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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모자란
엘라스틴-가수분해
마법
따개 | @ddagae22872
'이렇게 죽는 건가.'
숨이 막혀 죽어가는데 들이킨 물 때문에 배가 불렀다. 미지근하고 어딘가 향기로운 물이 배를 가득 채워서, 무슨 연못물이 이래? 싶었다. 몸을 휘감은 가느다란 수초는 다행히 부드러웠으며 생각보다 끔찍하게 고통스런 죽음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다만 어마마마와 아바마마, 덩치만 컸지 유약한 동생 걱정이 된다. 무지하게 슬퍼하시겠지. 아마도 그럴 거야. 애초에 저주를 풀 방법 따위가 존재했던 건지. 괜한 희망에 부풀어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아닐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자신했건만 우습게도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생각은 미련과 후회로 가득 차 있었다. 힘이 빠져 둥실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카와타는 눈을 감았다.
인 줄 알았는데.
"눈 떴구나뿅."
꿈뻑꿈뻑. 카와타는 부옇게 번지는 시야에 초점을 맞추느라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내가 죽은 건가? 아닌가? 제정신이 덜 돌아온 머리가 그 미지근한 물에 아직도 잠겨 있는 듯했다. 본능대로 코를 찡긋찡긋 냄새를 맡아보니 약초 냄새와 약간 매캐한 숯 향기가 느껴졌다. 산 모양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뭐야, 말은 못하는 모양이네뿅."
분명 이상한 샘에 빠져서 죽은 줄 알았는데. 카와타는 비척비척 일어섰다. 이제는 습관적으로 아침에 눈을 뜨면 몸의 크기를 가늠해보는데, 죽다 살아나서 그런가 몸이 어제보다 줄어들었는지 그대로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아까의 목소리가 어디서 왔는지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렸는데, 바닥에 주질러 앉아 빗질을 하고 있는 어떤 여자가 보였다. 설마, 설마 마녀인가?
"하아....이짓도 못해먹겠어뿅.....그나저나 꽤 이상한 저주에 걸렸네뿅. 너 원래 인간이지?"
새카만 머리카락을 땋아 고정한 여자는 터덜터덜 걸어 카와타의 앞에 섰다. 여자치고는 상당히 다부진 체격이었다. 마녀라고 생각한 자신의 첫인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상상 속의 마녀란, 그러니까...매부리코에, 구불구불하고 푸석한 머릿결에, 구부정하고 음침한 자세를 가진 모습이었는데. 깨끗해진 시야에 들어온 여자의 모습은 뭐랄까....용병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꽉 짜여진 어깨며 팔이 기사들과 비교해도 지지 않을 만큼 다부졌다. 그런데 저 머리는 뭐지, 아니 그것보다 대체 지금 무슨 상황이지?
"대답 안하면 솥에 넣어버린다삐뇽."
상황파악이 안 되서 멍청하니 있자 여자는 화가 났는지 그 다부진 팔로 펄펄 끓고있는 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헛말 같지 않아 카와타는 꾸욱! 하고 놀라 된소리를 냈다. 젠장! 몸이 더 작아진게 맞나보다. 원래도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는데 이제는 웬 강아지 낑낑대는 듯한 소리밖에 나오질 않는다.
"꾹, 꾸우우욱."
"인간이라는 거야 아니라는거야뿅? 맞으면 꾹, 아니면 꾸우욱 해 뿅."
"꾹...."
"이거 답답하네뿅......"
이상한 여자는 팔짱을 낀 채로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더니 카와타를 답싹 들어올렸다. 여자 손에 쏙 들어갈 정도면 정말로 강아지만한 상태인가 본데, 이 여자 체격이 웬만한 남자보다 웃도는 수준이라 스스로도 가늠이 안된다. 들린 채로 여자의 얼굴을 마주보니 정말 마녀도 아니고 용병도 아닌 것이. 묘하게도 생긴 여자다. 마녀라기엔 얼굴은 미끈하니 깎아놓은 옥돌 같고, 용병이라기엔 머리카락이 말도 안 되게 길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나 마녀 맞는데삐뇽."
"꾸익!"
여자는 특이하게도 웃었다. 뾰호호홓 하고 웃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냔 말이다. 독심술을 쓰는 걸 보니 진짜 마녀가 맞나보다. 어쨌든간에 자길 구해준 위인이니 카와타는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 싶었다. 아차, 근데 이 모습으로는 말을 못하고 어떻게 한다? 잠시 고민한 카와타는 자신을 들고있는 손에 슬며시 고개를 비볐다. 그런데 이 여자...
"헉....제법 귀엽다뿅...."
하며 카와타를 아기 어르듯 둥가둥가 흔드는 게 아닌가. 그러다가 갑자기 카와타를 냉큼 뒤집어 코를 박고 킁, 킁 냄새를 맡더니 이런다.
"꾸우우욱!!!!!"
"샴푸 덜씻겼네뿅."
이때까지만 해도 카와타는 상상치 못했다. 마녀가 자신을 수돗가에 데려가서, 화롯불에 올려놓은 끓는 물을 퍼다 대야 속의 찬물과 휘휘 섞은 뒤 자신을 거기다 집어넣었을 때 무슨 일이 생길지. 카와타는 딱 기분좋게 따끈한 물이 털 속속들이 파고드는 순간 자신의 성대가 변하는 걸 제일 먼저 느꼈다. 1년 만에 들어보는 자신의 목소리가 목구멍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꾸억, 꾸익 같은 괴상하고 듣기 싫은 짐승 울음소리가 아니라 어어어- 하는. 매끄러운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 다음은 몸이었다. 짧뚱한 다리가 길어지고 째끄맣게 튀어나온 엄니가 쏙 들어가고 사람의 치열이 생겼다. 그리고 얼굴, 코, 손톱과 발톱, 몸을 덮었던 털들....
"우와아아악!!!"
"삐효오오오옹!!!!!!!"
옛날 옛적에 어떤 공국이 있었고 그중 첫째 왕자가 있었다. 수려한 미남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지성과 덕이 뛰어났으며 육체 또한 훌륭했다. 문무에 능해 장차 왕국을 물려받기에 모자람이 없는 왕자였다. 아 근데 세상이 이렇게 치사스러울 수가. 동화 속의 왕자님들은 하나같이 미남에 문무양도를 갖췄으나 지덕체 중에 덕이 없는 왕자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외모야 예쁜 공주를 왕비나 후궁으로 맞으면 적당히 유전자 성공률이 올라가는 법이니 통과, 지나 체는 사람 왕창 붙여 기르면 된다지만 덕이야말로 타고나는 것이었는지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었는지. 그러니까 다른 공국의 덕이 모자란 왕자 하나가 질투를 한 모양이렸다. 누구를? 얼굴 빼고 다 가진 카와타 왕자를.
사건의 전말이란 이랬다. 요상스럽게도 각국 왕들의 합방일이 비슷비슷했는지 왕자들의 나이도, 공주들의 나이도 비슷비슷했다. 그럴수도 있는 상황이겠으나 문제는 이들에게 비혼이라는 선택지는 없었고 모두가 그나물에 그밥인 무도회에 참석해 다대다 맞선을 일 년 내도록 봐야 하는 상황이 펼쳐졌다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왕자와 공주들은 각기 다른 매력을 뽐냈고 그중에서는 첫 타자로 눈이 맞아 두 달 만에 결혼에 골인한 효자왕자 효녀공주도 있었다. 그들의 부모는 큰 짐 하나 덜어냈기에 이 피말리는 전쟁터에서 한걸음 빠져 산딸기 넣은 샴페인이나 마시며 무도캉스를 즐겼다.
그러면 이제 남은 왕자 공주들은 독기가 바짝 오르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왕자들이 그랬다. 지난 십 수년 동안은 로얄 패밀리들의 성비 불균형이 심각해서 공주들이 줄줄이 사탕이었고 그녀들의 혼삿길을 위해 왕과 왕비들의 골머리가 아주 톡톡히 썩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나니 공주 왕자들의 성비가 비슷해졌다. 그럼 그중에서 적당히 결혼의 작대기를 그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 의외의 소식이 국경을 넘었다. 성비 불균형의 문제는 이 대륙만의 것이 아니었다. B 나라에선 왕자들이 줄줄이 태어난 것이다. B 나라에서 태어난 공주는 단 3명! 사태의 심각성을 실감한 왕과 왕비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렇게 3명 뿐인 공주들은 어머니의 산도를 통과하자마자 가장 힘 있는 공국의 왕자들과 약혼을 했다. 그렇다면 남은 열댓명의 왕자들은 선택지가 없었다. A 나라의 공주들에게 청혼하는 수밖에.
일이 이렇게 되어 적당히 결혼의 작대기를 뻗치면 되는 줄 알았던 A나라 왕자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푸른 드레스가 특히 잘 어울리는 코코 공주는 루비와 사파이어를 놓고 고민하다 사파이어를 택했다. 지식욕이 높았던 안나 공주는 망원경과 최신 백과사전 편찬기구가 있는 공국에 시집을 갔다. 그런데 문제는 남은 공주들이다. 그 공주들이 모두 카와타 왕자에게 구애를 했다.
대체 왜? 저놈이 뭐가 그렇게 잘나서! 라고 하기에는 카와타는 얼굴 빼고 다 완벽했다. 덕과 문은 물론이고 그중에서도 체와 무는 견줄 자가 없었다. 활도, 창도, 검도, 무엇보다 흑마를 타고 달리는 카와타의 허벅지가 그녀들을 사로잡은 것이다. 알거 다 아는 결혼적령기 공주들에게 그만한 신랑감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질투심에 사로잡힌 왕자 하나가 흑마술사를 하나 고용해 카와타에게 저주를 걸었다. 흉측한 외모로 바꾸는 주술을 걸려고 했는데, 그 흑마술사가 무면허였는지 어쨌는지 마법이 실패했고 카와타는 외모 수준이 아니라 아예 멧돼지로 변해버리는 저주를 받게 되었다.
이것이 일년 전쯤 일어난 일이다.
분노한 카와타 공국은 곧바로 그 바보같은 왕자의 공국을 공격했다. 결과는 대승이었으나 카와타에겐 절망이었다. 흑마법사와 왕자가 모두 죽어버린 탓에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도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카와타는 오랫동안 방에 틀어박혀있다 어마마마와 아바마마에게 저주를 풀러 떠나는 여행을 청했다. 그때 카와타의 덩치는 조금 줄어들어 있었다. 저주를 건 흑마법사가 죽었기 때문인지 그 부작용으로 현철의 몸은 아주아주 미세하게 조금씩 줄어들었다. 마치 어려지는 것처럼. 그렇게 마법사를 찾아 떠돈 지 거진 일 년.
카와타는 굶고 지친 상태로 이 여자의 집이 있는 숲까지 당도했고 어지러움에 발을 헛디뎠는데, 그게 이 여자의 집 마당 한 구석에 있는 샘이었다. 너무 지친 데다 한밤중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연못에 빠졌다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러니까 그게, 샘이 아니라 욕조..였다고?"
"그래뿅."
"욕조가 왜 밖에 있는데?"
"이 머리를 봐라삐뇽. 약물을 넣어서 오래 담가야 하는데 집에서는 그렇게 못해삐뇽."
자신을 후카츠라고 소개한 여자는 정말로 마녀였다. 머리카락을 발끝까지 길게 기르는 이유는 바로 그게 힘의 원천이기 때문이란다. 정확히 말하면 마법의 재료라고 해야 할지. 매일매일 빗질을 해서 빠진 머리카락을 모아 약물을 만들 재료로 쓰는데, 정확히 어떤 힘이 있는지는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 그저 마법의 마지막 2%를 완성시켜주는 재료라고. 머리카락을 중간에 잘라내면 그 부분의 머리카락은 힘을 잃는다고 했다. 증거라고 보여준 후카츠의 옆머리 한 귀퉁이는 실제로 짧게 잘려 있었는데, 그 부분만 자라지 않은 채였다.
"인간으로 돌아온건 이게 처음이야뿅?"
"그래. 아까 물이 닿은 게 이유인것 같다."
"저주가 풀린 건 아닌데...아직 마법 냄새가 난다뿅."
"혹시...어젯밤에 네 ㅅ, 아니 욕조에 빠진 것 때문이 아닐까."
"그건 몰라뿅. 내 머리카락의 힘 때문일지, 물에 푼 약물 때문일지."
"어떤 약물인데?"
"코코넛오일, 사과식초, 해초 달인 거랑 장미증류수...."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아가며 읊는 재료에 카와타는 다소 어이가 없었다. 진이 빠질 만큼 단순하고 시장에서도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이었다. 가만 들어보니 성에서 살았을 때 목욕할 때마다 시종들이 욕조에 풀어주던 재료들도 있었다.
"원인은 네 머리카락 때문인것 같군."
"흠....."
카와타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이 공국의 첫째 왕자이며, 자신을 위해 저주를 풀 수 있는 마법을 개발해준다면 반드시 보답하겠다는 제의를 했다. 이 효과가 언제 풀릴지 모르니 절박하기 그지없는 부탁이었다. 그런데 후카츠는 통통한 입술을 삐죽 내밀고 흥, 하니 콧방귀를 내쉬며 싫다뿅! 하는 것이다.
"머리카락 때문이지?"
"그래뿅."
저주를 풀 수 있을지 없을지도 미지수. 도박이나 다름없는데 거기에 마법사로서의 전부인 머리카락을 날 위해 써 달라고 했으니 거절하는 것도 이해할 만했다. 그럼 어쩐단 말인가. 눈앞에 어마마마가 절망하던 모습이며 괴로움에 포효하던 자신을 달래던 남동생의 손길이 어른어른했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겨우 만난 마법사, 겨우 사람으로 돌아갈 기미를 찾았는데.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 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하겠어."
후카츠의 뾰루퉁한 입술이 조금 들어간다. 머리카락 만큼이나 까만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더니 한참을 우물쭈물한다. 도대체 무슨 요구를 하려고 저러나, 자기 몸통만한 금강석을 달라고 해도 구해줄 의향이 있었던 카와타는 침대 시트로 몸을 둘둘 감싼 채 후카츠의 통통한 입술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나한텐 꿈이 있어뿅."
"뭔데?"
비장하게 내놓는 첫마디와 달리 후카츠의 얼굴이 수줍음으로 차오르더니 조곤조곤 속삭였다. 뜸이나 들이지 말지....카와타는 말해보라는 듯 허리까지 숙여 후카츠의 말을 경청하겠다는 표시를 드러냈다.
"호문쿨루스를.....만들고 싶다뾰홍..."
".........호문쿨루스?"
내가 들은 게 진짜인가. 호문쿨루스? 호오문쿠울루스으으? 기가 차고 어이가 없고 코가 막혀서 하! 하는 코웃음 비슷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마녀라고 했지. 저주 걸린 새끼 멧돼지따윈 독안에 든 쥐라 이건가? 난 이 공국의 제 1 왕위 계승자다. 그게 반역죄라는 건 잘 알고 있을텐데. 내가 우습나?"
순식간에 흉흉해진 분위기가 오두막 안을 가득 채웠다. 내가 어지간히도 우습게 보였나 보군, 이런 시골 마녀에게 우롱이나 당하다니. 차갑게 분노한 카와타는 자리에서 일어서 당장이라도 후카츠를 결박해 감옥에 가둘 것처럼 몰아세웠다.
호문쿨루스. 인위적으로 생명을 창조하는 모든 삿된 행위는 반역죄로 취급되어 당사자는 참수형, 도움을 주거나 그 일을 함구한 사람도 처형당하는 중죄 중에 중죄였다. 그런데 그걸 왕자 앞에서 떠들어?
"그러니까 카와타가 도와줘야지뿅!!!!"
".....너 마녀 아니지."
"카와타야말로 날 의심하다니뿅!!!! 은혜도 모르는 부르주아 기득권층 남성뿅!!!!"
이쯤되니 카와타는 이 상황이 모두 꿈 아닌가 싶었다. 사실 자신은 어젯밤 진짜 숲속의 연못이든 계곡이든지에 빠져 죽었고, 이건 어쩌면...뭐....죽은 자를 심판하는 그런 과정 중에 하나가 아닐까. 잠시 아찔해진 카와타는 시트를 다시 몸에 동여매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난....난 사람을 만들고 싶은게 아니야뿅!!!"
"호문쿨루스 뜻을 모르냐???"
"그건 그냥 비유고 난 세포 배양을 하고싶은거다삐용!!!!"
또다시 잠깐의 정적. 그러나 이 정적은 분노가 아니라 무지에서 나온 정적이었다. 그게 뭔데? 하는 카와타의 표정을 본 후카츠는 한숨을 뾰호롷호 쉬더니 (도대체 이런 한숨소리를 어떻게 내는 걸까 생각했다) 거실 한 켠을 빼곡히 채운 책들을 들고 와 일장강의를 시작한다. 내가 설명하는게 귀찮아서 대충 뭉개 말한거지 난 호문쿨루스같은 멍텅구리 미신은 안 믿는다뿅....잘들어라삐뇽. 무릇 인간의 몸이란....
분노한 카와타는 어느덧 꼿꼿히 세운 허리를 풀고, 팔짱을 풀었으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후카츠와 함께 책을 들여다보고 그림을 그려보고 고개를 끄덕끄덕, 어느새 질문까지 하고 있었다.
"그럼 치아도, 뼈도 전부 새로 이식할수 있다는 거군. 가축들의 전염병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야."
"바로 그거다삐뇽!!!!!!!!"
왕자의 이해력이 높아서 다행이다뿅! 나라의 미래가 밝다삐뇽! 하고 소리친 후카츠는 눈을 빛내며 내가 무슨말을 하고싶은건지 알았냐며 몸까지 흔들어대며 뿅뿅 기대감을 표출해온다. 아아 그러나 카와타는 말했듯이 문무양도, 지성이 뛰어난 훌륭한 왕자였다. 하나를 가르치면 셋까지 알았다.
"근데 그렇다면 정자는 누구에게서 얻는다는 거지? 네가 말한 '유전학적으로 완벽하진 않더라도 아주아주 뛰어난 유전자를 포함한 세포' 말이다."
"그게 바로 포인트다뿅. 그 영광의 주인공은 바로 카와타다삐뇽!!!"
띠이이잉- 골이 울리는 것을 느끼며 카와타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이 미친 마녀- 아니 과학자인가-는 수리과학에 너무 특화된 인재라 인문학적 소양이 심히 부족한 듯했다. 예를 들면 정치학이라던지 마법윤리, 아니 연구윤리라던지.
"앞서 말했듯이 난 왕자다. 제 1 왕위 계승자지."
"그러니까 부탁하는거 아냐뿅!"
"들어보니 너 혼자서 그 연구를 진행하기란 불가능할 테고, 분명 너와 비슷한 마법사나 과학자들을 죄다 불러모아야 할 텐데. 그들 중에 한명이라도 변절한다면, 그리고 만약 내가 혼인을 해서 왕손이라도 낳는다면? 그 수많은 실험체가 우리 공국의 왕위, 계보를 위협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확신하지?"
그런 귀찮은 문제는 생각하기 싫었는데뿅....하는 표정이다. 생각해보지 못했다도 아니고 정곡을 찔린 듯한 표정. 보아하니 이 마녀가 이런 산속에 틀어박혀 책과 실험만 들이파고 있는 이유는 이런 귀찮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싫어서인것 같았다. 사실 마법까진 아니더라도 약초나 간단한 주문을 쓸 수 있는 존재들은 생각보다 꽤 있었다. 그들은 상점가에서 얼룩을 지워주는 약물, 잠시나마 관절통을 가라앉히는 약물 등을 만들어 팔고 있었다. 그러나 마법사란 워낙 귀한 존재라 궁정 마법사라는 직책 또한 사라진지 오래였는데, 카와타가 보기엔 이 마녀의 지식이며 만들어놓은 약물의 수준이며 아무래도 자신이 찾아 헤매던 진짜 마법사가 맞는 듯했다.
"그럼 이건 어때. 네가 궁정 마법사가 되는 거야."
"아아..싫어뾰옹...."
이럴 줄 알았다. 저렇게 귀찮아하는 게 많으면서 몸이 어떻게 저만큼 좋을 수가 있을까? 지긋히 후카츠를 노려본 카와타는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다.
"궁정 마법사가 되면 연구를 감시할 수 있으니까. 네 목적은 하나랬잖아. 세포 배양. 그게 성공할때까지 협력하겠어. 단, 내 저주를 풀어준다는 조건 하에!"
꽤나 솔깃했나보다. 또 그 통통한 입술이 우물쭈물. 그러더니 갑자기 펼쳐놓은 책들을 쌓아 작은 재단처럼 만들고는 그 앞에 냅다 무릎을 꿇는다. 뭐해? 너도 이 앞에 무릎꿇고 손 올려라뿅. 엉거주춤 시트로 허리춤을 묶은 카와타가 시킨 대로 자세를 잡는다. 뭐 하는 거냐?
"맹세다뿅. 진실한 과학과 마법의 서에 대고 맹세하는거다삐뇽."
"그래. 맹세할게."
푸른 불빛이 책장 사이사이로 쏟아져 나오더니 작은 사슬이 되어 표지에 얹어놓은 후카츠와 카와타의 손목을 한데 묶었다. 점차 빛은 사그라들었고 카와타는 어쩐지 손목에 느껴지는 작은 이물감이 신기해 손을 이리저리 털었다. 이제 맹세로 엮였으니 깨는 순간 국가소송이다뿅! 하고 외치는 후카츠에게 그러마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물이나 한 잔 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컵에 담긴 냉수를 꼴깍, 들이키는 순간. 카와타는 자신의 성대가 변하는 것을 느꼈고 안돼!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니까 정리해보자고 삐뇽. 1번. 카와타가 사람으로 돌아오려면 약 42도 이상의 따뜻한 물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 몸을 완전히 담가야 한다삐뇽. 2번. 찬물을 마시거나 몸에 닿으면 다시 멧돼지로 돌아간다뿅. 3번. 일주일 전을 기점으로 카와타돼지의 몸이 줄어드는 게 멈췄다삐뇽. 그리고 아마도 그건 내 머리카락 때문인 것 같다....맞으면 꾹, 아니면 꾸우욱 해라삐뇽."
"꾹."
후카츠는 맹하니 허공을 한번 쳐다봤다가 그 옆에 침울하게 앉아있는 카와타돼지에게 시선을 옮겼다. 한 가지 짐작하건대 카와타가 내 머리카락 때문에 일시적으로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기적을 얻었다면, 그건 머리카락 한두 가닥의 힘이 아니라 머리카락 전체의 힘을 합한 것이리라.
그날 후카츠는 장작도 좀 패 놓고, 며칠간 이어진 연구로 더러워진 집 청소도 하고 마을에 내려가 약초도 사고 약물도 파느라 체력을 상당히 많이 소진했었다. 집에 돌아와 목욕을 하고 머리카락은 잠시만 담가 놓는다는 게 그만 야외 욕조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한밤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웬 새끼 멧돼지가 자기 머리카락에 엉긴 채 잠겨 죽어가고 있는게 아닌가! 기겁해서 멧돼지를 건져내 등을 두들겨 물을 토해내게 하고 집 안으로 옮겼다. 그런데 가만 보니 그건 멧돼지가 아니라 저주에 걸린 인간인 거라, 이런 저주를 걸만큼 강력한 마법사는 후카츠가 알기론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는데 참 신기하다 싶었다.
그렇게 귀여운 아기 멧돼지가- 이때까지만 해도 후카츠는 이 깜찍한 멧돼지의 인간형이 자기보다 머리통 하나는 훌쩍 큰 남자일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깨어나길 기다리며 물을 올려놓고 마당에 나가 욕조를 마저 치우려고 했는데, 왕가의 문장이 찍힌 팬던트가 떨어져 있기에 설마 범죄자인가? 하고 의심했었더랬다.
그런데 왕자라니. 후카츠로써는 귀인을 만난 셈이었다. 어찌되었든 자신의 프로포절을 들어줄 청중이자 돈줄이자 연구재료(?)를 제공해줄지도 모르는 사람 아닌가! 마지막으로 카와타의 인간화를 본 순간 후카츠는 오직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내가 꿈꾸던 골격근 위성세포의 이디얼 샘플이 저기 있다!'
이렇듯 후카츠는 애초에 카와타를 그냥 놓아줄 생각 따윈 없었다. 뿅크큭....마을 사람들에게서 의뢰받은 신경통 치료약이나 곰팡이 제거제를 만드는 데는 이제 신물이 났기 때문에 새로운 연구소재에 갈증을 느끼던 찰나였다. 그런 후카츠에게 처음 보는 저주에 걸린 인물, 그것도 최고의 골격근세포를 가진 왕족 남성이라니 그야말로 로또중에 잭팟이 아닐 수 없었다. 부러 싫은 척 몇번 튕겨줬더니 카와타왕자는 연구지원까지 제의해주는 게, 후카츠는 당장 고를 외칠 뻔했으나 체면으로 참았다.
'나 같은 고학력자 마법사가 어디 흔한 줄 아냐뿅...국가연구의뢰면 당연히 비싸게 받아야지뿅!'
이리하여 후카츠와 카와타는 계약을 성사시킨 것이다. 카와타 공국의 미래와 과학마법의학분야의 새 지평을 열 위대한 연구의 시작이었다.
"대박이야뿅"
"이 정도면 괜찮을까?"
"살펴봐야 알겠지만 이정도만 해도 훌륭하다뿅"
후카츠는 눈이 반쯤 돌아간 채로 도서관 안을 휘젓고 다녔다. 기술과학 도서들이 모여있는 곳을 알려줬더니 표범마냥 책장을 타고 올라가려고 하길래 기겁하여 커튼 뒤에 가려진 사다리를 꺼내줬다. 정말 특이한 마녀가 아닐 수 없다. 저 엄청난 등근육과 팔근육은 아마 약초를 구하고 손수 장작을 패고...뭐 그런 험난한 여정의 흔적인 듯 했다. 여러모로 아까운 인재였다. 카와타는 사다리에 반쯤 매달리다시피 해 책을 살펴보고 있는 후카츠를 불안한 듯 바라보며 그런 생각들을 했다. 궁정 도서관의 규모에 감동했는지 한참이나 책을 살펴보던 후카츠는 옆구리에 끼고 내려와 카와타를 질책하기 시작했다.
"이만한 지식이 있는데 어째서 교육기관에 투자를 안 하는거야삐뇽."
어쩐지 예상했던 반응이라 카와타는 쩝, 하고 입술을 감쳐 물었다. 정말로 이 마녀는 아까운 인재가 맞았다. 여러모로.
"학교를 설립하려고 해도 여러모로 귀족들에게 반대가 많아. 내가 나중에 왕위를 이어받으면 관련 기관을 설립하려고 하는데, 솔직히 잘 될지 자신이 없다."
"뾰오옹.....정신이 꽤 제대로 박힌 왕자구나뿅..."
감동했는지 후카츠는 반드시 너를 왕으로 만들어서 교육부 예산을 뜯어내고 말리라는 호언을 던졌다. 알았다며 도서관에 자리를 마련해준 카와타는 후카츠에게 먹고 싶은 것이 있냐 물은 후, 요리사가 가져다준 식사를 하고 물을 마셨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당부한 카와타는 처음으로 마음 편하게 멧돼지의 모습으로 잠이 들었다. 인간의 모습으로 성에 들어가자 눈물을 펑펑 쏟으며 반기던 어마마마와 아바마마, 그리고 동생. 그러나 그들에게 아직 저주가 완전히 풀린 게 아니라는 말을 전할 때는 괴로움에 심장이 쿡쿡 쑤셨다. 그때부터 궁정 부엌의 가마는 불이 꺼진 적이 없었다. 언제나 뜨거운 물을 준비해두라는 왕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라도 어디냐며 감격한 아바마마는 후카츠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궁정 도서관의 개방과 연구비, 연구재료의 무제한 제공을 약속받은 후카츠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맹세를 바쳤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넘도록 카와타와 후카츠는 궁정 도서관에서 숙식을 함께하며 연구와 실험을 반복했는데, 유의미한 결과 하나가 도출된 것은 궁정 도서관에서 지낸 지 9일째 되던 밤이었다.
"카와타, 카와타뿅!!"
"구욱...꾸꾸..."
"빨리 물에 들어가라뿅! 네 저주가 뭔지 알것같다뿅!"
소스라치게 깨어난 카와타는 후카츠의 품에 안긴 채 복도를 내달렸고 후카츠는 욕조에 물을 퍼담아 카와타를 내던지다시피 빠뜨렸다. 물이 뚝뚝 흐르는 채 가운만 걸친 카와타는 후카츠를 들쳐업고 바람처럼 도서관으로 향했다. 야생마처럼 복도를 가로지르는 카와타의 등에 업힌 후카츠는 지금 미친 듯 뛰는 심장이 저주의 구조를 파악해냈다는 기쁨 때문인지, 추측한대로 카와타의 허벅지 근섬유의 탄력이 엄청나게 뛰어다나는 감탄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말해봐. 발견한 사실이 뭔지!"
"우선 확실한 건 너한테 저주를 건 흑마법사는 돌팔이었다뿅. 그러니까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저주야뿅!"
"....그래서?"
"저주는 푸는 방법도 저주의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뿅. 종류에 따라서 목숨을 걸어야 할 때도 있다뿅. 다행인건 카와타한테 걸린 저주는 조잡한 마법을 여러갈래로 묶어놓은 것 뿐이라 목숨을 걸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거지뿅. 이게 정말 큰 발견이야뿅."
"그럼 혹시 그 조잡한 마법이 뭔지도 알아낸거냐?"
뿅흐흐....당연하지뿅....오히려 그게 더 쉬웠다삐뇨.... 후카츠는 책 여러 권을 펼쳐 표시해놓은 페이지를 한장 한장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생김새를 바꾸는 마법도 그 강도가 다양했다. 가장 약한 단계는 단순히 형태나 색깔을 살짝 바꾸는 정도에서, 강력한 건 카와타의 경우처럼 아예 종 자체를 바꾸는 경우까지. 그러나 그 돌팔이 무면허 흑마법사는 그 정도의 마법은 익히지 못한 게 확실했다. 이럴줄 알았다삐뇽! 어어디 감히 아카데미 SH랩 포닥 출신에게 술식으로 비비려고! 후후 하지만 제대로 배웠으면 꽤나 대단한 마법사가 되었을텐데 아까운 인재다삐뇽....후카츠는 소리없이 외쳤다. 마법 술식에 힘을 더해주는 강화 주문을 몇 단계 더 추가하고 그 위에서 성질을 바꾸는 마법, 형태를 바꾸는 주문 몇 가지, 또 그것들을 베이스로 변신하는 마법 몇 종류를 더....이렇게 주문을 쌓고 또 쌓는 방법으로 만들어진 귀찮기 그지없는 마법이었다.
"푸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뿐이지 못 푸는 마법은 아니다뿅. 내 생각에 그 돌팔이의 인생 최대 업적이 바로 이 마법이 아닐까 싶네뾰옹....원래 돼지로 만들려고 한 것 같은데 우연ㅎ...!"
술식 몇 부분이 꼬여서 멧돼지가 된 것 같다뿅, 돼지가 유전학적으로 인간과 제일 가까운 동물이거든. 하는 말은 채 완성되지 못했다. 카와타가 후카츠를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어느새 물기가 다 마른 카와타의 몸은 흥분과 기쁨으로 뜨끈뜨끈히 데워져 있었다. 어어...기쁘지뿅...나도 기뻐 삐용...
"뭐라고....감사를, 표시해야 할지 모르겠다....정말로....정말 고맙다....."
".....카와타...울어....?"
"안, 운다...."
그치만 내 어깨가 좀 축축한데 뿅....라는 말은 삼키며 후카츠는 어설프게 카와타의 등을 쓰다듬었다. 하긴 힘들었겠지, 세상의 쟁쟁한 마법사들이 종적을 감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아카데미 학위를 받고 그 능력을 증명한 마법사들은 궁정 마법사로 발탁되어 승승장구했지만 귀족과 왕정의 입맛에 따라 그들의 탐욕을 채워주는 마법만을 수행해야 했다. 회의감을 느낀 마법사들은 점차 속세에 발을 떼고, 후카츠처럼 재야에 파묻혀 자기 입맛에 맞는 연구나 찌그리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본래 마법사란 그런 종족들이다.
다만 마법사야 사표 던지고 도망가면 그만이지만 왕자는 그럴 수도 없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저주를 풀지 못하면 꼼짝없이 왕위를 내주는 수밖에 없을 텐데. 한 나라의 운영을 짊어졌으니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이었을 테다. 어쩌면 크기가 계속 줄어들었던 이유도 그런 카와타의 심정이 표출된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이 저주의 정체를 알았으니 해독 재료들이 필요하다뿅."
"그래. 말만 해줘."
카와타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 상기된 표정을 했다. 오랫동안 닫혀있던 문이 열린 기분이었다. 금이 필요하다고 하면 금광을 통째로 가져다줄 의향도 있었다. 그런데 후카츠의 대답이 뜻밖이다.
"일단 중요한 재료는 물이야삐뇽."
"물?"
후카츠가 말하길, 모든 약물과 마법의 근간이 되는 재료들이 있는데 물, 불, 흙, 공기가 그것이란다. 그것들은 우주의 질서 그 자체기 때문에 마법사들도 감히 만들어내지 못하며 생명과 마찬가지로 감히 도전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했다. 이 부분에서 카와타는 세포 배양에 도전하는 건 할만한 거냐고 물어봤다가 그건 의학이야뿅! 하고 단칼에 면박을 당했다.
어쨌든 그 기초물질인 물과 후카츠 자신도 정체를 알수없는 머리카락의 힘이 합쳐져서 여러 층으로 꼬인 마법을 약간 느슨하게 만든 것 같다는 게 후카츠의 결론이었다. 거기다 몇가지 재료를 넣어 만든 약물로 꼬인 마법들을 풀어서 흐물흐물하게 만들면, 각각의 술식들은 매우 보잘것없어서 자연스럽게 해제될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는데, 사실 절반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이라 대충 요약하자면 이랬다.
"말하자면 엘라스틴-가수분해마법을 만들어야 한다는게 결론이다삐뇽."
"그렇구나."
"못 알아들은 것 같지만 괜찮다뿅"
"그럼 구체적으로 필요한 재료가 뭔데?"
재료는 이랬다. 글리키네 콩, 알리움 사티붐의 뿌리, 말린 피페르, 세파의 뿌리, 피스툴로숨의 줄기. 전국 곳곳을 뒤져야 할 판이었지만 괜찮았다. 막연한 희망이 그림으로, 식으로, 글자로 나타나 뚜렷히 모양이 보이기 시작하자 카와타는 기쁨에 벅차 다시 후카츠를 끌어안았다. 후카츠는 당황했는지 뻣뻣히 몸을 굳혔지만, 곧이어 손을 올려 곰만한 덩치의 등을 서툴게 쓰다듬었다. 후카츠는 어딘지 가슴께가 불편한 느낌을 받았지만 이것이 발견의 기쁨인지 당황스러움인지 알지 못했다.
"왕족이 좋긴 좋구나뿅."
"이런 면에서는 그렇지."
카와타는 그럼 전국을 발로 뛸 줄 알았냐며 씩 웃었다. 지금껏 그런 식으로 재료를 수급해온 후카츠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부르주아뿅...하고 중얼거릴 뻔했으나 입을 다물었다. 궁정 마법사가 되면 이제껏 그런 것처럼 온 나라를 헤맬 필요는 더이상 없겠지.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카와타는 그런 후카츠를 보며 픽 웃었다. 경비병들이며 시녀들은 이 이상한 마녀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며 말 걸기를 꺼렸다. 심지어 후카츠의 요청으로 실험기구나 책을 가져온 시종들은 그녀에게 말을 걸기 무섭다는 이유로 왕자인 카와타에게 대신 전해주기까지 했다. 카와타로써는 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냥 덩치가 조금 크고- 카와타보다 덩치가 큰 인물은 이 성에서 그의 동생 미키오밖에 없다는 걸 그는 종종 까먹는다- 보통 여자들보다 근육질인것 말고는 별달리 특별할 것도 없지 않나. 카와타는 그렇게 생각하며 후카츠를 마주본 채 재료 손질을 이어갔다. 맵싸한 풀 냄새가 손에 배였지만 그것마저 즐거웠다.
"시녀들이나 시종들도 있잖아삐뇽."
"가만히 둬도 바쁜 사람들이야. 네 연구를 돕겠다고 약속했으니 내가 해야지."
"뾰...."
후카츠는 묘한 표정을 했다. 함께 지내보니 후카츠는 첫인상과 달리 생각이나 감정이 표정에 그대로 다 드러나는 편이었다. 궁정의 알력싸움에 휘둘리는 게 싫어서 일부러 숨어 산다더니 과연 그럴만했다 싶었다. 실험에 실패하면 입술이 부루퉁하게 튀어나왔다가 책상에 반쯤 엎어진 채로 길게 땋은 머리카락을 쉴새없이 매만지며 기록을 하고 꿈지럭 꿈지럭 다음 실험을 준비했다. 탁자를 치우고 묵묵히 재료를 손질하고 약물을 끓였다. 그런 그녀를 돕는 건 언제나 카와타였다. 왕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군말없이 후카츠의 잔심부름까지 자처하는 그의 모습에 후카츠는 내심 마음이 열린 건지 실험 외의 이야기도 조잘조잘 떠들기도 했다. 가령 자신이 있었던 아카데미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이야기라던지, 살인 저주가 정말로 있는지, 모든 마법사들의 꿈이라는 전설 속의 불로초보단 후카츠 자신은 고래를 실제로 보는 게 꿈이라는 이야기까지. 대양으로 나가볼 기회가 없었다는 이야기에 카와타는 저주가 풀리면 기념삼아 바다에 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자 후카츠는 또 묘한 표정을 지었다. 반듯한 눈을 둥그렇게 뜨고 저를 흘끗 쳐다보는 얼굴.
"왜, 기왕 보는거 잡아다 줬으면 좋겠냐?"
"그런 거 아니다뿅."
수십 번의 실패가 계속되었으나 점차 성과는 쌓이고 있었다. 결정적인 열쇠는 글리키네 콩을 손질하고 얼마나 숙성시키느냐에 있었다. 온갖 서적을 뒤져보았지만 마땅히 이렇다할 방법이 나오지 않았을 때 의외의 정답은 부엌 시녀들에게서 나왔다.
'글쎄요, 달인 물이 아니라 그 재료를 쓰는 거 아닐까요?'
이거다! 후카츠와 카와타는 글리키네 콩을 달이거나 끓인 물을 활용했던 탓에 실패했다는 단서를 얻었다. 그 후로 며칠간은 글리키네 콩을 삶아 물을 빼고 그 건더기로 별 지랄을 다 떨어보던 참이었다. 그러다 그 콩을 씹어보던 후카츠가 이걸 숙성시켜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실험이 끝나고 남은 글리키네 콩 건더기들은 마굿간에 버려져 말들의 먹이가 되었는데, 지푸라기 틈새에 박혀 허옇게 변해가던 모습을 보고 무언가 생각난 게 있는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부엌 시녀들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독한 냄새를 견뎌가며 실험을 반복하던 중 후카츠는 드디어 이렇게 외쳤다.
"성홍이항 표!"
"성코이라호?"
"그래 표!!"
진덕하게 늘어지는 실 같은 건더기를 살펴보던 후카츠는 코를 틀어막은 채로 외치다가, 갑자기 차분한 얼굴로 카와타를 와락 끌어안고 하염없이 중얼거렸다. 이제 된 것 같아.....다행이네.....그 이상한 어미도 떼어내고 말하는 모습에 카와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근육이 약간 빠져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조금 가늘어진 몸을 마주 끌어안고, 카와타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 처음 느껴보는 것 같은. 말없이 끌어안고 있던 두 사람은 떨어진 후에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환기를 시키고 엉망이 된 자리를 청소한 둘은 실험일지를 마무리한 뒤 이제 모든 여정이 끝났다는 걸 느꼈다. 이제 끝이네. 응. 이후로 이어진 잠깐의 정적을 깬 것은 카와타였다.
"물 마실래? 계속 입으로 숨을 쉬었더니 목이 아파."
"그래 뿅."
어느새 자연스레 후카츠의 물을 떠오고, 필요한 책을 찾아주는 건 카와타의 몫이 되어 있었다. 왕자가 떠다 주는 물을 마시다니 호강 아닌 호강이었지만 후카츠는 고마워뿅. 한마디를 한 후 물을 들이켰다. 카와타 또한 미리 늘어놓은 쿠션 위에서 물을 마시고, 변하는 몸을 받아들였다. 아마도 이렇게 물을 마실 때마다 준비해야 하는 번거로운 일들도 곧 끝나겠지. 궁정 마법사가 된다 해도 이제 후카츠와도 헤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저주가 풀리면 다음은 어떻게 되지? 나는 빨리 남은 혼처를 찾아 결혼을 해야 할 것이고, 후카츠는 궁정 마법사가 되어 그녀의 꿈이었던 세포 배양 연구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녀를 지지해줄 힘이 있을까, 왕이 된다 하더라도 그 독사같은 늙은이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백성들을 위한 학교를 짓고, 그녀의 연구기관에 지원을 해 주고, 그녀가 이 궁정에서의 생활에 염증을 느끼지 않게 해 주고....과연 내가 그럴 수 있을까? 몸이 줄어드는 것을 느끼며 카와타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걸까, 저주가 풀리면, 나와 후카츠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리고 다음날, 카와타는 욕조에서 두 번째로 빠져 죽을 뻔 했다.
몸이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만들어놓은 약물과 재료를 거의 다 써버린 후카츠는 풀어헤친 머리칼을 잔뜩 헝크러트리며 욕을 짓씹었다. 뭐가 문제지? 어디서 틀린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대체 어디서부터. 아니다. 애초에 약물이 잘못 조제된 걸까? 내가 재료의 이름을 잘못 읽은 걸까? 생각은 꼬리를 물고 한참을 이어졌다. 후카츠는 자신의 오두막에서 평생에 걸쳐 작성한 연구일지를 모두 가져다 처음부터 검토하기를 반복했다. 맞고, 맞고, 맞고, 맞고.....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카와타! 안돼, 잠들면 안돼!"
재료가 바닥나기 시작하자 후카츠는 하루에도 몇 번씩 빗질을 해 빠진 머리카락들을 모아다 실험을 반복했다. 핏발이 선 눈에 풀어헤친 머리카락, 흐트러진 옷차림. 후카츠는 어느덧 카와타가 상상했던 마녀의 모습에 다가가고 있었다. 줄어드는 것이 멈췄던 카와타는 몸이 돌아오지 않게 된 이후로, 잠들었다 깨어날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다시 몸이 줄어들고 있었다. 그걸 깨달은 건 일주일 정도가 흘렀을 시점이었다. 연구일지를 읽다가 잠이 든 후카츠는 새벽녘에 일어났는데, 카와타가 누워있던 쿠션에서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강아지만한 크기였던 카와타가 쿠션에 비해 부쩍 작아 보였던 것이다. 공포심에 사로잡힌 후카츠는 조심스레 다가가 카와타를 안아올렸다. 분명 작아졌다. 한품에 꽉 찰 정도였던 카와타를 안은 품에 약간의 공간이 생긴 걸 깨달은 후카츠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고, 그날부터 저울을 가져다 시시때때로 카와타의 몸무게며 치수를 쟀다. 그러나 카와타의 몸을 덮은 부드러운 털은 날이 갈수록 가늘어졌고 숨소리는 미약해졌다. 아무리 잠을 깨워도 자꾸만 카와타는 잠에 빠져들었다. 마치 갓 세상에 나온 새끼처럼.
조금이나마 그 속도를 늦추는 건 후카츠의 머리카락이었다. 머리카락을 뽑아내듯 빗질을 하던 후카츠는 결국 가위를 들었다. 벌겋게 부은 눈으로 머리카락 뭉텅이를 든 후카츠는 궁정 부엌으로 쳐들어가듯 들이닥쳐 끓는 물에 머리카락과 남은 재료들을 모두 쏟아붓고 한참을 끓였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 약물을 식혀 카와타의 몸에 끼얹으며 후카츠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후타츠의 머리카락이 한 웅큼밖에 남지 않았을 무렵, 그 모습을 보다못한 부엌 시녀 한 명이 울며 가위를 든 후카츠의 팔을 붙들었다.
"그만하세요, 제발 그만하세요....."
"이거 놔요."
"이제 그만하시오. 후카츠."
왕과 왕비의 목소리였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들은 품에 카와타를 안은 채 애원하다시피 부탁해왔다. 카와타는 또다시 잠들어 있었다. 이제는 토끼만큼 크기가 줄어든 카와타는 품에 안겼다는 말이 무색하게 왕의 두 손에 가볍게 들어오는 정도였다.
"일어나, 카와타. 잠들면 안 된다고 했잖아."
"이제까지 정말 힘써 줬소. 모두가 그걸 압니다. 그러니 후카츠, 이제 그만해도 되오."
"난 안 그만둬요. 카와타! 일어나라고 했잖아!"
"후카츠! 제발!"
내가 오만했던 벌인 걸까, 그 돌팔이 흑마법사의 마법이 사실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거였을까. 고작 아카데미에서 십 수 년을 구른 걸론 도전하지 못할 만큼 엄청난 마법이었을 지 몰라. 아니다.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자 했던 내 욕망을 비웃은 질서의 형벌일지도 모른다.
생물의 노화는 당연한 것일진대, 생물이 태어나 죽는 것은 당연한 것일진대. 불로초를 비웃으며 고래를 보고자 했던 자신의 말이 우습게 느껴졌다. 모든 마법사들의 꿈이라던 불로초. 감히 도전할 수 없는 진리의 영역인 물, 불, 흙, 바람. 혹은 그 진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생명을 건드려보려던 오만에 대한 신의 장난인 걸까. 후카츠는 멍해진 머릿속으로 생각을 했다. 생명의 진리를 비웃듯이 카와타는 섭리를 거슬러 자꾸만 어려지고 줄어들고 있었다. 이제는 손바닥 하나를 겨우 채우는 크기였다.
"마사시."
문득 아카데미 시절 지도 교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모든 마법의 목적은 창조가 아니라 회복에 기초를 둬야 한다고. 마법서의 가장 첫 줄에 나와 있는 내용이었다. 이 세상 모든 술식과 약물의 바탕인 진리라고 입이 닳도록 말했었다. 그 진리를 잊어버리면 마법사는 타락하게 된다고 한다. 후카츠는 생각했다. 나는 이미 타락한 마법사였던 걸까.
"마사시, 일어나."
도서관 바닥에 웅크려 누운 채로, 후카츠는 잠든 새끼 멧돼지를 끌어안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한 줌밖에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내려 카와타를 칭칭 동여맸다. 아무런 의미 없는 짓이었으나 머리카락에 파묻힌 카와타를 연신 스다듬으며 후카츠는 중얼중얼, 어릴 적 배운 바보같은 주문들을 외우며 계속 눈물을 흘렸다. 손 안에 느껴지는 심장박동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후카츠는 소리를 내어 엉엉 흐느꼈다. 자신을 둘러싼 연구 일지들이 그동안의 모든 일을 부정하는 것 같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도 이젠 모르겠다는, 그런 절망감이 카와타를 자꾸 갉아먹어가는 것 같았다. 이게 벌이라면 차라리 나를 죽이지. 오만했던 건 나였는데 차라리 나를 벌할 것이지.
"좋아해. 마사시."
입으로 뱉고 보니 죄악감이 더더욱 후카츠를 짓눌렀다. 무릇 마법을 행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진실로 원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의심하지 않는 마음. 과학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2%의 공간을 그저 미지의 세계로 남겨놓고 받아들이는 마음이라고 했다. 미지의 공간을 대하는 마음은 과학에서도 통했다. 다만 후카츠는 그 2%를 메우고 싶었을 뿐이다. 지도교수가 지나가듯 말했던 것이 문득 생각난다.
'후카츠. 너는 과학을 대하듯 마법을 대하는구나. 그것도 훌륭한 자세지만 그런 마음으로는 과학의 2%는 완성시킬 수 있어도 마법의 2%는 완성시킬 수 없어.'
'그 2%가 뭔데요뿅.'
'흠. 그거야말로 마법의 비밀이지. 영원한 비밀, 아무리 파헤쳐도 인간으로선 알수 없는 미지의 공식 같은. 어쩌면 마법이야말로 비논리의 결정체일수도 있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단다. 마치 사랑처럼.'
'삐효....그게 뭐에요뿅....'
'너무 로맨틱했나? 하하, 그래도 나로선 그렇게밖에 설명할수가 없구나.'
한때 그 말을 비웃었던 때가 있다. 어느 소년 소녀, 나이 지긋한 신사부터 귀부인까지. 다른 물약은 모두 취급했으나 그들이 요청했던 사랑의 물약은 단칼에 거절했다. 그게 가능할리가 없지용? 그건 마법도 과학도 아니라구용 그냥 미신이에요뿅.
어쩌면 그게 마지막 2%였을지도 몰라. 평생의 소원을 위해 남겨놓은 머리카락의 비밀을 아직도 모르는 것처럼. 마법도 과학도 아닌 미신, 인간의 비논리를 완성하는 마지막 2%. 무모하고 비합리적인 어떤, 그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공간 말이야. 카와타, 그동안 했던 실험들이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아. 아마도 네가 그날 욕조에 빠지지 않았다면 말이야, 네 저주는 우리가 만든 약물로 진작에 풀렸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건 내 탓일지도 몰라. 약물을 거의 완성했었을 때 나는 진심이 아니었거든. 네 마법이 풀리지 않기를 아주 잠깐이나마 생각했었나 봐. 2%가 영원히 완성되지 않기를 바랬었나 봐. 그러니까 카와타. 아니 마사시.내가 아주 많이 좋아하는 너를 위해 내 마지막 남은 2%를 쓰고 싶어. 그걸로 네 저주를 풀 수 있다면, 하나도 아깝지 않아.
"나 씻고 싶어요."
눈이 벌겋게 충혈된 후카츠의 말에 하녀는 한솥 가득 끓인 물을 욕조에 부어주곤 찬물을 부어 온도를 맞춰 줬다. 43도. 수백 번 느껴본 온도라서 알 수 있었다. 후카츠는 품 속에 숨겨온 카와타를 꺼내 조심스레 타올 위에 눕히곤 옷을 벗었다. 카와타의 심장박동은 너무나 미약해서 이제 숨죽여 듣지 않으면 이제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카와타를 품에 안은 채 찬찬히 물에 잠겨들어간 후카츠는 한 웅큼 남은 머리카락을 잘라 욕조 안에 풀었다. 카와타의 따뜻한 몸을 제 가슴 위에 올려놓고, 물 속으로 잠겨들어갔다.
하나도 아깝지 않아, 궁금하지도 않아. 마사시. 영원히 비밀로 남겨두어도 좋아.
내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뿐-
눈물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이상한 마녀라고 생각했다. 첫인상은 그랬다. 그런데 이상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옆에 뻔히 사다리가 있는데 표범처럼 책장을 타고 올라가려는 모습은 물론 이상했지만. 고래를 보고싶다고 했던 모습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마녀라면서, 마법사라면서 마법보다는 과학에 더 열을 올리는 모습은 좀 이상했지만 이야기에 열중하는 눈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말끝마다 붙이는 뿅뿅 소리는 이상하긴 했지만 듣기 싫진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여자치고 큰 키도, 신기하리만치 튼튼한 어깨 근육이며 팔도. 솥을 번쩍번쩍 드는 모습이 신기했고 좋았고 나를 끌어안는 팔이 좋았고 내가 끌어안은 네 품이 좋았다. 평생 누워본 적 없는 도서관 바닥에 드러누워 밤새도록 어려운 책을 필사하는것도 꽤 재미있었다. 그러니까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어. 자꾸만 줄어들던 내 짐승 모습이 멈춘 건 네가 있어서였을까.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이론이 너무 흥미로웠고 믿음이 가서 그랬을까. 나는 안심했었던 것 같아. 후카츠, 네가 자는 모습을 보면 나는 인간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어. 그냥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욕조에 들어갔다 나오며 나는 가운을 걸치고 국정을 돌보지 뭐. 잠잘 때는 멧돼지 모습이어도 괜찮아. 생각보다 움직이기 편하더라고. 어느 순간 네가, 세포 배양에 대한 말을 하지 않게 된 게 이상하게도 안심이 됐어. 나쁜 생각이지만. 실마리가 하나하나 풀려갈 때마다 네가 기뻐하며 내는 이상한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거든.
후카츠,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된 건 네 탓이 아니야. 내 탓이다. 내가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을 부려서다.어쩌면 신이, 아니 우리가 맹세했던 진실한 과학과 마법의 서가 나를 벌한 거야. 내가 다른 마음을 품어서지 네 탓이 아니야. 내가 너를 좋아해서, 이 마법이 풀리지 않아도 괜찮다고 다른 생각을 해서 그런 거다.
그러니까 울지 마. 후카츠.
눈물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궁정에서 오래 일하다보면 직감 같은 게 생겼다.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공기 한 줌이 달라진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시녀 마리는 어린 나이에도 그것을 빨리 깨우친 똑똑한 아이였다. 몇달 전 왕자님과 궁전에 돌아온 이상한 마녀는 무슨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궁정 도서관에 왕자님과 함께 콕 틀어박혔다.
식사도 잠자리도 모두 거기서 해결했으며 사람들은 혹시 왕자님이 그 마녀에게 홀린 게 아니냐고 수군거렸지만 무슨 야채 껍데기를 까고 삶은 콩을 짚에 싸고있는 둘의 모습을 보곤 홀린 게 아니고 정신이 나간 것 같다고 수군거렸었다. 하지만 원체 총명한 왕자님이니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싶었다.
그리고 어느날 밤 마녀 후카츠님이 울면서 새끼 멧돼지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 시녀 마리는 그 이상한 일들이 모두 왕자님에게 걸린 저주를 푸느라 그랬던 거라는 걸 알고 크게 충격을 받았으며, 또 오래 울었다. 왕자님이 불쌍해서가 아니었다. 시녀 마리가 보기에는 그 둘 모두가 불쌍했다. 당최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던 마녀 후카츠님은 그 둥그렇고 단정한 눈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왕자님의 이름을 외쳐 댔다. 마리는 언젠가 식사를 가지고 도서관의 문을 두드렸을 때 나왔던 왕자님의 모습을 기억했다. 덩치가 곰만한 왕자님은 그 큰 손으로 쉿, 하고 웃으며 식사를 받아갔다. 덜 닫힌 문 틈으로 잠든 마녀의 어깨를 살살 흔들어 깨우는 왕자님의 표정은 전에 본적없이 다정했다.
어린 나이였기에 마리는 2%의 의미가 뭔지 몰랐지만, 시녀 마리는 눈치빠른 궁정인 답게 모르는 척을 잘 했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것, 궁금해하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는 것을 잘 했다. 그리고 어떤 직감이 뛰어났다. 공기 한 줌에서 바뀐 분위기를 읽는 것에 특히 뛰어난 그녀는 무언가를 느끼고 황급히 달려 욕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두 사람이 서로 끌어안고 있었다. 마리는 어떤 직감으로 두 사람분의 가운을 문 앞에다 마련해두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머리카락 아까워서 어떻해."
"그래서 안 예뻐 뿅?"
"아니 이뻐."
"뾰호홓...."
"그런데 진짜 신기하긴 해, 후카츠 네 머리카락의 비밀이 뭐였을까."
"궁금해하지마라삐뇽!!!"
"그래, 미안해."
침대에 얽힌 두 사람의 나신이 큭큭 들썩였다. 취임식을 끝낸 카와타는 성의 일부분을 리모델링했다. 성 안의 우물로부터 수도를 만들어 침실 옆 욕실까지 끌어왔고 그곳에 화덕을 만들어 물을 빨리 데울 수 있게 했다. 시녀들이 한결 편해진 건 덤이었다. 후카츠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한가지 더, 후카츠를 위해 카와타는 궁정 디자이너를 불러 남자와 여자 모두가 입을 수 있는 옷을 맞춰 줬다. 대체 어찌된 영문에서인지. 카와타의 저주가 풀리지 않은 것은 둘째치고, 서로의 사랑이 과했던지 아니면 또 그놈의 돌팔이 흑마법사가 건 마법이 욕조 안에서 풀려 뒤범벅이 된 건지 몰라도. 후카츠도 찬물을 맞으면 변하는 몸이 되어버린 것이다. 특이한 게 있다면 후카츠의 경우는.....
"남자가 됐는데 어떻게 생긴게 달라진게 없지뿅? 좀 실망스러워뿅. 키도 똑같잖아뿅."
"그러게. 나도 위화감을 못 느끼겠어."
"진짜 이상한 마법이었나봐뿅."
"궁금해하지 말자 여보야~"
"아 맞다뿅."
거울을 보던 후카츠는 가운을 여미고 카와타의 품에 냅다 뛰어들었다.
"여보뿅, 나 새로운 연구주제가 생겼다뿅."
"뭔데?"
"생각해보니 세포 배양은 너무 멀리간것 같아뿅. 유전학보다 공중보건이 먼저야삐뇽"
"공중보건이 이번 연구 주제야?"
"맞아뿅. 영유아 사망률을 획기적으로 낮춰보는거다삐뇽."
"회의 참석할거지?"
"당연하지뿅!"
옛날옛날에 카와타 공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참 살기는 좋았지만 그곳의 왕과 왕비는 정말로 이상했다. 하지만 백성들 입장에서는 살기 좋으면 장땡이었으니, 왕비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왕이 야수인지 사람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고 한다.