㄴ....무...슨...”

 

여자의 순한 눈매가 길게 가늘어졌다.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두 장의 사진 위로 남자의 머리에서 터져 나온 핏자국이 튀었다. 여자는 재빨리 사진을 뺏어 들었다. 풍만하게 드러난 가슴골 안쪽, 딱 맞게 조여진 남색 홀터넥 원피스의 안에 사진을 꾸깃꾸깃 밀어 넣는 여자의 손을 보며 A는 다시 한 번 피를 토했다. 이번에는 박살 난 병의 주둥이가 목 옆에 내리꽂혔기 때문이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꿰뚫린 기도 사이로 공기가 쉭쉭거리며 소리와 함께 빠져나갔다. 남자는 문득 숨이 똑바로 쉬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너느...설...마...”

 

옆으로 기우뚱, 하고 쓰러진 남자의 목에서 병 손잡이를 뽑아낸 여자가 얼굴에 튄 피를 대충 닦아냈다. 손과 얼굴, 옷은 물론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에도 전부 피가 튀어 있었다.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머리칼을 움켜잡았다.

 

“그 호모 새끼다, 뿅.”

 

여자의 가발이 벗겨지고 동그랗고 훤한 두상이 드러났다. A는 충격에 커진 눈을 여자에게 고정한 채 무어라 대꾸하려 했지만 입에서 나오는 건 피와 구멍 뚫린 숨소리 말고는 없었다. 어두컴컴하고 밀폐된 방 안에서 남자의 숨은 빠르게 식어갔다. 여자는 들고 있던 가발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답답했던 머리를 한 번 쓸어올렸다. 대가리 끝까지 올랐던 열을 참느라 악물었던 입술이 따가울 정도였다. 씨발 새끼. 여자는 다 죽어가는 남자의 몸을 구둣발로 몇 번이나 밟아댔다. 화가 약간 풀릴 정도가 되어서야 후,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룸 밖에서는 여전히 큰 음악 소리가 쿵쿵거리며 울리고 있었다. 여자는 덤덤한 얼굴로 허벅지 안쪽에 차고 있던 칼을 꺼내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시체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목 뒤에서 도톰하게 만져지는 네모난 것을 발견한 그녀는 망설임 없이 칼을 찔러 시체의 목에서 작은 칩을 꺼냈다. 대경파 간부 놈들은 이상한 악취미가 있다더니 정말이다뿅. 아마 낙수가 말했던 USB가 이거겠지. 여자는 허벅지 안쪽 칼집에 다시 칼을 갈무리해 넣고, 준비해 온 케이스에 손톱만한 USB를 넣었다.

 

옆에 놓인 아이스 버킷 속 녹은 얼음물이 보인다. 여자는 잠시 인상을 찡그렸다가, 이내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한 번 심호흡을 하고 버킷을 통째로 들어 자신의 머리 위로 쏟아버린다. 아, 뿅!!! 짜증 섞인 소리와 함께 남자는 깨질 듯한 머리를 흔들어 남은 물과 얼음 조각을 털어낸다. 이제 보니 커진 몸 때문에 남색의 원피스가 터질 듯이 팽창하고 있다. 남자는 입고 있던 불편한 원피스를 죽죽 찢어내듯 벗은 후,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쓰러진 시체를 내려다본다. 두 번의 고민은 없다.

 

 

 

바짓단이 빗물로 젖은, 목 부분에 수상하게 거무스름한 얼룩이 묻은 정장을 입은 빡빡머리의 남자가 룸을 나선다. 정장 주머니 안쪽에 자그마한 케이스를 넣은 남자는 휘파람을 불며 무표정한 얼굴로 복도를 지나 시끌시끌한 홀로 나왔다. 손님들은 이미 자리를 뜨고 없어 홀은 텅 비어 있었다. 오직 겁에 질린 주인만이 양손을 든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고, 그의 목에 시퍼런 칼을 대고 있던 동오가 반색을 하며 칼을 거두고 따라왔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정문 앞에 차를 세우고 기다리던 성구가 그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찾았어?”

 

남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뒷좌석에 동오까지 타는 것을 확인한 성구는 부드럽게 차를 움직여 동네를 빠져나갔다.

 

“...가야지, 현철이 데리러.”

 

누가 내뱉었는지 모를 말에 명헌은 유리창에 이마를 기댄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자신이 스스로에게 말한 것일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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